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30)

플로네츠 남작의 영지는 공식적으로 장원 두 개가 고작이었다. 마을이라고 해봐야 장원의 작은 마을이 전부였고, 성 주위에는 마을이라고 할만한 것이 조성되어 있지 않았다. 고작 몇 채의 집들이 들어서서 어쩌다 한 번 오가는 델킨피에르의 상인들을 상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마을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이 작은 마을을 지나면 작은 언덕 위에 서있는 단단한 성이 보이는데 그것이 바로 플로네츠 남작의 성이었다.

플로네츠 남작의 성은 델킨피에르 자작가의 성에서 정확히 마차로 8시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아침 일찍 출발하면 해가 떨어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가까운 거리였기에 칸피니스의 게으름과 중간의 사건 덕분에 조금 늦어지기는 했지만 칸피니스의 일행은 어두워지기 전에 성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누구냐?”

칸피니스의 일행이 보이자 성문을 지키던 경비병이 창을 곧추세우며 막아섰다. 

다각-

경비병이 창을 겨누자 기마대의 선두에 있던 롯시가 손을 들어 말과 마차를 멈추고 마부석에 앉아있는 레인을 돌아보았다. 점심을 먹은 뒤부터 마부노릇을 하던 레인은 롯시가 자신을 돌아보자 마부석과 연결된 창을 통해 칸피니스에게 무언가 말을 건내더니 롯시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델킨피에르 자작 칸피니스 포르니르 델킨피에르님이시다. 당장 비켜라!”

델킨피에르 자작이라는 말에 경비병들은 놀랐다. 자작이라면 그들의 영주인 플로네츠 남작보다도 높은 작위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성문을 지키는 경비병이었다. 설사 상대가 국왕이라 할지라도 확인되지 않은 상대를 들여보낼 수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델킨피에르 자작님. 지금 즉시 안에 기별을 넣겠습니다. 불편하시더라도 잠시만 기다려주셔야 하겠습니다.”

경비병의 선임이 창을 거두며 앞으로 나서 정중히 고개를 숙여보이며 칸피니스의 동의를 구했다. 하지만 상황이 나빴다. 평소라면 경비병의 사정을 고려해서 기다려줄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안에 기별할 필요 없다. 바로 들어가 남작님을 뵙겠다. 길을 비켜라!”

“그건...”

롯시의 말에 경비병은 할 말을 잃었다. 경비병의 제지를 무시하고 성으로 직접 들어가는 것은 무례도 보통 무례가 아니었다. 영주의 영지 안에서, 그것도 성으로 들어가면서, 영주의 허락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영주의 모든 권한을 무시하겠다는 의미였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자작이 남작보다 작위가 높다지만 고작 한단계 높은 것에 불과했다. 어차피 같은 하급귀족인 처지에 이렇게 무례를 보이자 경비병은 분노가 끓어오름을 느꼈다.

“안됩니다! 여기는 플로네츠 남작의 영지! 플로네츠 남작가의 성입니다! 플로네츠 남작님의 확인과 허락 없이는 국왕이라 할지라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도 들어가겠다면 어쩔 것인가?”

“막겠습니다.”

경비병들의 선임은 자신이 있었다. 델킨피에르 가문이 자작가라고는 하지만 흑암의 숲을 지나야 갈 수 있는 변두리의 소귀족이 불과했다. 델킨피에르 자작가가 강한 권력을 갖고 있다거나, 뛰어난 기사단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은 들어본 적 없었다. 더구나 눈앞의 기사나 다른 기사도 모두 여자였다. 여자가 강한 검술을 지녔다고는 생각할 수 없으니 실력으로 기사가 된 것은 아닐 것이라 여겨졌다. 충분히 경비병들만으로도 그들을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막아보시지.”

하지만 경비병 선임은 자신의 판단을 확인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롯시의 대답과 동시에 그의 목이 몸에서 분리된 채 하늘로 날아올랐기 때문이었다. 경비병 선임의 목이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 신호인 듯 딜레인을 비롯한 다른 기사들도 말을 달리며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크악!!”

“크아악!!”

“컥!!”

순식간에 성문 앞에 서있던 8명의 경비병들이 목숨을 잃었다. 비명소리를 듣고 성문에서 대기하고 있던 20여명의 경비병들이 달려왔지만 그들의 운명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델킨피에르 기사들이 말이 움직일 때마다, 검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어둠속에 검게 보이는 피를 뿜으며 하나둘 시체가 되어 바닥에 쓰러져갔다.

“막아라!!”

“영주님께 연락을!!”

“기사단을 불러! 기사단을!!”

“적은 기사다! 기사단이 올 때까지 버텨라! 유서깊은 플로네츠 남작가의 검은창 기사단이라면 저들을 막을 수 있을 거다!!”

“궁병대 활을 쏴라!”

“그냥 화살이 아니다! 불화살을 쏴라! 불화살을! 마차를 태워버려!!”

성 안에 있던 수백의 경비병들이 복장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달려나오며 끊임없이 소리질러보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모든 전술은 델킨피에르의 기사들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조차 없었다. 창을 내뻗기도 전에,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병사들의 목이 날아가버렸으니까. 

휘릭--

휘리리리릭---

휘리릭--

마차로 날아가는 화살또한 마찬가지 운명이었다. 화살들은 궁병들의 바람을 배신한 채 레인의 검에 막혀 모두 잘려졌다. 불화살은 마차를 불태우기는커녕 검풍에 말려 불까지 꺼진 채 다른 화살들과 마찬가지로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병사들은 절망했다. 그들이 어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에, 그리고 그런 상대가 살기를 품고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고 있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절망속에서 그들은 살기 위해 창을 찌르고, 활을 쐈다. 적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였다. 아니 살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는 것으로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더 이상 누구도 자신의 창이, 화살이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창을 찌르고, 활을 쏨으로서 자신이 살아있음을 만족할 뿐이었다.

무기력한 병사들의 저항은 델킨피에르의 기사들의 공격을 더욱 수월하게 만들었다. 살기조차 잃어버린 채 목적도 없이 발악적으로 가해지는 공격은 기사들에게 작은 위협조차 될 수 없었다. 그저 말을 달리고 검을 휘두르기만 하면 되었다. 그저 적이 보이는 곳으로 달려가 팔을 휘두르면 충분했다. 그것만으로도 적은 물러났다. 물러서지 않는 적은 시체가 되어 바닥에 누웠다.

“네놈들은 누구냐?”

한참을 양떼 속에 뛰어든 늑대와 같이 날뛰던 델킨피에르 기사들을 향해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갑주를 걸치고 말을 탄 사람이 검을 곧추세운 채 달려왔다. 그의 갑옷에 새겨진 검은 창의 문양으로 보아 플로네츠 남작가의 기사인 듯 했다. 

상대가 기사임을 확인하자 델킨피에르 기사들도 검을 멈춘 채 상대를 주시했다. 어차피 병사들을 죽이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다. 그들이 살육을 벌이는 것은 플로네츠가의 수뇌를 끌어내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기사가 모습을 보였으니 다른 기사도 곧 이 자리에 나타날 것이다. 기사들을 모두 베어버린다면 수뇌부들도 어쩔 수 없이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무의미하게 병사들을 살육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와아아!! 달튼경이시다!! 검은창의 기사다!”

기사의 모습이 보이고 델킨피에르 기사들이 살육을 멈추자 병사들은 기세가 올라 환호성을 질러댔다. 평소 우러러보며 존경하던 검은창의 기사가 적의 기사들을 멈추게 한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사가 적의 기사를 베어 지금가지 당한 복수를 해줄 것이라 믿어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델킨피에르의 붉은혜성들에게 있어 그같은 환호는 비웃음의 대상일 뿐이었다.

“흥! 검은창의 기사가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딜레인의 조롱에 달튼이라 불리우는 기사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검은창의 기사단의 일원임을 항상 자랑으로 여기던 그에게 딜레인의 조롱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여자였다. 기사로서 여자를 상대로 함부로 검을 뽑을 수는 없었다.

“감히 검은창의 기사를 모욕하는 것인가?”

“검은창이 모욕당할 주제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달튼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검을 뽑아 달려갔다. 상대가 여자라는 것은 더 이상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감히 자신이 속한 기사단을 모욕했다. 기사를 모욕한 이상 여자라 할지라도 용서할 수는 없었다.

“와아아아!!”

“와아아아아!!”

두두둑--!!

히히히히힝!!---!!

히힝--!!

“이얍!!”

병사들의 함성소리를 뚫고 말발굽소리와 말울음소리가 기세좋게 울리며 딜레인에게 달려들었다. 달튼의 우렁찬 기합소리는 기사답게 모든 소음을 뚫고 성안에 울려퍼졌다.

퉁--!!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칼부딪히는 소리조차 없이 달튼은 목을 잃어버린 채 말에서 떨어져버렸다. 그의 팔은 여전히 검을 굳게 쥔 채 앞을 향해 뻗어 있어, 검은창 기사의 기개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목을 잃은 몸은 그저 바닥을 피로 물들이며 목적없이 구를 뿐이었다.

툭--!!

뒤늦게 몸 근처로 투구로 감싸여있는 달튼의 머리가 떨어져내렸다. 

“...”

“...”

플로네츠 성의 병사들은 침묵했다. 믿을 수 없었다. 달튼경이라면 플로네츠 남작가에서 알아주는 실력자였다. 최강은 아니지만 검조차 섞지 못하고 목숨을 잃을 정도로 약한 실력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짧은 시간에 목이 잘린 시체가 땅위에 뒹굴고 있는 것이다.

딜레인이 말을 몰아 병사들에게 다가가자 겁에질린 병사들이 딜레인이 움직인 거리만큼 뒤로 물러섰다. 조금전의 절망에 찬 악다구니 같은 공격은 더 이상 없었다. 차라리 선 채로 죽을 지언정 반항은 꿈조차 꿀 수 없는 공포에 의한 포기만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왠 놈들이냐?”

두려움에 떨며 차마 막아설 엄두조차 못내고 좌우로 갈라서는 병사들을 헤치며 칸피니스 일행이 내성에 이르렀을 때 내성에서 10여명의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뛰쳐나왔다. 붉은 불꽃의 문장이 그려진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었다.

“너희들은 또 뭐냐? 플로네츠 남작가의 기사들 가운데 너희들 같은 자들은 없었는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딜레인은 기사들의 갑옷에 그려진 문장을 잘 알고 있었다. 레드플레임. 제국 내에서도 용맹으로 이름높은 콘벨른 백작가의 기사단의 문장이었다. 그런 대단한 기사단이 이런 촌구석에 나타났다는 것은 무언가 의도가 있기 때문일 터였다. 딜레인은 그 의도가 와르디와 관계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여자도 기사가 될 수 있는 변두리의 기사답구나. 레드플레임을 몰라보다니. 우리는 콘벨른 백작의 기사단 붉은 불꽃, 레드플레임이다.”

“호오... 그 대단한 레드플레임이 이런 촌구석까지 왠일이실까?”

플로네츠 성에 파견된 레드플레임 기사단의 리더인 듯 그람드 투르 자이먼이 칸피니스의 일행을 비웃으며 당당하게 외쳤지만 돌아온 것은 딜레인의 조롱섞인 대응 뿐이었다. 어차피 적이라면 존중해줄 필요가 없었다. 하물며 적이 자신들을 비웃는다면 같이 비웃어줄 뿐이었다. 그것이 델킨피에르 기사단의 방식이었고, 또한 딜레인의 방식이었다. 

“네... 네놈이...”

그람드는 딜레인의 조롱섞인 말투에 분노했다. 하찮은 시골의 기사단이, 그것도 어린 여자아이가 자신을, 아니 자랑스런 붉은불꽃을 조롱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보아하니 여기사가 입고 있는 제복은 붉은 색인 듯 했다. 붉은 색이라면 자신들이 처리해야 할 델킨피에르 영지의 붉은 혜성일 가능성이 높았다. 어차피 이런 궁벽한 영지에 나타날만한 기사단이라고 해봐야 몇 되지 않으니 거의 확실했다.

“어린계집, 너희가 델킨피에르의 붉은 혜성이냐?”

“호오... 알고 있네?”

딜레인은 여전히 여유있는 자세로 철저히 그람드를 조롱했다. 그람드는 상대가 붉은 혜성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자 잔혹한 미소를 지었다. 분노는 검으로 저들을 꺾어 풀면 되는 것이다. 죽일 필요도 없었다. 사로잡아서 자신의 잘못을 깨달을 때까지 철저히 능욕해줄 터였다. 보아하니 미모가 뛰어나 능욕한 재미도 쏠쏠할 것이라 생각하니 싸움을 앞두고 있음에도 자지에 피가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네 말로 모든 것은 결정되었다. 계집.”

그람드가 검을 뽑아들자 그람드 주위에 몰려있던 다른 레드 플레임도 검을 뽑아 칸피니스 일행을 겨누었다.

“네년의 무례는 네년의 몸으로 사과받도록 하지. 쳐라!”

나름대로 잔혹한 표정을 지으며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딜레인에게는 우습기만 할 뿐이었다. 

“흥!”

딜레인이 코웃음을 치며 말을 달려가자 롯시와 엘로나, 펠린, 루시등도 같이 말을 달리기 l작했다. 레인만 마차의 호위임무 때문이 아닌 싸움이 끝나면 마차를 몰아가야 했기 때문에 마부석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카캉--!!

캉--!!

캉--!!

그래도 제국에서 꽤 유명한 기사단이라서인지 검은창 기사단을 상대할 때처럼 금방 끝나지는 않았다. 제법 딜레인들의 검을 막아오는 소리도 들려왔고, 가끔 반격도 해오고 있었다. 그들의 명성이나 두 배에 달하는 숫적 우위를 생각한다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년!!”

그람드는 말 위에서 휘두르는 딜레인의 검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말 위에서 검을 휘두르면 말안장의 높이에 비해 짧은 검의 길이 때문에 공격의 범위가 크게 제한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람드도 그같은 점을 노리고 딜레인의 사각을 노리려 했다. 하지만 딜레인의 실력은 그람드의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엇다.

카캉--!!

캉--!!!

몇 차례 검격이 오가는 동안 그람드는 여러차례 마상의 검수가 갖기 쉬운 사각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의 공격은 모두 딜레인에게 막혀버렸다. 딜레인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움직인 사각조차 딜레인의 빠르고 유연한 공격에 아무 소용없이 그를 위험에 노출시켰다. 

캉--!!

카캉--!!

딜레인의 가는 팔을 보고 힘으로 밀어붙이려는 시도도 해보았지만 딜레인은 그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지 않고 슬쩍슬쩍 흘리며 도리어 그의 자세를 무너뜨리려 했다. 덕분에 그람드는 몇 차례나 생명을 위협받아야 했다.

캉--!

캉--!

싸움이 계솔될수록 그람드는 자신이 상대를 잘못파악했음을 절감해야 했다. 딜레인은 그가 쉽게 상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의 실력은 최소한 레드 플레임의 기사단장 정도는 되어야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등줄기로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그는 자신을 이 자리에 오도록 만든 스스로의 선택을 후회했다. 영주 아들의 꼴같잖은 명령을 기회라 여긴 자신의 어리석음을 저주했다.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이다. 이렇게 생사를 다투는 상황에서라면 더욱더.

“합!”

“헉!!”

챙--!!

딜레인의 검이 그의 공격을 흩뜨리며 위에서 아래로 강하게 베어오자 가는 다급하게 검을 들어 막으려 했다. 하지만 몸 전체를 사용해서 휘두르는 그녀의 검에는 그람드가 상상한 이상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크헛--!!”

검을 막은 것 까지는 좋았지만 몸의 중심이 흐트러졌다. 그리고 그의 자세가 채 가다듬어지기도 전에 아래로 내려갔던 딜레인의 몸이 위로 솟구쳐 올랐다. 그와함께 딜레인의 쭉뻗은 팔이 그람드의 몸을 아래에서 위로 갈라왔다. 

흐트러진 몸의 중심을 바로잡으려는 본능적인 탄력이 실린 딜레인의 검에는 내려치던 것 만큼이나 강하고 빠른 기세가 실려 있었다. 자세가 흐트러진 그람드로서는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서걱--!!!

본능적으로 검을 들어올려 막으려 해보았지만 딜레인의 검이 허공에 기묘한 곡선을 그리면서 날카롭게 뼈를 베는 소리와 함께 그의 머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머리가 잘려진 목에서는 피분수가 솟아올랐다. 

챙강--!!

퉁--!!!

손에 들린 검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구어지면서 그람드의 몸이 자신이 흘린 피 위로 쓰러졌다.

상당히 강한 적이었지만 딜레인은 죽은 적 따위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강한 적이든 약한 적이든 이미 죽은 이상에는 시체에 불과했다. 예의나 적의는 살아있는 사람에게나 필요한 것이지 죽은 시체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죽은 적에게 경의를 표하기보다는 살아있는 적을 쓰러뜨리는 쪽이 좋았다. 그것이 칸피니스의 가르침이었다. 칸피니스의 딸이자 제자인 딜레인은 그 가르침을 충실히 실천했다.

카캉--!!

롯시를 공격해가던 기사 가운데 한 명이 딜레인의 갑작스런 공격을 막아가다 중심을 잃고 자세를 흐트러뜨렸다. 적 기사는 딜레인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딜레인이 이동해온 방향에 누워있는 시체를 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나이...”

카캉--!!

캉--!!

캉---!!

휘릭--!!!

휘릭---!!

그람드의 이름을 외치려는 듯 했지만 딜레인은 그럴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람드를 쓰러뜨렸던 그 강하고 빠른 검격이 쉬지 않고 적 기사를 몰아쳤다. 적 기사는 필사적으로 검격을 막아갔지만 그람드에 비해 실력이 떨어지는데다, 선제공격에 이은 강한 정신적 충격 때문에 제대로 반격조차 해보지 못한 채 그저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캉--!!

카캉--!!!

휘릭--!!

샤라락--!!!

캉--!!

숨을 돌려보려 해도 그럴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공격을 위한 잠시의 여유도 딜레인의 검격이 하나하나 분쇄되어 버렸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동안의 훈련과 본능에 의지해 날아오는 검을 막아가는 것 뿐이었다. 그나마도 곧 그의 호흡이 흐트러지면서 검격을 피해 몸을 날리고 굴리는 것으로 대신해야 했다. 

하지만 그나마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잠시 겨우 버티던 적 기사는 무너진 자세로 딜레인의 공격을 겨우겨우 피하다 결국 딜레인의 검 앞에 자신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말았다.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푹--!!!

딜레인의 검은 움찔거리며 들어올려지는 적 기사의 검을 피해 아름다운 빛의 곡선을 그리며 적 기사의 목으로 파고들었다.

서걱--!!

그녀의 손목이 움직이자 기사의 목으로 파고들었던 검이 살짝 요동치며 목을 몸으로부터 분리시켜 버렸다. 공중으로 떠오른 목은 그대로 땅으로 떨어졌다.

세 명을 상대하다가 두 명으로 부담이 줄어든 롯시는 딜레인의 손에 한 기사의 목이 잘려지는 것을 보며 딜레인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주었다. 딜레인과 같은 폭발적인 힘은 없지만 한결같은 부드러움과 유연함을 갖고 있는 롯시의 검이 비어버린 한 사람의 자리를 헤집으며 다른 두 사람을 핍박해가고 있었다. 그녀의 미소는 상대를 완전히 제압한 데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딜레인은 그녀의 미소를 보자 굳이 롯시를 도와줄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그녀라면 두 명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터였다. 그녀는 롯시 대신 다른 동생들을 돕기 위해 말을 몰아갔다.

가장 나이 어린 펠린이 두 명의 기사에게 둘러싸여 고전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펠린의 나이 14살. 아직은 어린 나이였다. 검술의 기교는 어느정도 수준 이상에 올랐지만 아직 덜 자란 그녀의 몸은 그녀의 기술을 충분히 뒷받침해주지 못했다. 그녀는 칸피니스와 같은 괴물이 아니었기에 신체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두 명의 기사의 파상공격을 쉽사리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펠린!!”

딜레인은 펠린의 이름을 외치며 말을 달렸다. 그녀의 목소리에 펠린의 검격이 빨라졌다. 빨라진 만큼 틈도 커졌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딜레인이 도와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서걱--!!

딜레인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펠린이 노출시킨 허점만을 노리며 달려들던 적 기사의 목이 빠르게 달려온 딜레인의 검에 의해 베어졌다. 너무나도 깨끗하고 빠른 공격이라 방어하거나 피할 틈도 없었다. 

“하앗!!”

적이 하나로 줄어들게 되자 펠린은 검의 기세를 더더욱 높여갔다. 힘은 딸리지만 그녀에게는 유연함이 있었다. 적 기사의 강한 반격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유연함을 한껏 살려 쉴 새 없이 연속공격을 퍼부었다. 

캉--!!

캉---!!

캉캉--!!

카캉--!!

캉--!!

몇 번인지도 모르는 칼부딪힘이 있은 후 한 줄기의 빛이 적 기사의 미간을 향해 날아갔다. 적 기사는 그 빛을 막기 위해 몸을 젖히며 검을 찔러 반격해갔다. 하지만 날아오던 빛은 갑자기 폭포처럼 아래로 떨어지는가 싶더니 제비처럼 하늘로 치솟아오르며 기사의 공격을 차단하고는 곧장 기사의 턱을 향해 아래에서 강하게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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