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41)

색기발랄 > 그 후의 이야기 1 그 후의 이야기 1 

계절이 바뀌었다.

제법 선선하구나 하고 생각하던 바람이 어느새 날카롭게 바뀌어 내 몸을 유린하고, 그렇게 분탕질을 치던 바람도 한 풀 꺽여 이제는 봄내음을 물씬 풍기는 녀석이 됐다.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과연 같은녀석이었나 생각할 정도로 제멋대로다. 왠지...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다.

그 일은 지금까지 얼마 살아오지 않은 나로써도 과연 생애 최고, 최악의 사건이었다 할 정도의 일이었다. 며칠간은 잠도 못자고 먹지도 못해서 한밤중에 실려가기도 했다. 물론 구급차를 부른건 하나였다. 눈에 띄게 수척해지고 말라가는 나를 언제나 예의주시하고 있었단다. 아마 하나가 아니었으면 지금쯤 나는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하나도 그 사건에 대한 전말을 알게 됐다. 담담하게 내 이야기를 듣던 하나는 딱히 누군가를 두둔하지도, 질책하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들어주기만 했을 뿐. 그리고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어느샌가 눈물을 흘리고 있던 나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진 않았지만... 왠지 그 침묵이 위로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하나의 가슴은 이렇게나 말랑말랑했구나 하는 생각도 들더라.

그 이후로 나와 하나의 사이가 더욱 돈독해진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제법 누나흉내를 내면서(정말로 누나지만) 예전보다도 더욱 나를 챙겨주었고, 언제나 툴툴거리거나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하던 나도 조금은 하나를 누나로써 대접해 주었다. 다른 가정이었다면 평범한 일상이었을 이 소소한 것들이 조금씩 나를 치유하고 있었다.

하나는 하루가 멀다하고 집에 남자를 끌어들이던 것도 그만뒀다. 아마 그러한 모습에 내가 예전 일을 떠올릴까봐 그런 것이겠지. 정말로 지극정성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서였을까, 집으로 찾아온 정소연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은 예전과는 다른... 매우 차가운 눈빛이었다.

"...무슨 일로?"

"을이오빠 보러 왔어요."

"......"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내가 모든 것을 털어놓을 당시의 하나는 딱히 누구를 욕하지도 않고 그저 묵묵히 듣기만 했을 뿐인데. 역시 마음 속으로는 누군가를 강하게 비난하고 있었던 걸까? 그리고 그 대상은 정소연이었나?

하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정소연을 집으로 들이겠냐는 무언의 물음이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젓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으로써는 그 누구라고 해도 만나고 싶지 않다. 하물며 정소연이잖아?

* * *

"......"

과연 정소연의 집착은 어디 안갔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정소연은 매번 집으로 찾아와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한 정소연을 매번 마주해야 하는 하나의 얼굴도 날이 갈수록 안좋게 변했다.

"너 뭐하는 애야? 오지 말라는 말 못들었어?"

하나의 언성이 높아졌다. 평소의 하나라면 생각치도 못할 반응이다. 언제나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흐물흐물 기어다니는 노라이퍼의 표본이 하나인데.

정소연은 표정하나 바뀌지 않고 말했다.

"미안해요. 하지만 난 언니를 보러온게 아니라 을이오빠를 보러 온거에요. 집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좋아요. 오빠만 만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그렇게 말한 정소연은 슬쩍 고개를 틀어 내 쪽을 바라보았다. 거실 쇼파에 앉아있던 나는 그 시선에 일순간이나마 몸이 굳어버렸다.

"......"

하나는 아무 말없이 정소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당돌한 꼬맹이의 기세에 눌려버린 걸까? 아니면 열받아서 부글부글하는 중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하나는 몸을 비켜서며 정소연을 향해 말했다.

"들어와."

하나는 나의 모든 생각을 부정하고 정소연을 집으로 들였다. 무슨 생각이지?

정작 집으로 들어온 정소연도 하나의 이같은 반응에 조금은 얼떨떨한 표정이다.

주방으로 들어가려던 하나가 고개를 슬쩍 돌려 내 쪽을 향했다.

"둘이 방에 올라가 있어. 마실꺼나 가져다 줄께."

* * *

결국 정소연은 무사히 내 방으로 입성했다. 서로의 앞에는 하나가 가져다 준 오렌지쥬스가 놓여있다. 물론 하나는 여기에 없다.

"......"

아마도 하나는 내가 스스로 해결할 것을 바란 모양이다. 계속 문전박대 해봐야 정소연 성격에 안올리도 없고, 그럴 바에야 차라리 내 선에서 깔끔하게 끝내라는 의미일 것이다. 사실 처음부터 이렇게 했어야 옳은 일이긴 했다.

그 일 이후로 정소연을 제대로 마주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집에서 틀어박혀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식음전폐를 하다가 병원에 실려가서 입원하는 등의 헤프닝이 있었으니까. 계절도 하나 지나갔으니 한 몇개월만에 다시 만난것 같다.

"......"

시간의 힘은 참으로 위대하다.

그런 일을 겪고 나서도 정소연의 얼굴을 마주하며 '몇개월만에 보네' 따위의 생각을 하게 만드니까. 그 때의 정소연은 성현아에게 가려던 나를 전기충격기로 마비시키고 그 위에 올라타며 베실베실 웃던, 그야말로 악마같은 계집이었다. 나에게 한 짓을 생각해보면 결코 이런 분위기는 연출할 수 없을 터인데.

"보고싶었어요."

"......"

"오빠는 나 보고싶지 않았어요?"

"......"

할 말이 없다.

말없이 바라보고 있자, 정소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닌가' 하고 중얼거렸다.

"오빠를 못 본 몇개월동안 나도 참 힘들었어요. 일단 오빠 못보는게 제일 힘들었구요. 당연한거지만."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 정소연은 뭐가 재미있는지 얼굴에 슬쩍 미소를 띄웠다.

"오빠가 입원했다는것도 모르고 매일같이 찾아왔었어요. 나 바보같죠? 집에 아무도 없으니 초인종 눌러도 반응도 없고. 전화해봐야 꺼져있고. 얼마나 답답했는지 상상이 가요?"

...지 답답한 것만 생각하고 내가 받았던 충격은 하나도 생각 안하는 건가. 역시 명불허전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일일히 태클걸기도 귀찮다.

"이사라도 간 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쪽으로 아는 오빠들한테 도움좀 받았어요. 그래서 오빠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까지 알게 됐죠. 그래서 퇴원할때까지 오빠 생각하면서 참는게 제일 힘들었어요. 병원에 찾아가봐야 오빠랑 섹스는 못하니까."

역시 이 계집의 머릿속엔 저것밖에 없는건가... 이젠 별로 놀랍지도 않다.

"...그렇게 하고싶으면 딴새끼들이랑 좀 쳐대지 그랬냐."

무심코 던진 말에 정소연은 피식 웃었다.

"어, 음... 솔직히 하는 말인데요. 을이오빠 없을동안 다른 남자랑 할 뻔한 적은 있었거든요. 아까 을이오빠 찾는거 도와준 오빠들이랑도 할 뻔했고... 그치만 오빠 생각하면서 겨우 막았어요. 대단하지 않아요?"

"......"

그래, 대단한년 납셨다. 기회만 되면 누가 됐든 떡치고 보는 누구랑은 확실히 틀리긴 하네. 그래서 몇개월동안 거미줄치고 있었으니 칭찬해달라는 거냐.

가만, 그러고보니 한 명은 있잖아? 합법적(?)으로 정소연을 따먹을 수 있는 남자가.

"니 남친은 국끓여먹었냐? 걔는 왜 안써?"

"......"

일순간 정소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뭐지? 깨졌나?

"걔는... 음..."

주저하는 정소연의 모습이 왠지 낯설다. 한참동안 말문을 열지 못하던 정소연은 얼마 후에야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곧 군대갈 준비로 바빠서요... 별로 날 만나주지 않네요. 히히."

* * *

정소연이 돌아갔다.

그 이후로도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지만, 별로 영양가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한동안 풀이 죽어있던 정소연은 그래도 마지막엔 '오빠랑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서 꿈만같다'며 좋아했다.

사실 나도 이렇게 정소연과 아무렇지도 않은 대화를 나누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때의 심정이라면 아마 다시는 보고싶지 않았을 사람 중 한명이었을 텐데. 어쩌다보니 이렇게 이야기도 나누고 다음을 기약하기까지 했다. 나란 놈은 정말 물러터진 녀석인 건가? 아마 성현아나 박우리가 내 앞에 나타나도 난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을 대할까?

......

쓸때없는 잡담만 늘어놓다 보니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그 때의 일에 대해서 확실한 매듭을 지을 필요가 있었는데. 오늘은 어떻게 잡담만 하고 돌아갔지만, 내 머릿속에 그 때의 정소연의 이미지가 남아있는 한 이것도 머지않아 깨지게 된다. 이왕 물꼬가 텄으니 그 때의 일을 제대로 마무리짓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한다던가, 아니면 예전처럼 지낸다던가. 이렇게 스리슬쩍 넘어가 없었던 일인 것처럼 지낸다면... 분명 나중이 되면 크게 터진다. 난 그것을 아주 뼈저리게 배웠다.

"이야기는 잘 됐어?"

방 문을 열고 들어온 하나가 쟁반에 오렌지쥬스를 올려놓으며 말을 걸었다. 참... 요즘 맨날 보는 광경인데도 적응이 안된단 말이지. 저 하나가 누구 찾아왔다고 음료도 내오고 치우다니.

"뭐 그냥... 잡담만 했네."

"후움..."

주위를 둘러보던 하나는 이윽고 뭔가 냄새를 맡는 시늉을 하더니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인가 보네."

"...변태같이 냄새맡지 말라고."

아마 하나는 내 방에서 정액냄새가 안나니까 그제서야 아무일 없었다는걸 믿는 눈치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역시 하나는 하나구나. 저 변태성격은 어디 안 간다.

"그래도 모처럼 올려보냈는데 뭐가 됐든 확실하게 끝냈어야지. 그 야들야들한 애를 그냥 돌려보냈어? 천하의 박을이도 한물 갔네."

"......"

"푸훕. 목욕물 받아놨으니까 씻어. 사실 지금 쯤이면 끈적할줄 알고 받아놨더니. 에잉."

그렇게 말한 하나는 살풋 웃으며 바깥으로 총총 사라졌다. 젠장, 하나가 저렇게 말하니 은근 자존심 상하네. 지금 생각해보니 왜 정소연을 그대로 돌려보냈을까? 분명 그 계집도 하고 싶어서 난리였었는데.

...모르겠다. 내일 또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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