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41)

색기발랄 25 

......?

저거 지금 나한테 말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설마, 그럴리가 있나. 내가 여기에 있는 건 정소연밖에 모르는데.

숨을 죽인 채로 둘을 바라봤다.

어느새 허리를 꿈틀거리던 둘의 움직임은 멎어 있다.

"이제 내려와도 돼."

"네."

대답과 함께 정소연이 박우리의 몸 위에서 내려온다.

침대에 걸터앉아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다.

뭐야? 뭐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저 둘이 할 마음이 없다는 건 어느정도 예측하긴 했지만...

지금의 저 둘은 서로에게 관심이 없다는 듯 완전히 등을 돌리고 있다. 지금까지 위에 올라타서 골반을 부비적 거리던 것이 연기였던 것 처럼.

......

연기였던 것 같았다...?

설마, 정소연?

"...언제까지 그렇게 숨어있을 꺼냐. 니가 모습을 보이지 않고 뒤에서 이런 저런 궁리만 할수록 현아도 점점 너에게서 멀어질 꺼다."

"......"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역시 박우리는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등을 돌리고 앉아있던 정소연의 시선이 이쪽을 향해 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눈. 지금만큼은 저 눈빛이 소름끼칠 정도로 보기 싫다.

"니가 말한 재미있는 게 이거였냐?"

"...미안해요. 어쩔 수 없었어요."

"뭐가 어쩔 수 없는데. 둘이 짜고 날 엿먹이는게 어쩔 수 없어?"

정소연의 고개가 돌아갔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저 뒤통수를 후려 갈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법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지, 난 오빠가 시키는 대로 다 했어요. 오빠가 알고 싶어하던 것들, 우리오빠가 직접 하겠다고 해서 이렇게 같이 집으로 온 거에요. 우리오빠는 오빠랑 이야기하고 싶어했으니까."

"......"

박우리가 나랑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다고?

...내가 알고 싶어하는 것들에 대해서?

"사실대로 말하면 오빠는 우리오빠를 만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거짓말 한 거에요. 미안해요."

정소연의 뒤를 이어서 박우리도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그래. 다 내가 하자고 한 거다. 소연이는 잘못 없으니까 쟤한테 뭐라고 하지 마."

......

끼리끼리 논다더니, 서로 실드치느라 바쁘구만.

후우. 이젠 별 그지같은 걸로도 엿먹고 다니네. 그야말로 엿같은 기분이다.

뭐, 좋다.

이왕 병신된 거, 까놓고 얘기해 보자.

뭘 숨기고 있고, 뭘 하고 다녔는지, 현아는 뭐가 힘든건지.

캐낼 수 있는 건 전부 캐내 주겠다. 그래야 이 좆같은 기분이 조금이라도 풀릴 꺼 아냐?

"불 킬까요?"

"아니, 키지 마. 얼굴 보기 싫다."

진심이다.

진짜로 얼굴 보기 싫다. 정소연도, 박우리도.

어슴푸레하기 비치는 그림자만으로도 충분하다. 지금의 우리 사이를 대변하는 것 같아 마음에 든다.

"그래...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시길래 이렇게 사람 병신으로 만들면서까지 직접 행차하셨냐? 한 번 들어나 보자. 뭘 그렇게 많이 알고 있냐?"

"새끼, 며칠 안 본 사이에 많이 꼬였구만."

"누구때문에 말이다."

적당히 받아치고 나서 담배 하나를 꺼내 들었다. 잠깐 켜진 라이터의 불빛으로 박우리와 정소연의 표정이 스쳐간다. 착찹한 표정의 박우리와, 귀신같이 차가운 표정의 정소연.

정소연이 섞여 있다는 것을 자각하자, 지금부터 나올 이야기를 저 계집이 들어도 되는 것인지 살짝 고민이 됐다. 지금까지 만으로도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정소연이다. 필요 이상의 이야기를 들려줄 필요는 없겠지.

"...자리나 옮기자. 둘이서 이야기하는 편이 낫겠다."

내 말에 정소연이 즉각 대답했다.

"나 신경쓰지 말아요. 어차피 난 오빠들이랑 현아언니가 얽힌 일따위 아무래도 상관 없거든요. 내가 관심가지고 있는 건 오로지 하나에요. 그거 외에는 전부 관심없어요."

"...그렇다네. 그냥 여기서 얘기하자. 지금 시간에 뭘 또 어디로 가냐."

정소연의 대답에 박우리가 호응한다. 개놈들.

누워있던 자세에서 몸을 끌어올려 침대에 기댄 박우리가 주변을 두리번 거린다. 불도 안켜서 어두운데 뭘 찾고 있나? 

"앉을만한 의자 없어? 계속 침대에 있기 뭐한데."

"괜찮아요. 편한대로 있어요."

...처음 온 여자애의 집인데 저렇게 침대를 차지하고 있는게 민망했던 모양이다. 박우리라면 그럴 만도 하지.

이제 슬슬 물어볼까.

별로 오래 있고 싶지 않으니까.

"현아랑 만나서 뭐했냐."

"......"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제 나 몰래 현아랑 만나서 뭘 했는지, 일단은 그게 제일 궁금하다.

미동조차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박우리의 모습이 왠지 이상하다. 내가 어떻게 저걸 알고 있는지에 대해 물어야 하는거 아닌가? 

뭐... 상관은 없다. 정소연이 불었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정소연은 내 편이 아니라 박우리의 편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현아가 연락을 했어. 나올 수 있냐고 묻길래 시계를 봤다. 꽤나 늦은 시간이었지. 대충 현아가 무슨 생각으로 불렀는 지는 알고 있으니까, 시간은 별 상관 없다고 생각하고 나갔다."

예상대로다.

내 배웅을 받고 지하철을 탄 현아가 도중에 내려서 박우리한테 연락을 한 거다. 

"역 앞에서 만나서 한참을 돌아다녔다. 혹시 미행이 붙어있을까 싶어서 한 행동이었지. ...아, 소연이를 말한 건 아니다. 그 때의 난 소연이가 따라붙고 있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

"......"

아마 저건 모텔로 들어가기 전, 한 시간 정도 바깥에서 서성거린 걸 말하는 것 같다. 미행을 따돌리기 위해 돌아다녔다고? 정소연의 미행 말고도 또 다른 미행이 있었단 말인가? 그나저나 정소연이 미행한 것도 알고 있는 것을 보니... 역시 전부 다 말한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바깥에서 어느정도 시간을 보내다가... 모텔로 들어갔다. 당연히 알고 있겠지?"

"그래. 들어가서 뭐 했냐고 임마. 또 현아 땄냐?"

"잘 아네. 남자 여자 둘이서 모텔에 들어갔으면 떡치는게 당연하잖냐? 이건 내 생각이 아니라 현아 생각이다."

......

당연히 했을 꺼라 생각하고 있어서였나, 본인의 말로 들었음에도 별로 크게 와닿지가 않는다. 남친과 헤어지고 집에 가던 여친이 도중에 다른 남자를 만나서 모텔에 들어갔다, 여기서 추리할 수 있는게 하나 말고 뭐가 있겠어? 내가 저걸 알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지금 이 말을 들었다면... 아마 모텔 앞에서처럼 또 주먹이 날라갔을 지도 모른다.

"...너, 현아가 왜 나를 만나서 그런 짓을 했을꺼라 생각하냐?"

이번에는 박우리의 질문이다. 저 물음은 예전에도 한 번 들었던 적이 있다.

그 때의 박우리는 자신이 질문하고 자신이 대답했지. 현아가 박우리한테 끌리고 있으니 이렇게 접근하는 거다, 이미 마음은 자신에게 와 있는 상태다, 그따위 대답을 늘어놓았지. 그 직후에 내 주먹이 나갔고.

이번에도 그것을 강조하려는 건가?

이미 현아의 마음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현아는 이미 니 여자라고 말하고 싶은 거냐? 미안한데, 섹스 좀 한 걸로 마음이 그렇게 왔다갔다 하는게 아니거든. 현아가 말한 적 있지? 이런 변태같은 플레이 좋아한다고. 넌 그냥 그 플레이에 적합한 놀이대상이야. 알아듣겠어?"

녀석이 굴욕감을 느낄 수준으로 말을 뱉어냈다. 어쩌다 현아를 따먹은 것 정도로 착각하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를 담아서. 

내 대답에 박우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틀렸다."

"...죽어도 내 여자라고 인정 못하겠다 이거냐?"

"인정할 수가 없잖냐. 니 여자가 아닌게 사실이니까. 그리고 현아는 내 여자도 아니다."

......

또 이상한 말을 지껄이네.

내 여자도 아니고 박우리의 여자도 아니면... 뭐, 솔로냐?

"윤성현."

...윤성현?

박우리도 윤성현의 이름을 알고 있었나?

"지금의 현아는... 윤성현의 여자다. 그 플레이의 놀이대상은 내가 아니라... 바로 너다. 박을."

* * *

......

짧은 시간동안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지금 내가 뭘 들었는지 모를 정도로 혼란스럽기 그지 없다.

이야기를 털어놓은 박우리는 침대에 머리를 기대어 나름의 생각을 하는 중이다. 정소연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다.

...나도 다시 한 번 생각을 정리해 보자.

윤성현.

내가 알고 있던 그녀석은 현아의 소꿉친구이자 전 남자친구였다. 지금은 헤어진 상태고, 현아는 나랑 사귀고 있다.

그런데 박우리는 이것을 부정했다.

윤성현은 아직도 현아와 사귀는 사이라고 말했다. 내가 녀석을 처음 본 고등학교때, 빅엿을 먹었던 그때 당시부터 지금까지 주욱, 현아와 윤성현은 사귀고 있었던 거다.

물론 이것을 곧이 곧대로 믿기는 힘들다.

일단 박우리의 입에서 나온 말이고, 녀석은 나에게 몇 번이고 거짓말을 한 전적이 있으니까. 하지만 박우리는 현아 본인의 입에서 직접 들은 이야기라고 했다. 정 믿지 못하겠으면 현아에게 물어보라고 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는 믿지 않고 현아의 이야기는 믿을 수 있냐는 말을 했다.

...솔직히 나도 모르겠다.

박우리의 말은 믿지 않고 현아의 말은 믿는다?

아마 지금의 나라면 둘 다 무슨 소리를 한다고 해도 안믿을 것 같다. 박우리는 그걸 꼬집은 것 같다만.

일단 녀석이 진실을 말한다는 가정 하에 이야기를 들었다.

윤성현과 현아는 그 이상한 플레이를 즐기는 커플이었다.

이미 내가 고등학교때 그것을 경험했었지.

지금 내가 현아와 사귀는 건 그 플레이의 연장선이다.

고딩때와 마찬가지로 현아는 나에게 접근했고, 그 의도대로 사귀게 됐다.

즉, 현아는 자신의 진짜 남자친구인 윤성현과 짜고

나와 사귀는 척 하면서 그것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매일매일 찾아오는 것도 윤성현이 시킨 것이고,

외박 없이 꼬박꼬박 돌아가는 이유도 오늘의 플레이를 윤성현에게 보고하기 위함이다.

......

한마디로, 난 구제불능의 좆병신이란 소리다.

어느새 현아에게 진심을 가지게 됐던 나는 그저 변태 플레이에 적합한 놀이대상일 뿐이었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당할 정도로 어리버리한 호구왕이다.

박우리가 저기까지 말했을 때의 난 눈이 뒤집혀서 혀를 깨물 뻔 했다. 

지금 당장 현아를 찾아 가겠다면서 집을 박차고 뛰어나가려 했다. 정작 어디 사는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박우리는 간단하게 나를 제압했다.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면서.

녀석이 그 이후로 들려준 이야기는 나를 또다른 충격으로 내몰았다.

영락없는 변태커플로 생각했던 그 둘이었지만, 사실은 현아 역시 피해자라는 것이다.

그 이해하기 힘든 플레이는 사실 윤성현 혼자의 취향이었다고 한다.

현아는 거기에 말려든 것 뿐이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소꿉친구였고, 거기서 연인으로 발전한 사이라 현아 역시 그것에 영향을 받았다. 애인이 보는 앞에서 다른 사람과 즐기는 그 행위가 묘한 쾌감을 불러 온다고, 현아는 그렇게 말했다고 했다.

어느새 그런 플레이가 몸에 베여버린 현아였지만, 그 자신도 이것이 정상이 아니란 것을 인지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만 둘 수는 없었다. 윤성현은 여전히 그런 플레이를 고집했고, 현아 자신도 그것이 몸에 베여버린 지라 한 번 즐기기 시작하면 정신을 못차릴 정도로 빠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 플레이의 절정인 '나와 사귀어 봐라' 라는 말이 윤성현의 입에서 나오자, 현아는 더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단다. 하지만 현아는 반발하지 않고 순순히 그 말에 따랐다. 그 말대로 나와 사귀어 정말로 잘 되가지고 윤성현의 곁을 떠날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진행됐을 때, 나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싫으면 애초에 싫다고 하고 헤어지면 될 것을,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말이다.

그리고 이런 나의 물음은 박우리도 대답하지 못했다. 현아 본인에게서 듣지 않는 이상 박우리가 알 도리가 없겠지.

아무튼 현아는 그 윤성현의 지시대로, 그리고 윤성현과 끝을 내기 위해 나와 사귀기 시작했다. 하지만 잘 될 리가 없었다. 나와 알콩달콩하게 지내서 사랑에 빠져야 하는데, 정작 내가 현아를 별로 안좋아 했으니까. 그런 데다가 현아는 또 몸에 베인 그것 때문에 다른 남자한테 안기고 싶은 생각이 자꾸만 들고 있으니 산 넘어 산이었다.

그것을 못이기고 현아는 결국 박우리와 몸을 섞었다.

거의 끝나갈 무렵에서야 정신을 차려 박우리에게 화를 내고 쫓아냈지만, 얼마 후 박우리의 모텔로 찾아가 제대로 떡을 쳤다. 아예 작정하고 따먹히러 간 거다. 그리고 나서 박우리에게 모든 것을 털어 놓았다. 박우리가 나에게 들려준 이 이야기들도 모두 그 때의 현아에게서 나온 이야기란다.

현아는 윤성현의 곁을 떠나고 싶어한다.

그래서 박우리에게 도와달라고 했다.

나와 현아가 잘 될 수 있도록.

......

여기까지가 박우리의 이야기였다.

나름 생각을 정리한답시고 되짚어 봤지만, 전혀 정리가 되지 않는다.

일단, 나를 밑에 두고 첫번째로 떡친 건 그 플레이의 일환으로 벌어진 우발적인 섹스였겠지만, 박우리의 모텔로 찾아가 대준 건 계획적이었을 꺼라 생각한다. 박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일부러 대줬을 것 같다. 박우리도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아무튼 박우리는 그런 현아의 부탁을 수락했고, 다음날 정소연까지 합쳐서 넷이서 모텔에 갔을 때, 나를 불러내서 했던 말들도 다 저것의 일환이었다고 한다. 비록 박우리의 말 때문은 아니었지만, 어찌됐든 지금의 난 진심으로 현아를 생각하고 좋아하니까 현아의 바램대로 되고 있는 셈이다.

...솔직히 지금 내 안에 있는 것이 무슨 감정인지조차 모르겠다.

화가 나기도 하지만 뭔가 이해되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현아가 괘씸하다고도 생각되지만 한편으로는 안됐다는 생각도 든다.

안좋은 쪽으로 생각하자면, 현아는 오로지 자신의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 나와 박우리를 이용하고 있는거나 다름없다. 비록 나와 잘 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지만, 박우리가 말해주기 전까지 나는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그 상태로 쭉 이어져 정말 나와 잘 된다고 한 들, 그것이 잘 된거라고 할 수 있는 건가? 나를 매개체로 윤성현과의 관계를 끊어내는데에 성공한다면, 현아는 이용가치가 없어진 나를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박우리의 입장도 결코 순탄한 것이 아니다.

박우리 역시 현아를 좋아하는 한 남자로써, 나와 더불어 현아를 손에 넣기를 간절히 희망했던 녀석이다. 그런 녀석이 모든 사실을 제일 처음으로 전해듣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나와 잘 되게 해달라는 현아의 부탁까지 듣게 되다니. 도대체 저녀석은 무슨 생각으로 그 부탁을 수락했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좋다는 건가? 어찌됐든 현아라는 여자가 좋으니 일단 돕고 본다는 마인드?

저러한 사실들을 왜 내가 아닌 박우리에게 말했는지도 의문이다.

윤성현의 지시로 나와 사귀게 됐고, 현아 자신은 그것을 진짜 사랑으로 키워 윤성현의 마수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는 마음은 잘 알겠다. 하지만 그럴 꺼라면, 같이 걸어나가야 할 나에게 말했어야 하는거 아닌가? 어째서 박우리였단 말인가?

......

박우리의 이야기가 끝난 이후로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있다.

나는 물론이고 나머지 둘도 저마다의 생각에 잠겨 있는 듯 싶다.

박우리야 그렇다 치고, 저 사과머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전혀 상관도 없는 제 삼자가 듣기에는 어떨까? 역시 다들 병신이라며 혀를 찰까?

한 순간의 기분으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정보를 듣기 위해 왔다지만, 지금 들은 이건 상상 이상으로 너무 큰 이야기다. 좀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어제 현아가 널 불러낸 것도 그냥 니 얼굴이 보고 싶어서가 아니란 소리잖아."

마음 속으로 생각하던게 무의식적으로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내 말을 들은 박우리가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내가 보고싶어서 였으면 얼마나 좋았겠냐. 그냥 푸념이나 늘어놓을 겸, 답답해서 부른 거래. 겸사겸사 떡도 치고."

자신의 불행을 끝내는 데에 도움을 주는 박우리니까, 그깟 다리벌려주는 것 따위 현아에겐 아무 일도 아닐 것이다. 처음에 부탁하기 전에도 일단 따먹히고 시작했으니까. 그렇게 현아의 몸을 대가로 돕고 있는 박우리는 행복한 건가.

......

아니다. 지금은 한가롭게 남의 걱정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난 어떻게 하지?

이제부터 난 현아를 어떤 얼굴로 대해야 하지?

정말 유감스럽게도, 모든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현아를 향한 내 마음은 별반 달라진게 없다. 오히려 지금 당장이라도 그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몸이 으스러지도록 꼭 껴안고서, 그동안 나한테 말도 못하고 끙끙대느라 얼마나 힘들었냐면서, 그 얼어붙은 마음을 달래주고 싶다. 집에 가서 생각하면 또 열받을 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의 마음은 이렇다.

박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이 비밀을 나에게 털어놓은 것일까?

내가 이런 사실들을 알고 있는걸 현아한테 내색해도 될까?

현아는 내가 아닌 박우리에게만 이것을 말했다.

바꿔 말하면, 나에게는 들키고 싶지 않았다는 말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현아에게는 내색하지 않는 편이 나으려나?

본인의 입으로 더 자세한 내용을 듣고 싶기는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니 앞으로도 당분간은 조용히 현아의 옆에 있어주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윤성현의 집으로 찾아간 적이 있었다."

"......뭐?"

기습적으로 튀어나온 박우리의 말에 놀란 어투로 되물었다.

윤성현의 집에 간 적이 있었다고?

가만... 혹시 인천으로 갔다가 되돌아 온 그것을 말하는 건가?

"지금 생각하면 좀 어처구니 없지만... 그 때의 난 이렇게 흐지부지한 관계가 지속되느니 내 힘으로 이 악연을 끊어놓으려는 생각을 했었다. 윤성현을 죽기 직전까지 패버리고 다시는 현아의 그림자에도 얼씬하지 말라고 엄포를 떨면... 그럼 자연히 현아는 윤성현에게서 해방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지."

......

어처구니가 없다고?

난 좋은 생각이라고 보는데?

박우리의 싸움실력이야 옆에서 계속 봐왔던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영화처럼 17대 1같은 싸움은 무리지만, 아무튼 난 박우리가 싸움에서 지는 걸 본 적이 없다. 녀석이라면... 분명 윤성현을 떡으로 만들고 현아를 구해낼 수 있을 텐데...?

근데... 박우리는 윤성현의 집까지 알고 있었나?

난 현아의 집도 모르는데... 녀석의 정보망은 어디까지인 거냐?

이런 나의 물음에 박우리는 뒷통수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말 안했던가? 윤성현의 집은 현아의 집이야. 둘은 동거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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