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기발랄 > 그 후의 이야기 3 그 후의 이야기 3
그 날 이후로 우리는 연인이 됐다.
별다른 프로포즈도 없었다. 그저 서로가 서로를 생각한다는 마음을 확인했을 뿐. 굳이 거창한 고백이 아니더라도 상대의 마음을 확인했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정소연도 이미 사귀는 사이라고 생각한 모양인지, 예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애정행각을 벌인다. 매일매일 집으로 쳐들어오는건 이젠 당연한 일이고, 가끔은 집에 안가고 그냥 내 방에서 자고 가기도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에도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멍하니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그 모습은 흡사 고양이를 보는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내 얼굴을 쳐다보던 정소연은 가끔씩 요상한 말을 한다.
"오빠."
"응?"
"잘생겼다구요."
"...내 얼굴보고 그렇게 좋아하는거냐."
"에이, 설마요. 아는 오빠들중에 을이오빠보다 더 잘생긴 사람도 있는데요?"
......
일전에 몇 번 말한적 있는가 모르겠는데, 난 꽤나 얼굴이 먹어주는 타입이다. 여기에 말빨도 되는 편이라 그동안 그렇게 여자 후리고 다닌거지. 솔직히 내가 작정하고 들이대면 안넘어오는 여자 없다. 뭐? 재수없다고? 근데 어쩌랴. 사실인데.
그런데 지금 살짝 심기가 불편해졌다. 물론 내 얼굴보고 반한게 아니라는 말이 존심상한게 아니다. 이렇게 가끔씩 정소연이 내뱉는 '아는 오빠들'이라는 사람들이 은근히 신경쓰인다. 은근히가 뭐야? 상당히 거슬린다.
"흐응... 오빠? 표정이 왜그래요? 설마 질투?"
표정이 대놓고 드러났었나? 아니지. 정소연이라면 내 얼굴에 스쳐가는 찰나의 표정이라도 잡아낼꺼다. 무서운 계집이니까.
근데 이걸 질투라고 하긴 그렇지 않나? 이젠 내 여자가 된 정소연이 그 '아는 오빠들'을 언급한다는게 거슬릴 뿐인데. 게다가 그 아는 오빠라는게 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잖아? 그 아는 오빠란 새끼들은 모르긴 몰라도 정소연을 몇 번이고 따먹었을꺼 아니냐고.
물론 지금의 정소연이라면 나 이외의 남자에게 다리를 벌리진 않겠지. 게다가 저 사람 놀리는 듯한 여우같은 표정을 보니 대놓고 날 떠볼려고 말한게 틀림없다. 그런데도 이렇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듯한 감정이라니... 아닌게 아니라 이게 질투 맞는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지금은 이 발칙한 꼬맹이한테 어른의 여유를 보여주는것이 우선이다.
"당연한거 아냐? 나보다 잘생긴 사람이 없을수가 없지. 뭐 그런거가지고 질투냐? 풉."
"......"
정소연의 표정이 뾰로통해졌다. 요시!
입술을 오물거리던 정소연이 이내 눈을 내리깔며 한숨을 쉬듯 말했다.
"그래요... 내가 딴 오빠들이랑 뭘 하고 다녀도 질투도 안한단 말이죠? 후우..."
"...아니, 그건 아닌데..."
나도 모르게 조건반사적으로 대꾸해버렸다. 당했다 라는 생각과 정소연의 회심의 미소가 교차하는 순간이다.
"히히. 거봐요. 역시 질투하면서. 오빠 왜이렇게 귀여워요? 푸훕."
"......"
이왕 이렇게 된거 물어나 보자. 솔직히 존나게 신경쓰인다.
"흠흠, 그건 그렇고. 그 아는 오빠들 말인데..."
"네?"
"요즘도 만나고 다녀?"
요즘도 만나고 다니냐는 물음은 꽤나 함축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정소연이라면 알아듣겠지?
"걱정 말아요. 나 요즘은 오빠하고만 떡치니까요. 쿡쿡."
뭐가 재밌는지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큭큭 웃는 정소연의 모습에 일단 안도의 한숨을 쉬어본다. 역시 내가 물어본걸 정확히 알아들었군.
너무 속보이는 질문이었나 하면서 머슥해있을 무렵, 또 한가지의 의문이 떠올랐다.
요즘은 나하고만 한다고?
"그... 걔는 요즘 안만나? 입대준비 한다던..."
잠시 잊고 있었다. 정소연에겐 남친이 있었잖아?
그러고보니 난 그녀석이 있었다는 것도 까먹고 이렇게 정소연이랑 연인 기분을 내고 있었나?
정소연은 입을 다물었다. 실제로는 채 3초도 안될 짧은 침묵이었지만, 어째서인지 그 정적이 굉장히 길게 느껴진다.
"...만나요."
* * *
"야, 천천히 마셔."
방금 하나가 뭐라고 말한것 같은데. 아, 천천히 마시라고?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오징어다리를 집어 질겅질겅 씹으면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한 잔 하자고 하더니 지 혼자 병나발을 부네 아주그냥."
살짝 답답하다는 듯한 하나의 목소리. 그제서야 난 고개를 들어 하나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짜식, 역시 나닮아서 예쁘긴 하네.
정소연이 집으로 돌아가고, 방에 우두커니 앉아있던 난 결국 하나의 방으로 쳐들어갔다. 냉장고에 있던 술이란 술은 죄다 꺼내서. 뭔가 기분이 답답하기도 하고 드럽기도 하고 짜증나기도 해서 누군가에게 털어놓지 않고는 못버틸것 같았거든.
그래서 하나를 붙잡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다 털어놓고는 홀로 술잔을 비우고 있는 중이다. 사실 하나는 술 잘 못마신다.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하나가 그 시선을 자기 아래에 놓여있는 술잔으로 옮기더니, 어렵사리 손을 가져가서 원샷을 해버렸다. 표정이 참 볼만하다.
"후아... 그래서, 소연이 걔가 남친이 있는 상태에서 널 만나는게 불만이라고? 그럼 헤어져."
"......"
"...이 등신아. 그런건 사귀기 전에 정확히 했어야지. 어? 아니 뒤늦게 알았다고 치자. 왜 그자리에서 걔한테 말 못하고 이렇게 나한테 지랄이야. 앙?"
사실 나도 그게 답답하다. 정소연이 그 남친도 같이 만난다고 말했을 때에는 그냥 넘어가놓고, 정소연이 돌아가니까 그제서야 이렇게 열폭이라니?
"뭐어... 그동안 니가 했던 짓이 있으니까, 딴에는 걔한테 그런거 꼬치꼬치 캐물을 입장이 아니라는 생각이라도 했어? 하~ 어쩌다 우리 을이가 이렇게 맘이 약해지셨을까잉?"
"......"
"근데, 어? 그런거 다 털어버리고 둘이 새롭게 시작하기로 했으면 말이야, 더이상 예전같은 일 안일어나게 하기 위해서라도 불신같은건 쌓으면 안된다고? 너는 그냥 신경안쓸려는 척 넘어가려고 해도 언젠간 이거때문에 펑~ 하고 폭발한다? 이건 니가 더 잘 알고 있는거 아니였어?"
...서로에 대한 불신같은건 쌓으면 안된다라... 말이야 참 쉽지.
정확히 말하면 지금 난 정소연에게 불신을 가지고 있는게 아니다. 나를 향한 그 마음이 거짓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는다. 지금 이렇게 연인으로써 지내는 것이 한낱 사랑놀음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 마음은 분명 진심이다.
정소연의 남친이라는 녀석은 학창시절부터 정소연을 지탱해준 정신적인 지주였다. 정소연이 나때문에 모든것을 버렸을 때에도 단 하나 버리지 못한것이 바로 그 남친이였으니까.
내가 불안해하는 것은 바로 저것이다.
나에 대한 마음이 진심인 것처럼, 녀석을 향한 마음도 진심이라면?
"그-러-니-까, 둘 중 누군지 확실하게 물어보란 말야. 등신같이 당한지 얼마나 됐다고 또 호구노릇 할꺼야?"
...저건 갈수록 혀가 꼬부라지고 있네. 이제 한 두세잔 마신거 같은데.
하지만 확실히 일리있는 말이다.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몇 남자가 대치한 상황이 불과 몇개월 전의 일이다. 그런 상황이 지금 똑같이 재현되려 한다. 다시는 그런 병신짓을 할 수는 없다.
조금은 미안하다는 생각을 했다. 멀쩡히 잘 사귀어오던 그 둘 사이에 내가 끼어버린 꼴이니까. 그래서 만약 정소연이 녀석을 선택한다면... 아니, 지금처럼 둘 다를 만나는 상황이 지속되기라도 한다면... 아마 내쪽에서 먼저 물러나줘야 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었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생각이 바뀌었다.
사랑에 권리는 없다. 녀석은 단지 나보다 정소연을 일찍 만난것일 뿐.
그것 뿐이다.
생각이 정리되자 거짓말처럼 답답한 기분이 사라졌다.
머릿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 마치 누가 내 머리통을 열고 뚜러뻥을 콸콸 들이부운것 같다. 하나가 그랬나?
말없이 하나를 바라보고 있자, 이리저리 머리를 돌려대던 하나도 내 눈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흠... 술에 취해서 그런지 평소보다도 더 예쁘게 보인다.
"야, 하나야."
"엉?"
"넌 왜 애인 안만드냐?"
"필요없으니까."
"왜 필요가 없어?"
"애인 있거든."
"뭐야. 방금 없다며?"
"......"
막힘없이 술술 대답하던 하나가 입을 다물었다. 자기도 지가 한 말이 이상하다는걸 느꼈나? 또다시 머리를 휘적거리던 하나가 나를 쳐다보며 베시시 웃는다.
"나 잘래."
"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나도 내방으로 건너가야겠다."
술병과 안주거리들을 봉지에 쓸어담고 대충 정리했다. 손 하나 까딱 안하고 내가 치우는걸 지켜보던 하나는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재워줘."
"......"
"너때문에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 마셔가지고 머리아프단 말야. 그러니까 재워주고 가. 빨리~"
하나가 땡깡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게 어딜봐서 누나냐 진짜.
"...알았으니까 양치하고 와. 씻고 자야할꺼 아냐."
"응."
고개를 끄덕거린 하나가 비틀비틀 일어나서는 벽을 짚으며 문 밖으로 사라졌다. 몸만 어른이지 완전 애나 다름없구만.
...그렇게 하나를 침대에 눕혀놓고 잠들 때까지 옆에있던 나는 급기야 같이 자자고 때를 쓰는 하나의 말에 결국 한 이불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아마 지금은 취해서 나한테 땡깡을 부리겠지만, 내일 일어나면 왜 자기랑 같이 자고있냐고 지랄을 하겠지? 뭐, 그래도 오늘 하루는 봐준다. 이렇게 생겨먹었어도 누나는 누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