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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2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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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 정소연, 그리고 윤소정 上

어려서부터 난 인형같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남들 말로는 귀여운 외모와 자그마한 체구가 인형을 연상시킨다고 한다. 귀엽고 작으면 인형인가? 잘은 모르겠지만, 그 시절의 난 인형이라는 별명이 맘에 들었던 것 같다.

점점 나이를 먹어갈 수록 내 몸도 또래 여자애들과 마찬가지로 나올 곳은 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가는 등, 더이상 인형이라 불릴 만한 체구는 아니게 됐다. 물론 다른 애들보다 조금은 작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확 차이가 날 정도도 아니다. 그냥 키가 조금 작을 뿐인,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사람이다.

하지만 나에겐 그 인형이라는 별명이 계속 따라다녔다.

머리 좀 굵어지고 보니 내가 귀여운 얼굴인지 뭔지도 잘 모르겠더라. 보는 시각에 따라서(주로 남자들의 기준으로) 귀엽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정도 생김새로 인형이라는 별명은 무리수다. 난 이미 예전의 내가 아닌데, 그 별명만큼은 내 뒤를 쫓아 다녔다. 마치 그림자 처럼.

......

점점 그 인형이라는 소리가 듣기 싫어졌다.

외모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냥 그 소리 자체가 싫었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번이라던데, 듣기도 싫은 소리가 계속 귀에 들려오니 더욱 싫어질 수 밖에 없잖아? 급기야는 그 인형이라는 소리가 날 놀리고 조롱하는 것처럼 들려 필요 이상으로 예민해지기까지 했다.

인형이라 불리는 것이 싫었는데도, 그때의 나는 그 별명으로 불리는 것에 거부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한창 사춘기때였으니까, 아마 그런 식으로 애들에게 선을 그어버리면 왕따가 돼버릴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이라도 있었던 모양이다. 적당히 애들과 어울리려면 뭔가 선을 이어주는 연결점이 있어야 하니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 싫어하는 별명을 연결점으로 친구들과 이어져 있었던 거다.

그런 일상이 지속되다 보니 친구들을 대하는 내 태도에도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나를 인형 취급하는 애들에게 굳이 살갑게 대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적당히 대꾸하고 적당히 웃어주는 등, 모나지 않을 정도의 이미지를 만들어 애들에게 내비쳤다. 인형이라 불리는 일상도 마치 익숙한 것처럼, 티내지 않고 그럭저럭 친구들 속으로 스며들었다. 이런 식으로 가면을 쓴다면, 그 진심이야 어쨌건 애들과 어울리는 건 무리 없을꺼라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정말로 인형이 되어가고 있었다.

* * *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다.

3년동안 같이 지내온 친구들끼리 모여 술자리를 가지게 됐다. 다들 수능도 잘 본 모양이고, 지망하는 대학에도 붙어서인지 한층 기분이 고조되어 있었다. 금기시 되었던 술도 마실 수 있다는 것이 그러한 기분을 더욱 이끌어 올렸다.

그때만큼은 나도 답지 않게 한껏 기분을 내고 있었다. 갑갑했던 고등학생 시절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드디어 해방이구나 따위의 생각이 들었을 꺼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인형의 가면을 내려놓고 말았다.

......

굉장한 싸움이 일어났다.

서로 취기가 올라 감정이 고조된 상태에서 내가 터트려 버린 것이다. 어디까지 나를 인형취급 할 셈이냐고, 나도 사람이라고, 인형이 아니라고.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 하면서 그동안 쌓여왔던 걸 폭발시켰다. 

처음에는 어리둥절 하던 친구들도 점점 열이 받았는지 그런 날 집단으로 깠다. 그렇게 싫었으면 진작에 말하지 왜 병신같이 참아왔냐느니, 우리같은 애들이랑 어울리느라 고생 많으셨겠다느니, 별에 별 소리가 다 나왔다.

아수라장이 된 술자리는 결국 그 애들이 먼저 일어서는 것으로 끝났다.

그리고 억지로 이어져 있던 그 애들과의 연결고리도 그것으로 끝났다.

뭔가 후련했다.

진작에 이랬으면 좋았을 것을.

그동안 나는 뭐가 좋다고 저런 애들과 어울리고 싶어서 인형을 연기했던 걸까.

너무나도 통쾌하고 후련해서인지, 눈물이 흘러나왔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그것이 참 뜨겁다고 생각했다.

......

그렇게 혼자 울면서 앉아 있었다.

누군가 내 어깨에 손을 대기 전까지는.

"...괜찮아?"

...혼자 남겨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 한 사람이 더 있었던 모양이다.

혹시 날 버리지 않고 같이 남아준 친구가 아닐까?

하는 기대감에 고개를 들어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누구더라.

분명 같은 반이었던 것 같은데.

술기운 때문인지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건지,

얘가 누군지 도저히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따뜻하게 느껴졌다.

멋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범생이같은 외모의 남자앤데,

그런 애의 어디가 이렇게 따스하고 의지가 되는지... 모를 일이었다.

......

그것이 인연이 되어,

결국 난 그 애와 사귀게 됐다.

고백은 그 애가 먼저 했다.

지난 3년간 쭉 나를 보고 있었다고.

...저런 식의 고백은 지금까지 참 많이도 들어봤다.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고, 너무 귀여워서 한 눈에 반했다고.

하지만 뭐, 그런 남자들의 속셈이야 안봐도 뻔했다. 어떻게든 꼬셔서 따먹을 생각이겠지. 실제로 한 번은 정말로 호감이 갔었던 남자에게 이끌려 학교에서 떡칠 뻔 하기도 했다. 난 한 번도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그 남자가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이 굉장히 무서웠고, 팬티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도망치듯 빠져나와야 했다. 그 이후로 내 눈에 비친 남자들은 죄다 날 어떻게 해볼 생각으로 접근하는 거라고 박혀버렸다.

그런데 이 애는 뭔가 달랐다.

그렇게 먼저 고백해 놓고는, 정작 사귀는 사이가 됐는데도 날 만지는 것을 주저한다. 어쩌다 손이 툭 닿아도 그쪽에서 먼저 화들짝 놀란다. 그런 모습이 왠지 귀여워서 오히려 내가 먼저 그 애의 손을 꼭 잡아주기도 하고 안아주기도 했다. 뭐랄까, 모성본능을 자극하는 애라고 해야 하나? 키로 보나 체구로 보나 나랑 그렇게 차이도 나지 않을 것 같은 그 애의 모습에서 나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귀여움을 느꼈다.

이 남자애,

정말 인형같다.

* * *

그 애와 나의 사이는 순탄했다.

만나면 즐거웠고, 이야기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다른 남자들처럼 나를 어떻게 해보려는 욕심도 없었고, 그저 그 모습 그대로의 날 좋아해준다는 생각에 나도 점점 이 애한테 빠져 들었다.

그러던 우리 사이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것을 느낀 것은 나였다.

점점 그 애가 마음에 들고 좋아하는 감정이 깊어질 수록,

지금같은 사이로는 만족하지 못하게 됐다.

날 만져줬으면, 안아줬으면, 키스해 줬으면.

내가 먼저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쪽에서 날 원하는 그런게 필요했다.

하지만 이 애는 절대로 먼저 나를 만지지 않았다.

모를 일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얘도 남자일 텐데, 어찌 이렇게 날 보고 아무 생각이 안들 수가 있을까? 한 번은 작정하고 꼬셔볼려고 잘 입지도 않는 짧은 치마에 가슴이 푹 패인 상의를 걸치고 나갔지만, 걸려든 것은 얘가 아니라 지나가던 남정네 들이었다. 그 날, 내 번호를 따갈려고 접근했던 사람이 열 명은 넘었다.

이대로는 안된다.

난 지금보다 더 깊은 사이를 원하는데, 얘는 일절 그런 생각을 안한다. 

마치,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 인형처럼 말이다.

......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혹시 예전의 내가 이런 모습이었나?

친구들에게 인형이라 불리던 그 시절의 나는, 이렇게 수동적이고 남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애였나? 그런 상황에서 나는 더욱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하면서도, 그러면서도 내 마음을 알아주길 바랬던 건가?

생각이 생각을 거듭할 수록, 지금의 이 애와 예전의 내가 겹쳐 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느낄 수록 마음 한 구석에서는 뭔지 모를 쓰라림이 계속해서 나를 찔러왔다.

내가 이 애를 좋아한다는 감정은... 나와 같다는 동질감을 착각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나와 같은 그 애를 보면서,

나는 내 친구들이 그러했듯이 똑같은 짓을 이 애한테 하고 있었던 거다.

내 딴에는 좀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 좀 더 사랑하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한 건데, 받아들이는 쪽에서는 그게 아닐 수도 있다. 바로 내가 그러했으니까. 그리고 지금 이 애도 그 때의 나와 똑같은 마음일지도 모른다.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 있는 그 얼굴 속으로는, 이런 날 비난하고 가볍게 보고 있는 건 아닐까? 그 애도 나와 적당히 어울리기 위해 가면을 쓰고 있는 건 아닐까? 마치 내가 그랬던 것 처럼?

......

술이 마시고 싶다.

평소에는 이게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남들이 마시니까 넙죽 마시던 그 쓰디 쓴 물이, 지금은 간절하게 생각난다. 아니, 원래 술이란 건 괴로운 사람들을 위로하는 거니까, 나도 모르게 술을 떠올린 것일 지도 모르지. 지금의 난 무지무지 괴롭다 하고 광고라도 하고 싶은 걸까?

아무 술집에나 들어가 혼자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았다.

그리고는 종업원에게 아무거나 달라는 말을 내뱉고는 테이블에 엎드렸다.

뭔가 괴로운 감정을 표출하고 싶은데, 이상하게도 눈물은 나지 않는다.

......

누군가 엎드려 있던 내 팔을 툭툭 건드린다.

벌써 시킨 메뉴들이 나온 걸까? 하는 생각에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어떤 남자가 내 맞은편에 앉아 있다.

차림새로 보아하니 종업원들이 입는 옷이 아니다.

그런가. 이 남자도 날 어떻게 해볼려고 접근한 남자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풋 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남자들은 어째 하나같이 똑같을까?

그 욕정에 찬 눈들은 항상 내 얼굴이 아니라 가슴을 보고 있다. 그 머릿속에는 벌써 나랑 침대에서 뒹구는 상상으로 가득 차 있겠지. 그런 남자들 중에서도 예외인 것이 바로 그 애였는데. 

......

그런데 이 남자...

내 얼굴을 보고 있다.

살짝 뚱해보이는 얼굴로 내 얼굴을 쳐다보는 그 남자가 어딘가 낯설게 느껴진다.

내가 아는 세상 남자들은 전부 날 따먹을 생각으로 가득차 있는 그런 짐승들일텐데?

아무튼, 허락도 없이 내 테이블에 앉았으니 뭐라도 말을 꺼내야 했다.

살짝 찌푸린 얼굴로 쏘아내듯 말을 꺼냈다.

"...누구에요? 누구 맘대로 여기 앉은 거에요?"

"응? 당연히 내 맘인데. 여기가 자리가 좋아 보이길래."

남자의 목소리는 그 외모처럼 시원시원했다. 

너무나도 당당한 그 모습이 오히려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뭣때문에 이렇게 혼자 와서 엎드리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이런데서 그렇게 무방비하게 있으면 남자들이 가만 안둔다?"

"...그쪽도 그 가만 안두는 남자들 중 하나인 것 같은데요?"

"그래? 이거 유감이네. 선의를 베풀려는 사람한테 너무 냉정한 걸."

"선의는 무슨... 남자들이 다 똑같지 뭐."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왠지 내 얼굴이 빨개졌을 것 같다는 생각에 고개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시선이 느껴진다.

"너, 아무리 봐도 민짜로 보이는데... 이런데 들어와도 돼냐?"

"...스무 살이거든요."

"그래? 이야... 축복받은 동안이구만. 완전 고딩같이 생겼는데. 너랑 사귀면 고딩이랑 사귀는 기분 낼 수 있는거네?"

"그렇겠죠. 근데 난 남친 있어요. 그쪽보다 훨씬 근사하고 멋진 사람이에요."

이건 거짓말이다.

그 애보다 앞에 있는 이 남자가 훨씬 근사하고 멋지다.

...인형보다는 사람이 더 멋지잖아.

계속 창 밖을 내다보고 있으려니, 남자는 뭔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당연히 그렇겠지. 너같은 애가 남친이 없다는게 말이 돼? 그래서 다행이다."

"...뭐가요?"

"남친이 없었으면 나한테 반해서 사귀자고 달라붙었을 지도 모르니까. 근데 남친 있으니 그런 걱정은 조금 덜게 되잖아?"

뭐래. 짜증나.

이제보니 완전 자뻑에 왕자병 말기잖아?

그렇게 생각했을 무렵, 아까 내가 시켰던 '아무거나'가 나왔다.

몰랐는데, 메뉴판에 진짜로 '아무거나'라는 메뉴가 있더라.

시킨 것들이 나오자, 남자가 손바닥을 비비며 입맛을 다셨다.

"오우. 잘 먹겠습니다.'

"...뭐라구요?"

"이거 혼자 먹을려고? 에이, 배가 두번 터져도 넌 다 못먹어. 내가 도와줄께."

"하 참, 기가 막혀서. 나 이거 다 먹을 수 있거든요?"

진짜다.

나 되게 잘먹는다. 지금 나온거의 두 배도 먹을 수 있다. 아마 이렇게 먹는게 전부 가슴으로 가는게 아닐까?

내 말을 들은건지 어쩐건지, 남자는 젓가락까지 꺼내들며 빙긋 웃고 있다.

"이렇게 일용할 양식을 주셨으니 통성명이라도 해야지. 난 박을이야. 을이오빠, 하고 부르면 돼."

"...이상한 이름이네요."

뚱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다가, 아무렴 어떠냐 하는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난 윤소정이에요. 인형이라는 소리만 안하면 어떻게든 불러도 상관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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