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기발랄 19
[듣고 있어요? 지금 우리오빠랑 현아언니랑 같이 있다니까요?]
......
아, 그래.
아주 잘 들린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 둘은 몰래 만나는 사이였다는 거잖아?
"...거기가 어디야?"
[여기 신천역 쪽이에요.]
...내가 현아를 바래다 준 지하철역은 잠실역이었다.
내가 사는 곳이 여기니까.
그럼, 현아는 내 배웅을 받고 잠실에서 지하철을 탄 다음,
한 정거장만 움직이고 내려서 박우리를 만났다는 거다.
"걔네 둘 언제 만난거야? 지금?"
[만난 건 조금 전인데... 우리오빠 따라서 미행하다 보니까 현아언니를 만나더라구요. 역 앞에 서있는 현아언니한테 손 흔드는걸 봤어요.]
......
현아를 보내고 내가 잠든 시간이 대략 1시간 정도.
잠실에서 신천으로 가는 시간은 넉넉하게 잡아도 5분.
정소연의 말대로 지금 만났다면, 현아는 5분 정도를 이동하는데 쓰고
나머지 55분 정도를 기다리는데 썼다는 말이 된다.
만약 현아와 박우리가 사전에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면,
이렇게 기다리는 시간이 오래 걸릴리가 없겠지.
하지만 현아는 박우리를 50분 가량이나 기다렸다.
그렇다는 건... 사전에 만나기로 되어 있던 약속이 아니라는 소리다.
현아와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50분이나 길거리에 방치하게 둘 박우리도 아니다. 아마 우발적으로 현아가 박우리에게 연락을 했을 것이다. 지금 나올 수 있느냐, 이런 식이었겠지.
[이제 어떡해요? 여기 안올꺼에요?]
"......"
그 쪽으로 간다라...
내가 가면, 그 이후엔 뭘 해야 하지?
아직 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만나기만 했을 뿐.
만나는 것 정도야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달려가 '너희 여기서 뭐하는 거냐'라고 말해봐야
전혀 먹히지 않을 말이 된다.
......
좀 더, 확실한게 필요하다.
비로소 내가 움직일 만한 증거. 그 확증적인 증거가 필요하다.
조금 더 정소연을 굴려보도록 하자.
"...조금 더 그 둘을 지켜봐. 어디로 가는지, 뭘 하고 있는지 주시해서 나한테 연락해."
[...네? 오빠...]
띡.
통화 종료를 터치했다.
정소연에겐 더이상 나와 통화할 시간조차도 아깝다.
조금이라도 더 그 눈으로 현아와 박우리가 뭘 하는지 지켜봐야 하잖아?
담배. 담배가 어딨더라.
젠장, 다 폈던가? 사둔 것도 없는데...
......
니코틴이 모자라서 그런가, 불안한 마음이 진정되질 않는다.
이런 때일수록 그저 차분히 생각하는 것만이 유일한 안식이다.
확실한 건, 현아는 나와 헤어지고 박우리를 만났다는 거다.
이유가 뭐든 지간에 이건 절대로 변명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언제부터 이렇게 따로 만났는지도 모를 일이다.
발각된 것은 오늘 처음이지만, 어쩌면 현아는 이 전부터 계속
내 눈을 피해 박우리를 만났을 지도 모른다.
...아니, 그건 아닌가.
예전부터 주욱 이렇게 만나오던 사이라면
오늘 현아가 50분 가량이나 박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이유는 없지.
그렇다면 나를 속이며 만나왔다는 가설은 일단 힘이 떨어진다.
그럼 새로운 가설을 세워 보자.
박우리와 싸웠던 그 날 이후로 현아는 박우리와 만난 적이 없다.
그러다가 오늘, 돌발적인 현아의 연락에 박우리가 나오게 됐다.
녀석이라면 지금 쯤 자고있었을 테니까 나오는 시간이 늦어졌을 수도 있다.
아니면 이렇게 자신을 불러낸 현아에 대해 이것저것 생각하느라 시간을 잡아먹었을 수도 있겠지.
......
이 쪽의 가설이 왠지 신빙성이 있게 느껴진다.
현아가 50분 가량이나 기다린 이유도 설명된다.
하지만... 만약 이 가설대로라면
현아는 50분이란 시간을 소모해서라도 박우리를 기다릴 필요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지금 시간이라면 더이상 대중교통은 다니지 않는다.
여기서 인천까지 가는 시간을 고려하면 막차도 아슬아슬한 거리다.
조금 여유를 두고 지하철을 타야 갈아타는 도중에 차가 끊기지 않게 된다.
하지만 현아는 막차가 끊기는 시간이 지나도록 박우리를 기다렸다.
이건 무엇을 뜻하는가?
현아는 이미 차가 끊기는 것은 안중에 없다는 소리다.
왜냐.
박우리와 함께 밤을 보낼 것이기 때문에.
......
무섭도록 정확한 가설이다.
이미 이것이 기정사실인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설은 가설.
두 눈으로 똑똑히 보여줄 수 있는 증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증거를 현아에게 내밀어 일말의 반박조차 허락치 않게 한다.
다시는 박우리의 그림자 옆에도 얼씬하지 못하도록,
이것을 반면교사로 삼아 현아를 붙들어 맨다.
현아는 그 누구에게도 줄 수 없다.
박우리든, 윤성현이든.
* * *
늦다.
정소연에게 연락이 온 이후로 한시간 가량이 지났는데, 아무런 연락이 없다.
미행은 잘 하고 있는 건가?
혹시 들켜버린 건 아닌가?
그것도 아니면... 통화를 끊어버린 나에 대한 반발로 미행을 포기한 건가?
아니, 그럴리는 없다.
정소연은 이미 몸과 마음이 전부 나에게 길들여진 계집이니까.
싫어하는 척 하면서도 결국엔 내 말을 따른다.
왜냐고? 정소연은 날 좋아하니까.
디이이잉─
보라. 이렇게 연락이 왔지 않은가.
여자 후리는 건 일도 아닌 이 박을님이 이런 꼬맹이 하나 구워삶지 못했을 리가 없잖아?
[오빠.]
"응. 어떻게 됐어?"
[들어갔어요.]
"...뭐를?"
[모텔이요. 조금 전에 둘이 모텔 들어가는거 봤어요.]
......
드디어 올 것이 왔나.
빼도박도 못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나온 건가.
결국 현아는...
박우리가 쑤셔주는 그 맛을 잊지 못한 거였나?
이렇게 갑작스레 연락해서 박우리를 불러낼 정도로 그 좆맛이 좋았던 건가?
...일단 몇 가지 물어보자.
"조금 전에 들어갔다고? 지금까지는 둘이 뭐했는데?"
[밖에 있었어요. 역 근처에서 계속 빙빙 돌면서 이야기 하더라구요.]
흠...
이미 모텔에 들어갈 것이 확실했을 텐데,
굳이 밖에서 서성거렸을 필요가 있었나?
"어느 모텔로 들어갔어? 몇호실?"
[...그런 것 까지는 몰라요.]
역시 거기까지가 한계인 건가.
카운터로 가서 방금 올라간 둘이 어느 방으로 갔냐고 묻는다면,
대다수의 주인아저씨들은 알려주지 않으려 한다.
시끄러운 일이 벌어질 위험이 크기 때문이지.
[혹시나 싶어서 둘이 모텔로 들어가는거 영상으로 찍었어요. 통화 끝나면 보내줄께요.]
......
이건 생각치도 못한 수확이다. 그야말로 눈에 보이는 증거 그 자체다.
역시 예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꽤나 영리한 녀석이다.
그 맹해보이는 얼굴과 귀여운 인상에 깜박 속을 뻔 하기도 하지만,
정소연의 속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하고, 교활하다.
[이제... 어떡할까요? 더이상 여기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왜?"
일부러 왜냐고 물어봤다.
모텔에 들어간 둘을 보고 정소연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 반응이 궁금해서였다.
[...현아언니는 우리오빠랑 섹. 스할테니까요. 몇 번이고 하고 또 하겠죠. 현아언니는 날이 새는지도 모르고 우리오빠한테 실컷 따. 먹. 힐 꺼에요. 그러니 더이상 여기 있을 필요가 없어요.]
......
정소연은 적나라할 정도로 구체적으로 대답했다.
현아와 박우리는 오로지 떡치러 들어간 거라고 의도적으로 말한 거다.
내 뇌내에 똑똑히 새겨지도록.
[보니까 오빠도 여기 올 것 같지는 않네요. 그럼 난 영상도 찍었고, 할 일은 다 한거죠?]
"...그래. 고생했어. 내일 보자."
짧은 통화가 끝났다.
그리고 잠시 후, 정소연이 보낸 영상이 하나 도착했다.
...나란히 걷고 있는 현아와 박우리의 모습이 영상에 담겨 있다.
팔짱을 낀다거나 밀착해 있는 모습은 아니다. 그저 담담하게 걷고 있다.
그렇게 걷던 둘은 어느덧 한 모텔 앞에 멈춰섰고, 주위를 둘러보는 현아의 움직임에 영상이 잠깐 흔들렸다. 이쪽을 들킬까봐 촬영을 중단하고 숨은 모양이었다. 다시 들어올려진 화면에는 이미 모텔 안으로 들어서는 둘의 모습이 나오고 있다. 조금이긴 하지만, 현아가 앞서서 걷고 있다.
......
다시 생각해 보자.
가설대로라면 박우리를 불러낸 것은 현아다.
차가 끊기는 것도 개의치 않고 박우리를 불러내 모텔로 데리고 갔다.
저 앞서서 걷고 있는 현아의 모습으로 보아 그것을 유추할 수 있다.
...예전에 한 번 했던 생각이지만,
박우리와 얽힌 현아는 거의 대부분 현아 스스로 박우리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현아는 박우리에게 접근했다.
혹시 현아는...
나와 박우리를 사이에 두고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건 아닌가?
박우리 역시 현아에게 마음이 있고,
그런 박우리를 내치지 못한 현아가 오히려 끌려버린 거다.
내가 없었다면 그대로 박우리와 사귀었겠지만...
내가 있는 탓에 대놓고 사귀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나와 헤어지고 박우리와 사귀는 것도 아니다.
나도 마음에 들고, 박우리도 마음에 드니까 둘 다 취한다.
이것이 지금의 현아가 가진 생각이 아닐까.
하지만 이런 방식을 박우리가 용납할 것 같지는 않다.
녀석은 나, 아니면 자신.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강요할 타입이다.
분명 그 때의 박우리는 그런 말을 했다.
빼앗기기 싫거든, 나 스스로 지켜내라.
여러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한 남자의 여자라는 것을 전제로 한 이야기다.
즉, 나랑 사귀면서 자신도 만나는 현아를 용납할 리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 박우리의 성격을 감안한다면...
현아가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는 것은 조금 설득력이 떨어지겠지.
양다리를 걸치게 할 바에는 박우리가 전력을 다해서 현아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 것이다.
......
생각이 막혔다.
더이상 내가 가진 정보로 추측하는 것은 여기까지가 한계인 듯 싶다.
그렇다면... 조금 더 알아내 보자.
정보를 캐내는 것은 수월할 것이다.
먹이를 주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강아지가 옆에 있으니까.
* * *
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는데도 어느새 나는 잠들었었고, 또 일어났다.
그것도 꽤나 깊이 잠들었던 모양이다. 아침부터 오기 시작한 정소연의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들이 가득 쌓여 있다.
혹시나 박우리와 현아에 대한 또다른 정보일까 싶어 메시지들을 훑어봤지만, 왜 전화 안받냐는 투정밖에 없다. 아마 정소연도 어제의 그 시점에서 철수했으니 별다른 정보는 가지고 있지 않을꺼다.
느긋하게 준비를 하고 평소에 정소연을 만나던 시간 즈음, 연락을 했다.
[오빠, 왜 이렇게 전화를 안받아요?]
"잤어."
[...오늘 나랑 데이트 하는거 아니였어요?]
......
아침부터 데이트 할 생각으로 그렇게 전화를 했던 거였군.
확실히 정소연은 약속을 지켰다.
두리뭉실한 정보가 아닌 제대로 된 정보를 나에게 줬다.
증거 영상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그러니 나도 약속대로 데이트를 해줘야 맞는 거겠지.
근데 그게 오늘이라는 말은 안했잖아?
"아... 미안. 오늘 바로 데이트하자고 할 줄은 몰랐지. 내일이라도 할까?"
[...하여튼 오빠는 이래서 안돼요. 내가 옆에 붙어서 하나 하나 말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해. 그럼 데이트는 내일로 미루고... 지금 그쪽으로 갈께요.]
......
이번에는 이 꼬맹이가 먼저 끊어버렸다.
어제 내가 그렇게 끊어버린 것의 복수인가?
가만 보면 정소연도 꽤나 자기중심적이다.
현아가 박우리랑 모텔 들어가는걸 알려줘 놓고선 그 다음날 보란듯이 나랑 떡치러 오는게 말이 안돼잖아? 내 기분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저 자기만 기분좋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지.
뭐, 그런걸 신경쓰는 내가 아니니 별 문제는 없다.
어쩌면 정소연도 내가 이런 성격인 걸 알고 있으니 이렇게 나오는 걸지도 모르지. 상당히 치밀하고 계산적인 녀석이니까.
...현아랑 박우리는... 당연히 끝까지 갔겠지?
예전의 나였다면 그 둘이 떡치는 장면을 생각하면서 딸이라도 쳤을 테지만...
둘이 같이 잔게 100% 확실시 된 지금에서는 별로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미칠듯이 열받는다거나 박우리를 때려죽여야 겠다거나 하는 생각도 안든다.
그저 머릿속이 공허하게 돌아갈 뿐이다.
어떻게 박우리를 엿먹여서 현아 옆에 못오게 할까.
어떻게 현아를 교육시켜야 다른 남자랑 잘 생각을 못하게 할까.
......
박우리를 엿먹인다. 현아의 옆에 얼씬도 못하게 한다.
녀석은 외압적으로 꺽을 수 있을 만한 놈이 아니다. 다른 수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스스로 자괴감에 빠져 현아 얼굴을 못보게 만드는 쪽이 좋겠군.
박우리를 리스트에서 제외시키면, 현아는 그 다음이다.
......
이쪽에 도착했다는 정소연의 메시지가 왔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가끔은 귀찮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계집이다.
아무 생각없이 따먹기에도 좋고, 전부 안에 싸재껴도 된다.
미행같은 것도 할 줄 아는데다가 증거영상까지 물어온다.
정말 맘에 드는 꼬맹이다.
이렇게 속이 꽉 찬 여자를 딴 놈한테 뚫리게 하는 건 조금 아깝다는 생각도 든다만...
역시 정소연만한 계집이 없다.
박우리에 대한 정보도 캐올 겸, 그 낯짝을 못들게 하는 수단으로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