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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위반 로맨스-128화 (128/128)

# 128

에필로그3. After 3 years, 아직 못 다한 이야기 (7)

시간은 어느덧 오후에 접어들어 차창 밖으론 슬슬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대체 어딜 가는 건데요, 네?”

“곧 알게 된다니까요.”

인터넷 기사들은 올해가 유난히도 추운 크리스마스라는 뉴스를 보도하고 있었다. 이런 날 그냥 집에 있으면 될 걸 왜 굳이 나오자고 한 건지 의문이 들긴 했지만, 은수는 폰을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곤 잠자코 창밖을 살피기에 바빴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따뜻하게 데워진 시트 덕에 어느샌가 솔솔 잠이 들려고 할 무렵이었다.

“은수 씨, 다 왔어요. 내려요.”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손길에 그녀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갑작스레 차가운 바람이 새어 들어 옆을 보았더니 그는 벌써 문을 열고 내리고 있었다.

“…….”

여기가 어디야, 대체. 몽롱한 눈을 한 은수는 얼른 몸을 곧추세우고 차창 밖을 확인했다.

이윽고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니, 여기는……?’

어쩐지 어디선가 묘한 소금기가 느껴진다 싶었는데, 거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차문을 열자마자 겨울 바다의 짠 내음이 진동을 했다. 부러 숨을 한번 들이쉬니 상쾌하고도 차가운 공기가 폐부로 가득 스며들었다.

마침내 그들이 도착한 곳은 그녀가 현재의 프러포즈를 받았던 바로 그 바닷가였다.

“…….”

주차장에선 다소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겨울 바다를 바라보던 은수가 현재를 향해 팽그르르 돌았다.

“……현재 씨?”

“기억나요, 여기?”

기억이 나냐니. 기억하지 못할 리가 절대 없지 않은가.

너무나 당연해서 대답도 않고 있는 그녀를 보며, 현재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오늘, 은수 씨랑 꼭 다시 와 보고 싶었어요.”

“…….”

“가죠, 저녁 먹으러.”

그는 그 말만을 남기곤 곧바로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은수는 잠시 그런 현재의 뒷모습을 눈으로만 멀거니 좇고 있었다.

갑자기 여긴 왜 오고 싶었던 걸까. 아직까지는 남자의 의도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저를 굳이 이 먼 곳까지 데리고 온 데는 그 나름의 생각이 있었을 거라 여겼다. 그는 항상 그런 남자였으니까.

‘뭐, 좀 이따 말해 주겠지.’

대수롭지 않게 여긴 그녀는 주린 배를 붙잡으며 군말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 * *

바닷가도 왔고 하니 내심 저녁으론 당연히 해산물이나 회 같은 걸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저녁이에요?”

“네. 싫어요?”

“아, 아뇨, 싫을 리가요.”

그녀는 얼른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솔직히 말해 싫은 건 아니었다. 그냥, 좀 뜻밖이다뿐이지.

은수는 그와 제 앞에 놓인 컵라면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그녀야 워낙 이런 걸 좋아하는 편이니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남자가 선뜻 이런 메뉴를 택한 건 좀 의외였다.

나무젓가락의 포장을 뜯고 그 뒤꽁무니를 테이블에 탁탁 치면서 은수는 가늘어진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장소도 그렇고 메뉴도 그렇고, 혹시 이 남자가 그때 그 상황을 똑같이 재현할 셈인 건가?

“이제 다 된 것 같은데 얼른 먹어요, 은수 씨.”

“……네, 먼저 먹어요.”

언제 먹어도 맛있는 컵라면과 함께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나누자 식사는 금방 끝이 났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남자는 별말이 없었다.

결국 그녀가 작심하고 화두를 꺼낸 것은 그때처럼 바닷가 모래사장에 발을 들인 후였다.

“……현재 씨.”

“네?”

“아직도 말 안 해 줄 거예요?”

“뭘요?”

“……오늘 같은 날, 굳이 날 여기로 데려온 이유요.”

그때처럼, 사락거리는 모래 소리와 찰싹하고 부딪치는 파도 소리가 대화 사이로 추임새처럼 섞여 들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라 조금 붐비지 않을까 싶었지만, 추운 날씨 탓인지 한겨울의 모래사장엔 사람들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하기야 크리스마스에 화려하고 좋은 번화가를 놔두고 굳이 이런 우중충한 곳에 올 이유는 없으니까.

‘우리 같은 예외를 제외한다면.’

은수가 살짝 뾰로통해진 표정을 짓자 현재는 짐짓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냥…… 오랜만에 다시 한 번 와 보고 싶었어요. 초심도 되새길 겸.”

“……초심이요?”

자박자박 모래밭을 걷던 그는 바닷물 근처에 가서야 멈춰 섰다. 꽤나 싱그러운 모습을 자랑했었던 바다는 어느새 어두운 잿빛을 띠고 있었으나, 느낌만은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붉게 물드는 수평선을 넌지시 바라보던 그가 이내 말을 이었다.

“실은, 조만간 은수 씨 고향에 한번 가 보고 싶었어요. 은수 씨가 나고 자랐다는 곳, 거기의 바다가 궁금해서. 거기 가면, 내가 몰랐던 은수 씨의 흔적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했거든요.”

“…….”

“근데 오늘 안에 거길 다녀오긴 좀 무리니까, 가까운 바다를 생각하다가 여기를 떠올린 거예요. 내 나름대로 짜낸 궁여지책이랄까.”

“……아.”

경상남도 해주. 떠나온 지 오래된 그녀의 고향이자, 이제껏 그는 한 번도 발길을 들이지 못한 그곳을 가 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녀조차도 꽤 오랜 시간 동안 다시 가 보지 못했던.

그러고 보니 한 번쯤 데려갈 수도 있었을 텐데, 왜 못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그 답을 깨달을 수 있었다.

지난 3년간, 그들은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으니까. 그런 여유 같은 건 감히 꿈꿀 수도 없었을 정도로 말이다.

‘……어지간히 열심히 살긴 했구나, 내가.’

그래, 이젠 좀 놓고 살 때도 되긴 했지.

오랜만에 탁 트인 바다를 보고 있자니 여러 일에 치여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바다가…… 보고 싶었어요?”

문득 묻는 말에 그는 가볍게 답했다.

“……아뇨, 사실 난 아닌데요.”

“…….”

“은수 씨한테는 보여 주고 싶었어요. 은수 씨가 보면 분명히 좋아할 것 같아서.”

그는 저녁놀에 붉게 물든 은수의 얼굴을 지그시 돌아보며, 그녀의 손을 쥐고 있는 손아귀에 더욱더 힘을 주었다.

그러고는 나지막이 속삭이기 시작했다.

“지난 몇 달간 내 멋대로 행동해서 미안해요. 난 그게 은수 씨를 위하는 길인 줄 알고……. 혹시나 은수 씨가 미안해하고 내 눈치를 보는 상황이 오지 않았으면 해서 그랬던 건데.”

“…….”

“아무래도 내 생각이 짧았던 것 같아요. 미안해요.”

은수는 가만히 얼굴을 붉혔다. 그의 진심 어린 사과에, 오히려 유치했던 제 행동만 부각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니에요. 나도 미안해요. 내 맘대로 넘겨짚고, 막 땡깡 부려서.”

옛말에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더니, 이럴 때는 정말 그런 듯했다. 이렇게 한순간에 또 아무렇지 않게 되는 걸 보면.

서로를 향해 살짝 미소 지은 그들은 잠시 동안 먼 바다를 응시했다.

“예전에 내가 했던 말, 혹시 기억해요?”

“어떤 말이요?”

“……내가 매순간마다 은수 씨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사랑하고 있는 이 마음만은…… 시간이 지나도 절대 변하지 않겠다고 했던 말.”

……아아, 그 말.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리고 아주 먼 훗날에도,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영영 기억하게 될 프러포즈였으니까.

긍정의 눈초리로 뒷말을 기다리고 있는 은수를 향해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때 말했듯이, 벌써 3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나는 은수 씨에 비해서 많이 부족해요. 그래도 그 약속은 꼭 지킬 거예요.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절대 변하지 않을 마음이니까.”

“…….”

“그러니까 어제처럼 불안해하거나, 혼자 속상해하거나, 그러지 마요. 알았죠?”

그 말을 듣고서야 그녀는 그가 굳이 저를 이곳으로 데리고 온 진짜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마도 이 다짐을 다시 일깨워 주기 위함이었겠지. 그녀에게든, 그 스스로에게든.

은수는 어쩐지 뭉클해진 얼굴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았어요.”

“…….”

“근데요, 현재 씨.”

“네.”

분위기를 바꿔 빙긋, 웃음을 머금은 은수가 천진하게 물었다.

“‘둘째’ 생각은, 정말로 없어요?”

……그 얘긴 왜 또?

본능적으로 흠칫 놀란 그가 슬쩍 넘겨보자 그녀는 천연덕스럽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니, 뭐…… 나는 세 살이나 네 살 터울 동생이면 딱 괜찮을 것 같았거든요. 그 정도면 나이 차이도 적당해서 은성이랑 별로 안 싸울 것 같고, 또…… 육아도 일종의 감각이잖아요. 이 감각이 다 사라지기 전에 둘째를 맞는 것도…… 나름 괜찮을 것 같았는데.”

“…….”

“안 그래요?”

빙빙 돌려 말했지만, 현재는 그 속에 담긴 진의를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다른 건 필요 없고. 둘째 갖자고, 이 눈치 없는 자식아.’

“…….”

그의 입가에 슬며시 웃음기가 번졌다.

승환이 했던 말처럼, 어쩌면 그는 지금껏 괜한 걱정을 해 왔던 걸지도 몰랐다.

큼큼. 미소와 함께 괜스레 목을 가다듬은 현재는 그녀를 향해 넌지시 물었다.

“먼 길 오느라 피곤했죠.”

“아, 아뇨. 오늘 좀 많이 자서 그런가, 가뿐한 것 같은데.”

“……음, 잘됐네요.”

“뭐가요?”

영문을 모른 채 쳐다보는 은수를 향해 그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미리 말해 두는데, 지금부터 각오해 두는 게 좋을 거예요.”

“…….”

“오늘 밤엔…… 자고 싶어도 잘 수 없을 테니까.”

바보가 아닌 이상 도저히 못 알아들을 수가 없는, 노골적인 뉘앙스.

“……네에?”

……쳇.

금방 볼이 화끈하게 달아오른 그녀는 행복한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가슴팍을 콩 때렸다.

하여튼 못 말려, 진짜.

“…….”

똑같이 웃음을 머금은 채, 마침내 은수에게로 완전히 돌아선 현재가 그녀의 어깨를 두 팔로 감싸 안았다.

그리고 불타는 저녁놀을 배경 삼아, 사랑스러워 마지않는 그녀에게 다정히 입 맞추었다.

진정, 거짓말이라고는 하나도 보태지 않고…….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요.”

정말이지, 빈틈없이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여전히, 너무나.

……아,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그날 밤, 두 사람을 어여삐 여긴 삼신할매가 살포시 둘째 딸을 점지해 주었다는 것은……

우리만이 알고 있는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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