소설리스트

21화 (21/30)

외전입니다. 앞으로 한동안 외전에 주력할 생각입니다. 그동안 진도가 너무 지지부진해서... 

겸해서 이벤트 합니다. 일종의 설문인데... 가장 마음에 드는 캐릭터, 가장 섹스를 해보고 싶은 캐릭터, 반드시 등장했으면 좋을 것 같은 종족 이 세 가지를 적어서 쪽지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통계를 내서 앞의 두가지는 외전으로 쓰도록 하고, 뒤의 한가지는 소설에 우선적으로 등장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기간은... 한 달입니다. 

어쨌든 장기연재를 하기로 했으니 하는 김에 열심히 써서 색마검천황 카페를 하나 만들어보는 것이 목표입니다. 소설중에는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짬짬이 올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 것 같거든요. 그날을 위해 열심히 해볼랍니다.

콘벨른가의 몰론 별저는 과거 몰론이라는 성을 쓰던 백작의 성이었다. 몰론이라는 마을 이름은 바로 몰론 백작가의 성을 딴 것이다. 

색마검천황 

한때 플로네츠와 델킨피에르가 개척되기 전, 흑암의 숲에 살고 있던 몬스터들이 지속적으로 제국의 동남쪽을 넘보던 250년전까지 몰론가는 제국의 동남쪽을 방어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덕분에 유난히 흉폭한 흑암의 숲의 몬스터들을 상대하느라 몰론가는 대대로 뛰어난 기사들을 많이 배출했다. 그 휘하의 기사단도 그 수가 적었지만 충직하고 용맹했다. 비록 변방의 백작에 불과했지만 몬스터로부터 제국을 보호한다는 지정학적 위치와 그 무력으로 다른 유력한 귀족가에 못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아마도 250년 전 작위를 받지 못한 채 당대 몰론가의 백작이었던 토론트 파이샤 몰른의 홀대와 핍박을 받고 있던 백작의 동생 칸파트와 페일른에 의해 플로네츠와 델킨피에르 영지가 개척되지 않았다면 몰론가는 지금까지도 유력귀족으로서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 최소한 플로네츠와 델킨피에르의 영지를 개척한 두 동생들과의 관계를 원만히 할 수 있었더라도 몰론가는 제국의 동남쪽에서 가장 강한 힘을 지닌 귀족 가운데 한 명으로서 그 명성을 이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몰론의 백작과 초대 플로네츠와 델킨피에르의 영주들의 사이는 최악을 달리고 있었다. 몰론의 백작은 플로네츠와 델킨피에르의 영주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그들이 힘들게 개척한 땅을 강제로 흡수하려 했다. 당연히 플로네츠와 델킨피에르의 초대영주들은 반발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몰론을 쓰러뜨리기 위해 제국 동남부의 다른 유력한 귀족을 끌어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귀족을 끌어들인 결과는 몰론가의 몰락과 플로네츠와 델킨피에르의 독립이었다.

당시의 싸움으로 인해 크게 세가 기울기 시작한 몰론가는 40여년전까지 그 이름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을 당시 콘벨른가의 차남이 몰론가의 마지막 후계자였던 마를린과 결혼하면서 콘벨른가에 흡수되어버리면서 이제는 그 이름마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남은 것은 콘벨른가의 별저가 되어버린 몰론 성과 그 성을 중심으로 조성된 몰론 마을이 몰론가의 흔적을 전할 뿐이었다.

당대의 무가로 이름높던 몰론가가 지은 성이라서인지 몰론가의 별저는 변경의 요새와도 같이 견고하기 이를데 없는 성이었다. 하지만 디포르챠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성벽이 두텁고 높은 것은 좋은데 창까지 너무 작았던 것이다. 가고일과 같은 비행형 몬스터를 막기 위한 구조라고는 하지만 창이 작은데다 강철 덧창까지 씌워져 있으니 수천개의 촛불과 횃불로 불을 밝혀도 부족할 정도로 성안이 너무 어두침침했다. 고위귀족의 아들로서 화려함을 일상으로 여기던 디포르챠에게 그같은 어두침침함은 도무지 적응할 수 없는 것이다.

“아아... 정말 싫은 곳이구만. 어둡고 춥고, 성안을 밝히느랴 켜둔 횃불로 인해 매캐한 탄내까지 나고... 몰론가는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았나 몰라?”

“하지만 제국에서 가장 견고한 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몰론가 이래로 난공불락으로 이름 높습니다.”

“알아. 그 때문에 할아버지도 이 성을 허물지 않고 우리 별저로 쓰는 거잖아. 아버지도 마찬가지고. 아마 형도 이 성을 허물거나 개조할 생각은 없을걸?”

“예. 유사시 가장 든든한 방벽이 될 수 있으니까요.”

“방벽? 웃기다고 생각지 않아? 플로네츠나 델킨피에르가 본가에 도전할 리 없으니, 이 성은 우리 콘벨른가의 최후방에 위치한 성이란 말야. 그말은 곧 이 성에 본가의 병력이 주둔해 농성할 정도라면 이미 망할 징조라는 거지. 안그런가? 그런데 그때 가서 든든한 방벽이면 뭐하나? 다 망해가는 상황에서 시간 좀 끈다고 뭔가 바뀌는 것도 아닌데 말야. 차라리 성을 허물어 서북쪽 웨작스 백작과의 경계에 옮겨짓는 게 낫겠어.”

“하지만...”

“아아... 됐어. 어차피 그런 건 가문을 물려받으실 펠킨 형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지 내 상관할 바는 아니니까. 나야 어디까지나 플로네츠 남작가를 물려받아 경영하는 일이나 잘 해야 하는 처지 아닌가? 콘벨른가의 일은 펠킨 형님께 맡기자구.”

“예.”

색마검천황 

디포르챠의 성격은 말 그대로 변화무쌍했다. 언제 어떤 말을 할지 몰랐고, 언제 어떠한 것이 관심을 기울일 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의 변덕스러움은 흠이 되지 못했다. 콘벨른 백작가의 후계자로 낙점된 펠킨에 비해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뛰어난 재능과 능력 때문이었다. 

라이언이 디포르챠를 주군으로 선택한 것도 그의 능력 때문이었다. 만약 디포르챠가 뛰어난 능력을 보이지 않았다면 그는 작위도 물려받지 못하는 둘째 아들 따위에게 충성을 맹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주군에 대한 충성만큼이나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기사였다. 디포르챠는 그런 그가 충성을 맹세하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다. 

“여기인가?”

디포르챠가 도착한 곳은 성의 남쪽탑 가장 꼭데기 방이었다. 햇볕도 들지 않아 대낮에도 몇 개의 횃불로 조명을 밝혀야 하는 어둡고 외진 곳이었다.

“예.”

“좀더 좋은 방에 옮겨놓지 않고...”

“자칫 시끄러운 일이 있을 경우 은폐하기 힘들다 했습니다.”

“집사인가?”

“예.”

디포르챠는 조금전 성 안으로 들어서면서 보았던 늙은 집사의 얼굴을 떠올렸다. 콘벨른가에서 무려 71년을 봉사하며 늙어온 집사의 표정과 눈빛은 강철로 된 가면이라도 쓴 듯 한점 흐트러짐 없어보이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떠올리자 디포르챠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마음에 드는 노인이로군. 늙은 생강의 매움이던가?”

“콘벨른가를 위해 70여년을 일해온 집사입니다. 지금은 그 아들에게 물려주었지만 몇 년전까지만 하더라도 콘벨른의 본가에서 백작님을 보좌하던 사람입니다.”

“그래. 그렇지. 확실히 그래. 어쨌든 이번 일을 끝내고 나면 상이라도 줘야겠어. 그정도 되는 노인네라면 합당한 대우를 해줘야 하는 거니까.”

“좋은 생각이십니다.”

“그래 그게 좋겠어. 있다가 내가 잊을 수도 있으니 라이언경, 자네가 내가 잊지 않도록 일깨워주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끼익---

디포르챠가 문고리를 잡고 힘주어 밀자 강철로 격자를 이은 나무문이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열렸다. 오늘의 일 때문에 기름을 치며 정비를 한 모양이지만 수십 년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세월의 무게에는 역부족인 듯, 녹슨 경첩이 마찰하는 소리가 어두운 계단으로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나는 들어가서 볼 일 보고 있을테니까 자네는 여기서 좀 기다리게.”

“예.”

디포르챠가 여자와 재미를 보는 동안 꼼짝없이 문앞에 멀뚱히 서서 그를 호위하라는 말이었다. 기사로서, 그것도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은 기사로서 할만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라이언은 디포르챠의 기사였다. 또한 디포르챠에게 자신의 미래를 걸고 있었다. 디포르챠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몇 시간이고 그를 위해 문밖에서 기다려줄 수 있었다.

“그럼 수고하게.”

“예! 좋은 시간 되시길...”

“고맙네.”

방 안으로 들어가자 맞은 편 벽에 붙어있는 침대가 보였다. 침대 위에는 작은 창으로 비쳐들어오는 어스름한 햇빛에 한 사람이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

“일어난 건가?”

디포르챠도 뛰어난 기사였다. 플로네츠가의 일이 아니었다면 레드플레임의 기사로서 복무했어야 하느니만큼 그 기사로서의 검술 수준은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다. 그런 그에게 사람의 호흡을 구분하는 것쯤은 쉬운 일이었다. 기절한 척 누워있기는 하지만 분명 침대 위의 여자는 정신이 깨어 있었다.

디포르챠의 지적에 침대 위에 널브러지듯 누워있던 여자가 몸을 일으켰다. 화사한 벌꿀색의 머리카락에 살짝 치켜올라간 눈썹과 눈꼬리가 도발적인 느낌을 주는 미녀였다. 큰 눈은 어둠 속에 검게 보였지만 희미한 햇빛에 녹색으로 반사되고 있었다. 앙증맞은 코 아래에 오물거리는 듯 작은 빛에도 유난히 반짝이는 작고 도톰한 입술은 그 자체로 색정을 자극하고 있었다.

“당신인가요? 나를 납치한 것이?”

디포르챠의 예상과는 달리 눈앞의 여자의 태도는 태연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간 그의 경험이 가르쳐준 바에 따르면 납치된 여자들은 처음에는 자신의 현실을 부정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납치되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현실을 부정하기 위해 발버둥치느라 발악을 하거나 울부짖었다. 그러다 끝내는 디포르챠에게 무릎을 꿇고 눈물로 애원하거나 공포에 질려 자신으로부터 도망가려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여자는 달랐다. 그녀는 조금도 자신을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여전히 도도했으며 태연했다.

“호오... 태연하군.”

“그런 상황에서 내가 어떠한 이유로, 어떻게, 누구에게 납치되었는지 모른다면 구제불능의 바보라 해야겠지. 이미 모든 상황을 아는데 쓸데없이 모양 구기며 발버둥칠 필요 있을까?”

“궁금한 것도 없겠군.”

“물론. 나는 바보가 아니니까.”

“지금부터 무슨 일을 당할 지도 알고 있다는 건가?”

“나를 납치해서 이런 곳에 가둔 다른 이유가 있을까요? 그렇다면 오히려 제가 흥미로운 일이네요.

“호오... 알면서도 그리 태연하다는 것은 각오가 되어 있다는 말이로군.”

“그정도 각오는 되어 있어요.”

“그말은 그럼 나를 받아들이겠다는 건가?”

디포르챠는 눈 앞의 건방진 여자에 대해 부쩍 흥미가 이는 것을 느꼈다. 와르디 플로네츠. 플로네츠가에 방문하기 전에 몇 번 이름은 들어보았다. 플로네츠가에서 약혼녀의 언니로서 몇 번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도 나누어 보았었다. 하지만 그때 들었던 소문이나, 그때 그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경험들은 모두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녀는 정말 특별한 여성이었다. 디포르챠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와르디를 응시한 채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원한다면. 당신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당신이 질릴 때까지.”

“너는 델킨피에르 자작의 정부가 아니었던가?”

“맞아요. 그의 정부죠. 뭐가 잘못되었나요?”

“그런데 어찌 다른 남자를 그리 쉽게 받아들이겠다고 말하는 건가? 한낱 창부도 그리 쉽게 다른 남자를 받아들인다고 말하지는 못할텐데. 자작 따위의 정부가 되더니 귀족으로서의 긍지도 버린 것인가?”

“훗...”

“왜 웃지?”

“어차피 반항해도 강제로 할 거잖아요. 강제로 당하나 순순히 당하나 무슨 차이가 있죠? 어차피 내 뜻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진 일인데. 기왕 당해야 하는 거라면 차라리 몸이라도 안다치는 게 낫죠. 제가 다치는 건 칸피니스 오라버니가 싫어할테니까.”

“순순히 당해주는 것과 강제로 당할 수밖에 없는 것과 아무 차이도 없다는 건가?”

“물론. 어차피 이 상황에 이른 것 자체가 내 의지와는 상관 없으니까요. 설마 반항 않는다고 강간이 아니다라는 식의 편리한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건가요?”

“훗훗... 순순히 몸을 대주는데도 강간이라는 건가?”

“내 뜻과는 상관 없으니까요. 나는 당신과 만나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이렇게 좁은 방에서 당신과 같이 있고 싶은 생각도 한 적 없어요. 지금 이 상황을 만든 것은 오로지 당신의 의지와 당신의 힘이죠. 그리고 이런 상황에 처한 이상 제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구요. 그런데도 제가 당신을 원해서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말씀하실 건가요?”

“핫핫핫... 핫하하... 멋지군. 정말 멋져. 당신 말이 맞아. 분명 이런 상황에 놓인 이상 당신에게는 다른 선택이 없지. 그래놓고서 강간이 아니라고 하는 건 너무 뻔뻔한 소리지. 하지만 델킨피에르 자작도 당신의 말을 믿어줄까? 반항 한 번 없이 몸을 내어준 당신의 진심을 델킨피에르 자작이 받아줄 것이라 생각하는가?”

“당연하죠. 칸피니스 오라버니는 당신과는 다르니까요. 설사 제가 제 스스로의 의지로 당신을 받아들였다 할지라도 제 마음이 떠나지 않은 이상 칸피니스 오라버니는 저를 믿고 받아들이실 거에요.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요.”

“호오... 델킨피에르 자작을 확실히 믿는 모양이군.”

“믿을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제가 오라버니를 믿듯 오라버니도 저를 믿을 것이고, 오라버니가 저를 믿듯 저도 오라버니를 믿습니다.”

“후후후후후하하하하하하....!! 정말 멋지군. 정말 멋져. 반하지 않을 수가 없겠어. 정말 멋진 여자야! 당신이라는 여자는... 당신같은 여자에게서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남자로 태어난 보람이 있다고 하겠어.”

디포르챠는 와르디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저 도도하고 당당한 태도는 그가 그리던 이상적인 귀족의 여성의 모습이었다. 힘에도 굴복하지 않고, 불리한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굳은 의지를 지닌 강인한 귀족의 여성의 모습 그 자체였다. 디포르챠는 자신이 눈 앞의 여성에게 강하게 끌리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델킨피에르 자작에게 결투를 신청해서라도 그녀를 디올린 대신 자신의 약혼녀로 삼고 싶은 마음까지 들 저오였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생각과는 달랐다. 콘벨른 백작가에 필요한 것은 와르디에게 덧씌어진 오명이 아니었다. 디올린이라는 순백의 아가씨와 플로네츠의 영지였다. 더구나 지금 그녀는 디포르챠에게 납치당한 상황이 아닌가? 제국기사단 넘부 23의 기사를 이길 리도 없었지만 설사 델킨피에르 자작에게 결투를 신청해서 그를 이기고 그녀를 빼앗는다 할지라도 자신을 납치한 디포르챠를 그녀가 용서할 리 없었다. 

꿈은 꿈으로 끝내는 것이 좋았다. 그것은 펠킨이 백작가의 후계자로 결정되고, 그가 누려야 할 것들마저 펠킨에게로 돌아가면서 그가 깨달은 현실이었다. 현실을 깨닫는 순간 와르디를 향해 빛나던 그의 눈빛이 웃음과 함께 급격히 사드라들기 시작했다. 어느새 순수하게 빛나던 그의 눈에는 추악한 욕망만이 남아 탁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정말 마음에 들어. 당신이라는 여자는. 하지만 내가 마음에 들어한다고 당신이 순순히 내 여자가 되어줄 리는 없겠지? 당신을 풀어준다고 할지라도 나라는 인간이 당신의 마음 한 조각이라도 차지할 가능성은 거의 없을 거야. 그렇지 않나?”

“잘 아시는군요.”

“그래. 솔직하군. 솔직해. 그것도 하나의 매력이겠지만.”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다는 거죠?”

“아, 어떻게? 당신을 강간할 거야. 나에 대한 증오로 당신의 머릿속이 가득 찰 때까지 강간하고 또 강간해 줄거야. 가능한 모든 치욕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고, 당신이 상상도 해보지 못한 고통을 느끼게 할거야. 그래서 당신의 모든 마음이 나를 향하도록 만들거야.”

“재미있겠군요.”

“그렇지? 정말 재미있을거야. 거기에 더해 당신의 그 사랑하고 믿어마지 않는 델킨피에르 자작 그 자식도 죽여버리면 정말 재미있을거야. 당신이 보는 앞에서 그놈의 팔과 다리를 하나씩 잘라 그 피로 당신을 목욕시켜준다면 더욱 즐겁겠지. 선물로 그놈이 자지는 잘라 당신의 입에 넣어줄까? 마지막으로 즐기라고 말야. 하하하하하...!!!”

“훗... 재미있겠네요. 그럴수만 있다면 말이죠.”

와르디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재미있는 남자였다. 저리도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경우가 많은 귀족 가운데서도 그런 모습을 보기는 쉽지 않았다. 더구나 멀쩡한 모습으로 유쾌하게 지껄이다가 저렇게 한 순간에 맛이 가버리는 모습을 보기란 정말 드문 일이었다. 색다른 구경거리에 와르디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걱정은 되지 않았다. 그녀 자신이나, 칸피니스나... 누구를 걱정한단 말인가? 그 칸피니스다. 그 칸피니스가 자신을 구하러 오고 있는 것이다. 아니 벌써 그가 보낸 누군가가 자신의 주위에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예전에 본 그 뱀파이어나 마족이라면 이미 그녀를 찾아내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녀를 지켜볼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을 터였다. 

그녀는 편안히 눈앞에서 자기도취에 빠진 디포르챠의 재롱을 즐길 뿐이었다. 하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디포르챠는 그녀의 그런 속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그녀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 허세를 부리는 것이라 생각할 뿐이었다.

“호오... 인정하는구만. 당신을 위해서 직접 델킨피에르 자작을 잡아와주지. 내게 고마워해야 할거야.”

“할 수만 있다면...”

와르디의 비웃음과도 같은 웃음에 순간적으로 발끈했지만 이내 참아넘길 수 있었다. 그는 콘벨른 백작가의 차남이었다. 그의 뒤에는 콘벨른 백작가가 있었다. 그의 형이 물려받을 가문이었지만 아버니가 백작으로 있는 동안에는 그를 위한 힘이기도 했다. 그 힘에 대한 믿음이 궁지에 처한 와르디의 오기가 분명한 비웃음을 무시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었다.

“콘벨른가가 마음 먹어서 하지 못할 것은 없어. 그 증거를 보여주지. 라이언...”

콰아아아아앙---!!!

하지만 그의 믿음은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흔들리고 말았다. 수백년간 제국의 동남쪽에 굳건히 서있던 몰론성의 흔들림과 함께. 

우르르르르--!!!

“우욱!!”

“꺄악...!!”

“디포르챠님!”

엄청난 폭음에 이어 몰론성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변화에 와르디나 디포르챠 모두 놀라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폭발과 흔들림에 놀란 라이언이 디포르챠의 비명소리를 쫓아 그를 보호하기 위해 문을 열고 뛰어들었다. 하지만 폭발은 한 번이 아니었다.

콰앙--!!

콰앙---!!!

우르르르르르---

우르르르르르---

연속적인 폭발음과 함께 조금전과 같은 진동이 쉴새없이 성을 강타했다. 설 수도 없는 강한 흔들림에 디포르챠나 와르디, 심지어 기사인 라이언마저 선 자세를 유지하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을 뒹굴었다.

“우욱!!”

“꺄악...!!”

“디.. 디포르챠... 우욱...”

색마검천황 

휘리리릭---!!

바닥을 뒹굴며 혼란스러워하는 그들 위로 검은 안개가 바람처럼 스며들기 시작했다.

“헉!”

“흑!”

검은 안개가 세 사람을 뒤덮는 순간 짧은 두 번의 신음과도 같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남자의 목소리였다. 디포르챠와 라이언의 비명소리였다.

“루... 루에...”

와르디의 반가운 목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운 검은 안개 사이로 비집고 흘러나왔다. 그녀의 목소리는 다른 두 남자와는 달리 밝고 생동감이 넘쳤다.

콰앙---!!

콰앙--!!

몰론의 견고한 성벽 위로 검은 빛의 창이 내려꽂히고 있었다. 검은 창이 마치 비라도 내리는 것처럼 허공을 가득 메우며 아래로 빠르게 쏟아지고 있었다.

콰앙---!!

콰앙--!!

“우악--!!”

“크아아악--!!”

“아아악--!!”

“살려줘--!!”

“신이여--!! 신이여---!!”

“꺄아아악---!!”

재앙은 하늘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후웅---!!

후웅--!!

휘리릭--!!

퍼억--!!

카득--!!!

서걱--!!

“크아악--!!”

“커헉--!!”

“크윽--!!”

“크흑--!!”

땅 위에서도 거대한 체구의 사내가 휘두르는 클레이모어가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검은 창을 피해 달아나려는 사람들에게 저주와도 같이 덮쳐오고 있었다.

후웅--!!

휘릭---!!

퍼어억---!!

콰드득---!!

콰아악---!!

쉬리릭---!!

서걱--!!

“크악--!”

“커헉--!”

“큭--!”

칸피니스의 칼은 거침이 없었다. 앞으로 한 번 크게 베는가 싶으면 어느새 몸을 한바퀴 돌리며 그 기세로 주위를 크게 베어갔다. 앞으로 나아가며 크게 베는가 싶더니 잠시 후에는 뒤로 물러 후미를 난도질하고 있다. 나아가고 머물고 물러서는 것이 하나였다. 베고 내리치고 찌르는 것이 또한 하나였다. 끊김 없이 모든 동작이 마치 처음부터 하나인양 그렇게 흐르듯 이어지고 있었다.

검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어김없이 하나 이상의 목이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목이 잘린 이들은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한다. 비명은 목이 아닌 다른 곳을 잘린 자들의 것이었다. 목과 함께 사방으로 비산하는 팔다리의 주인들이 바로 처절한 비명을 질러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사... 살려...”

“제... 제발...”

압도적이었다. 공포였다. 지금의 장면을 설명하기에 이보다 더 긴 말은 필요치 않았다. 검을 들어 막으면 검까지 함께 잘려나갔다. 두터운 풀플레이트 아머는 종잇장처럼 찢겨 몸통과 함께 허공을 날았다. 말을 달려오던 기사는 말과 함께 둘로 나뉘어 사이좋게 좌우로 누워버렸다.

무려 20명이나 되는 레드플레임의 기사가 주둔하고 있었고, 그들의 지휘를 받는 200여명이 용병이 있었지만, 그들의 필사적인 저항조차도 무기력하게 죽기 싫은 자들의 무력한 마지막 발악으로 비쳐질 뿐이었다.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저지할 수 있는 어떠한 수단도 없었다.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것 외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크헉--!!”

“크악--!!”

“플레임버스트---!!”

실드로 하늘에서 내려꽂히는 검은 창들을 막아가던 마법사 하나가 칸피니스의 학살을 더 이상 두고볼 수 없다는 듯 강력한 마법을 날려왔다. 5클래스의 화염계 마법 - 강한 폭발에 이은 뜨거운 불길이 모든 것을 불태우고 녹여버린다는 플레임버스트였다.

“합!”

하지만 플레임버스트는 칸피니스의 기합에 이은 칼질 한 번으로 그대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칸피니스의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 평범한 클레이모어에 조금의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채 허무하게 사라져버렸다. 

“파...”

놀란 마법사가 다른 공격을 시도하려는 듯 주문을 외우려 했지만 그의 적은 칸피니스 하나만이 아니었다. 실드를 펼쳐 그가 여태까지 막고 있던 검은 창들이 잠시의 틈을 타고 그에게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시... 실...”

놀라 급히 펼치려던 실드는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그가 채 주문을 외우기도 전에 그의 머리 위래 서너개이 검은 창이 내리꽂힌 것이다.

퍼퍽--!!

퍽--!!

“큭... 끄륵...!”

마법사마저 쓰러져버리자 사람들은 절망했다. 장내의 누구도 칸피니스의 검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하늘로부터 내리꽂히는 검은 창은 칸피니스가 미처 죽이지 못한 나머지 사람들을 꼬치꿰듯 꿰뚫고 있었다. 희망은 실드를 펼쳐 검은 창을 막아가던 마법사 뿐이었다. 기사들은 다가가지도 못하는 칸피니스에게 마법공격을 가할 수 있는 마법사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런데 그 마법사가 죽어버린 것이다. 제대로 한 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력하게.

“어...”

“아...”

“아...”

이제 더 이상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 절규하며 도망다닐 의욕도 없었다. 그저 멍하니 쓰러진 마법사와 주위를 뒤덮고 있는 시체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칸피니스의 검은 이미 모든 힘을 잃어버린 채 저항은커녕 도망조차 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조금의 용서도 양보도 없었다. 조금전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대로 검이 나아가는 대로 그저 앞에 있는 자들을 베어넘길 뿐이었다.

“컥--!!”

“헉--!!”

“큭--!!”

무력한 자들은 비명소리마저 작았다. 짧은 단속음같은 비명소리들이 칼이 휘둘러지는 사이사이로 들려왔다. 그러면 어김없이 몇 개의 시체가 칸피니스의 발 아래 쌓여갔다. 칸피니스는 자신의 발에 밟혀 짓물러지는 시체를 딛으며 서서히 앞으로 걸음을 옮겨 남은 사람들을 하나하나 처리해가고 있었다.

“큭...!!”

마지막 비명소리가 들려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대략 2시간 정도였다. 해가 아직 서산에 넘어가기 전에 시작했는데 어느새 사방에는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칸피니스는 피에 절어 어둠 속으로 검게 물들어가는 땅 위로 마지막 시체를 쓰러뜨리고는 조용히 허공으로 칼을 한 번 게 털었다.

휘릭--!!

핏방울이 붉은 무지개를 그리켜 그의 칼끝을 따라 허공으로 크게 비산했다. 칼에 묻은 피를 털어낸 칸피니스는 검을 등에 짊어지고 있던 칼집에 꽂아넣었다. 그리고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살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서있는 것도 없었다. 성의 마당에 심어진 정원수나 석조 조형물마저도 남아난 것이 없었다. 으깨지듯 부수어진 것은 릴레이나의 마법에 의한 것이었다. 날카롭게 베어진 것은 칸피니스의 검이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남은 것은 칸피니스와 릴레이나가 만들어놓은 파괴의 잔흔 뿐이었다.

칸피니스는 무심한 눈빛으로 주위를 한 번 훑어본 후 생존자가 없음을 확인하고는 큰 소리로 디아스루에나를 불렀다.

“루에나!”

“예, 마스터!”

색마검천황 

칸피니스의 부름에 디아스루에나가 그의

마차는 몰론 동남쪽 숲에 숨겨져 있었다. 마을 여관에 묵을 경우 그들의 행적이 노출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마을 여관에서 뻔질나게 오가는 모습을 보인다면 아무리 증거를 남기지 않는다 할지라도 의심을 사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의심을 받는 것은 무서운 게 아니지만, 의심을 사게 되면 번거로운 일이 많으니 그 불편함을 피하기 위해 굳이 숲속에 마차를 숨겨둔 것이다.

마차주위에는 이미 클라이안과 롯시, 딜레인 등의 일행들이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많이 닦아내기는 했지만 곳곳이 핏물도 더럽혀져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치열한 격전을 치르고 온 듯한 모습이었다.

“여어~~ 일찍 끝냈네?”

칸피니스가 숲으로 들어서자 그의 모습을 본 여자들이 급히 그를 향해 달려온다. 아직 익숙지 않은 라일리안과 이번에 구출한 그녀의 여동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들만이 뒤에 남아 뻘쭘히 서있을 뿐, 어느새 그의 주위는 그의 여자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칸피니스 오라버니, 언니는?” 

역시 와르디의 일이 마음에 걸리는지 디올린이 먼저 말을 걸어온다. 칸피니스는 씨익 웃어보이더니 자신의 품에 안은 와르디를 디올린에게 보여준다. 와르디는 아직도 디아스루에나의 마법으로 인해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괘... 괜찮은 거에요?”

“응. 괜찮아. 마법 때문에 잠들어 있을 뿐이야.”

“아무일 없는거죠?”

“응. 내가 아는 한은.”

칸피니스의 여유로운 표정을 보며 비로소 안심을 했는지 디올린은 한숨을 쉬어보인다.

“다... 다행이네요. 아무일 없었다니.”

“루에나가 바로 옆에서 지키고 있었거든.”

“루에나요?”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그러고보니 뱀파이어라는 것 때문에 인간의 성이나 마을에서는 될 수 있으면 디아스루에나의 모습을 감추어왔던 것이 생각난다. 칸피니스는 디올린이 디아스루에나를 한 번도 보지 못했을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그녀를 위해 친절히 설명해주기로 했다.

“고위급 뱀파이어야.”

“배... 뱀파이어요?”

역시나 놀라는 표정이다. 사실 마족이나 드래곤은 강하기는 하지만 인간의 피부에 와닿는 강함은 아니다. 그들의 강함이란 대체로 인간과는 그리 밀접한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뱀파이어는 다르다. 그들은 인간의 피를 주식으로 한다. 그들의 존재, 그들의 강함은 인간의 생명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이다. 디올린이 뱀파이어라는 말에 이토록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 아직 한 번도 못봤나?”

“예. 뱀파이어는...”

“조금 있으면 올테니까 그때 만나보도록 해.”

“예에... 하지만...”

“왜? 뱀파이어라서 만나는 게 꺼려지니?”

끄덕끄덕--

“무서워?”

끄덕--

“흐음...”

역시 16살의 여자아이다. 델킨피에르 성의 여자들이라면 16살 씩이나 되어 뱀파이어를 두려워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기사로서 철저히 단련받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성에서 단련받지 않은 여자아이들의 반응은 생소하면서도 또한 새로운 느낌이다.

“하지만 그 뱀파이어가 와르디를 구해주었는데?”

“그... 그렇긴 하지만...”

“뱀파이어이긴 하지만 내 여자야. 나의 명령을 듣는 나의 수하이기도 하고. 그래서 나의 여자인 와르디를 지금껏 보호하고, 이렇게 구해오기까지 한 거거든? 그래도 싫고 무섭니?”

“으음...”

“정 싫다고 한다면 루에나와는 만나지 않아도 돼.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줄게.”

“으음...”

“어때?”

디올린은 쉽게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 같다. 칸피니스의 여자이고 또한 언니의 은인이라고는 하지만 뱀파이어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를 극복하지 못하는 탓이리라. 하지만 이내 곧 결심을 굳혔는지 결연한 표정으로 칸피니스에게 말을 걸어온다.

“마... 만나겠어요. 그래서... 고... 고맙다는 인사도...”

“루에나와 함께 나에게 안기는 건?”

“그... 그건...”

“그건 싫어?”

얼굴이 빨개진 것을 보니 아주 싫기만 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아무래도 소녀적인 부끄러움에 아직 씻어버리지 못한 뱀파이어에 대한 두려움이 더해지면서 거부감을 느끼게 된 듯 하다.

하지만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한 번 칸피니스의 여자로 인정했으면 그녀와 한가족이어야 한다. 그것이 칸피니스의 원칙이었고 칸피니스의 정부가 된 이상 그 원칙에 복종해야 했다. 설사 상대가 뱀파이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괘... 괜찮아요. 루... 루에나와 함께... 함께 오라버니께 안겨도...”

“훗... 장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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