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30)

연재주기가 늦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 백수인 상황이라 다른 돈될 일에 집중할 필요가 있을 것 같거든요. 최대한 연재는 해보겠습니다만 그 간격은 길어질 것 같습니다. 그래도 닷새에 한 번은 연재할테니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는 전제에서요. 마음이 안정되면 그때 성실연재 하겠습니다.

퍽... 퍽... 퍽... 뿌직... 뿌직... 

색마검천황 

“으으음... 으음... 으응...” 

“헉... 헉...” 

마차 안에 때아닌 열풍이 불고 있다. 청명한 8월의 여름하늘. 그렇지 않아 더워 죽겠어서 초목마저 축 늘어져있는 상황에서 마차 안은 오히려 부족하다는 듯 더 뜨거운 열을 내뿜고 있다. 그것도 닿으면 데일 듯한 뜨거운 습기로 가득한 열기로. 

“영주님... 영주님...” 

“으음... 음... 헉...” 

뿌적... 뿌적... 

칸피니스의 일행은 모두 말을 타고 있었다. 그의 조카 롯시와 딸 딜레인, 엘로나, 필린을 비롯해서 기사들도 모두 기사의 제복을 갖추고 말을 타고 가고 있었다. 마차에는 원래 펠란제스백작부인의 딸인 파트리샤만이 타고가려 했었다. 하지만 아침을 먹지 못한 칸피니스의 집념어린 고집으로 성을 나오면서부터 칸피니스도 마차에 동승하고 있었다. 

칸피니스와 한 여자가 같이 마차에 타고 있는 이상 벌어질 일은 너무도 뻔하다. 칸피니스를 아는 자라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 바로 더운 여름날 말타고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더 더워지도록 열을 발산하는 일이다. 

마차 의자에 앉아있는 칸피니스 앞에서 간만에 입은 드레스의 앞부분을 열어 젖가슴을 드러낸 파트리샤가 열심히 허리를 움직이고 잇었다. 위로 풍성하게 들어올려진 치마 아래로 희고 풍만한 그녀의 엉덩이가 보였다. 칸피니스의 크고 검은 손이 그 흰 엉덩이를 붙잡고 그녀의 허리 움직임에 맞추어 위아래로 빠르게 움직여갔다. 움직임에 따라 칸피니스와 파트리샤는 표정을 바꾸며 가쁜 숨과 신음소리를 토해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뜨거운 열기가 마차 안을 더욱 뜨겁게 달구고 마차 밖까지 열기를 뿜어냈다. 

“하항... 항... 아아아앙.... 앙...” 

“헉... 헉헉... 헉... 흐흐... 흐헉...” 

뿌적... 뿌적... 퍽... 퍽... 쩍... 쩍... 

색마검천황 

“쳇... 음란한 아빠 같으니라구. 아침도 못먹어 말 탈 기운도 없다면서 여자 탈 기운은 넘치나 보네.” 

마차의 바로 옆에서 말을 몰던 딜레인이 참지 못하고 한 마디 했다. 벌써 두 시간째 계속 저 소리만 듣고 있으려니 짜증이 난 것이다. 파트리샤도 성에 있으면서 기사훈련을 받았으니 말을 못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괜히 백작부인의 딸이라고 마차를 타고가는 것도 눈꼴 시린데, 칸피니스가 아침 못먹었다는 핑계로 마차 안에 틀어박혀 둘이 두 시간 째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고 있으니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훗... 한 열흘 굶겨놔도 여자 올라탈 기운은 남아있을 분이시니까. 칸피니스 삼촌은.” 

“열흘? 죽기 직전까지 굶겨도 여자 있으면 힘이 넘칠 걸? 아빠를 우습게 보지 말라구.” 

“그럼그럼. 엘로나 언니의 말이 맞아. 정말 존경스러운 아빠 아니겠어?” 

평소 칸피니스를 극진히 따르던 펠린마저 기분이 좋지 않은 듯 말투가 험악해진다. 딜레인은 그녀의 바지 사타구니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연본홍색 기마바지 사타구니가 짙은 색으로 물들어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딜레인은 펠린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녀도 같은 입장이었으니까. 

“쳇. 누구는 마차안에서 뜨겁고... 누구는 말 위에서 햇살에 익어버리고... 아빠라는 인간은 마차 안에서 딸네미뻘 되는 여자랑 뒹구느라 정신없고... 아아... 나는 정말 불행한 딸이야. 저런 아빠의 딸로 태어나다니. 흑...” 

엘로나가 눈물을 닦는 시늉을 하며 연극투의 말투로 불평을 토하자 딜레인이 이를 맞받았다. 교양으로 연극을 배웠던 것을 활용하여 최대한 과장되고 비장미 넘치는 동작과 말투로 마차 안의 칸피니스를 비꼬았다. 

“오오... 엘로나... 가엾은 내 동생... 너의 슬픔이 나의 가슴을 찢는 듯 하구나. 모두 아빠의 탓이다. 모두 아빠의 탓이야. 착하고 아름다운 엘로나로 하여금 이 뜨거운 여름햇살 아래서 이토록 고통스럽게 하다니.” 

“사랑하는 딸 딜레인... 내 사랑하는 딸아. 아빠는 지금 더위에 지친 파트리샤양을 위해 기사로서의 봉사를 하고 있는 중이란다. 딸들의 슬픔에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지만, 아빠는 어디까지나 기사. 레이디에게 봉사해야 하는 의무를 가진 기사란다. 이해해다오. 아름다운 나의 딸 딜레인. 사랑스러운 딸 엘로나. 귀여운 펠린.” 

“오... 아버지... 사랑하는 나의 주인. 나의 보호자이자, 나의 주군. 아버지의 고통을 제가 어찌 그대로 보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다행히 부족하나마 당신의 딸 딜레인도 기사. 딸로서 아버지의 의무를 대신하겠습니다.” 

“딜레인... 나의 사랑하는 딸... 네 마음을 잘 알겠다. 아비를 사랑하는 네 마음이 너무 간절히 와닿는구나. 하지만 이 일은 내가 해야 하는 일. 다른 누구에게 맡길 수 있는 일이 아니란다. 딜레인 네 마음만 고맙게 받으마.” 

“아버지... 존경하는 아버지... 아버지의 마음을 알겠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딸로서, 기사로서, 여자로서, 아버지의 어려움을 어찌 그냥 보고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딸의 호의를 받아주시지요.” 

“괜찮다니까 그러는구나. 딸아.” 

“괜찮... 학... 아요... 학학... 하항... 나이...흐흥... 트... 딜레... 하앙... 인...” 

듣다 못한 파트리샤가 부녀간의 만담에 끼어들었다. 한참 절정에 이르고 있는지 짧게 끊어지는 그녀의 말투는 뜨겁고 끈끈한 욕정에 젖어있었다. 

“레이디 파트리샤. 아무래도 힘드신 것 같습니다. 아버지로는 무리인 듯 하니 제가...” 

“나이트... 하항... 딜레인... 흐흡... 마음은 고맙습니다만........... 항... 괜찮...” 

만담은 딜레인과 파트리샤로 넘어갔다. 조금 전까지 짜증스런 표정을 짓고 있던 엘로나와 펠린, 롯시, 레인, 루사의 표정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어차피 칸피니스가 다른 여자를 안는 일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고, 그런 일로 질투를 느낄 거라면 성에서 살아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녀들이 짜증을 냈던 것은 더운 날 여행이 지루했기 때문이지 칸피니스가 파트리샤와 섹스를 한다는 사실 때문은 아니었다. 

“으으... 흐... 헉...” 

“아앙... 항... 하항... 아아아앙...” 

절정에 이른 듯 칸피니스의 숨소리가 짧게 끊어지기 시작했다. 파트리샤의 신음소리도 칸피니스에 맞추어 좀더 높아지고 단속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쳇...” 

색마검천황 

만담의 재미에 빠져있던 딜레인은 신음소리를 들으며 더 이상 파트리샤가 그녀와의 만담을 즐길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남의 섹스를 구경하는 것은 재미있지만 소리만 듣는 것은 할만한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이미 욕망을 배운 여자라면 더더욱 그랬다. 다시 젖어오기 시작하는 사타구니를 느끼며 딜레인은 앞으로 말을 빨리 몰아갔다. 

“어?” 

말을 몰아 대열의 앞으로 나가던 딜레인은 대열의 한참 앞 숲에서 이상한 빛이 보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칸피니스가 고안한 거울신호. 딜레인은 배운 내용대로 거울신호를 번역하기 시작했다. 

“앞에. 400미터. 마차. 기사. 10명. 습격. 범인. 20명?” 

“딜레인. 무슨 일이에요?” 

“롯시 언니. 피레샤츠로부터 신호가 왔어요.” 

“저도 봤어요. 앞에 누군가가 마차를 습격했다는 신호 말이죠?” 

“네. 영주님께 빨리 알려야겠어요. 이런 외진 곳에 마차를 몰고오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아닐테니까.” 

“예. 딜레인이 영주님께 말씀드리세요. 저는 엘로나와 필렌을 데리고 먼저 가보겠어요.” 

“예. 나이트 롯시. 그럼.”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지금 그들이 통과하고 있는 숲은 흑암의 숲이라 이름지워진 숲이다. 칸피니스가 한때 흑암의 숲을 뒤집어놓았던 덕분에 붉은 갑옷을 입은 그의 기사들은 익숙하게 통과하지만, 델킨피에르 출신이 아닌 자들은 엘프조차도 함부로 들어설 수 없는 곳이 바로 흑암의 숲이었다. 극성맞은 대륙의 상인들마저도 이 흑암의 숲을 꺼려해서 델킨피에르 영지로는 들어가지 않으려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델킨피에르 영지는 흑암의 숲으로 인해 제국의 모든 영지로부터 고립되어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흑암의 숲으로 마차가 접근하고 있었다. 그것도 기사를 대동하고. 귀족이 굳이 위험을 감수할 정도로 델킨피에르 영지에 무슨 큰 이익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슨 이익을 바라고 오는 무리는 아닐 것이 분명했다. 아마도 칸피니스를 만나러 오는 마차일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오늘 칸피니스가 영지를 나서 흑암의 숲을 통과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 수 있는 사람이 틀림없었다. 그런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더구나 기사 10명을 함께 동반할 정도라면. 

“영주님!” 

“뭐냐?” 

언제 정사가 있었느냐는 듯 칸피니스의 냉정한 목소리가 마차 안에서 들려왔다. 조금전까지 마차를 뜨겁게 달구던 정사의 열기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피레샤츠님의 신호입니다.” 

“들어서 알고있다. 와르디겠지?” 

“아마도.” 

와르디라면 근처 플로네츠의 영주 플로네츠 남작의 손녀다. 플로네츠 남작의 딸이 칸피니스의 생모이니 칸피니스의 외사촌이 되는 사이였다. 4년 전 황도에서 마주치기까지 와르디는 자신의 고종사촌인 칸피니스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처음 만난 그날로 와르디는 칸피니스의 정부가 되어버렸다. 색마 칸피니스의 위력이었다. 

처음 외할아버지 플로네츠 남작의 반발은 대단했다. 기사들을 보내 칸피니스를 죽이려 할 정도였다. 하지만 칸피니스가 몰래 보낸 디아스루에나는 그같은 반발을 완벽히 침묵시켰다. 고위급 뱀파이어를 부리는 칸피니스에게 설사 외할아버지라 할지라도 함부로 덤빌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4년간 칸피니스가 황도로 갈 때나, 다시 영지로 귀환할 때, 플로네츠 남작의 묵인하에 와르디는 칸피니스의 정부로서 충실히 그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아마도 오늘도 칸피니스가 수도로 간다는 소식을 프리첼시로부터 듣고, 정부로서 칸피니스를 마중하러 나오던 도중 습격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칸피니스는 전말을 짐작하자 분노했다. 와르디는 그의 여자였다. 그의 여자가 그를 만나러 오다가, 그의 영지 근처에서 습격을 당한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의 여자가, 다른 곳도 아닌 그의 영지에서, 습격을 당해 위험에 빠진 것이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느덧 잔혹한 살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딜레인은 레인, 루사를 이끌고 롯시를 도와 습격한 놈들을 죽여라. 살려두는 것은 한 명으로 족하다. 부상자도 필요없다. 포로도 필요없다.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하고 확실한 방법으로 놈들을 죽여라! 내가 갈 때까지 모든 것을 끝마쳐라!” 

“옛!” 

평소 여자나 밝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잔혹한 오만과 피비린내나는 위압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딜레인은 이미 소드마스터에 이른 자신조차도 두렵게 만드는 칸피니스의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몸을 떨었다. 이것이 그녀의 아버지, 그녀의 스승, 그녀의 군주, 그녀의 남자의 진면목이었다. 

딜레인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칸피니스가 도착할 때까지 끝내라는 명령은 반드시 이행해야 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늦는다면 그 후환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남자로서의 칸피니스는 바보같을 정도로 부드럽지만, 영주로서의 칸피니스는 잔혹한 폭군이었다. 그 형제조차도 잔인하게 죽일 수 있는 폭군이 델킨피에르의 영주이자, 기사인 그의 본질이었다. 

딜레인은 아직 머뭇거리는 레인과 루시를 재촉하며 급히 말을 달렸다. 칸피니스의 명령을 롯시에게 전달해야 했다. 자칫 실수라도 한다면 칸피니스의 분노가 그녀들에게 떨어질 것이기에 조금이라도 서둘러야 했다. 칸피니스가 화났다는 사실을 한시라도 빨리 앞서간 이들에게 전해야 했다. 레인과 루시가 그녀의 마음을 아는 듯 급히 말을 달려 그녀와 보조를 맞춰갔다. 

“루에나!” 

“예! 마스터!” 

딜레인이 말을 달려 사라지자 칸피니스는 디아스루에나를 불렀다. 그녀는 현재 다크미스트로 치명적인 햇빛을 차단한 채 마부역할을 맡아 칸피니스의 마차를 몰고 있었다. 다크미스트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뱀파이어인 이상 낮에는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을 고려한 칸피니스의 배려였다. 

“다크미스트를 넓혀라. 아마 떨거지들이 몇 달려들 것 같다.” 

“예! 마스터!” 

다크미스트는 뱀파이어의 본질의 힘을 활용한 권능이다. 자기 자신을 보호할 정도의 다크미스트만으로도 일반 뱀파이어라면 본질을 잃고 소멸할 정도로 효용성만큼이나 힘의 소모가 막대했다. 아무리 고위급 뱀파이어라지만 다크미스트를 넓혀 사용한다면 디아스루에나에게도 무리가 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같은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디아스루에나는 칸피니스에게 복종했다. 반려이며 주군인 칸피니스의 명령이었기 때문이었다. 

“파트리샤!” 

“예! 영주님!” 

파트리샤는 칸피니스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가 아는 칸피니스는 강하지만 한없이 부드러운 남자였다. 바보같을 정도로 낙천적이었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면서도 상대 여성에게는 더없이 약한 남자였다. 하지만 지금 칸피니스가 보이는 모습은 그런 평소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그의 몸에서 나오는 살기는 모든 것을 파괴할 듯 했다. 그의 분노는 여름의 태양마저도 얼려버릴 듯 차가웠다. 파트리샤는 그런 칸피니스의 모습이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칸피니스의 모습이 전혀 싫지 않았다. 사정의 순간 갑작스레 차갑게 변하는 바람에 절정을 경험하지 못한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그의 강렬한 모습에 그녀는 절정과도 같은 짜릿함을 느꼈다. 그랬다. 그녀는 지금의 영주로서의 칸피니스의 모습에 반해버린 것이었다. 이전과는 다른 감정이었다. 굴복하고 싶고, 복종하고 싶은, 그의 소유가 되어 그의 의지에따라 휘둘리고 싶은 예속의 욕구. 그녀는 자신의 마음속의 변화에 놀랐지만 외면하지 않았다. 칸피니스는 그의 남자이며 주인이었다. 그 사실을 그녀는 순순히, 아니 능동적으로 받아들였다. 

칸피니스는 젖가슴과 엉덩이를 드러낸 채 아직 옷차림도 추스르지 못한 파트리샤를 보며 그녀의 내면의 변화를 감지해냈다. 익숙한 감정의 파동이 그녀에게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프리첼시와 텔로시가 그에게 매료될 때 느꼈던 그것과도 같은 것이었다. 릴레아나가 자신에게 다가설 때 느꼈던 그것과도 같았다. 이 귀여운 귀족의 처녀는 그녀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진심으로 매료되어버린 것이다. 칸피니스는 자신의 새로운 소유물을 미소로서 환영했다. 

“루에나가 적을 발견하면 나가서 죽여라! 드레스 벗어라. 델킨피에르가의 기사로서, 나의 소유물로서, 내 적을 죽여라!” 

“예! 영주님!” 

파트리샤의 반응은 신속했다. 그녀는 급히 자신의 드레스를 벗은 후 마차 의자 밑에 넣어둔 상자에서 자신의 기사제복을 꺼냈다. 델킨피에르 기사단의 정식명칭은 붉은 혜성. 그 이름답게 제복도 붉은 색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짙은 붉은 빛의 풍성한 상의와 타이트하게 달라붙은 연분홍의 바지. 반사광이 최대한 억제된 천의 재질 탓에 화려한 맛은 덜하지만, 칸피니스의 천재적인 디자인이 적용되어 여성이 입을 경우 야성적인 매력을 한껏 끌어낼 수 있었다. 

단순히 외형적으로만 보기 좋은 것이 아니었다. 풍성한 상의는 그 안에 엘프의 미스릴천을 덧대어 일반 강철갑옷을 뛰어넘는 방어력을 지니고 있었다. 바지는 땀과 열의 배출과 통기성이 인간이 만든 천에 비해 몇 배나 뛰어난 섀도우엘프의 비단으로 만들어져 있어 장기간의 전투시에도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 제복 상하의만으로도 최상의 전투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최고의 방어구인 셈이다. 

파트리샤는 붉은 혜성의 기사로서 알몸이 되어 자신의 주군 앞에서 제복을 하나하나 갖추어 입기 시작했다. 풍성한 상의의 소매는 가는 가죽끈으로 나풀거리지 않게 조이도록 되어 있었다. 넓은 허리띠는 상의의 풍성한 단을 허리에 바싹 조여 가는 허리의 선을 강조하는 한편 척추를 단단히 고정시켜주었다. 목은 검은 가죽 기장으로 둘러 바짝 긴장시켰고, 반짝이는 검은 가죽장화가 그녀의 멋진 각선미를 마무리지었다. 마지막으로 검을 허리띠에 걸자 모든 복장이 갖추어졌다. 

“마차 위에 올라가 루에나의 지시를 따라라. 만약 감당할 수 없는 강적이 나타나면 무리하지 말고 내게 알려라. 강한 적에게 무리하게 덤벼들다 다치는 것은 용서하지 않는다.” 

“예! 영주님!” 

“가라!” 

“옛!” 

파트리샤가 마차 위로 올라가는 기척을 느끼며 칸피니스는 눈을 감았다. 자고 있는 듯 보였지만 그의 뇌세포는 이순간 무섭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가 살아오는 동안 보고, 듣고, 느낀 정보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꺼내어진 채 뇌세포가 보내는 신호속으로 녹아들어갔다. 뇌세포는 자신이 흡수한 정보를 다른 뇌세포와 교류하며 하나의 사실을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칸피니스는 자신의 뇌세포들이 전해온 사실을 확인하며 분노의 대상을 확정했다. 확정된 대상에 대한 그의 분노가 이가는 소리와 함께 마차 안으로 폭출되었다. 그의 눈은 더할 수 없이 차갑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경고했다. 분명히 경고했다. 내 여자를 건드린다면 누구라도 가만두지 않는다고. 그런데 경고를 무시하고 이따위 일을 벌여? 훗... 경고를 무시한 댓가를 보여주마.” 

“적입니다! 오른쪽 2시방향! 세 명!” 

“왼쪽 10시 방향! 다섯명!” 

“파트리샤!” 

“옛!” 

성에서 검술을 배운 지 삼 년밖에 되지 않지만 그녀의 스승은 칸피니스와 프리첼시, 텔로시였다. 제국에서 가장 강한 기사와 하이엘프와 다크엘프가 가르쳐준 검술이었다. 왠만한 기사는 그녀에게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하물며 상대는 도적이었다. 실력은 있는 것 같지만 파트리샤라면 아무 걱정없이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 칸피니스는 파트리샤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적에 대한 모든 신경을 끊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번 사건을 벌인 원흉에 대한 응징이었다. 

“훗. 재미있군. 재미있어. 몇 년 사이에 간덩이가 부어버린 모양이야. 내 경고를 무시하다니. 역시 사람은 사흘에 한 번씩 몸으로 힘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줄 필요가 있어. 안그러면 기어오르거든? 훗훗... 재미있어. 아주 재미있어. 내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였단 말이지? 감히 내 여자를 건드리다니 말야. 훗훗...” 

살기에서 느껴지는 한기에 디아스루에나는 자신도 모르게 움찍 몸을 움츠렸다. 고위급 뱀파이어인 그녀였지만 칸피니스의 살기는 그녀조차도 두렵게 만들었다. 디아스루에나는 뱀파이어답지 않게 그의 살기의 대상이 되어버린 인간을 동정했다. 도대체 어떤 인간이 저 인간같지 않은 인간의 성미를 건드렸는지 새삼 걱정이 되는 디아스루에나였다. 물론 걱정만 할 뿐이었다. 인간 따위를 위해 마스터의 분노를 거스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어찌되었든 인간은 그녀에게 있어 먹이에 불과했으니까. 

마차가 습격장소에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15분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충분한 시간이었다. 마차가 도착하고 칸피니스가 마차에서 내렸을 때 모든 상황은 끝나있었으니까. 아직 파트리샤가 뒤쪽에서 도적들의 경계조와 싸우고는 있었지만 그쪽도 얼마 안있어 정리될 터였다. 

덜컥- 

롯시가 문을 열어주자 칸피니스는 몸을 일으켜 마차에서 내려섰다. 2미터 20센티. 인간이라기보다는 오거에 가까운 거대한 체구였다. 한참을 올려다봐야 하는 그의 얼굴은 잘생겼다기보다는 야성적이었다. 한 번 본 사람이라면 잊을 수 없는 강인함이 느껴지는 외모였다. 하지만 이 모든 특성들도 그의 눈 하나보다 인상적이지는 못했다. 잔폭함, 인간의 것이라 여겨지지 않은 북해의 얼음이 불타오르는 듯한 그 잔폭함에 주위의 모든 것들이 얼어붙었다. 심지어 뱀파이어인 디아스루에나조차도 그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움찔 뒤로 물러설 정도였다. 

“책임자가 누구냐?” 

목소리는 나직했다. 나직했지만 모든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낮은 울림을 동반한 듣기좋은 허스키보이스였지만 그 안에는 그의 눈동자에서 느낀것과 같은 잔폭한 위압감이 내포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짧은 한마디에 공포를 느끼며 몸을 떨었다. 멀쩡한 것은 그의 이같은 모습에 익숙한 델킨피에르의 기사들 뿐이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퍽--!!! 

겨우 두려움을 이기고 한 기사가 나서보지만 칸피니스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그를 손등으로 날려버렸다. 고작 손등이었지만 인간같지 않은 힘때문인지 훈련으로 단련된 기사는 그 자리에서 핑그르 돌며 무너져내렸다. 

“책임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지금 무슨...?” 

그의 난폭한 모습에 검을 뽑으려던 기사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목이 잘렸다. 어느새 칸피니스의 손에는 바스타드 소드가 들려있었다. 사람을 죽인 사람의 모습같지 않은 단정하고 냉정한 그의 손에 들린 바스타드소드에는 워낙 빠른 검놀림 때문이었는지 한방울의 피도 묻어있지 않았다. 

“마지막이다. 책임자가 누구냐?” 

“뭐하는...” 

“그만!! 자작...” 

푸학--!!! 

한 사람이 반발하듯 나서는 것을 뒤에 서있던 기사가 말리려 했을 때는 이미 나서려던 기사의 몸이 목을 잃은 채 무너지고 있었다. 뒤늦게 말리던 기사는 공포와 분노가 뒤섞은 표정을 지으며 동료의 몸이 피웅덩이 위로 쓰러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죄... 죄송합니다. 자작님. 제가... 기사들의 선임을 맡고 있는 기사 벤자민 트라울르입니다. 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나이트 벤자민인가? 오랜만이군.” 

“기... 기억해주셔서... 가... 감사합니다!” 

벤자민 트라울르의 얼굴에서 분노는 급속히 사라졌다. 그는 칸피니스의 진면목을 알고 있는 몇 안되는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다. 칸피니스는 벤자민 따위가 분노의 감정을 가질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설사 제국의 황제라 할지라도 그의 앞에서는 분노를 가져서는 안되었다. 그같은 사실을 잘 알았기에 벤자민은 모든 감정을 최대한 죽이고, 비굴할 정도로 정중한 태도로 칸피니스를 대했다. 

하지만 벤자민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칸피니스의 대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누구까지 알고 있나?” 

“예?” 

갑작스러운 질문에 벤자민은 당혹스러웠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물론 그가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답을 말할 수는 없었다. 자칫 그 자신은 물론이고 주군인 남작도 위험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최대한 잡아떼기로 결심했다. 

“누구까지 알고 있냐고 물었다!” 

“무슨...?” 

“내가 더 묻기를 바라나?” 

“무슨 말씀이신지...” 

“와르디는 지금 어디있나?” 

“와르디 아가씨는 지금...” 

“누가 그녀를 쫓아갔지?” 

“그게...” 

“너희는 남아서 무얼 하고 있었던 건가?” 

“도적들의 습격을 받아...” 

“훗!! 다시 묻겠다. 누구까지 알고 있지?” 

“저기... 그게... 무슨...?” 

이미 힌트를 주었음에도 끝까지 잡아떼려는 벤자민의 모습에 칸피니스의 인상이 굳어졌다. 

“안되겠군. 딜레인!” 

“옛! 영주님!” 

“다 죽여라! 남작에게 직접 묻겠다!” 

“옛!” 

칸피니스는 더 이상의 물음이 필요없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이번 일에 가담한 이상 그에게 죽을 놈들이었다. 그의 결정은 간결하고 단호했다. 어차피 죽일 놈들이라면 그냥 죽여버리고 진상은 주모자인 플로네츠 남작에게 들으면 되는 일이었다. 

“자... 자작... 크악!!” 

딜레인의 행동은 신속했다. 딜레인이 움직이자 롯시와 엘로나, 펠린도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벤자민을 시작으로 플로네츠가의 기사들이 하나둘 목숨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피레샤츠!!” 

“예! 마스터!” 

“도망가는 놈들을 모두 죽여라! 한 놈도 살려둘 필요없다!” 

“예! 마스터!” 

기회를 봐서 도망가려는 자들도 칸피니스의 명령에 의해 그 퇴로가 봉쇄되었다. 숲에서는 하이엘프보다 강하다는 피레샤츠의 화살이 급히 몸을 빼려는 자들의 몸에 박히며 그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루에나!” 

“옛! 마스터!” 

“와르디의 행방을 쫓아라! 와르디의 곁에 있는 자는 모조리 죽여라! 한 놈도 살려둘 필요 없다!” 

“예!” 

“가라!” 

“예!” 

디아스루에나는 명령이 떨어지자 급히 자신의 몸을 검은안개로 바꾸어 바람에 실어 날리기 시작했다. 비록 낮에는 피레샤츠만큼 빠르지 못했지만 그녀는 피냄새를 추적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칸피니스의 모든 여자들의 피냄새를 기억하고 있는 그녀만이 조금은 이동속도가 늦더라도 정확히 와르디를 찾을 수 있을 터였다. 

“릴레이나!” 

칸피니스가 이름을 부르자 그의 반지에서 황금빛이 뿜어지더니 공중에 검은 그림자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마법진 한가운데서 보라색 눈을 가진 흰 피부를 지닌 여성체 마족이 나타났다. 발밑에까지 끌릴 정도로 길게 기른 검은 머리와 몸에 달라붙는 검은 드레스가 묘한 매력을 풍기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릴레이나였다. 

릴레이나는 마법진을 나서며 흥분된 눈으로 주위를 살피더니 칸피니스를 발견하자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뛰어들 듯 안겨왔다. 

“칸피니스!” 

“릴레이나! 오랜만이야.” 

“칸피니스... 칸피니스... 너무했어. 그동안 불러주지도 않구...” 

“하하하... 그럴 사정이...” 

“쳇... 3000살이나 먹은 늙다리 하이엘프 때문이구나?” 

“늙다리 하이엘프? 프리첼시를 말하는 거야?” 

“흥! 프리첼시가 아니면? 누가 감히 칸피니스와 나 사이를 방해할 수 있겠어?” 

“훗... 하긴... 프리첼시가 릴레이나를 싫어하기는 하지.” 

“흥!! 프리첼시가 날 싫어하는 게 아니라 릴레이나가 프리첼시를 싫어하는거야. 프리첼시는 이 고위마족 릴레이나님을 두려워하는 거고.” 

“프리첼시에게 전해주지.” 

“흥! 전해줘도 상관없어! 이번 기회에 승부를 내고 말테니까.” 

“언제쯤이나 프리첼시와 사이가 좋아질까?” 

“하이엘프와 마족이? 헷... 칸피니스도 농담이 늘었구나.” 

“안되나? 뭐 그럼 할 수 없는거고.” 

“홋홋... 칸피니스 때문에 프리첼시를 죽이지 않고 있잖아. 그것만으로 만족해.” 

“하긴 덕분에 릴레이나와는 이렇게 외도의 스릴을 느끼며 즐길 수 있는거니까.” 

“어머어머... 그럼 나 칸피니스의 숨겨둔 정부인거야?”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꺄아... 꺄... 멋지다아~~!!” 

“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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