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기발랄 13
밖으로 나왔다.
카운터를 슥 지나 밖으로 나가려니, 주인아저씨가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본다. 남자 둘 여자 둘 이렇게 들어갔으니 지금쯤 둘씩 나뉘어서 짝짓기라도 하고 있어야 정상 아니냐 하고 묻는 눈이다. 물론 나도 그게 정상이라고 생각했는데, 박우리가 정상이 아닌 모양이다.
금방 들어올꺼라는 말을 남기고 모텔의 문 밖으로 나갔다.
뻘쭘한 분위기에 담배나 태우려 담배갑을 꺼내니, 박우리가 손을 내민다.
"나도 하나 줘라."
"...너 담배 끊었지 않냐?"
"그냥 오늘은 좀 땡기네."
......
담배 한개피를 받아 입에 문 박우리가 탁탁 하고 불을 붙힌다.
스읍 하고 숨을 들이마시더니, 곧 머리를 흔들며 중얼거린다.
"오랜만에 피니까 어지럽네."
"......"
"시가3? 너 아직도 이거 피냐?"
"어. 2500원짜리 중에서 제일 낫더라."
의미없는 말이 오고 간다.
이런 이야기나 하려고 부른 건 아닐텐데. 왜 이렇게 뜸을 들이냐.
어느덧 박우리의 담배는 꽁초만 남기고 다 타버렸다.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던 박우리가 바닥으로 휙 떨어트리며 다시금 손을 내민다.
"하나 더 주라."
"......"
"아깝냐? 돈 줄께 임마."
"...아니다."
박우리에게 다시 담배를 하나 건네주고, 나도 하나 꺼내서 입에 물었다.
타들어가는 담배처럼 내 마음도 타들어간다.
얼른 뭐라도 말해라 임마.
"...현아랑 했다."
"...쿨럭!! 쿨럭콜록!!"
담배를 빨아들이다가 사레가 들렸다.
"지금 뭐라고?"
"현아랑 잤다고. 너 그 방에 가있는 사이에."
......
두번째 말을 듣고 나서야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심장이 덜컥거리는 느낌. 숨이 멈춘 듯한 느낌.
아랫도리가 꿈틀거리는 느낌.
이거다.
이 느낌이 참을 수 없을 정도의 희열을 가져다 준다.
당장에라도 자지를 꺼내 잡고 흔들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린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조금 빗나간 상황이다.
시간을 맞추지 못해 그 둘이 뒤섞이는 장면을 보지 못한 것도 그렇지만,
어째서 박우리가 성현아와 뒹굴었다는 사실을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지?
명색이 난 성현아의 남자친구인데.
내가 아무 말이 없자, 박우리는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고는 한숨처럼 내쉬었다.
"...자다가 눈 떠보니까 현아가 내 옆에 안겨있더라. 그리고 너네 둘은 보이지도 않고."
"......"
"내가 깨서 부스럭거리니까 현아도 눈 뜨더라. 그리고 같이 침대에 누워있는거 보더니, 넌 어디갔냐고 묻더라. 당연히 모른다고 했지."
......
저기까지는 내가 의도한 상황이랑 딱 맞는데 말이야.
저렇게 안겨서 자다가 눈 떠가지고, 이제 거기서 빠바박 했다는 말이잖아?
"모른다고 하긴 했는데, 척 하면 딱이잖아. 너랑 같이 소연이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점점 타들어가는 마음에 나도 모르게 다음을 재촉했다.
"그래서는 뭐 임마. 좀전에 말했잖아."
"했다고?"
"어."
"뭐... 어떻게? 갑자기 하진 않았을꺼 아니야. 어떤 이야기가 나왔다던가... 어떻게 했다던가..."
......
알고 있다.
내가 정상적인 성현아의 남친이라면,
저런 대사가 나오는게 아니라 주먹부터 날라가는게 맞겠지.
근데 난 정상도 아니고, 성현아의 남친인지 뭔지도 햇갈린단 말이다.
지금의 난 그저 저 둘이 어떻게 떡쳤는지, 몇 번이나 했는지,
안에다 쌌는지, 이런게 궁금할 뿐이라고.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는데 그게 물건너 갔으니 어쩔 수 없잖아?
"......"
박우리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뭐지? 왜 쳐다보...
아, 그런가.
녀석도 내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다.
정상적인 반응이 나오는게 아니라 이상한걸 물어보고 있으니...
조금 화를 내는 척 했어야 했나?
"...현아가 내 위로 올라탔어. 그리고 그 상태로 바로 넣었다. 당연히 잘 안들어갔는데, 조금 움직이다 보니까 금방 젖어버리더라."
"...그래서?"
"...니가 옆방에 있는거 알고 있을텐데, 소연이랑 뭔가 하고 있는거 눈치챘을 텐데. 왜 그 방에 안 쫓아가고 내 위에 올라탔을까?"
"......"
"...그것 뿐만이 아니야. 넌 모르겠지만... 아까 술집에서도 너희 둘 몰래 현아가 내 자지잡고 흔들기도 했어. 아무리 테이블 밑이라도 사람들 다 있는 장소에서 그랬다고. 왜 그랬을까. 넌 아냐?"
......
가만, 가만.
잠깐 생각할 시간을 줘.
성현아가 박우리를 잡고 흔들었던 건 당연히 나도 본거다.
이렇게 폰에도 영상으로 찍혀 있지.
근데 그걸 스스로 말 할 줄이야. 그럼 이건 더이상 쓸모가 없어지잖아?
그리고 다음...
내가 정소연이랑 같이 저쪽방으로 넘어가서 떡치고 있는걸 알면서도
그걸 방치하고 박우리의 위로 올라갔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
내가 정소연과 쳐대고 있으니 자기도 박우리랑 즐기겠다는 뜻인가?
아니면 니가 이렇게 방치하니 박우리랑 논다 하는 질투유발?
......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처음 만났던 술집에서 박우리를 만날 때,
성현아는 사귀는 사이를 비밀로 부치고 박우리에게 접근했다.
그 날, 모텔에 간 직후,
박우리에게 넣어달라고 허락한 것도 성현아였다.
다음 날, 자신을 부르는 박우리의 연락에
성현아는 나를 두고 박우리의 모텔로 갔다.
그리고 그 날 술집.
테이블 아래로 내가 본 것은 박우리를 만지고 있는 성현아였다.
그리고 조금 전.
내가 옆방에서 정소연과 떡치는걸 알면서도 박우리의 위로 올라갔다.
......
생각에 잠겨있을 무렵, 박우리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모르겠다면 내가 말해볼까? 현아는... 이미 나한테 마음이 생긴거다. 이유야 어쨌든 몸은 너랑 사귀고 있지만, 마음은 나한테 와있는 거지. 그리고 그 마음의 표현을 이렇게 하고 있는 거다. 어때? 그럴싸 하지 않냐?"
박우리의 말에 나는 어느새 피식 웃는 모양새를 만들고 있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그럼 왜 니가 고백했을 때 꼬라지내면서 차버렸겠냐?"
"왜였겠어. 그땐 니가 있었잖아. 남친이라는게 밑에 있는데 대놓고 수락할 수는 없잖아?"
......
이건... 열받는 말이다.
성현아가 박우리에게 빼앗겨 가는 모습을 즐기고는 있었지만,
이런 식은 아니다.
내가 원하는 건 그 음란한 육체가 박우리의 배 밑에 깔려서 허우적거리는,
그러면서도 자극을 참지 못해 받아들이는, 그런 걸 원했단 말이다.
이딴 치정싸움이나 하자고 내가 지금까지...
"잘 생각해 봐. 그날 밤에는 분명 나한테 그렇게 소리쳤지만, 다음날 현아는 내가 부르니까 쪼르르 달려왔었어."
"...그 때 니가 또 고백했다고 했었지. 근데 현아가 거절했다고 하지 않았냐? 나밖에 없다고 그렇게 말했..."
풉, 소리가 난다. 웃은 건가?
"...당연히 거짓말이지 새꺄. 그걸 진짜로 믿고 있었냐?"
"......?"
"야,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물어봐라. 모텔로 오란다고 낼름 오는 여자가 뻔한거 아니야? 그리고 그렇게 오는 여자를 가만 둘 남자가 어딨냐?"
"...그럼 그때... 했냐?"
"당연하지. 내가 고자냐? 솔직히 그때 소연이가 현아 옷에서 좆물냄새 난다고 했을때 존나 놀랐다. 쳐대다가 보니까 옷에 또 튀었거든. 물론 그 담부턴 옷에 안튀게 전부 안에다 싸줬다."
"─!!!"
......
정신차리고 보니 하늘이 보인다.
난 지금 바닥에 누워있는 모양이다.
"...니가 나한테 싸움을 걸 실력은 아니지 않냐. 중고딩때 너한테 달라붙는 새끼들한테서 커버쳐준게 나라는거 잊었냐?"
위에서 박우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랬지. 저새끼 싸움 하나는 장난 아니었지.
나도 모르게 주먹을 날렸던 건가?
......
분하다. 열받는다.
뭔가 존나게 끓어오른다.
왜 성현아가 박우리랑...
사귀자고 말했던 건 역시 장난이었나?
생각했던 대로 적절한 자지가 필요하던 참에 내가 나타나서 데리고 있었던 건가?
이젠 그 자리를 내가 아니라 박우리가 가지게 된 건가?
"...일어나지 마라. 제대로 들어갔으니까."
"씨발... 너같으면 쳐누워서 네 알겠습니다 하겠냐, 이 개같은 새끼야..."
"열받냐?"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
얼추 일어났다고 생각되자마자 몸을 날렸다.
저 재수없는 면상을 한대라도 갈기지 않으면 속이 풀리지 않을 것 같다.
근데... 왜 맞지를 않는거냐.
박우리는 가만히 서있는 것 같은데.
"...열받으면... 그런 짓을 하지 마라."
"......"
"정말로 니 여친이라는 생각 들면 말이야, 그런 병신같은 짓거리 하지 말라고.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지?"
......
모르겠다 이새끼야.
"지금 나한테 달려든 그거, 잊지 마라. 그리고 니가 스스로 지켜내는 거야. 빼앗기기 싫으면."
"......"
"...현아를 노리는건... 아니다. 이건 나중에 얘기하자. 난 간다."
박우리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자리에서 일어선 건 그 이후로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 * *
......
어떻게 다시 위로 올라왔다.
지금도 머리가 울리는게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그러고보니 나, 신발도 안신고 맨발로 왔다갔다 했었군.
복도에 서서 방을 바라본다.
왼쪽 방은 성현아가 있고, 오른쪽 방은 정소연이 있다.
정소연한테는 금방 다녀온다고 하긴 했지만...
졸리면 먼저 자라고 했으니 지금 시간쯤이면 잠들었겠지.
그리고 지금 정소연한테 신경쓰고 있을 여유따위는 없다.
끼익.
성현아가 있는 왼쪽 방의 철문을 열었다.
바깥의 공기를 마시다가 이 방으로 돌아오니 술냄새가 확 풍긴다.
...아마 정액냄새도 섞여 있겠지.
철문을 걸어 잠그고, 슬쩍 열려있는 방 문을 밀고 들어갔다.
방 안은 깜깜하다. 박우리가 불을 끄고 나온 모양이다.
자고 있을지도 모를 성현아를 깨울까봐 불은 키지 못했다.
내 눈이 어둠에 익숙해질 때까지 가만히 서 있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자, 방의 전경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있는 성현아도 보인다.
얌전하게 이불을 덮고 누워 있다.
......
저 이불을 걷어내면...
박우리의 좆물을 머금고 있는 성현아의 보지를 보는 건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최고의 흥분제일텐데...
이상하게 지금은 그딴 자극은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일이 내 눈에 보여질까봐 불안하고, 무섭다.
꿀꺽.
벌써 몇 차례의 심호흡일까?
난 아직도 그 이불을 들출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결국,
이불은 내비두고 그 위로 조심스레 누워버렸다.
...박우리의 흔적이 남아있는 성현아의 다리 사이를 본다면,
정말 미쳐버릴 지도 모른다는 압박감 때문이다.
......
가만히 누워서 성현아의 얼굴을 들여다 봤다.
언제봐도 정말... 예쁜 얼굴이다.
지금만큼은 색기가 넘치느니 꼴리게 생겼다느니 그런 말을 담기 싫다.
그저... 예쁜 현아라고 부르고 싶다.
"...을아..."
"......"
성현아의 눈이 부시시하게 떠졌다.
목이 메인 것 같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어디갔다 왔어... 아무도 없어서 혼자 잠들었잖아..."
"...어? 그게..."
"나... 좀 많이 마셨나...? 정신차려 보니까 아무도 없고... 혼자 침대에 누워 있길래... 셋이 맛있는거 먹으러 간 줄 알았는데..."
......
기억이 없는 건가?
아니면 거짓말을 하는 건가?
박우리의 위에 올라타서 허리를 흔들었잖아?
...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간신히 참았다.
그 대신, 깔고 있던 이불을 확 들춰버렸다.
이제서야 이걸 들출 용기가 생겼다기 보다,
성현아의 말을 부정하기 위해서 들췄다는게 맞을 것이다.
"...왜 그래? 나 추워."
이불이 걷어내자, 성현아가 몸을 웅크리며 눈살을 찌푸린다.
그리고 내 눈살도 찌푸려졌다.
성현아는 멀쩡하게 옷을 입고 있다.
......
잠깐 굳었던 손을 다시금 움직였다.
성현아의 위에 올라타 두 다리를 확 재끼고,
그 사이에 걸쳐있는 앙증맞은 팬티를 찢어내듯 벗겼다.
...어차피 박우리가 사준 옷따위 찢어버려도 상관 없겠지.
"....야아, 아우 진짜. 왜 그래. 하고 싶어졌어?"
허리를 꿈틀거리던 성현아가 볼멘소리를 내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듯이 바짝 들이댔다.
......
아무것도 없다.
흐르는 정액도, 둘이 결합해서 마찰했던 흔적도 없다.
냄새도 뭣도 아무것도 없다.
그저, 원래 성현아가 가지고 있는 그 모습과 향기만이 있을 뿐이다.
"......"
"어, 왜 그래? 너 울어? 이리와봐."
......
운다고? 누가, 내가?
상체를 일으킨 성현아가 가만히 나를 안아 온다.
뺨을 갖다대며 부빗거리는 그 움직임에,
내 볼에 흐르던 축축한 액체를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울고 있었던 모양이다.
"뭐야... 남자가 바보같이."
"......"
이상하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왜 눈물이 나는지, 왜 말이 나오지 않는지,
아무것도 이해할 수가 없다.
"울지마... 바보야. ...울고 싶은 건 나니까..."
"......"
"...항상 너한테 미안해...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
"...이런 애라서 미안해..."
......
성현아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다.
뭐가 저렇게 미안한 걸까.
모르겠다. 지금만큼은 생각을 멈추고 싶다.
난 너무 생각이 많아서 탈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여줘도 좋잖아?
"...현아야."
"...응."
"너랑... 사귀고 싶어."
"......"
"내 여자로 만들고 싶어. 아무데도 가지 못하게... 나만 바라보게 만들고 싶어."
......
너도 무슨 소린지 황당할 꺼다.
말하는 나조차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하지만...
진심이다.
성현아와 제대로 사귀고 싶다.
거짓으로 위장했던 섹파같은 애인이 아니라,
진심으로 보듬어주고 예뻐해주는, 그런 애인.
......
나를 바라보던 성현아의 눈이 살짝 감겼다.
그렁그렁 매달려 있던 구슬이 눈꺼풀에 밀려 주르륵 떨어진다.
"나도... 너랑 사귀고 싶어..."
"......"
"진심이야... 이번엔... 거짓이 아니야..."
* * *
......
숨이 차오른다.
이렇게나 가쁘게 달려본 적이 또 있었던가?
지금까지의 난 여자와의 섹스를 그저 내 쾌락을 위해서,
그리고 상대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서 기계처럼 움직였을 뿐이다.
여길 건드리면 이렇게 반응하겠지, 이렇게 해주면 좋아하겠지,
몸이 기억하는대로 움직이는 계산적인 몸놀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모든 것을 버리고
그저 현아를 생각하는 마음을 담아 움직였다.
"...하아... 하아..."
지금 내 옆에 누워있는 현아는
여태까지 내가 안았던 성현아와는 다르다.
죽기 직전처럼 숨을 헐떡이지도 않고
바들바들 떨면서 경련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하지만 왠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런게 정말 사랑을 담는다는 것이구나, 하고 말이다.
...지금의 현아도 이런 내 마음과 똑같을까?
왠지 같았으면 좋겠다.
"을이야..."
"...응."
"나 ...있잖아."
"...응."
"지금까지... 니가 해준 것 중에서... 오늘이 제일 좋았어..."
"......"
"고마워..."
......
또다시 눈물이 날려고 한다.
나 이렇게 잘 우는 놈이었나?
......
사귀게 된지 어언 한달 남짓.
그리고 몸을 섞은 횟수도 한달 내내.
그렇게 서로의 몸을 사귀던 나와 현아는
오늘에서야 서로의 마음과 사귀게 됐다.
* * *
......
자다가 보면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아, 나 지금 꿈 꾸고 있구만.
다들 한 번 정도는 자다가 그런 생각 든 적 있잖아?
지금의 내가 그 상황이다.
현아와의 섹스가 끝나고, 우리는 서로를 껴안고 잠에 빠졌다.
그리고 난 지금 현아에게 팔베개를 해주고 자고 있다.
그 자고 있는 모습을 내가 내려다 보고 있으니, 이게 꿈이지 않고 뭐겠어?
설마 죽은 건 아닐테고.
신기한 건,
내려다 보고 있는 나도, 그리고 침대에 누워 있는 나도,
둘 다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의 난, 누워 있기도 하면서 내려다보고 있기도 한 거다.
도대체 이게 무슨 꿈일까.
나오는 건 아무것도 없고 그저 자고 있을 뿐인데.
근데 그걸 보고 있다니.
......
그 요상한 개꿈도 슬슬 걷혀지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무렵,
어디선가 많이 본 얼굴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현아는 아니다. 내 옆에서 잘 자고 있으니까.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왠지 정소연같이 생겼다.
하지만 정소연은 어깨정도로 내려오는 사과머리인데,
얘는 그보다 더 짧은 단발이다.
에이, 모르겠다. 어차피 꿈인데 뭐.
그 무표정한 얼굴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뒤로 하고,
나는 완전히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