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
에필로그3. After 3 years, 아직 못 다한 이야기 (5)
그의 시야에 속눈썹을 내리깐 깨끗한 얼굴이 정면으로 들어찼다. 누가 보고 있는 것도 아니건만 행복한 미소가 절로 비어져 나왔다.
‘정말 예쁘다, 우리 부인.’
누가 들으면 새삼스럽고 유난스럽게 뭐 하는 거냐고 하겠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원래도 너무 예뻤던 민은수는 정말, 보면 볼수록 더 예쁜 사람이었으니까.
이런 사람을 두고 근 몇 개월을 참아 낼 수 있었다니. 현재는 아무리 생각해도 스스로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녀를 먼저 생각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절대, 절대로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
하지만 그런 그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좀 참기가 힘들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시간도 시간이고, 여자의 상태도 상태이기에. 그녀와 처음으로 몸을 섞었던 3년 전의 그날이 자동적으로 연상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도 그녀는 이렇게 무방비한 상태로 그를 괴롭혔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몰랐던 스물일곱 살의 자신은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었던가. 이런 여잘 앞에 두고 꼴에 어떻게 참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던 건지.
그는 새삼 과거의 자신을 한껏 비웃고 싶어졌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는 여자의 입술을 자동으로 클로즈업하고 있었다.
“…….”
……뽀뽀하고 싶다. 아니, 당장이라도 진하게 입 맞추고 그녀를 깨워 아예 잠에도 못 들게 하고 싶다. 있는 힘껏, 사랑해 주고 싶다.
오랜 시간 눌러 온 굴뚝같은 마음들이 가슴속에서 치고 일어났다. 일이고 뭐고, 내 아내 내가 안겠다는데 다른 것들이 무슨 소용인가 하는 마음마저 들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이렇게 쉽게 무너질 다짐이었다면 아예 시작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
많이 부족하고 많이 미안한 만큼,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아껴 주고 싶었다. 또 그녀의 앞길을 막는 짓 따윈 다신 하고 싶지 않았다. 어물쩍어물쩍 넘어가기에 그녀는 이미 너무 많은 희생을 치른 입장이었으므로.
그러니까 조금만 더 참자. 앞으로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늘 위안 삼던 그 말을 속으로 되뇐 그는 몸을 일으켜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고민 끝에 입술 대신 떨리는 손을 그녀에게로 가져갔다.
다른 건 다 양보했으니,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겠지.
여자의 볼은 여전히 복숭아처럼 발갰다. 나이답지 않게 솜털이 보송한 피부가 뭉툭한 손끝의 감각을 철저하게 일깨웠다. 소심하게 지분거려지던 볼은 어느새 그의 넓은 손바닥 안에 폭 감싸진 채였다.
이 감촉을 마지막으로 느껴 본 게 대체 언제인지. 평소엔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본능 탓에 마음 놓고 이럴 수가 없었다. 터치도 힘든 판에 포옹이나 키스는 당연히 금기 사항이었고.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심지어 장본인인 은수조차도.
느슨해진 엄지가 과즙이 배인 듯 붉고 탐스러운 입술을 조심스럽게 보듬었다. 제 맘대로 그어 놓았던 선을 넘는 기분이 나름 짜릿했다.
……그렇게, 혼자만의 유희를 즐기며 얼마쯤 심취해 있었을까.
“으음…….”
불현듯 살짝 들려온 신음에 몽롱했던 그의 눈이 일순 선명해졌다. 잠귀가 어둡기도 하거니와 워낙 곤히 잠들어 기척도 못 느낄 줄 알았건만, 어느샌가 그녀는 스르르 눈을 뜨고 있었다.
‘어.’
흠칫한 그는 서둘러 손을 떼어 냈다. 그런데,
─턱,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생각 이상으로 거센 힘이 그의 손목을 턱 휘어잡더니, 그것을 도로 제 앞으로 끌어다 놓는 것이 아닌가. 마치 어디에도 도망갈 수 없다는 것처럼.
섬광과도 같았던 그 움직임에, 무심결에 놀란 현재는 제 손목과 여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으, 은수 씨?”
제 이름이 불렸음에도 여자는 말이 없었다. 반쯤 뜬 눈을 그에게 고정한 채 빤히 쳐다보고 있을 뿐.
이거, 몰래 도둑질이라도 하다 걸린 것 같은 기분인데.
금세 긴장을 푼 그는 설핏 웃음 지으며 물었다.
“……정신이 좀 들어요? 물 좀 가져다줄까요?”
그날 밤, 엄청나게 목이 타는 듯했던 그녀를 염두에 둔 질문이었다.
하지만 은수는 대답할 생각은 않고 대뜸 입을 열었다.
“야.”
“…….”
“야, 도현재애.”
……‘반말’로.
이제껏 여러 가지 호칭과 말투를 들어 보았지만, 이렇게 공격적인 반말은 처음이었다.
이게 웬일이지.
당황스럽지만 한편으론 귀엽기도 한 그 말투에, 그는 살짝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네, 왜요.”
한참 동안 그를 불퉁하게 노려보던 은수는 별안간 눈을 느릿하게 끔뻑이며 물었다.
“……너어, 너 말이야.”
“…….”
“너…… 이제 내가 싫어졌냐? 내가 지겨워?”
“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술에 취해 하는 헛소리겠지만, 그렇다 해도 영 이해가 안 되는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어리둥절해진 그는 살짝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안 싫어요. 안 지겨운데요.”
지겨워지긴커녕 날이 갈수록 더 좋아져서 큰일인 걸.
그러나 그 뒤 곧바로 이어지는 말들은 그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웃기지 마아! 내가 네 속을 모를 줄 알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꼴랑 3년 만에 그렇게 지겨워지냐? 그런 거면 솔직하게 말을 해, 말을! 사람 헷갈리게 하지 말고오!”
“…….”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날 시러해애, 어? 잘생기면 다냐? 다냐고오!”
누워 있는 상태로 어찌나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지, 대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모를 정도였다.
비록 내용은 얼토당토않지만, 어눌하게 소리치는 발음 하나하나에는 그를 향한 깊은 원망이 묻어 있었다.
또한, 술기운이 가득한 여자의 눈은 어느새 잔뜩 충혈 돼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모양새.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지만 더 이상 웃고 있을 상황은 아니다.
그것을 직감한 현재는 얼른 웃음기를 지우고 진지하게 물었다.
“잠깐만요, 은수 씨.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가 은수 씰 왜 싫어해요.”
하지만 그런 말 따윈 귀에 아예 들어오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은수는 고개를 안으로 한껏 말아 넣고는 씩씩거렸다.
“씨, 나쁜 놈……. 흐윽, 나쁜 놈…….”
아니나 다를까, 말과 말 사이에 금세 예상한 소리가 섞여 들었다.
“은수 씨…… 울어요?”
그 말에, 눈물 고인 눈으로 그를 쏘아보던 그녀가 파드득 몸을 일으켜선 소리쳤다.
“그래, 운다! 울면 뭐 어쩔 건데에? 네가 뭘 어쩔 건데에!”
그러고선 곧바로 울음을 쏟기 시작한다. 그야말로 아이처럼, 펑펑.
한동안 여간해선 잘 울지 않았던 그녀이기에 그새 눈물샘이 말라 버린 건가 싶었는데, 그 또한 저의 오산이었나 보다고 그는 생각했다.
옛날부터 속 깊고 생각이 많아 탈이었던 여자는 이 많은 눈물을 또 속에만 담아 두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저수지처럼.
여자가 울고 있는 이유는 빤했다. 그가 자신을 싫어하게 된 거란 생각 때문일 터. 그 원인은 아마도…….
“…….”
현재는 순간, 그녀를 향한 애정과 애틋함, 그리고 미안함이 왈칵 용솟아 오름을 느꼈다.
더 이상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는 그녀를 품 안에 꽉 가두어 버리고 말았다.
“흡!”
갑작스런 포옹에 깜짝 놀라던 그녀는 이내 더더욱 크게 울음을 터뜨리며 몸을 버둥거렸다.
“씨, 이거 놔, 나쁜 놈아! 놓으라고!”
“울지 마요.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요. 다 잘못했어.”
솜 주먹으로 콩콩 쳐 봤자, 데미지는 0에 수렴할 뿐이란 걸 왜 모를까.
반항하는 그녀를 겨우겨우 끌어안은 그는 피식, 만족감 어린 웃음을 흘렸다.
맘은 아파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그녀를 울리고 만 셈이 되었지만, 또 덕분에 이렇듯 그녀를 품에 안게 되었지 않은가. 그로선 의도치 않은 전화위복이었다.
“미안해요, 은수 씨. 그러니까 울지 마요.”
내가 정말 미안해.
따뜻한 목소리와 함께, 그의 큼지막한 손이 가녀린 등을 살살 쓰다듬었다.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더없는 충만감. 거듭 사과를 하면서도 그의 입가에선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이렇게 좋은 걸, 나는 대체 어찌 참아 온 걸까 싶을 정도였다.
“…….”
한편, 안겨 있는 은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술김에 미친 짓 한번 저질러 보자는 마음이었는데, 별것 아닌 포옹 한 번에 이제껏 그녀를 괴롭혀 온 미운 감정들이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정신도 놀랍도록 또렷해져 있었다. 이렇게 안겨 본 것이 대체 얼마만인지…… 눈물겹게 좋아서 소름이 다 끼쳤다.
그에게서 벗어나려던 몸부림은 어느새 잦아들었고, 그녀는 결국 그 특유의 향기가 풍기는 어깨에 입술을 묻고 눈물을 방울방울 흘렸다. 이제 와 토닥여 주는 남자가 너무나도 야속했다.
‘진작에 이러면 될걸, 왜 사람을 그토록 피해서 모든 걸 우습게 만들어 버린 거냐고, 이 남잔.’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하단 말이야.
하지만 역시나 애석한 것은, 자신은 그런 그마저 너무나도 사랑한다는 것. 어쩌면 그래서 더 짜증이 나는 걸지도 몰랐다.
그때, 한참 동안 그녀를 어르고 달래던 그가 낮게 속삭였다.
“은수 씨.”
“……네.”
“혹시, 내가 싫어졌어요?”
……어라?
눈물에 젖은 그녀의 눈이 띠용 커졌다.
“네?”
뭐, 뭐지.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질문인데……?
어디서 들었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그녀를 제 품 안에서 떼어 낸 그가 다정히 눈을 맞추며 다시금 물어 왔다.
“내가 은수 씨 의도적으로 피해서, 그래서 내가 싫어졌냐구요. 솔직히 말해 봐요.”
“…….”
“응?”
남자의 까만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나서야 그녀는 이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떠올릴 수 있었다.
……어제 꾼 그 꿈, 그 개꿈에서 들었던 질문이잖아!
하지만 디테일한 부분들이 꿈에서 들은 것과는 조금 달라서, 은수는 술김에 고개를 갸웃거려야만 했다. 이건 무슨 데자뷰(deja vu)도 아니고.
“…….”
어떤 대답을 해야 좋을지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생각 끝에 그녀가 내뱉은 말은,
“……네, 싫어요.”
꿈속에서의 대답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물론 온전한 진심은 아니었다. 눈앞의 남자가 무슨 짓을 한들, 제 맘엔 한 치의 변함도 없을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녀였으니까.
그래도…… 요 몇 달간 실제로 그가 너무너무 밉긴 했으므로. 이건 일종의 시위에 가까운 행위였다. 꿈에서 똑같은 말을 했던 것처럼 말이다.
“정말요?”
“……그, 그렇다니까요.”
다만 이제 궁금한 것은 과연 그가 어떻게 반응할 것이냐, 하는 것. 꿈속에서의 그는 이다음에 아주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는 걸 그녀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술기운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사방이 조용한 가운데서 꼴깍, 그녀의 침 넘어가는 소리만 선명하게 들렸다.
그런 은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현재는 별안간 피식, 웃음을 흘렸다.
“…….”
꿈에서 보았던 그 권태로운 웃음과는 뭔가, 약간 다른 웃음.
꿈에선 그저 넋을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지만, 현실의 은수는 어쩐지 그 의미를 물어보고 싶어졌다.
“왜…… 웃어요?”
“좋아서요.”
“……뭐가요?”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감싼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당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