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41)

 색기발랄 26 

현아가...

윤성현이랑 동거하고 있다고?

"아무튼... 그렇게 무력으로라도 해결해볼까 싶어서 찾아갔었어. 현아의 집은 이 이야기가 나왔을때 알려줬었거든. ...그래서 찾아갔었다만... 집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도로 왔다."

망치로 뒷통수를 맞은 듯 멍하게 있다가 보니 박우리가 뭔가 말한 걸 뒤늦게서야 알아챘다.

"...어? 왜 그냥 왔는데. 들어가서 쳐죽여야 할 꺼 아니야?"

"......"

박우리는 고개를 저었다.

"못하겠더라고. 만약 내가 진짜로 그 집에 들어가서 윤성현을 떡으로 만들었다면... 진짜로 현아가 윤성현을 잊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

"당연한거 아니냐? 그놈 때문에 나나 너나 현아까지도 전부 피해보고 있는 거잖아."

"아니,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어. 현아는 대놓고 헤어지자는 말도 못하고 이렇게 우리를 이용할 정도로 윤성현한테 얾매여 있는 거야. 같이 있던 시간도 길었을 테고, 그동안 들었던 정이라던가 사랑이라던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겠지. 그래서 이렇게 윤성현이 아닌 너라는 인간한테 매달려서 새로운 사랑이 싹트기를 바라고 있는거 아니야?"

"......"

"그 와중에 내가 난입해서 윤성현을 패죽여봤자 역효과만 날지도 모르지. 눈 앞에서 나한테 맞아 쓰러지는 윤성현을 현아가 본다면... 과연 누구 편을 들까? 윤성현을 패는 날 응원할까, 아니면 맞아서 쓰러진 윤성현을 돌볼까. 난 후자라고 생각했다."

......

모르겠다. 무슨 생각이 그리 복잡하냐.

그냥 윤성현을 쳐죽이고 현아를 데려오면 다 끝나는거 아니야? 그 이후에 박우리와 나 사이에서 현아의 소유권을 놓고 경쟁한다고 해도, 최소한 윤성현이란 새끼는 배재시켜야 맞는거 아니야? 

아무튼 녀석은 윤성현을 때리러 갔다가 저런 생각이 들어서 도중에 돌아왔다는 말이군. 이미 지나간 일이니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이제 어떡하고 싶은데.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다 털어놓을 결심을 했다면 너도 뭔가 생각하고 있는게 있을꺼 아니야?"

"......"

박우리는 말이 없다.

설마 아무 생각없이 이런 비밀들을 털어놓을 녀석은 아니고. 분명 뭔가 생각하고 있는게 있을텐데.

......

한 번 생각해 보자.

현아는 박우리에게 자신을 도와줄 것을 빌미로 접근했다. 나에게는 말하지 않고 박우리한테만 말한 것을 보니 비밀이었던 거지.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박우리는 나와 현아를 도와주는 도우미에 불과했다.

그 비밀을 나에게 말함으로써 더이상 비밀이 아니게 됐다.

이젠 나도 모든걸 다 알게 됐고, 그렇게 된 이상 박우리가 나와 현아를 잘 되게 도와야 할 필요는 없다. 왜냐고? 내가 다 알아버렸으니까. 굳이 박우리의 도움이 아니더라도 내가 알아서 현아와 잘 되도록 하면 될 일이지. 난 여전히 현아를 좋아하고, 현아도 나와 잘 될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 둘은 아무 문제 없이 사랑을 키워나갈 수 있다.

...혹시 박우리가 나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은 건,

이런 도우미 입장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의지는 아닐까?

분명 박우리는 현아를 좋아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마찬가지겠지.

현아의 부탁이었으니 어쩔 수 없이 수락했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속이고 나와 현아를 잘 되게 돕는 일이 결코 좋을리가 없다. 

그래서 나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자신이 도울 필요 없이, 내가 알아서 하라는 뜻일지도 모르지.  그리고 그런 도우미 입장에서 벗어난 박우리는 예전처럼 현아를 노리며 나름대로의 노력을 할 것이다. 즉, 도우미에서 경쟁자로 돌아가겠다는 소리다.

박우리가 나에게 비밀을 털어놓았지만, 난 현아에게 이것을 알고 있다는 내색을 할 수 없다. 언젠간 말해야 겠지만 당분간은 말 안하는 것이 좋을 테니까.

그렇다면 현아 입장에서는, 박우리는 여전히 자신을 돕고 있는 줄로만 알고 있을테고, 도와주는 대가성이랄까, 꾸준히 박우리를 만나서 몸을 대줄 것이다. 박우리는 이미 나에게 비밀을 털어놓고 경쟁자의 위치로 돌아갔기 때문에, 그렇게 몸을 내어주는 현아를 취하고 점점 자신의 여자로 길들이려 하겠지. 그런 상황이 지속되다보면... 현아는 나와 잘 되는 대신 박우리와 잘 되서 윤성현의 마수에서 벗어나게 될 수도 있다. 

......

생각해 보니 그럴싸 하다.

정말 이것이 박우리가 노리는 것인가?

"...일단 니 생각을 먼저 듣고 싶다. 내가 지금 한 얘기 들으니까 무슨 생각이 드냐?"

오히려 박우리가 질문을 던졌다.

내 생각을 듣고 싶다라... 내 대답을 듣고 나서 자신의 대답을 결정하겠다는거 아니야?

어떻게 머리를 굴려볼까 하고 잠시 고민했지만, 별달리 떠오르는 생각이 없다. 담배를 하나 꺼내 불을 붙히고 깊게 빨아들이는 순간까지 내 머리는 그저 하나의 생각만을 띄우고 있을 뿐이었다.

"...현아를 데려와야지. 그 미친놈한테서."

내 대답에 박우리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 나도 마찬가지다. 뭐가 됐든, 윤성현과 현아를 끊어내는게 최우선이야. 너와의 일은 그 이후지."

박우리가 침대에서 완전히 일어났다.

"내가 이 사실들을 너한테 털어놓은 이유는... 제안을 하기 위해서다."

"...제안?"

"그래. 이제 너와 나는 모든걸 공유하고 있어. 내가 알고 있는 것들도 너역시 모두 알게 됐고, 현아의 몸도 공유하고 있지. 이제와서 현아는 니 여자라고 말할 셈은 아니겠지? 사실대로 말하자면 현아는 아직 윤성현의 여자니까. 그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몸은 너와 내가 공유하고 있다. 그게 사실이야."

......

현아를 공유하고 있다라...

분하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지금 내가 현아랑 사귀는 건 그저 변태플레이의 연장선일 뿐이고, 진짜로 사귀는 쪽은 윤성현이지. 비록 현아가 나와 사귀어 윤성현에게서 벗어나려 한다고 해도, 아직까지는 그 윤성현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고 있는건 변함없다.

현아 자신도 박우리를 불러내 모텔에 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니, 녀석의 말대로 현아의 몸을 공유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난 이런 상황이 매우 맘에 안든다. 현아가 무슨 물건도 아닌데 여러 남자들에게 돌려지고 있으니까. 걔가 이렇게 여러 남자한테 안기는걸 좋아한다고 해도, 그 마음이 바라는 것 처럼 이제는 이런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찾아줘야겠지. 안그러냐?"

"...그래서 뭔데. 그 제안이라는게."

속이 타는 나머지 그 다음을 재촉한다.

박우리는 뭘 말하고 싶은 거지?

"별 거 아니야. 현아를 윤성현에게서 구해내고 너와 나 사이의 경쟁도 끝낼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하려는 거야."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이 망할놈아.

"나하고 넌 현아를 두고 경쟁하는 사이다. 너도 그렇겠지만 나 역시 현아를 가지길 원해. 예전에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지만, 지금은 아니야. 현아가 내 여자가 됐으면 좋겠어. 현아랑 같이 자는 횟수가 늘어날 수록... 그 애의 향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그걸 전부 내것으로 만들고 싶어져."

한차례 심호흡을 한 박우리가 숨을 뱉어내듯 말을 꺼냈다.

"너하고 나, 둘 중 누가 먼저 현아를 윤성현에게서 뺏어올 수 있는지. 내기를 하자."

"...내기?"

"그래. 방법은 아무래도 상관없어. 지금의 현아를 윤성현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고, 그 연결고리를 끊어서 데리고 오는 사람이 현아를 차지하는 거야. 어때?"

......

그러니까 지금 박우리가 한 말은,

윤성현에게서 현아를 구해낸 사람이 현아를 차지할 기회를 가진다는 소린가?

뭐야 이게. 결국 그 말이 그 말이잖아.

"니가 지금 말한 거... 뭔가 이상하지 않냐?"

"뭐가?"

"당연히 너나 나나 윤성현한테서 현아를 데려오려는 목표가 있잖아? 굳이 이런 내기가 아니라도 자기 손으로 현아를 데려와서 애인으로 만들고 싶어하는게 당연하잖아?"

"그게 아니야."

고개를 저은 박우리가 다시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내가 너한테 이것들을 전부 말해준 이유부터 생각해 봐. 모든 걸 같이 알고 있는 상태에서 시작하자는 의미야. 이걸로 내기의 조건은 성립되지."

"......"

"그리고, 현아를 구해낸다는 건, 방법이 뭐든 지간에 그 윤성현의 손에서 빼내오는 사람을 말하는 거야. 예를들어 현아의 계획대로 너랑 현아가 정말로 사랑하는 사이가 됐다고 해도, 내가 윤성현을 찾아가 담판을 짓고 현아에게서 손을 떼겠다는 말을 듣게 된다면 나의 승리라는 거다. 그렇게 되면 넌 깨끗하게 현아를 포기하고 나한테 넘기는 거지."

뭐?

그러니까 과정이야 어쨌든 마지막에 윤성현과 현아의 사이를 갈라놓는 데에 공을 세운 사람이 현아를 가진다는 소리잖아? 그렇게 되면... 결코 나한테 유리한 내기가 아닌데?

"물론 이건 반대의 경우도 해당된다. 현아가 자신을 돕는 대가로 나한테 와서 몸을 대주고 있는 상황이고, 난 이것을 기회로 삼아 현아의 마음을 점점 내것으로 만들어 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니가 윤성현과 결판을 짓고 현아를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 낸다면, 난 그때까지 현아를 생각했던 모든 걸 접고 너한테 넘긴다."

"......"

"뭐 니 말대로 내기를 하나 안하나 똑같은 상황일 수는 있겠지만, 뒤를 깨끗하게 하자는 거야. 윤성현과의 일을 결판짓고 너랑 다시 경쟁하는 것도 솔직히 싫다. 그러니까 먼저 구해내는 사람이 현아를 차지하는 걸로 하자는 거지."

......

뭔 말을 하려는 건지는 대충 알겠다.

그런데 저 녀석... 그런 내기로 현아를 생각해오던 마음을 단숨에 접어낼 수 있는 건가? 아니면, 윤성현에게서 현아를 구해내는 건 자신이라고 믿고 있는 건가?

솔직히 이런 내기를 지금 이 자리에서 결정하는 건 어렵다.

그리고 이건 나와 박우리만의 내기도 아니다. 현아도 섞여 있으니까.

만약 내가 내기에서 져서 현아를 넘겨야 한다고 치자. 그리고 그때까지 나랑 현아는 정말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했다고 치자.

거기서 내가 깨끗하게 승복하고 현아를 넘긴다면, 현아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자신이 사랑하던 남자가 어느날 갑자기 '넌 이제 저 남자한테 가라' 라는 말로 등을 돌린다면... 현아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인단 말인가?

이런 생각은 나만 한게 아니었나 보다.

잠잠하던 정소연이 말을 꺼낸 것이다.

"너무해요."

"...뭐가?"

"현아언니를 그런 식으로 취급하는게 너무하다구요. 언니가 무슨 물건도 아니라고 말한 건 우리오빠잖아요? 그런데 구해내는 사람이 소유권을 가지기라도 하듯 깨끗하게 포기하라는 건... 언니의 마음따위는 하나도 생각하지 않은 몰상식한 처사에요."

"......"

박우리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림자만 보이듯 어두운 방 안인데도 녀석이 당황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자기 자신의 모순을 깨달은 모양이지? 

아무튼 이 꼬맹이, 말 한 번 잘했다. 내 말이 그 말이다. 현아는 물건이 아니니까. 그 애가 바라는 대로 누군가와 맺어져 행복한 삶을 꿈꾸게 해야지, 구해내는 사람한테 부속품이 딸려가듯 움직이는 건 윤성현 옆에 있을 때와 별반 다르지도 않다.

"그리고... 을이오빠. 오빠도 뭔가 잊은게 있지 않아요?"

"...뭘?"

이번에는 정소연이 날 타겟으로 잡았다.

뭔 소리를 하려는 거지?

"우리 사이에 있던 약속 말이에요. 내가 오빠가 원하는 정보를 가지고 온다면... 나에게 해주기로 했던 약속, 잊은거 아니죠?"

......

약속이라고?

가만... 내가 뭔 약속을 했더라?

내가 꿀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자,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던 정소연이 일어나 나에게 다가왔다.

"잊었다고 말하지 말아요. 난 분명 오빠가 나한테 해줬던 말, 토씨 하나 안틀리고 전부 기억하고 있으니까."

......

기억났다.

박우리에게 접근시켜서 내가 원하는 이야기를 가지고 온다면... 사귀기로 했었다.

내가 원하던 방법은 아니었지만, 분명 정소연은 박우리로 하여금 내가 알고 싶어하던 것들을 전부 불게 만들었다. 이로써 더이상 내가 박우리와 현아 사이의 일을 궁금해 하는 건 없다. 그 말대로, 정소연은 모든 걸 완벽하게 해냈다.

하지만...

사귀기로 한 것은 정소연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어물쩡 말한 거짓이었다.

지금의 난 윤성현이란 녀석에게 현아를 구해내 완전한 내 여자로 만들어야 하는 사명을 띄우고 있는데, 이제와서 이런 꼬맹이한테 발목잡혀서 중간에 낙오할 수는 없다. 그 색기발랄한 현아의 뒤로 감춰져 있던 아픔을 내가 씻어내 줘야 한단 말이다. 그 어디에도 정소연이 끼어들 장면은 없다.

박우리는 알고 있나? 정소연이 나에게 정보를 대주는 대가로 사귀기로 했다는 것을?

"...그러고보니 넌 소연이랑 그런 약속을 했다고 들었는데. 생각해보니 너랑은 그런 내기를 할 필요도 없는 거였네? 그냥 나 혼자서 현아를 구해내서 내 여자로 만들면 되는 거였잖아?"

......

빌어먹을, 역시 알고 있잖아.

내가 여기서 정소연을 받아들여 사귀는 걸로 한다면... 더이상 현아의 일에 간섭할 수 없게 된다. 일단 정소연이 그것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애인으로 두고 왜 아직도 현아를 신경쓰냐면서 뭐라고 하겠지. 그렇게 되면 내가 현아를 신경써야 하는 일이 극도로 제한될 수 밖에 없다. 그 뿐이랴? 매일 저녁마다 나에게 오던 현아도 더이상 만날 수 없게 된다. 이건 치명적이다.

이건 나중에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매듭지어야 한다.

"...미안하다."

내 말에 정소연이 슬쩍 고개를 갸웃거린다.

"뭐가 미안해요?"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널 애인으로 만들 수는 없어."

"...왜죠?"

정소연의 목소리.

...소름끼치도록 차갑다.

그 얼굴 또한 목소리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무표정하다. 불이 켜있지 않아 얼핏 보이는 얼굴만으로도 그것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지금...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도저히 현아를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어. 비록 내가 현아랑 시작하게 된 게 어이없는 잠자리였긴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나 역시도 현아를 사랑해. 걔가 아니면 이제 누구라도 안 될 정도로 너무 커다래졌어."

"......"

정소연은 대답이 없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도저히 모르겠다.

어느새 내 뺨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물론... 소연이 너도 나한테는 정말 소중한 사람이야. 지금까지 같이 지내왔던 시간이나 나한테 해줬던 것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안되겠어. 난 해야 할 일이 있고... 그것을 놓치고 싶지 않아. 그래서..."

결국 말을 끝맺지 못했다.

이렇게까지 정소연에게 미안했던 적도 없다.

그저 따먹기 좋고, 부려먹기 좋은 계집 정도로만 생각했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미안한 마음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평생토록 날 미워하고 저주한다 해도 할 말이 없다.

난 그런 짓을 당해도 싸다. 그보다 더한 짓을 당해도 할 말이 없다. 정소연의 마음을 가지고 놀았으니까. 왜 예전에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이제와서 정소연에게 상처를 주는 걸까?

아니... 어쩌면 지금의 이야기들로 내 생각이 바뀌었을 지도 모르지. 정말로 누군가를 생각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절실해지니,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일들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어리석은 짓이었는지 생각하게 된 거다. 그저 굴려먹는 용도로만 쓰던 정소연도, 그 마음은 오로지 나를 향해 있었을 뿐일텐데... 난 그걸 알면서도 정소연을 이용한 거다. 정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박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자신이 나설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겠지. 물론 나도 지금은 박우리가 뭔 말을 한다 한들 신경 쓸 여유가 없다.

문제는 정소연이 아무 말도 안한다는 거다.

내 뺨을 후려 갈기던, 의자를 집어 던지던 화를 내면 좋겠는데...

어째서 가만있는 거지?

......

이 비정상적인 침묵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정확히 열 다섯번째 침을 집어 삼켰을 때, 드디어 정소연이 입술을 뗐다.

"...그러니까, 오빠는 날 받아줄 수 없다는 말이네요?"

"...미안해."

다시 한 번 진심을 담아서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잠시 입을 다물었던 정소연이 갑자기 풉 하고 웃는다.

"휴우. 그럴 줄 알았어요. 오빠가 그렇죠 뭐."

"......"

정소연의 목소리가 평상시로 돌아왔다.

귀엽고 발랄한 그 목소리다. 

"오빠는 아무 잘못 없어요. 예전에도 그랬죠. 오빠는 그저 나랑 즐기고 싶었을 뿐인데, 옆에서 도와주질 않은 거에요."

"...어?"

예전에?

언제 또 이런 일이 있었나?

고개를 끄덕거리던 정소연이 다시 한 번 피식 웃었다.

"...맞아요. 오빠는 아무 잘못 없어. 오빠 옆에 있던 그 여자가 잘못이야. 그때나 지금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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