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30)

한참 오랜만에 만난 칸피니스와의 대화를 즐기던 릴레이나는 그의 눈에 담긴 잔폭한 기운을 느끼자 흥분이 가시는 것을 느꼈다. 칸피니스가 화난 것이다. 자신을 매료시킨 반려의 분노에 릴레이나는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미소는 마족인 그녀가 분노를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무슨 일로 부른거야? 누가 또 화나게 한거야?” 

“아아... 부탁이 있어.” 

“뭔데?” 

“루에나를 도와줘.” 

“디아스루에나를?” 

“루에나는 뱀파이어. 아무리 고위급 뱀파이어라고는 하지만 본질은 뱀파이어이기 때문에 낮에는 그 힘을 모두 발휘할 수 없어. 재수없어서 조금 강한 놈이라도 있으면 위험해질 거야. 네가 가서 도와줘.” 

“흥! 오랜만에 만난 정부에게 다른 애인 도와주라고 부탁하는 거야? 너무해!!” 

“하지만 너밖에는 부탁한 상대가 없으니까. 누가 뱀파이어인 그녀의 위치를 찾아내서 그녀에게 힘을 줄 수 있겠어? 피레샤츠도 그건 무리라구.” 

“흥!! 그대신 오늘바암~~ 응? 알지? 응응?” 

“훗... 밤새도록 상대해주지.” 

“후훗... 약속이다아~~?” 

“그래!” 

“마.족.의.약.속.?” 

“릴레이나도 프리첼시 닮아가나?” 

“뭐?” 

“아니. 혼잣말이야. 알았어. 약속.” 

“그럼 있다봐~~! 하니~~” 

“그래. 있다 보자구.” 

릴레이나를 떠나보내고 주위를 둘러보자 이미 장내는 정리가 끝난 상태였다. 처음 명령했던대로 한 명의 도적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시체가 되어 땅에 누워있었다. 서있는 것은 오직 칸피니스의 딸과 기사들 뿐이었다. 어느새 도적들을 전부 죽이고 달려왔는지 파트리샤가 온몸에 피를 묻힌 채 그녀들의 옆에 같이 서있었다. 

“모두 끝났나?” 

“예!” 

칸피니스의 물음에 절도있는 그녀의 대답이 들려왔다. 칸피니스는 그런 그녀들을 보며 미소를 지어보여주었다. 한바탕 피바람을 일으키고, 목표가 분명해지자 살기가 어느정도 누그러진 것이다. 와르디를 구하는 일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디아스루에나와 릴레이나에게 맡긴 것으로 충분할 것이기에 더 이상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럼 남은 도적은 마차 지붕위에 던져놓고 점심부터 먹자.” 

“예?” 

딸과 기사들의 얼굴표정이 밝아졌다. 장난스런 말투에서 그의 살기가 누그러진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아침도 안먹었잖아. 먼저 점심부터 먹고, 점심 먹고 나면 플로네츠 남작을 찾아가도록 하자.” 

“예, 하지만 와르디는...?” 

“릴레이나가 갔으니까 됐다.” 

“예?” 

“여기서 릴레이나를 상대할 사람이 있나?” 

“아...” 

피레샤츠가 고개를 끄덕이자 모두 납득해버렸다. 딜레인이 여기 모인 인간 가운데 칸피니스 다음으로 강하다지만 섀도우엘프와 비교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 섀도우엘프 피레샤츠가 인정했다. 딜레인이나 다른 사람들도 피레샤츠의 의견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와르디는 플로네츠 남작은 만난 다음에 해결한다. 어차피 큰 위험은 없을거야. 죽일거라면 굳이 납치하지는 않았을테니까.” 

“하지만... 혹시 몹쓸짓이라도 당하면...” 

아무래도 걱정되는 듯 롯시가 끼어들었다. 난폭한 도적들이었다. 죽지 않는다 할지라도 강간과 같은 치욕적인 일을 겪을 수도 있었기에 걱정이 안될 수 없었다. 

“당하면... 뭐가 어때서?” 

“에?” 

“와르디는 내 여자다. 죽지만 않는다면 그 사실은 변함이 없다. 설사 사지가 잘리고 얼굴이 난자당한다 할지라도, 한 번 내 여자로 인정한 이상 그녀는 내 여자다. 그녀는 살아있으면 된다. 나머지는 내가 책임진다. 내가 책임지고 내 여자를 행복하게 만든다. 됐나?” 

“예... 옛! 영주님!” 

롯시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활기차게 대답했다. 칸피니스의 말이 단순히 와르디를 향한 것만은 아님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 말은 롯시와 다른 칸피니스의 여자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롯시는 새삼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알았으면 우선 점심부터 먹고 천천히 출발한다. 롯시가 점심준비를 책임지고 지휘하도록.” 

“옛! 삼촌!” 

영주로서의 칸피니스에게는 오로지 영주님이나 주군이라는 호칭만이 허락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남자로서의 칸피니스였기에 공적인 호칭보다는 가족으로서의 호칭이 더 적절했다. 

“피레샤츠는 저 보기싫은 시체들을 노움을 시켜서 땅에 묻어버려. 밥먹는데 지장 있으니까.” 

“예! 마스터!” 

피레샤츠가 명령에 따라 정령을 부르는 동안 칸피니스의 시선이 파트리샤에게로 향했다. 꽤 극심한 격정을 치렀는지 온몸이 피에 절어있는 그녀는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격전의 피로로 창백해진 그녀의 피부에 묻어있는 피가 매우 선정적이고 매혹적인 매력을 풍겼다. 

“파트리샤!” 

“예! 영주님!” 

파트리샤는 바짝 언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칸피니스가 화내는 모습에 주눅이 들어버린 모양이었다. 하긴 그녀같이 곱게 자란 귀족의 따님이 그런 잔혹하고 냉정한 위압감을 경험해봤을 리 없을테니 쉽게 적응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터였다. 

“너무 굳어있지 말고. 누가 잡아먹으려는 줄 알겠다.” 

“예... 옛!” 

“지금 잡아먹으려 하고 있잖아요?” 

파트리샤가 칸피니스의 미소에 겨우 긴장된 근육을 이완시키려는 순간 펠린이 끼어들었다. 그녀의 장난기어린 웃음을 보며 파트리샤는 얼굴을 붉혀야했다.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너무 딱딱하면 이가 아프거든. 기왕 먹으려면 부드럽고 매끈힌 처녀의 살이 맛있지. 안그래, 파트리샤?” 

“뜨겁고 매끈거리는 보지가 더 맛있겠죠.” 

“주름이 꿈틀거리며 조여오면 더 좋을테고. 

“그지?” 

“저... 저기...” 

“어이, 그만들 놀리라구. 파트리샤가 부끄러워하잖아.” 

빨개진 파트리샤의 얼굴을 보며 칸피니스는 그녀의 어깨를 안아갔다. 근육이 약간 굳어있는 것을 감싸안은 손으로 가볍게 주물러 풀어주었다. 파트리샤는 칸피니스의 손길에 굳어진 근육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쩌릿쩌릿한 쾌감과 함께 뜨거운 열기가 그의 손으로부터 그녀의 몸으로 스며들어 그녀의 근육을 하나하나 이완시키며 다시 긴장시켜갔다. 

“음... 아음...” 

“어때?” 

“조... 좋아...요.” 

“흠... 힘들었나보지?” 

“아... 아뇨.” 

“처음 사람을 죽인 거잖아?” 

“괘... 괜차...” 

“괜찮을 리 없지. 아무리 삼 년간 검술을 배웠다고 하더라도 그전까지는 얌전한 귀족 아가씨였을테니까.” 

“....” 

칸피니스의 말에 파트리샤의 고개가 숙여졌다. 다른 이유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듯, 그녀의 근육이 다시 굳어져오는 것이 칸피니스의 손에 느껴졌다. 

“어쨌든 잘했다. 훌륭했어. 삼 년간 배운 실력치고는 이만하면 훌륭해. 어차피 죽어야 할 도적들이었다. 다만 그 대상이 너였을 뿐이야. 마음에 부담 따위는 가질 필요 없어.” 

“예...” 

“자... 들어가서 아까 하던 거 마저 해야지? 그러고보니 하던 일 중간에 그만둔 것도 그놈들 때문이잖아? 그것만으로도 죽을 이유는 넘치고도 남는 걸? 안그래?” 

“예...” 

“그래. 들어가자.” 

“...” 

칸피니스가 움직이자 파트리샤도 칸피니스에게 몸을 맡긴 채 힘없이 따라왔다. 

“딜레인.” 

“예!” 

“우리 점심은 마차 안으로 들여줘.” 

“나와서 먹어욧!” 

“구경하고 싶은 거야?” 

“응!” 

“파트리샤, 여기서 할까? 엘로나가 저렇게 원하는데.” 

“예... 전...” 

괜찮다고 말하려는 듯 했으니 전혀 괜찮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습기에 찬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칸피니스는 딜레인에게 살짝 눈짓을 해보였다. 

“아아... 한두번 본 것도 아닌데 괜히 봐봐야 열만 받지. 얼른 들어가요. 점심은 있다 마차로 챙겨 넣어줄테니까.” 

“알았다. 들어가자, 파트리샤.” 

“예...” 

“하긴 몰래 엿보는 게 더 재미있긴 하지. 기대해요, 아빠.” 

“삼촌, 저도 봐도 되죠?” 

“영주님.” 

“시꺼! 식사 끝나면 플로네츠 남작 저택으로 바로 출발한다.” 

“쳇! 구두쇠!” 

“약았어!” 

“시꺼! 파트리샤, 가자!” 

“예...” 

칸피니스는 파트리샤를 안고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짧은 시간동안 마음의 정리가 되었는지 목소리는 작았지만 떨림은 남아있지 않았다. 조금은 힘있는 걸음으로 칸피니스의 걸음에 맞추며 파트리샤는 살인으로 인한 혼란과 두려움을 어느정도 떨쳐낼 수 있었다. 

“어? 꼿꼿이 섰잖아?” 

“에? 에...” 

오히려 칸피니스와 가질 섹스의 쾌락에 들뜨기 시작했다. 젖꼭지가 서면서 금고리가 옷 안에서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사타구니도 축축히 젖어왔다. 칸피니스가 예민해진 젖꼭지를 만져오자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을 정도로 짜릿한 쾌감이 느껴졌다. 

“어디어디...” 

“여... 영주님...” 

“음... 젖은건가?” 

“아흑... 흑... 아앗... 영... 영주... 앗...” 

“벗겨보면 알겠지.” 

“아앙... 문좀...” 

“닫을까?” 

“예...” 

“그냥 두지 뭐.” 

“영주님...” 

“아앗...” 

“반응이 빠른데?” 

“아앙... 아아앙... 앗... 앗... 핫... 학...” 

“어이, 딸네미들. 점심 안먹을거냐?” 

“여... 영주님...” 

“쳇... 문이나 닫든가.” 

“맞아, 롯시 언니. 보란 듯이 문 열어놓고서 저 얄밉게 말하는 것 좀 봐.” 

“이 더운날 점식식사 준비하는 딸들에게 구경 좀 시켜주면 어때서.” 

“맞아맞아. 눈요기라도 해야 일하는 보람 있을 거 아냐.” 

“누구네 딸들인지 정말 걱정된다. 꼭 아빠의 좋은 일을 구경해야겠니?” 

“응!” 

“파트리샤, 그렇다는데?” 

“여... 영주님!” 

“파트리샤가 괜찮다니까 계속 봐라. 점심만 늦지 말고.” 

파트리샤의 빨개진 얼굴은 무시한 채 칸피니스는 자신의 딸들을 보며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었고 롯시들도 즐겁게 웃으며 파트리샤를 놀리는 미소를 지어주었다. 레인과 루시는 칸피니스가 노는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롯시와 딜레인들 대신 점심을 먹기 위해 자리를 정비하고 있었다. 

피레샤츠는 언제나와 같은 정겨운 모습에 웃음을 지으면서도 뭔가 빠뜨린 것 같은 허전함을 느꼈다. 그녀는 허전함의 정체를 금방 깨닫고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와르디님의 일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는건가?” 

그녀의 말대로 칸피니스의 일행들은 더 이상 와르디의 안전에 대해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칸피니스에 대한 믿음이었다. 또한 칸피니스가 보낸 디아스루에나와 릴레이나에 대한 믿음이기도 했다. 와르디가 안전할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기에 태연히 무시한 채 웃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피레샤츠도 마찬가지였다. 

“뭐, 디아스루에나님과 릴레이나님이 같이 가셨으니까. 죽지야 않겠지.” 

그녀의 마지막 중얼거림은 칸피니스의 생각이었으며 그 일행 전체의 생각이었다. 피레샤츠는 가볍게 생각을 정리한 후 아직도 놀고 있는 롯시와 딜레인들을 대신해서 레인과 루시를 돕기 시작했다. 자신이라도 돕지 않으면 해가 떨어지고 나서야 점심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식사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롯시와 딜레인들은 칸피니스와 놀고 있었고, 칸피니스 아래에서는 파트리샤가 알몸이 되어 쾌락의 신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아앙... 아앙... 앗... 앗... 하학... 핫... 아앙...” 

“흐흐흐... 괜찮은 물건 하나를 건졌군.”

“그러게 말야. 귀족의 손녀라니... 그것도 아직 건재한 가문의...”

인신매매 길드의 중간간부인 칼로이와 텔만은 갑자기 찾아온 횡재에 입이 찢어질 듯 웃음을 지었다. 귀족출신의 여자는 비쌌다. 그것도 몰락귀족이 아닌 영지와 세력을 지닌 귀족출신이라면 더욱 비쌌다. 하지만 알고 있음에도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었다.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는 그들의 조직이 큰 타격을 입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웃기는 인간이야. 클라인 푸니엘 플로네츠 남작이라던가? 쯧쯧... 사촌의 정부가 되었다는 이유로 자신의 손녀를 인신매매 조직에 팔아넘기다니...”

“가문의 명예라고 하지 않나? 귀족이라는 얘기지.”

“미친... 먹고 살기 힘들어 딸네미를 넘기는 가난한 평민들도 부끄러운 건 안다구. 그런 걸 귀족이라구...”

또다른 중간간부인 모츠가 분개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가 인신매매 길드에 들어오게 된 이유는 어려운 살림 때문에 어려서 팔려간 누이를 찾기 위해서였다. 인신매매 길드에 팔렸으니 인신매매 길드에 들어오면 팔려간 누이의 행방을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인신매매 길드에 투신했었다. 길드의 배려로 누이를 찾아 지금은 같이 살게 되었지만 과거 자신의 누이가 팔려가서 겪어야 했던 과거가 사라질 리 없었다. 당연히 가문의 명예를 위해 친손녀를 팔아넘기는 플로네츠 남작의 행사는 분노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흐흐... 덕분에 귀족여자를 하나 얻지 않았는가? 귀족여자는 엘프 다음으로 비싸다구. 이번에 죽은 30명의 가족들에게 보상금을 지불하고도 길드에 막대한 이익이 떨어질 거란 말야. 덜떨어진 귀족 덕분에 우리만 횡재했지.”

“글쎄말야. 보아하니 정말 미인이더라구. 귀족만 아니라면 그냥... 꿀꺽...”

“아서라 아서... 원래 귀족은 도도한 맛에 사는 거라구. 괜히 건드렸다가 굴욕이라도 느끼면 값을 절반도 못받는단 말야.”

텔만이 뒤에 따라오는 마차를 보며 침을 삼키자 칼로이가 웃으며 그를 말렸다. 하긴 말릴 필요도 없을 것이다. 텔만도 길드의 중간간부였다. 중간간부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였다. 그런 그가 자신의 욕심 때문에 상품에 흠집을 내서 길드에 손해를 끼칠 행동을 할 리 없었다. 

“하긴... 몰락귀족의 딸에 비해 현역귀족의 딸이 몇 배 비싼 이유도 그 건방짐과 도도함 때문이지.”

“크크... 노예로 팔려간 주제에 자신이 노예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거든. 하긴 그게 좋아서 사가는 놈들도 있지만 말야.”

“그런 놈들이 더 많지. 이번에 물건을 사기로 한 귀족놈도 그 도도함을 꺾어야겠다며 손대지 말라고 신신당부 했잖아?”

“중앙의 간부들만 아니었으면 적어도 몇 배의 돈은 더 울궈낼 수 있었은텐데 말야.”

칼로이의 말에 모츠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요구조건이 붙게 된다면 비용도 추가되는 것이 장사의 기본이다. 그런데 중앙간부들이 이번 고객에 대해 배려할 것을 직접 지시해 왔기 때문에 그것이 불가능해졌다. 중앙의 명령이기는 하지만 더 받아낼 수 있었을 돈이 떠오르자 중간간부의 입장에서 크게 아쉬워질 수밖에 없었다.

“글쎄... 보아하니 이쪽으로 경험이 많은 것 같던데? 안그러면 어떻게 중앙간부들이 직접 그의 의뢰를 들어주었겠어?”

“하긴... 우리 일이라는게 주로 귀족을 상대하는 것이니. 귀족이 없으면 인신매매 길드는 창녀나 공급하며 푼돈이나 만졌어야 했을걸?”

“썩을 귀족들 덕분에 우리가 먹고사는 거라 그 말이지.”

“크크... 그건 자네 말이 맞아 텔만.”

“소란을 피우지 않는 것으로 봐서 약발은 제대로 먹힌 모양이군.”

칼루이의 말대로 30여명의 조직원들에게 둘러싸여 움직이는 마차는 조용했다. 두꺼운 나무로 만들어져 내부에서 소란이 있어도 외부로 전해질 리 없었지만, 오랜 경험으로 내부의 작은 변화까지 알아낼 수 있는 칼루이나 다른 중간간부의 눈에도 마차 안은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장사 하루이틀 하나? 내일모레 의뢰인의 성에 도착할 때까지는 깨어나지 않을걸? 그렇지 않나, 모츠?”

“아니, 하루정도 더 자야해. 의뢰인이 글피쯤 성에 도착한다고 했거든. 괜히 그 전에 깨어나봐야 자칫 상품만 상할 수 있어서 약을 조금 더 썼어.”

모츠의 대답에 칼루이와 텔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츠의 말대로 자칫 물건이 일찍 깨어나봐야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면 물건이 손상될 수 있었다. 귀족 특유의 도도함이나 기품이 꺾일 수도 있었고, 그러다보면 물건의 가치가 크게 떨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조금 위험하기는 하지만 물건을 넘기는 그 순간까지 물건이 깨어날 수 없도록 하는 편이 좋았다.

“그런데 위험하지는 않겠나? 자네 솜씨를 못믿는 건 아니지만 사흘이나 재우는 건 좀...”

“?... 칼루이, 모츠의 실력을 의심하는거야? 저 인간이 약을 쓰면 일주일을 자고서도 멀쩡히 일어날 수 있다구. 괜히 중간간부가 아니란 말야.”

“하긴, 모츠의 약쓰는 솜씨는 중앙의 고위간부들도 인정할 정도니까.”

“크크... 잘보여야 한다구. 우리 가운데 중앙의 고위간부로 승진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이 바로 모츠일테니 말야. 언젠가 자네나 나도 모츠의 명령을 들어야 할 날이 올걸?”

“그건 그렇겠지? 모츠라면 아마 몇 년 안에 중앙으로 불려갈게 확실하니까.”

“그럼그럼...”

“이런... 텔만, 칼루이, 너무 추켜세우지 말게. 그러다 떨어지겠어.”

“??... 소심하긴. 자신을 가지라니까. 나중에 중앙에 올라가면 우리나 잘 봐달라구.”

“흐흐흐... 텔만의 말이 맞아. 우리정도의 검술은 쌔고쌨지만 자네같이 약을 잘쓰는 사람은 길드 안에서도 몇 없으니까.”

“하긴 이런 게 매력이긴 하지만 말야. 인신매매 길드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성실하고 겸손한 모습 때문에 조직원들이나 간부들도 모츠 자네를 신뢰하는 것일테지.”

“흐흐... 확실히 인신매매 길드와는 안어울리긴 하지. 오히려 그게 높은 자리에 적합한 자격요건이긴 하지만 말야.”

“아아... 마음껏 갖고 놀고, 놀고 나서 제자리에만 갖다놔주게.”

“갖고 놀았으면 팔아넘겨야지. 왜 제자리에 갖다놔주나? 자네는 아직 인신매매 길드원으로서는 멀었어.”

“하하하하하.... 맞아! 인신매매 길드에 몸을 담고 있다면 갖고 논 사람을 그냥 제자리에 갖다놓아서는 안되지. 모츠 자네가 고위 간부가 될거라는 말 취소네. 평길드원부터 다시 시작해야겠어.”

“맞아! 하하하하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구!!”

“하하하하... 이 사람들이...!!!”

모츠, 칼루이, 텔만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두 쌍의 눈이 길드원들이 호위하고 있는 마차를 노려보고 있었다. 인간의 것이라 할 수 없는 선명한 붉은색 눈동자 한 쌍과 보랏빛이 도는 흰자위 위에 박힌 검은 눈동자 한 쌍이었다. 그 두 쌍의 눈의 주인은 칸피니스의 명령을 받은 디아스루에나와 릴레이나였다.

“루에나, 아무래도 저놈들 뒤에 배후가 있는 것 같지 않아?”

“그렇습니다. 릴레이나님.”

“아무래도 배후까지 알아내서 박살내버리는 것이 좋겠지?”

“예, 칸피니스님도 그러길 바랄 겁니다.”

“당분간 와르디의 몸에 위험은 없을 것 같으니 배후가 드러날 때까지 그냥 놔둬도 괜찮을 것 같아. 이대로 놔두고 저들의 배후를 쫓는 게 낫겠어.”

“제가 저들의 뒤를 쫓겠습니다.”

“그래. 와르디가 위험해지기 전에는 나서지 말고, 칸피니스와 내가 도착할 때까지 감시만 하도록 해. 나는 칸피니스에게 가있을테니까.”

“예. 릴레이나님.”

“그럼 수고하라구.”

“예.”

디아스루에나는 대답과 동시에 다크미스트로 몸을 감싸며 마차의 그림자로 숨어들어갔다. 아무리 낮이라 할지라도 고위급 뱀파이어인 그녀의 움직임을 알아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한여름의 뙤약볕에는 어울리지 않는 한기가 잠시 스치는 것을 이상히 여길 뿐이었다.

여전히 웃으며 떠들고 있는 인신매매 길드의 세 중간간부를 보며 릴레이나는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마족의 잔혹함이 노골적으로 느껴지는 비웃음의 미소였다.

“어리석은 작자들. 몇 푼의 돈 때문에 건드려서는 안될 인간을 건드리다니. 홋... 하긴 칸피니스의 힘은 인간들이 알아채기엔 너무 크지만 말야.”

“나는 그럼 칸피니스가 약속한 보수를 받으러 가보실까? 홋홋홋...”

마족의 권능에 의해 주문 없이 텔레포트가 시전되며 릴레이나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텔레포트의 목적지는 플로네츠 남작이 성. 아마도 지금쯤 칸피니스는 그 성에 도착해 있을 것이었다. 릴레이나는 사타구니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욕망에 들뜬 채, 칸피니스와 황도를 오가며 몇차례 들른 와르디의 성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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