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41)

색기발랄 21 

......

싫다고?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정소연이 나한테 싫다는 말을 할 리가 없는데?

나한테 푹 빠져있는 계집이니까 내 말이라면 뭐든 따라야 되는거 아니야?

"나 오빠한테 이러는 거, 을이오빠니까 이러는 건데요? 좋아하지도 않는 우리오빠랑 그런거 못하는게 당연하잖아요."

"......"

...뭘까. 왜 튕기는 거지?

아, 그런가. 역시 너무 성급하게 말을 해버린 거다.

집으로 부른 이유도 좀 더 친밀감을 느끼게 하려는 의도였는데, 저 하나가 방해를 해서 산통이 다 깨지는 바람에 섹스도 두 번 밖에 못하고 별로 유대감이 생기지 않은 거다. 좀 더 분위기를 잡고 애틋한 시선으로 말했어야 했는데... 이래서는 계획이 시작부터 삐걱거리게 생겼다.

쳇. 너무 만만하게 봤나? 정소연의 입에서 싫다라는 말이 나올 꺼라고는 전혀 생각치 않았는데. 지금까지 그 힘든 미행도 알아서 해올 정도로 나한테 절대적인 녀석이었으니 이번에도 당연히 오케이 할 꺼라고 생각했다. 젠장, 천하의 박을이 이런 실수를.

"미안해요. 오빠가 바라는 건 뭐든 다 해주고 싶은데... 그래도 그건 좀 그래요."

"......"

"잊었어요? 나... 오빠 좋아해요. 그 좋아하는 사람한테서 다른 남자랑 섞이라는 말 들으면 기분이 어떨지 한 번 생각해 봐요."

......

뭔 소리야. 지도 엄연히 남자친구란 녀석 달고 다니면서 무슨 순애파 흉내를 내고 있어? 이미 나 말고도 그 남친이랑 떡치고 다니는 주제에 깨끗한 척 하긴. 

어떡하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계획은 밀고 나가야 하는데...

정소연의 마음을 돌릴 만한 좋은 수단이 없을까?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어느새 정소연은 옷을 추스르고 자켓을 도로 입었다.

집에 가려는 건가?

"...오늘은 이만 갈께요. 왠지 기운이 없어졌어요..."

"소연아."

나가려는 정소연을 불러세웠다. 등을 돌렸던 정소연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정소연이 마음에 들어할 만한, 정소연이 좋아할 만한 말이 필요하다.

좋아하는 것이라면... 역시 섹스잖아?

하지만 그 좋아하는 것으로 여겼던 섹스는 오로지 나랑 하는 것만 좋아할 뿐이다. 다른 남자와 관계하는 건 싫어한다. 

그럼 다른거... 음...

나? 정소연은 나를 좋아하지?

나를 걸고 뭔가 말해볼까? 데이트? 아니야, 그걸로는 부족해.

정소연이 바라는 것, 진심으로 원하는 것...

"...일단 좀 앉아봐. 아직 이야기 안끝났어."

"......"

정소연이 내 옆에 앉았다. 꽤나 우울한 얼굴이다.

이제 저 우울한 표정을 싹 날려버릴 만한 말을 해주면 되는 거다.

"소연아. 우리가 처음 본 게 술집이었지? 그 때 화장실 가는 나한테 니가 말걸었잖아."

"......"

"그 때부터 지금까지 거의 매일같이 만나면서 같이 있었지. 가끔은 데이트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정소연은 아무 말이 없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묵묵히 듣고만 있을 뿐이다.

"비록 우리가 가볍게 만난 즐기는 사이라고는 해도... 난 너를 한 번도 가벼운 여자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 같이 있으면 즐겁고, 떨어져 있으면 보고 싶고... 이런 감정, 애인한테나 들 법한 거 아닌가? 어느새 나도 모르게 너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나 봐."

"...그렇게 생각한 여자한테 왜 그런 짓을 시켜요?"

아무 말이 없던 정소연이 갑자기 날 쳐다본다. 울려고 한다.

좋아. 감정이 고조되고 있는 모양이다.

"내가 아직 현아한테 마음이 남아 있어서 쉽게 내치지는 못하지만... 난 벌써 알고 있는지도 몰라. 진짜로 내 옆에 있어줬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나를 위해줬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말이야. 그래서 일부러 너한테 조금 거리를 두기도 했어. 가끔 모질게도 굴고 나쁜남자처럼 굴기도 했지만... 역시 마음이 바라고 있는 사람은 따로 있었던 걸지도 몰라."

"......"

"그 갈팡질팡한 마음을 니가 잡아줄 수 있지 않을까? 니가 하는 행동 하나 하나가 내 마음을 움직이니까 말이야. 조금은 우유부단한 내 마음을 잡아줄 수 있는 니 행동이라면... 아무리 둔한 나라도 내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

먹혔나? 먹혔을라나?

정소연이 지금 제일 바라는 건 아마도 나랑 사귀는 거겠지. 이런 섹파도 아닌 애인도 아닌 어중간한 사이보다 누구에게라도 떳떳하게 밝힐 수 있는 확실한 사이. 그런 걸 바라는 거다.

그러니까 그걸 걸고 넘어지면... 걸려들 수 밖에 없을 껄? 니가 도와주는 하나 하나가 다 내 마음속에 남아서 좋게 보고있다는 늬앙스를 품어서 말했으니까. 

"...정말이에요?"

나이스! 낚였구나!

"당연하지. 내가 아무리 나쁜놈이라고 해도 사람 진심 가지고 장난 안쳐. 지금은 내가 박우리때문에 열 받아서 이런걸 부탁한다지만, 앞으로 이런 부탁은 절대 없을꺼야. 나도 소연이같은 애가 박우리랑 어울리게 놔두고 싶지 않아.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여친이라고 있는걸 모텔로 휙 데리고 가는 녀석이니까. 어떻게 해서든 매듭을 지어야 하지 않겠어? 박우리를 엿먹이고 현아를 내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야."

"......"

"그리고... 그 때가 되면 나도 비로소 알게 되겠지. 그동안 니가 나한테 얼마나 잘해줬었는지. 정말로 내가 곁에 두고 싶어했던 여자가 누구였는지... 니가 알게 해주지 않을래?"

......

말하는 내내 오글거려서 토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먹힌다. 이거라면 분명 먹혔다.

옆에 앉아있는 정소연의 얼굴을 힐끔 살폈다.

뭔가 굉장히 고심하고 있다. 살짝 깨물려진 입술이 뭔가를 말할 듯 열리려고 한다.

"...알았어요."

됐다. 공략 끝. 게임오버.

"그치만, 조건이 있어요."

...어? 조건?

"오빠 말은 충분히 알아들었지만, 그걸로는 모잘라요. 그런 두리뭉실한 말로는 언제든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갈 수 있는게 을이오빠잖아요?"

"......"

"확답을 듣고 싶어요. 만약 내가... 우리오빠한테 접근해서 오빠가 원하는걸 해온다면... 이번에야말로 나랑 사귀는 거에요. 오빠가 거절한다면 나도 없던걸로 할꺼에요."

......

정소연도 꽤나 고단수로 나오는군.

침착해라. 이미 다 된 밥이다. 어떻게 먹냐의 차이일 뿐이지.

"알았어. 애초에 처음부터 이렇게 말하는게 더 좋았겠지만... 나랑 사귀는걸 조건으로 너한테 부탁하면 너무 속물처럼 보일까봐 그렇게 말 못한거야. 니가 스스로 그렇게 말해 줬으니까 나도 더 숨기지 않아도 되겠지? 이번 일만 잘 되면... 우리는 이제 애인이야. 약속할께."

말은 저렇게 했지만, 난 정소연이랑 사귈 생각따위는 없다.

물론 현아가 없었으면 정소연은 예전부터 내 여친이었겠지. 너보다 더 우월한 현아를 원망해라.

빠져나갈 구멍이야 당연히 있다. 

계획대로 박우리를 엿먹이고 필요한 걸 다 빼온다면, 그 때에는 다른 핑계를 대거나 아니면 정소연을 버리는 방법도 있다. 이미 거기까지 진행됐으면 더이상 정소연은 필요 없으니까. 나중에 귀찮은 존재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니 아예 버리는게 더 좋겠지. 이 계집은 필요 이상으로 많은 걸 알고 있기도 하니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정소연이 우물거리듯이 말했다.

"...오빠는 괜찮아요? 내가 우리오빠랑... 섹스해도..."

"어?"

"오빠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오빠도 나한테 똑같이 그럴텐데... 우리오빠가 만져주는 대로 흥분할 꺼고... 우리오빠가 싸주는 정액이 내 안으로 가득 들어올 텐데... 그래도 상관 없어요...?"

......

말하는걸 들어보니 지금이라도 그 생각을 바꾸라고 우회에서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일을 당하는 자신을 생각해 보라면서 말이지. 근데 미안하지만, 전혀 상관없다.

"...나도 가슴아파. 하지만 꼬인 매듭을 풀어야 다시 시작하는게 쉽잖아? 당연히 그 같이 시작하는 옆에는 니가 있을꺼야. 절대로 혼자두지 않을꺼니까, 걱정하지 마."

"......"

드디어 정소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이상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는 듯 보인다.

"...안아줘요."

"응."

"그거 말구요. 해달라구요. 오빠꺼 받고 싶어요."

바라는 대로 해줬다. 

이번에는 예전처럼 거칠게 하지 않고 부드럽게 다뤘다. 마치 현아한테 하듯이, 발 끝에서부터 하나 하나 정성스레 만져주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안겨지는 기분이 들게끔. 이렇게 해줬으니 아마 정소연도 완전히 내 말을 믿었겠지?

상당히 부드럽게 움직였는데도, 어째서인지 정소연은 나를 끌어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 * *

정소연이 돌아갔다.

돌아가기 전, 정소연은 하나의 방에 들러 다음에 또 오겠다며 얼굴 도장을 찍고 갔다. 떡치기 직전의 모습을 들켰으니 민망할 법도 할 텐데, 저렇게 대놓고 또 오겠다는 인사를 할 필요가 있나? 거기다 대고 하나는 다음에 오면 같이 야동보자면서 이상한 배웅을 했다. 하여튼 내 주변엔 정상이 없다.

뭔가 태풍이 지나간 것 같은 기분이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난관에 부딪쳐서 그걸 해결하느라 진땀을 뺐지. 정소연이 거절하는 모습따위는 생각치도 않았는데. 쓸만하긴 하지만 역시 곁에 두고 있으면 있을수록 귀찮은 여자다.

......

자... 그럼.

현아를 만날 준비를 해볼까?

시간이 조금 빠듯하다.

아직 현아한테서 연락은 안왔는데... 조만간 올 것 같다. 현아는 출발 전에 연락하지 않고 도착하고 나서 연락하니까. 그렇게 지멋대로 이쪽으로 넘어와서 연락하고는 왜 늦게 왔냐면서 꼬라지 부리는게 현아다. 당연히 정상이 아니지.

대충 샤워만 하고 나와서 옷을 고르고, 머리좀 만지다가 보니 여섯시가 넘었다. 

아직 현아한테서 연락은 없다. 흠... 오늘은 조금 늦을라나?

일단 보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제 현아가 박우리랑 모텔에 간 건 나는 모르는 척 해야 한다. 현아는 당연히 내가 자기를 배웅하고 집으로 간 줄 알고 있을테고, 그리고 나서 안심하고 박우리를 만나서 모텔로 간 거다. 그러니 거기에다 대고 모텔이야기를 하는 건 자폭이다.

하지만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고 평소처럼 데이트를 하는 것도 내키지 않는다. 나를 두고 딴 남자랑 몰래 모텔에 갔다는 사실이 괘씸하니까. 비록 내가 현아랑 헤어지려는 생각은 안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열이 안받는 것도 아니다. 분명 그 때 나한테 '진심으로 나랑 사귀고 싶다'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는데 말이야. 

뭔가... 알고 있는 척을 해볼까?

가슴에 찔릴 만한 대사를 툭툭 던져서 말이지. 그러면서도 무심한 척 평소대로 행동하는 거다. 그럼 현아 입장에서는 내가 뭔가 알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해서 행동이 조심스러워지지 않을까? 자연히 다음에 박우리를 만난다던가 그런 것도 꺼려지게 될 테고. 어쩌면 다시는 박우리 만날 생각을 안할지도 모른다.

솔직히 박우리를 제외시키면 그 다음은 현아 차례라고 생각은 했지만... 내가 무슨 수로 현아를 이기겠어. 그저 다른 남자한테 못가도록 최대한 붙들고 있는 수 밖에 없지. 그 다른 남자한테 안기는 이상한 플레이도 못하도록 자제시키면서 말이야. 그걸 못하게 하면 내 즐거움도 하나 사라지는 거지만, 현아가 바깥으로 나도는 것 보다야 나으니까 비교 대상은 아니다.

......

갑자기 든 생각인데, 어제 내가 세웠던 가설대로 만약 현아가 지금까지 박우리를 만나지 않고 있다가 어제 만난 거라면, 아마 그 이유 중 하나는 내가 아니었을까? 매일 똑같은 얼굴 보기도 지겨울지도 모를테고, 같은 자지만 달고 살으니 다른게 먹고 싶을지도 모르잖아? 나도 현아만 먹는게 조금은 지겨워져서 정소연을 같이 먹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저 말대로라면 현아가 매일같이 나한테 올 이유가 없는데. 내가 좀 지겨워 졌다면 이렇게 매일 올 리가 없잖아? 근데 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안빠지고 매일같이 나한테 왔다. 진짜로 사귈 때가 아닌, 술먹고 떡쳐서 사귀던 그 시절부터 말이다. 흠... 그럼 내가 지겨워진건 아니라는 소리겠지? 

...그러고 보니 오늘은 데이트 계획도 못세웠구나. 생각치도 못하게 정소연이랑 씨름을 하느라 미쳐 그 생각을 못했다. 오늘은 그냥 현아가 끌고 다니는 데로 휘둘려줄까... 

...흠.

이상하다. 왜 연락이 안오지?

벌써 여덟 시가 다됐는데...

지금까지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는데...

어디 아픈가? 지금의 현아라면 못오면 못온다고 이야기라도 해 줄...

......

잠깐.

오늘은 평소의 오늘이 아니다.

나를 뒤로 하고 박우리와 같이 밤을 보낸 후의 다음 날이다.

에이, 아니겠지.

어제 박우리를 만나서 몇 번을 쳐댔다고 해도 그걸로 끝났을꺼 아니야?

둘이 사귀게 됐다거나 날 버렸다거나, 그런 건 말도 안됀다.

나중에라도 또 둘이 만나서 떡칠지 모르지만,

그 둘은 원래 그런 사이잖아?

나를 버려두고 지들끼리 사귈 리가 없잖아?

그리고 난 그걸 못하게 하려고 이렇게 준비중인 거였잖아?

...근데 여기서 이렇게 둘이 눈맞아서 내가 버려지면...

이건 정말로 계획에 없던 일이라고.

......

현아한테 연락 해볼까? 

지금 어딘지, 왜 아직 안오는지...

요즘 환절기라서 감기몸살이 심하던데,

혹시 감기라도 걸려서 몸져 누운건 아닐까?

침대에 누워서 콜록대면서 말이야, 그러면서도 나한테 가야 하는데... 하고 중얼거리면서 그렇게 앓고 있는거지. 이런, 얼른 약 사가지고 가봐야 하잖아. 남자친구가 돼가지고 이런 것도 신경 못써주고.

......

후우. 아무리 다른 생각으로 덮으려고 해도 도저히 진정이 되지 않는다.

벌써 몇 번째 전화를 돌려보고 있지만 받을 기미가 안보인다.

이럴 수는 없는거다. 그 둘이 나 몰래 만난 것 까지는 아무래도 좋지만

이렇게 갑자기 연락도 끊어지고 모습도 안비치는 건...

박우리. 박우리한테 연락해 볼까?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녀석한테 연락할 수는 없다.

그 때 이후로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는데... 이런 일로 연락한다는 것 자체가 웃음거리가 되는 거다. 만약, 그럴 리는 없겠지만, 정말로 현아가 지금 박우리와 함께 있다면... 녀석은 그야말로 병신이라면서 쳐 웃을꺼라고. 

디이이잉.

...문자가 왔다.

누구지? 당연히 현아겠지?

늦어서 미안하다고, 지금 가는 중이라고...

[사과머리]

...정소연.

이 사과대가리가 왜 지금...

[오빠, 나 지금 우리오빠 만나고 있어요. 잠깐 짬나서 연락했어요. 우리오빠 만나고 있지만 마음은 을이오빠 생각하는거 알죠? 헤헤. 잘자요.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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