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30)

“허헉--!!” 

캉--!!

급히 몸을 뒤로 눕히며 검을 뻗어 공격을 피했지만 공격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솟아오르던 그 기세 그대로 펠린의 검이 적 기사의 눈을 향해 곧장 뻗어온 것이다.

콰직---!!

“크아악--!!”

한순간이었다. 한 순간 방어할 틈도 주지 않은 채 펠린의 검이 적 기사의 코뼈를 부수었다. 검끝이 코뼈에 이어 숨골까지 꿰뚫더나 기사의 뒷통수로 삐져나왔다.

“컥--!!”

털썩--!!

펠린이 상대하던 적이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엘로나가 맡아 상대하던 기사 하나가 엘로나의 검에 한쪽 팔을 잃은 채 심장을 꿰뚫리며 쓰러졌다.

“크아악--!!”

엘로나와 펠린이 동시에 승리의 검을 치켜드는 순간 살아남아있는 레드 플레임은 한 명도없었다. 롯시가 맡아 상대하던 두 명과 루시가 상대하던 두 명도 이미 검은 시체가 되어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오직 델킨피에르 기사들만이 아무일 없었던 듯 말을 몰아 병사들을 압박해갈 뿐이었다.

믿었던 콜베른 기사들마저 전멸해버리자 병사들은 두려워할 힘조차 잃고 있었다. 이리저리 델킨피에르 기사들의 움직임에 따라 몰려다니고 있는 그들의 손에는 더이상 무기도 들려있지 않았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두려움마저 사라져버린 체념어린 표정 뿐이었다.

“남작님께서 안으로 뫼시라 하십니다.”

모든 것이 정리된 뒤 내성의 문이 열리며 남작가의 집사 로베르트 벨린이 나와 정중하게 남작의 말을 전했다.

덜컹--!!

집사의 말에 마차의 문이 열리며 칸피니스가 내려섰다. 2미터 20센티의 거구. 잔폭한 눈빛과 폭발적인 위압감은 그의 체격보다 더욱 압도적인 존재감을 느끼게 했다. 델킨피에르의 기사들의 신위에 놀란 병사들은 칸피니스의 존재감에 몸을 떨며 한참을 더 뒤로 물러서야 했다.

칸피니스의 잔폭한 눈빛이 집사를 향하자 집사도 찔끔 놀라며 뒤로 세 걸음 물러서야 했다. 그래서는 안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해봤지만 무의미한 저항이었다. 드래곤조차도 놀라는 델킨피에르의 살기를 검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집사가 견뎌낸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로베르트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로베르트가 붉게 상기된 얼굴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이려는 순간 칸피니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육중한 몸과 압도적인 존재감이 그의 걸음과 함께 로베르트에게 다가왔다.

“으... 으...”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던 조금 전의 다짐을 잊었는지 로베르트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두려움에 질린 신음소리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어... 어... 어서... 오십... 시... 오... 칸피니스... 자... 작... 님...”

집사의 예에 따라 칸피니스에게 떠듬거리며 인사를 하기는 했지만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다행인지 칸피니스는 그의 인사 따위에는 전혀 신경쓰고 있지 않은 듯 했다. 그저 냉혹한 눈빛으로 내성의 정문을 노려볼 뿐이었다.

“저... 저를... 따...”

로베르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칸피니스는 아무말 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로베르트는 칸피니스가 자신을 스쳐 지나가자 급히 걸음을 옮겨 칸피니스를 추월해 그의 앞에서 그를 인도하기 시작했다. 몇 차례 플로네츠 성에 방문했던 칸피니스인만큼 특별히 안내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임무였기에 로베르트는 떨리는 다리를 억지로 이끌며 칸피니스의 앞에 서서 남작의 집무실로 걸어갔다.

“기다려야 하나?”

내성안으로 걸어들어가는 칸피니스의 등을 멍청히 바라보며 딜레인이 롯시를 보며 말을 걸었다. 다른 귀족의 성에 온 이상 귀족가의 안내가 없이는 함부로 건물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녀들을 안내해야 할 로베르트가 겁을 집어먹어 딜레인을 비롯한 델킨피에르의 기사들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덕분에 그들은 멍청히 서서 집사가 다시 나와 그들의 거취를 이야기해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번에 나오면 그냥 죽여버릴까?”

딜레인은 검술실력만큼이나 성격이 과격했다. 아마도 말리지 않는다면 진짜 집사를 죽여버릴지 몰랐다. 롯시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말려야 했다.

“그냥 적당히 팔 하나 정도 자르고 끝내는 게 어때? 그렇지 않아도 오늘 피를 많이 봤는데피를 더 볼 필요는 없잖아.”

롯시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살기가 넘치던 끝이라 그녀의 황당함은 딜레인에 결코 뒤지지 않는 과격함으로 바뀌어 있었다. 

“좋아, 특별히 봐줘서 팔 하나로 끝내주지.”

딜레인은 크게 인심쓰는 듯 고개까지 끄덕여보였다. 롯시는 그런 그녀를 대견하다는 듯 바라보며 웃어주었다. 드디어 딜레인이 자신의 성질을 죽일 줄 알게 되었다 여긴 것이다. 자신의 제안도 딜레인 못지않게 과격하다는 사실을 그녀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오른팔로 자를까? 왼팔로 자를까?”

“일은 해야 하니 왼팔이 낫지 않겠니?”

“오른팔을 잘라야 일을 할 때마다 교훈이 되지 않겠어?”

“그러다 잘리면 가족들은 어떻게 하구.”

“흠... 대개 집사는 세습이니까 아들이 이어받지 않으려나?”

“로베르트의 얼굴 봤어? 이제 설흔도 안되어 보이잖아. 분명 아들도 그만큼 어릴거야.”

“쳇... 봐줬다. 왼팔 하나로 용서해주지.”

“착하구나. 딜레인은.”

“흥!!”

롯시의 온화한 미소이나 딜레인의 부끄러워하는 표정과는 뭔가 핀트가 맞지 않는 대화였지만 당사자들은 너무도 진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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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회에는 섹스장면이 없습니다. 원래 마족과의 섹스가 들어가야 하는데 전투장면이 생각보다 길어지는 바람에 한 회는 그냥 건너뛰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동안 최소한 한 회는 섹스에 관련된 대사나, 섹스를 연상시키는 묘사를 넣어왔는데 이번에는 그랬다가는 밸런스가 무너질 것 같아서 포기했습니다. 

앞으로의 내용은 칸피니스의 하렘 설정에 맞춘 모험을 중심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주된 내용은 황실에서 일어나는 음모와 이웃나라와의 전쟁, 그리고 전설의 보물을 찾기 위한 모험입니다. 물론 먼치킨인 이상 단순호쾌하게 진행됩니다. 몇 회나 이런 식으로 전투장면만 나열한다면 야설이 들어간 판타지지 판타지의 형식을 취한 야설이 아니거든요. 저는 어디까지나 야설을 쓰고 있는 것이지 판타지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점 잊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다음회에 마족과의 섹스가 나갈 것이고, 그 다음회에 새로운 캐릭터가 추가될 것입니다. 섀도우 엘프와의 섹스란 어떤 느낌일까는 그보다 조금 뒤에 나가겠군요. 아직 등장하지 않은 종족들이 많이 있습니다. 홋홋홋....^^

“오랜만입니다. 외할아버지.”

“오랜만이로구나.”

문을 열고 집무실로 들어선 칸피니스를 바라보는 클라인 푸니엘 플로네츠, 플로네츠가의 현남작의 표정은 마치 시체와도 같을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뭐라고 변명이라도 해보시겠습니까?”

칸피니스의 말투는 차가웠다. 클라인의 얼굴은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할 말이 없다.”

클라인의 힘없는 대답에 칸피니스는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흥! 이제 와서 후회하는 척 해봐야 소용 없습니다. 노친네 속은 내가 잘 아니까.”

“콘벨른가의 둘째 아들이 와서 협박을 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호오... 조금 전에 당신이 죽으라 내보낸 그 떨거지들 말입니까?”

“음...”

“나를 바보로 아시는 건 아니겠죠? 이 성에는 죽은 벤자민 말고도 세 명의 서임기사가 더 있습니다. 견습기사도 최소한 5명 이상 남아있을테구요.”

“벤자민을... 죽였나?”

“병신같은 놈이 쓸데없는 의리를 지키려 하더군요. 뻔히 드러날 사실을 가지고 말이죠.”

“으음...”

“그런 허술한 음모를 꾸미고서도 들통나지 않으리라 생각한 것이었을까요?

“벤자민은...”

“대단한 녀석이죠. 앞으로 10년만 있으면 제국에서 가장 강한 100명 안에 드는 기사가 될 수 있었을 겁니다. 아마 그렇게 되었다면 검은창 기사단의 명성도 꽤 높아졌을테죠.”

“그래... 그녀석을 발굴한 건 너였다. 농노에 불과하던 아이를 데려다 기사로 키우라고 던져준 것이 바로...”

“아아... 과거야 어쨌든 녀석은 플로네츠 남작님의 기사지 제 기사가 아니죠. 더구나 녀석은 감히 나를 속이려 했거든요. 살려줘야 했을까요?”

클라인은 칸피니스의 조소어린 눈빛을 똑바로 마주볼 수 없었다. 그의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래가 촉망되는 벤자민을 이번 일에 끌어들인 것은 클라인 자신이었다. 직접 그를 죽인 것은 칸피니스였지만 그를 죽음의 길로 내몬 것은 클라인의 순간적인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그가 조금만 현명했다면 칸피니스 앞에서 잔재주를 부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를 속여가며 그의 여자를 건드리지 않았을 것이다. 최소한 가문의 기사단을 이끌어갈 동량을 이번 일에 끌러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같은 뒤늦은 깨달음이 칸피니스의 비웃음과 함께 그를 괴롭게 했다.

“휴우... 어쩔 수 없지. 모두 내 잘못이니까. 그래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콘벨른의 머저리들을 죽으라 내보낸 것으로 봐서 대충 짐작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내... 목숨인...가?”

낮은 울림과 함께 끊어질 듯 가늘게 이어지는 목소리였다. 

“훗... 외할아버지만으론 부족하죠. 이 일을 알고 있는 전부의 목숨이 필요합니다.”

“전... 부? 전부라... 누구까지를 말하는건가?”

“글쎄요... 누구까지일까요?”

칸피니스의 눈빛이 잔혹하게 빛났다. 클라인은 자신의 뇌리를 파고드는 서늘한 살기에 숨이 멎을 듯한 공포를 느꼈다. 눈앞의 이 사내를 속이려 하는 것은 미칫짓이었다. 클라인은 마치 잊었던 기억을 떠올리듯 칸피니스의 경고를 받아들였다.

“나와 세 명의 서임기사들만이 알고 있네. 토르넬도 몰라. 그녀석은... 아직 너무... 어리니... 까...”

토르넬이라면 클라인의 외아들로서 플로네츠 남작가의 후계자였다. 칸피니스의 외숙부가 되니 그의 외사촌이자 정부이며 이번 사건의 당사자인 와르디의 생부이기도 했다. 칸피니스는 그를 잘 알았다. 그는 영민한 사람이었지만 잔인하거나 교활한 사람은 되지 못했다. 자신의 딸을 위험에 빠뜨리는 행동을 할만한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토르넬 외숙부라면 이런 일에 끼어들 사람은 아니죠. 아버지와 형을 죽이고 작위를 계승했다고 아직도 나와 얼굴도 마주하려 하지 않는 그 고집스러움은 분명 외할아버지의 계획과는 거리가 아주 멀거든요. 그렇죠?”

“아마 그 아이가 이 일을 알았다면 가문이 멸망당할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콘벨른 백작가의 기사들과 일전을 치렀을 것이다. 네 말대로 그 아이는 고집스러울 정도로 고지식하니까. 와르디가 네 정부가 되었다는 사실을 듣고 불같이 화를 내면서도 와르디의 선택을 존중해줄 정도로 정도 많지.”

“내 보복이 두려워서 일부러 빼돌린 건 아니구요?”

“네 말대로다. 내가 콘벨른 백작가의 레드플레임의 힘과 능력에 잠시 오판을 하기는 했지만 너라는 존재를 아주 잊어버릴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니까.”

“그렇겠죠. 그런 분이니 가문의 체면 때문에 손녀를 인신매매 조직에 팔아넘길 수 있었겠죠.”

“체면 때문만은 아니다!”

나직하지만 힘있는 목소리였다. 이제껏 칸피니스의 추궁에 수세적인 자세를 취하던 것과는 달리 영주다운 당당함을 두른 채 클라인의 시선이 칸피니스를 마주쏘아보고 있었다.

“콘벨른 백작가는 제국의 명문 가운데 하나다. 그들의 레드 플레임은 제국의 10대 기사단으로 꼽히는 기사단이고. 그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플로네츠 남작가 따위는 하루아침에 없애버릴 수 있다. 아무리 작위도 없는 둘째 아들의 요구라지만 함부로 거절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호오... 그래서 잘하셨다는건가요?”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을 하려는 거다.”

“제게 연락하셨다면 해결해드렸을텐데요.”

“네가 콘벨른 백작가를 상대해낼 수 있겠느냐?”

“글쎄요...”

클라인의 질문에 칸피니스는 모호한 미소만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클라인은 칸피니스의 미소를 노려보며 눈살을 찌푸려보였다.

“네가 강하다는 것은 안다. 네 주위에 강한 자들이 많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네가 콘벨른 백작가와 대적할 수 있을 거라고는 지금도 믿을 수 없다. 아니, 설사 콘벨른 백작가와 대적할 힘이 있다고 하더라도 콘벨른 백작가와 연계된 수많은 귀족들의 세력을 감당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렇다. 네가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한 개인의 강함일 뿐이다. 네 주위의 강자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콘벨른은 최소한 400명의 기사와 8000명의 병사를 동원할 수 있는 세력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아무리 못되어도 40개의 귀족가문을 끌어들일 수 있는 권력과 인맥도 갖고 있다. 네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그들을 상대한다는 것은 무리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훗... 생각은 많이 하신 것 같군요.”

자신을 노려보는 클라인의 눈빛이 보다 강해지고 있음에도 칸피니스의 비웃음과도 같은 미소는 풀리지 않았다. 

“안타깝네요. 외할아버지의 생각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확인시켜 드릴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을 상대할 수 있다는거냐?”

“글쎄요... 꼭 아셔야 합니까?”

“죽을... 사람이라는... 거냐?”

“죽을 사람이 너무 많이 알아봐야 미련만 커지는 법이니까요.”

클라인은 인생의 경험으로 칸피니스의 웃음에서 살기를 읽을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 살기였지만 67년의 삶이 헛된 것은 아니었는지 서늘한 한기가 웃음과 함께 자신을 노려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놈은... 진짜... 나를 죽이려는거다.’

클라인은 비로소 죽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굳어진 얼굴을 보는 칸피니스의 표정엔 더욱 밝은 웃음이 떠올랐다. 그의 공포를 조롱하며 즐기는 듯한 웃음이었다.

“외할아버지와 다른 세 서임기사의 죽음은 자연사로 처리해드리죠.”

“자연... 사?”

“예. 괜히 피 볼 필요는 없으니까요. 와르디도 걱정이 되고...”

“그렇... 겠지.”

“외할아버지께도 그리 나쁜 조건은 아닐 겁니다. 괜히 제가 손을 썼다가는 외할아버지께서 하려던 일들을 다 까발려야 할테니까요. 차라리 이렇게 조용히 자연사하는 쪽이 콘벨른 놈들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울 수 있으니 도움이 될테죠.”

“음... 알았다...”

“후계는 확실히 정해놓은 겁니까?”

“지금 플로네츠 남작가에 남아있는 아들은 토르넬 하나 뿐이니까.”

“토르넬 외숙부라면 남작으로서 일을 잘 처리할 겁니다.”

“그렇지. 귀족치고 독한 면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성실하고 영리한 녀석이니까.”

“와르디의 집안이기도 하니 외숙부가 자리잡을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래주겠다면 고맙군.”

“어차피 서임기사가 다 죽게 된다면 플로네츠의 방위력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래서야 와르디를 제대로 지킬 수 없을테죠.”

“그러... 겠지.”

칸피니스의 말에 플로네츠 남작가에 소속된 서임기사 네 명이 모두 죽게 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클라인의 표정은 다시 한 번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영지에서 기사 두 명 보내드리도록 하죠. 서임기사는 아니지만 콘벨른 따위의 기사보다는 쓸만할 겁니다.”

“여... 자들이...겠지?”

“당연한 말씀을 굉장히 어렵게 하시는군요.”

클라인은 델킨피에르의 기사들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수도로 가는 길에 성에 들를 때마다 침실에서 칸피니스가 기사들과 어떤 일들을 했었는지도, 와르디와 칸피니스가 한 침실을 쓸 때 몇 명의 기사가 같이 있었는지도 보고를 통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클라인은 뼛속까지 귀족이었다. 그런 그에게 있어 델킨피에르의 기사들은 음란한 창녀들로 여겨질 뿐이었다. 그녀들의 놀라운 실력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의 행위만으로도 그녀들은 경멸받아 마땅한 천한 존재들이었다. 그런 델킨피에르의 기사들이 플로네츠의 기사단을 맡게 된다고 생각하자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 다...”

“거절하실 필요없습니다. 클라인 푸니엘 플로네츠 남작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내가 원해서 파견하겠다는 거니까요.”

“으음...”

모욕이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칸피니스는 더 이상 그의 외손자가 아니었다. 칸피니스는 강자였다. 그것도 언제든 플로네츠 가문을 멸문시킬 수 있는 강자였다. 클라인은 그 사실을 잊지 않으려는 듯 주먹으로 움켜쥔 채 강하게 힘을 주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들어가서 쉬어야 하거든요.”

“아... 알겠다.”

주인의 허락 없이 방을 나서겠다고 하는데도 클라인은 참고 허락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 클라인의 모습에 칸피니스는 비웃음과도 같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인사도 않고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크흠...”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열고 나서는 칸피니스의 뒷모습을 보면서 클라인은 화조차 내지 못했다. 화를 낼 기운도 의욕도 없었다. 무례를 탓하기엔 그가 처한 상황이 너무 기막혔다. 외손자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았다. 어떻게 죽는가 하는가 하는 이야기까지도 무력하게 듣고만 있어야 했다. 

처음 제안을 들었을 때 불안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콘벨른이라는 이름과 레드플레임이라는 실력 앞에 그 불안은 금방 사라져버렸다. 잘만 하면 가문의 수치를 치우고, 유력한 백작가문과 연결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겨졌다. 그래서 자신의 손녀를 그들의 손에 넘겨주었다. 치졸한 계략까지 써가며 인신매매길드의 손에 자신의 외손자의 정부이기도 한 손녀를 넘겨주었다. 

성공할 것이라 여겼었다. 분명히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실패하더라도 레드플레임이 있으니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다. 칸피니스의 분노 따위 레드플레임이 막아줄 수 있을 것이라 믿었었다. 하지만 칸피니스가 직접 나서지 않고도 10명의 레드플레임은 시체로 누워버렸다. 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에. 칸피니스는 그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두려운 존재였다. 단지 다섯명의 여기사만으로 두 배의 레드플레임을 쓰러뜨렸다. 칸피니스 자신은 물론이고, 클라인이 알고 있는 숨겨진 다른 힘은 쓰이지도 않았다.

클라인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칸피니스는 잔인하고 신의가 있는 사람이었다. 죽인다고 약속했다면 반드시 죽였다. 부모나 형제라 할지라도 한 번 마음먹은 이상에는 예외란 존재하지 않았다. 클라인이라고 별다를 리 없었다. 죽인다고 약속했으니 반드시 죽일터였다. 그것도 플로네츠가의 동량이랄 수 있는 세 명의 서임기사들과 함께. 

모든 것은 클라인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일어난 결과였다. 칸피니스를 무시하고 눈에 보이는 힘을 쫓은 댓가였다. 클라인은 스스로를 향해 분노와 저주를 퍼부으며 온몸에 힘을 뺀 채 눈을 감았다. 마치 절망과도 같은 어둠이 그를 감싸안앗다.

“칸피니스 오라버니!”

플로네츠 남작의 집무실을 나서는 칸피니스를 불러세운 것은 이제 16살이나 되었음직한 소녀였다. 갈색이 섞인 화사한 금발에 앙증맞은 코가 귀여운 매력을 느끼게 해주는 아름다운 소녀였다. 

“디올린!”

그녀는 와르디의 동생인 디올린 플로네츠였다. 역시 토르넬 외숙부의 딸로 칸피니스에게는 외사촌이 되었다. 

“오랜만이에요. 오라버니.”

“그래 오랜만이구나.”

디올린은 와르디와의 관계 덕분에 칸피니스와 얼굴을 마주할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다. 토르넬이 칸피니스와 와르디의 관계에 불만을 품고 와르디의 다른 형제와 칸피니스가 만나는 것을 막아왔기 때문이었다. 

“저...”

“무슨일인데? 디올린”

디올린이 망설이는 표정으로 주저거리자 칸피니스는 다정스럽게 그녀와 눈높이를 맞춰주었다.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자신의 정부인 와르디의 여동생이면서 칸피니스가 아끼는 귀여운 사촌여동생인 디올린이었다. 그런 그녀가 머뭇거리며 다가온 이상 무심할 수는 없었다.

“칸피니스... 오라버니...”

“왜?”

“저기... 저...”

“말해봐. 어려워말고.”

눈을 맞추어주며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고 있음에도 디올린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칸피니스는 그녀를 안심시켜주기 위해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편안한 미소를 지어보여주었다.

“자아... 무슨 말인지 이 잘생기고 매력적인 칸피니스 오라버니께 말해보렴.”

“저기... 저기...”

“음?”

“저... 저와... 아니, 저... 저를 안아주세요.”

“음?”

느닷없는 말에 칸피니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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