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기발랄 > 외전 - 정소연, 그리고 윤소정 中 외전 - 정소연, 그리고 윤소정 中
외전 - 정소연, 그리고 윤소정 中
통성명을 하고 나서도 꽤나 오랜 시간을 이 박을이라는 남자와 함께 보냈다.
내 몸을 노리고 접근한게 분명한데, 다른 남자들과는 다르게 그것을 표출하지는 않는다. 왠지 능글맞게 보이기도 하는 저 표정이 싫은 듯 하면서도 뭔가 끌린다. 말도 굉장히 재밌게 한다. 뻔한 말인데도 뭔가 이상하게 꼬아서 말하는 탓에 그것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내가 바보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가끔 내 말에 장단을 맞춰주기도 하는 등, 이 남자는 어느새 나와 완전히 어울리고 있었다. 아니, 내가 이 남자의 페이스에 말려들었다고 하는게 맞으려나?
"이야... 그래? 뭐 그런 것들이 다 있냐? 친구가 아니라 그냥 꼬붕 부리듯이 굴려먹은거 아니야?"
"...그건 아닐 꺼에요. 아마 그 애들도 나름대로 나랑 친해지고 싶어서 그랬던 거죠. 근데 난 그냥 그 인형이라는 말이 거슬려서 대놓고 애들을 차단한 거에요. 이상한 가면이나 뒤짚어 쓰고."
이런 식으로 말하면 이 남자는 그냥 고개를 끄덕여 준다.
뭔가 더 할 말이 있어 보이는 것 같은데, 일단 수긍부터 해주고 본다.
"그럴수도 있겠네? 뭐 사람 생각하는걸 들여다 볼 수가 없으니 서로 답답한 거지. 마치 지금 나랑 너처럼 말이야."
"...거기서 우리 얘기가 왜 또 나와요?"
"응? 난 그저 니가 혼자 있는게 안쓰러워서 이렇게 앉은 건데, 넌 나를 불한당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
웃기시네요.
얼굴에 드러나지 않을 뿐이지, 내 마음의 눈에는 혀를 낼름거리면서 가슴을 쳐다보는게 보인다고. 이제 곧 본색을 드러내고 나를 모텔로 유인하려고 할 꺼다. 틀림없다.
"뭐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카톡이나 하면서 지낼까? 너 카톡 되지?"
저거봐. 슬슬 본심이 드러나고 있다.
내 번호를 따고 나면 이제 내 아랫도리를 따려고 하겠지?
"...네. 여기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어느새 나는 그 남자가 준 핸드폰에 내 번호를 찍어주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분명 나를 노리는게 눈에 보이는데. 지금 당장이라도 나를 모텔로 끌고 갈 것이 눈에 보이는데. 왜 이 남자한테 이렇게 끌리는 거지? 이래서는... 그 애한테 미안해지잖아.
내가 눌러준 번호로 전화를 걸어 내 핸드폰이 울리는 것을 확인하더니,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서 나를 내려다 본다.
"오케이. 오늘은 덕분에 잘 얻어먹었어. 배고팠는데 말이야."
"네? ...가는 거에요?"
"응. 너도 더 늦기전에 집에 가라고. 지금까지는 내가 커버쳐줬지만, 계속 이렇게 혼자 있으면 또 누가 와서 작업건다?"
그렇게 말한 남자는 슬쩍 손을 들어보이고는 테이블을 빠져 나갔다.
정말 가는거야? 나 안먹을꺼야?
...진짜로 가버렸다.
멍하니 남자를 쳐다보다가 이내 테이블로 고개를 돌렸다.
후우. 나도 참.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저런 처음보는 남자한테 뭘 기대했던 거지? 그저 말이 좀 통하는 사람이었을 뿐인데. 그 속은 분명 날 어떻게든 해보려고 작정한 늑대잖아?
그치만, 모처럼 기분은 좋았다.
인형이란걸 집어던지고 이렇게 속시원하게 누군가에게 털어놓은 적이 또 있었던가? 이건 그 애한테도 못했던 일이다. 이런 개인사를 어떻게 처음보는 저런 남자한테 털어놓을 수 있었을까? 단순히 사람을 편하고 재밌게 해주는 이상의 뭔가가 있는 걸까?
...저런 남자한테라면... 어땠을까.
이렇게 가버리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내 몸을 원한다고 말했더라면...
난 못이기는 척 그 손을 잡고 모텔로 따라갔을 텐데.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어떤 눈초리들이 느껴졌다.
정말로 날 노리고 궁시렁대는 남자들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다. 그 남자의 말 대로다.
무슨 배짱으로 이런 술집에 혼자 들어올 생각을 했을까?
평소의 나였다면 절대로 혼자 올 생각은 못했을 텐데. 정말로 우울하고 속상했던 모양이다.
혹시라도 험한 꼴을 당할까 싶어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테이블을 바라보니 시켰던 안주며 술들이 전부 깨끗하게 비워져 있다.
나도 먹긴 했지만... 반절 이상은 그 남자가 먹어치웠다. 어째 조금 분하다.
"얼마에요?"
카운터로 걸어가 계산을 하려고 하니, 종업원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계산은 아까 같이 계시던 분이 해주시고 나가셨습니다. 그냥 가시면 되요."
와...
뭐 이런 남자가 다 있어?
혹시 그 남자는 선수라던가 그런게 아닐까? 이런 식으로 여자들한테 작업치고 다니는 사람들 말이야.
......
선수든 뭐든, 일단 돈은 굳었다.
이름이... 박을이라고 했나? 을이오빠라고 부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정작 자기는 몇 살인지도 안알려주고 말이지.
흐응...
이번엔 내가 얻어먹은 꼴이 됐으니까, 다음에는 내가 사줄까?
* * *
을이오빠를 다시 만난 건 그 후로 일주일 뒤였다.
먼저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도저히 못견뎌서 내가 먼저 연락을 했었다. 아니, 왜 내가 먼저 연락을 해야 되는거야? 으례 날 노리고 있는 남자쪽에서 먼저 해야하는거 아니야?
...아무튼 난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리고 연락을 했다.
그냥, 보고싶었으니까.
을이오빠는 마치 예전에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는 듯, 내가 부르니까 바로 나왔다. 그렇게 내가 불러서 기어나온 주제에 그 반들반들한 면상으로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이야, 드디어 날 불러주는 구나. 난 또 연락이 없길래 그렇게 잊혀진 줄 알았지."
"뭐에요. 오빠가 먼저 좀 연락해줬어도 좋았잖아요?"
"내가? 왜?"
......
그냥 돌아갈까.
내가 왜 이 남자를 보고싶어 했더라. 괜히 후회된다.
"보자... 그럼 오늘은 뭘 해볼까?"
"오늘은 이라뇨. 어제도 만났던 것처럼 말하지 말라구요."
"그래? 흠... 그럼 오늘은 뭐할까?"
그렇게 헛소리를 하더니, 이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뭐지?
그것을 손에 쥐고 어딘가를 가리키자, 뾱 하는 소리가 났다.
"일단 좀 움직여 볼까?"
...아. 차키였구나.
이 오빠도 그렇게 나이가 들어보이진 않는데 차도 가지고 있구나. 하긴 여자 꼬시고 다닐려면 차 정도는 있어야 하려나? 분명 자기돈으로 산게 아니라 부모님이 사주셨겠지. 아니면 리스던가.
아무튼 오빠가 끌고 온 차에 덥썩 타버렸다.
조수석에 앉고 나서 느낀건데, 치마가 아슬아슬한 선까지 올라가 버렸다. 내가 오늘 왜 치마를 입고 나왔을까. 남친보러 나갈 때에도 별로 안입는 치마인데.
따로 들고 나온 백도 없어서 그야말로 치마가 찢어지도록 잡아당기고 있는데,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오빠가 문득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드,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 건가? 어째서 난 겁도 없이 차에 타버려서 이런 상황을 자초한 걸까? 오늘로 내 처녀는 사라지는 걸까?
......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는데, 뭔가 예상했던 느낌이 오지 않는다.
가슴을 만진다든가, 내 다리 사이로 손을 넣는다던가, 그런 마땅한(?) 감촉이 전해지지 않는다. 살며시 눈을 떠보니 내 허벅지 위에 왠 손수건이 놓여 있다.
"보기보다 대담한 치마를 입고 다니네. 뭐 나야 좋지만."
...손을 뻗은게 날 만지려던게 아니라 손수건 깔아줄려고 그랬던 거야?
뭐야, 이 말도 안되는 매너는. 분명 을이오빠라면 날 덮치고도 남았어야 하는 남자잖아?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오빠가 운전하는대로 어디론가 정처없이 흘러갔다. 지리라던가 길같은건 전혀 모르니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다. 어쩌면 이대로 모텔로 끌고 가려는 걸지도 모르지. 근데 이제는 이런 생각도 좀 바보같다. 정말 그럴 마음만 먹었다면, 이 남자는 언제라도 날 건드렸을 꺼다. 이 차 안도 완벽한 공간이다.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다른 남자였다면... 난 이 차 안에서 벌써 몇 번이나 강간당했겠지.
보기보다 믿음직스러운 구석이 있는 걸까? 다른 남자랑은 다르다던가.
아니면 나같은 애송이는 언제든 요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냥 그 말대로 난 여자로도 보이지 않는 건가?
나 자신도 뭔 생각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복잡한 생각이 실타래처럼 얽히고 설킬 무렵, 오빠가 운전하던 차도 슬슬 속도를 줄이고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이다.
가만히 창 밖으로 내다보니, 뭔가 놀이동산 같다. 내가 예상한 건 모텔촌이었는데 말이지. 저녁시간이 거의 다 되서 사람은 별로 없어보이는 한적한 놀이공원이다.
"다 왔다. 내리자."
"...여긴 어디에요?"
"응? 어린이 대공원이잖아."
"그러니까 왜 여길..."
설마 이 오빠, 내가 어린애같다고 생각해서 이런데 끌고 온 건 아니겠지? 그런 말도 안되는 생각이나 할 즈음, 어느새 차에서 내린 오빠가 조수석의 문을 열어 손을 내밀었다.
"가실까요?"
"......"
말 없이 손을 잡았다.
손이 참 따뜻하다. 왠지 녹아버릴 것 같다.
* * *
오빠가 보이질 않는다.
멋대로 이런 대공원에 끌고 와놓고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잠깐 음료수 사러 갔다오겠다고 하더니 이런 공터에 남겨놓고는 사라졌다.
그렇게 30분 가량이나 혼자 멍하니 있었다. 전화도 안받는다.
그 와중에도 혼자 있는 나를 노리고 몇몇의 남자들이 다가왔다. 정말... 어딜 가나 있구나.
문득 저쪽에서 인형탈을 뒤집어 쓴 사람이 걸어오는게 보인다.
인형옷이 축 처져보이는 것이 상당히 지쳐보인다. 저 안에 들어가 알바하는 사람들의 후기를 들어보면 굉장히 힘들다고 하던데. 특히나 여름같은 경우에는 기피대상 1호로 꼽힐 정도라고 한다.
저녁시간이고 하니 알바가 끝나서 돌아가는 걸까?
아무 생각없이 그 사람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 인형사람(?)도 이쪽을 보고는 걸어온다. 뭘까? 내 쪽에 있는 벤치에 앉으려는 걸까?
그렇게 멀뚱히 보고 있다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왠지... 저 안에 있는 사람, 을이오빠일 것 같다.
그래서 내 옆에 다가와 앉는 그 사람에게 대놓고 말했다.
"을이오빠, 뭐에요 그 차림은."
"......"
당황했다. 분명히 당황했다, 이 사람.
나를 쳐다보는 듯 하더니, 고개를 추욱 떨구고는 머리에 씌여있던 인형탈을 벗는다. 역시나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오빠였다. 상당히 힘들어 보이는 그 모습에 나는 지금까지 혼자 기다렸던 것도 잊어버리고 웃어버렸다.
"푸핫, 아니, 왜 그래요? 갑자기 왠 인형탈?"
"...난 줄 어떻게 알았냐."
"그냥 딱 느낌이 왔어요. 여자의 감이랄까?"
"별 쓸때없는 감도 다 있네. 이거 빌리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렇게 말한 오빠는 들고 있던 인형탈을 내려다 보더니 다시금 말을 이었다.
"한 번 인형이 되어보고 싶었어. 그럼... 속을 알 수 없는 니 마음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까?"
"......"
"물론 이해할 리가 없겠지? 그럼... 너를 이해하는 인형이 아니라 널 위한 인형은 어떨까? 너한테만 웃어주고 재롱떠는 그런 인형 말이야. 그런 거라면 나도 조금은 자신 있는데."
......
뭔가 했더니, 이런 퍼포먼스 였구나.
나름 이벤트를 꾸민다고 머리를 굴린 모양인데... 땀으로 흠뻑 젖은 오빠의 얼굴만큼 유감스럽기 짝이 없다.
가만히 손을 뻗어 오빠의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 아까 오빠가 내 허벅지에 올려줬던 그 손수건으로.
"내 인형이 된다는 거... 그거 얼마나 힘든지 알아요? 내 성격 다 받아주려면 인형이고 뭐고 때려치고 싶을 껄요? 물론 보수도 없어요."
"보수라면 당연히 있지. 니가 웃을 때마다 나도 웃게 되니까. 그게 내 보수야."
"...진짜 이런 말은 안하려고 했는데, 말하는게 전부 오글거려요. 닭살돋아."
"괜찮아. 익숙하니까."
"오빠가 문제가 아니라 듣는 내쪽이 문제라니까요? 어휴."
어느새 나는 웃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런 내 얼굴을 바라보는 오빠도 희미하게 미소를 피워 올렸다. 보수를 받았으니 좋아하는 걸까? 참... 기가 막히는 오빠다.
......
그렇게 나는, 오빠와의 비밀스러운 연애를 시작하게 됐다.
그 애는 알지 못하는 둘만의 연애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