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속도위반 로맨스-127화 (127/128)

# 127

에필로그3. After 3 years, 아직 못 다한 이야기 (6)

은수의 볼이 곧장 화르륵 달아올랐다. 이렇게 달콤한 시선,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영 적응이 되질 않는 탓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들어 그와 이렇게 낯 뜨거운 시간을 가진 적은 거의 없었으니까.

하지만 현재는 이제 아예 그녀의 양 볼을 붙든 채 속삭였다.

“정말 미안해요, 은수 씨. 근데, 그래도 나 싫어졌다고 그러지는 마요. 나한텐 그 말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말이니까.”

“…….”

“……아니다. 싫어졌대도 상관없어요. 내가 좋아하니까, 날 다시 좋아하게 만들 거예요. 그럼 되지.”

쳇, 누구 마음대로?

오만한 그의 말투에 은수는 부은 얼굴로 퉁명스레 대꾸했다.

“……자신 있나 보네요.”

“그럼요.”

“…….”

“3년 전에도 이미 한 번 해 봤는데, 두 번째라고 뭐가 그리 어렵겠어.”

그리 말하는 남자의 입가엔 자조적인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아,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미처 잊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제 맘을 얻기 위해, 그 옛날의 그가 얼마나 속상해하고, 고군분투했었는지를.

생각이 거기에까지 미치자 은수는 이상스럽게도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남잔 결코 제 손을 먼저 놓을 남자가 아니라는 걸. 싫어져도, 미워져도, 그런 저를 품었으면 품었지 내칠 남자는 절대 못 된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지만 왠지 모를 불안감에 제대로 확신하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이런 남자의 마음을 나는 고작 스킨십 같은 이유로 의심하고 있었다니. 어린애처럼 유치하게 군 스스로가 그녀는 어리석게 느껴졌다.

그래, 뭐니 뭐니 해도 육체적 사랑보단 정신적 사랑이지. 암, 그렇고말고.

“근데 나, 변명 하나만 해도 돼요?”

한참 동안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현재가 대뜸 물었다.

그의 진심에 금세 화색을 되찾은 은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변명이요?”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이내 대답했다.

“……최근에 내가, 은수 씨를 왜 피했는지에 대해서.”

“…….”

“좀 구차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변명하고 싶어요.”

오호, 드디어 말을 하시겠다 이건가.

은수는 짐짓 거드름을 피우며 팔짱을 꼈다.

“좋아요. 뭐 참작할 만한 사유라도 되는지, 어디 한번 들어 보죠.”

방금까지만 해도 마냥 사랑스러운 아내의 얼굴을 하고 있더니, 이럴 때는 또 영락없는 직장 상사의 얼굴이 되는 여자였다.

그래도 어쩌면 이렇게라도 기회를 잡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잖아도 이걸 어찌 풀어 가야 할지 고민이었으니까.

마침내 결심한 현재는 조심조심 운을 띄웠다.

“실은…… 무서웠어요.”

“뭐가요?”

의아한 듯 물어보는 은수에게,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이내 말을 이었다.

“내가…….”

“…….”

“은수 씰 덮칠까 봐.”

“……네에?”

그 순간, 안 그래도 발갛던 그녀의 볼이 더더욱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니, 이 남자가 덮치긴 뭘 덮쳐……?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갑자기.”

어느덧 결혼 3년차가 되었건만, 그의 아내는 아직도 이런 말 하나하나에 심히 부끄러워하곤 했다.

귀엽긴.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미소 짓던 그는 이내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난, 내가 원래 큰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다지 잘난 것도 없지만, 그만큼 욕심도 없으니까 다행이라고. 내 주제에 맞는 만큼만 알차게 잘 살다 갈 수 있으면 그만이라고…… 아주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었거든요.”

“…….”

“그런데 은수 씨를 만나고 난…… 어느샌가 욕심이 너무너무 커져 버린 것 같아요. 은수 씨 맘을 얻고 싶었고, 그러고 나니까 은성이의 제대로 된 아빠가 되고 싶었고, 또 최근엔…… 괜찮다는 은수 씨 말만 믿고 무작정 은성이한테 동생을 만들어 주고 싶었구요.”

“…….”

“근데 다시 생각해 보니까, 그건 정말 내 욕심이었더라구요.”

“……현재 씨?”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그녀의 표정.

그는 얼른 덧붙였다.

“여자한테 임신이라는 게 얼마나 무섭고 힘든 일인지, 내가 완벽히 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순 없어요. 그렇지만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해요. 그러니까 괜히 나나 둘째 문제 때문에 은수 씨가 일을 관둔다거나, 그럴 필요는 없다는 거예요.”

“…….”

“얼마든지 기다릴게요. 아니, 사실 난 은성이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요. 그러니까 내 말은…….”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한 템포 쉰 현재가 그녀와 다정히 눈을 맞추며 다시금 말을 이었다.

“다른 생각은 말고, 앞으로도 은수 씨 하고 싶은 대로 맘껏 하라구요. 난…… 더 이상 은수 씨한테 걸림돌이 되고 싶지 않으니까.”

“…….”

은수는 잠시 동안 그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당최 의중을 알 수 없는, 알쏭달쏭한 얼굴로.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녀는 나지막이 물었다.

“그럼, 현재 씬 이제껏…….”

“…….”

“혹시나 둘째를 가지고 싶단 욕심이 생길까 봐서, 날 그렇게 피했었던 거예요?”

다분히 은수다운, 묵직하게 날아든 직구.

말해 놓고 보니 더없이 민망해지는 이유라서, 그는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었다.

“……그런 셈이죠.”

일순간 더욱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그런데 잠시 뒤, 그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하, 참나…….”

무슨 이유에선지, 여자에게서 돌연 살짝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졸지에 현재는 살짝 굳은 채로 그녀를 불렀다.

“……으, 은수 씨?”

어느새 눈가가 한없이 이지러진 은수는 그를 기가 차다는 듯 째려보고 있었다.

“진짜…… 잘난 척은 혼자서 다 한다니까…….”

“…….”

“고작 그런 이유로 날 피했다고요? 그게 다예요, 지금?”

평소답지 않게 약간 높아진 언성.

어쩌지, 화났나.

자연히 몸이 단 현재는 거기서 또 가만있질 못하고 입을 열었다.

“어…… 저기, 은수 ㅆ…….”

“그럼,”

하지만 뒤따른 그녀의 말은 그의 말을 곧바로 제지했다.

“어디 한번 욕심 내 봐요.”

“……네?”

우뚝 멈춘 그가 눈을 깜빡였다.

여전한 얼굴의 그녀는 그를 살짝 흘기면서도 차분히 말하고 있었다.

“현재 씬 이제 날 무척이나 잘 알겠나 봐요. 내가 지금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잘 알고나 하는 소리예요?”

“…….”

“나 아니면 대체 누구한테 욕심을 부리려구요. 그것도 참다 보면 병나거든요? 덮치든 뭘 하든, 아무거나 좋으니까 욕심 낼 테면 내라구요. 얼마든지 받아 줄 테니까.”

그녀는 야무지게 말을 마치더니 그의 목덜미에 양팔을 둘러 제 앞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어쩐지 매우 도발적으로 느껴지는 눈빛과 함께.

덕분에 현재는 잔뜩 커진 눈으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도현재 씨.”

하나뿐인 내 사람, 그리고 내 하나뿐인 반쪽.

“앞으로도 나 하고 싶은 대로, 그렇게 하고 살라고 했죠. 근데요.”

“…….”

“당신이 하고 싶은 건 나도 하고 싶어요. 당신이 원하는 게, 내가 원하는 거구요.”

살풋 웃어 보인 은수는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랑해요.”

……그러니까 얼른, 아무런 고민 말고.

“안아 줘요…… 빨리.”

“…….”

그 말은 곧, 현재로 하여금 자신의 다짐을 깡그리 무너뜨리게 하는 주문이 되었다.

아주 오래전의 그날처럼, 은수는 먼저 그에게 열정적으로 입 맞추었다. 물론, 잠시 뒤 그도 기꺼이 협조적으로 화답해 주었고.

깊고도 뜨거운 밤은 그렇게 너울너울 저물어 가고 있었다.

기실 꿈과 다를 바가 없는, 아니, 꿈보다 더 행복한 결말과 함께.

* * *

“……하암.”

다음 날 아침, 은수는 모처럼 개운하게 눈을 떴다.

대략 몇 시쯤 되었을까.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이미 느지막한 시간임을 가늠할 수 있었다. 눈꺼풀을 들어올리기가 무섭게 따가운 햇빛이 득달처럼 들이닥쳤으므로.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깜빡이던 그녀는 어느 순간 불현듯 깨달았다.

잠깐, 오늘은…… 크리스마스잖아?

‘맞다, 은성이!’

크리스마스 오전, 두 여사님들께서 은성이를 친히 집까지 데려다주겠노라 공표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은수는 성급하게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읏.”

오랜만에 호되게 자극을 받은 곳이 곧바로 쓰라린 아픔을 호소해 온 탓에, 그녀는 미처 다 일어나지 못하고 주춤해야만 했다.

사실은 그뿐만 아니라 온몸이 뻐근했다. 한동안 쓰지도 않던 근육을, 차마 횟수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마구마구 써 댔으니 그럴 만도 하지.

그녀가 속으로 행복한 푸념을 하고 있던 바로 그때,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어, 일어났어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상큼한 미소를 짓고 있는 현재였다.

다만 그는 그냥 서 있는 것이 아닌, 무언가를 손에 들고 있는 채였다.

은수는 여전히 엉거주춤 앉은 상태로 눈을 깜빡거렸다.

“혀, 현재 씨.”

“잘 잤어요?”

“……네. 근데, 그건 웬 거예요……?”

은수가 그의 손 쪽을 눈짓하며 물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쟁반이었다. 작은 쟁반 위에는 계란 프라이와 식빵, 소시지 등으로 차려진 간단한 식사가 가득 올려져 있었다.

침대맡으로 다가온 그는 이불을 덮고 있는 그녀의 무릎 위로 쟁반을 내려놓으며 미소 지었다.

“죄 지은 게 있으니까 알아서 기는 거예요.”

“…….”

“배고프죠. 얼른 먹어요.”

오랜만에 정열적인 밤을 보낸 덕인지, 평소보다 컨디션이 매우 좋아 보이는 남자였다.

어젯밤의 일이 생각난 은수는 다시금 얼굴을 살짝 붉혔다.

‘이 남잔 오늘따라 더럽게 잘생겼네, 또.’

꽤나 긴 잠을 잤기에 배가 매우 고프기는 했으나, 은수는 일단 궁금한 것부터 묻기로 했다.

“은성이는요? 두 분 왔다 가셨어요?”

“아뇨. 좀처럼 토리랑 안 떨어지려고 해서 하루만 더 데리고 계시겠대요. 둘이서 크리스마스 오붓하게 잘 보내라고 하시던데요.”

“……아, 그렇구나.”

엄마를 닮아서일까, 유난히도 강아지를 좋아하는 아이. 그러고 보면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도 회사 일 때문에 유보해 놓은 것들 중 하나였다.

이참에 한 마리 기를까, 하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쳤다. 어쩌면 이젠 집에 있을 시간이 많아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어쨌거나 미소를 지어 보인 은수는 쟁반 위에 놓인 수저를 천천히 들었다.

그런데 그때,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던 그가 갑작스레 입을 열었다.

“은수 씨 오늘, 혹시 따로 약속 같은 거 있어요?”

“……약속이요?”

이 남자가 아직도 날 모를 린 없을 텐데. 황금 같은 휴일에 약속이 웬 말인가.

은수는 당연하다는 듯 아뇨, 하며 고개를 저었고, 그걸 본 현재는 씩 웃었다.

“그럼 이따 오후에 나랑 잠깐 어디 좀 나가요.”

응?

아무 생각 없이 빵을 뜯어 먹던 그녀가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생각지도 못한 제안 탓이었다.

“싫어요?”

……아니 뭐, 싫기까지야 하겠냐마는.

“아, 아뇨. 그런 건 아닌데…… 갑자기 어딜요……?”

크리스마스라고 특별히 어딜 나갈 속셈인가, 설마. 웬일이지?

잔뜩 의아한 눈초리를 한 그녀를 향해, 현재는 말없이 씩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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