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
에필로그3. After 3 years, 아직 못 다한 이야기 (4)
“……어, 그랬지.”
윤정을 쳐다보는 은수의 얼굴은 어느새 말을 붙이기도 힘들 만큼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아뿔싸.
필요 이상으로 차분하고 서늘한 대답에, 옆에 앉은 현재는 본능적으로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척 봐도 기분이 상해 있는 게 분명했다.
왜 하필 이 타이밍에 둘째 이야기가 나왔는지 조금은 야속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윤정을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내가 뭐라도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두 여자를 번갈아 보며 망설이던 현재는 난처한 미소와 함께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그게, 저…… 지금은 저도 그렇고, 은수 씨도 좀 많이 바빠서…… 둘째는 천천히 느긋하게 생각하려구요. 기다리다 보면 앞으로 차차 생기겠죠.”
하하하.
분위기를 상쇄해 보려는 그 나름의 시도. 하지만 그것은 별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허! 뭐야. 설마 지금 내 탓하는 거야? 이 남자가 장난하나!’
찌릿, 은수의 날카로운 눈총만 불러일으켰을 뿐.
그러는 와중에도 눈치를 포도주스에 말아먹은 그녀의 절친은 계속해서 떠들어 댔다.
“음, 하긴. 은수 얘가 뭐 보통 워커홀릭이어야지. 안 봐도 빤해요, 빤해. 현재 씨더러 보살이라 그러는 게 괜히 그러는 게 아니라니까. 하늘을 봐야 별도 따는 거지, 쯧쯧쯧.”
“야!”
“뭐, 왜! ……하여간, 너그러운 현재 씨가 이해 좀 해 줘요. 알다시피 얘가 일 욕심이 워낙 많잖아요. 뭐 아직 둘 다 나이도 젊으니까 둘째는 언제든 가지면 되는 거지.”
참나, 기가 막혀서!
은수는 그저 할 말을 잃은 채 윤정을 쳐다보았다.
아니, 저 기집앤 쥐뿔 아는 것도 없으면서 왜 저래? 애초에 하늘을 볼 생각도 안 한다니까, 이 남잔?
나름 여자로서의 자존심과 결부된 문제였고, 그래서 절친인 윤정에게조차 얘기를 하지 않았던 건데.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떠벌리고 다닐걸 그랬다. 그럼 이렇게 억울해질 일은 없었을 게 아닌가!
열이 받은 안색이 금세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온몸이 어찌나 화르륵 달아올랐는지 그 열기가 옆에 앉은 현재에게도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였다.
……큰일 났네. 위기감을 느낀 그는 일단 황급히 말을 이었다.
“……하하, 네. 그, 그렇죠. 그럼요.”
“…….”
“저, 그런데 전 정말 괜찮습니다. 지금은 우리 은성이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둘째야 뭐 나중에 기회가 되면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고…….”
하지만 그때, 현재의 말허리가 댕강 잘려 나갔다.
“잠깐.”
다름 아닌 은수에 의해서였다.
그녀는 다짜고짜 팔을 뻗어 멀리 있는 와인 병을 집어 들더니 미소를 지었다.
입가는 분명 올라가 있으나 어딘지 모르게 살벌함이 느껴지는 미소를.
“……나참, 주인공은 따로 있구만 여기서 왜 자꾸 우리 얘기가 나오는지 모르겠네? 기쁜 소식도 들었는데…… 건배 안 해요? 괜히 딴소리들 말고 빨리 한잔 더 하지?”
“…….”
“얼른요.”
민은수가 ‘한잔 더’를 부르짖다니, 웬만해선 절대 없을 일이었다. 해가 갑자기 서쪽에서 뜬다면 모를까.
예상치 못한 돌발 행동에 모두가 얼떨떨한 눈이 되어 있는 사이, 그녀는 한술 더 떠 그들의 잔을 손수 채워 주기 시작했다.
와인과 포도주스로 반쯤 채워진 잔들이 각자의 손에 턱턱 쥐어졌고, 은수의 손에도 곧 잔이 들렸다.
다만, 그것은 다른 잔들과 달리 보랏빛 와인이 한가득 따라진 채였다.
“……으, 은수 씨……?”
“네? 왜요.”
입구까지 그득히 담긴 와인은 작은 움직임에도 마치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금방이라도 잔 밖으로 흘러넘칠 듯한 태세였다.
평소의 그녀라면 죽었다 깨나도 절대 못 마실 양. 입술을 모은 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 은수 씨한테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 다 마실 수 있겠어요?”
하지만 은수는 무표정하게 답했다.
“그럼요, 이 정도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마셔 보니까 또 은근히 괜찮은 것 같아요.”
“…….”
“걱정 말고 얼른 한잔해요. 자, 자, 건배!”
속전속결로 건배까지 주도한 그녀는 쨍하는 소리가 나기 무섭게 곧장 제 몫의 와인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꿀꺽, 꿀꺽, 꿀꺽.
거의 ASMR을 방불케 하는 소리가 그녀의 목에서 울려 퍼졌다.
모든 이가 할 말을 잃고 지켜보는 가운데, 그 많던 액체는 금세 그녀의 식도로 싹 넘어가고 말았다.
“……캬!”
와인으로 물든 입술을 손등으로 쓰윽 닦아 내던 은수는 문득 세 사람을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는 얼굴이었다.
“……왜요. 안 마셔요? 얼른 마셔요. 마셔, 윤정아.”
“…….”
“현재 씨도, 안 마셔요?”
“……아, 네.”
성화에 못 이겨 억지로 와인 한 모금을 머금으면서도, 눈살을 찌푸린 그는 그녀에게서 좀체 눈을 떼지 못했다. 갑자기 또 무슨 바람이 분 걸까.
그나마 그걸로 끝이겠거니 했더니, 은수는 이제 아예 와인을 콸콸 쏟아부으며 전투적으로 잔을 채우고 있었다.
현재의 눈가엔 더욱더 깊은 주름이 졌다. 순간, 묘한 기시감이 든 탓이었다.
‘이거 뭔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광경인데. 언제였더라……?’
현재는 무심코 고개를 돌려 승환을 쳐다보았다. 역시나, 승환의 표정도 그의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
“…….”
동이 나고 있는 술. 그 앞에서 살짝 발개진 얼굴을 하고서는, 누가 어떻게 보고 있건 말건 혼자 부어라 마셔라 하고 있는 여자. 분명 조짐이 심상치 않았다.
……왠지 오늘, 또 뭔 일이 날 것 같은데.
너무나 똑같은 생각이 두 남자의 머릿속을 동시에 관통했다.
그리고 그 생각이 정확히 적중했다는 것을 그들이 깨달은 건, 그로부터 약 한 시간쯤 뒤의 일이었다.
* * *
“흐흐흐! 진짜진짜 추카한다, 허윤정! 너도 드디어 나랑 한 배를 타는구나아! 장하다, 장해! 일루 와, 울 윤정이!”
쪽, 쪽, 쪽!
“야, 야! 고만해, 좀! 어우, 얘가 진짜 왜 이래?! 민은수!”
……또 나왔다. 저놈의 술버릇.
고작 와인 네 잔이었다. 은수는 눈 깜짝할 새 K.O. 상태가 되었고, 어김없이 뽀뽀 로봇이 되었다. 오로지 윤정을 향해서만.
질색하며 짜증을 내고 있는 아내를, 그녀의 남편 승환은 그저 안타깝다는 듯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지난 3년간 미처 잊고 있었는데, 우리 본부장님 술버릇 정말…… 끝내준다, 끝내줘. 안 그래?”
“……그러게요.”
제 아내지만 정말 죄송할 정도네요.
두 남자가 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동안에도 은수는 끊임없이 윤정에게 징징거리고 있었다.
“아, 왜애~ 일루 와라. 응? 응? 허윤저엉, 언니가 사랑하는 거 알지이~?”
“아, 몰라! 모른다고! 아으, 이 기집애가 진짜!”
이럴 줄 알았으면 와인 병을 저 멀리 치워 버리는 건데. 꿀떡꿀떡 잘만 마시다 갑자기 이렇게 돌변해 버린 통에 차마 말릴 수도 없었던 게 화근이었다.
진력이 난 윤정은 자꾸만 제게 엉겨 붙는 은수를 거칠게 밀어내며 현재에게 다급히 구원 요청의 눈빛을 보냈다.
“현재 씨, 얘 좀 다시 어떻게 좀 해 봐요! 네?”
그라고 어떻게 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이미 말리기만을 수십 번. 그럼에도 은수는 막무가내였다. 그놈의 술만 먹으면 어찌나 힘이 세지는지, 나름 건장한 몸이라고 자부했던 그조차도 그녀를 쉽게 당해 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수습은 해야 하는 게 마땅했다. 언제까지고 저렇게 놔둘 순 없는 노릇이니.
다시 결심한 현재는 얼른 맞은편으로 다가가 윤정에게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는 은수를 붙잡았다.
“은수 씨, 이제 그만하고 가요, 네? 정신 차려 봐요.”
“아, 또 왜애!”
그때였다. 짜증스럽게 돌아보던 은수의 눈이 일순 그에게로 고정된 채 느릿하게 끔뻑인 것은.
“……응?”
매끈하던 미간에 어느새 주름이 잔뜩 져 있다. 정신 못 차리고 사람 구분도 못 하더니 이제야 그를 알아보는 모양이었다.
“……현재…… 씨……?”
“네, 도현재 맞아요.”
은수 씨의 하나밖에 없는 남편, 도현재요.
그가 퍽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 상태 그대로 눈가를 찡그릴 뿐이었다. 뭔가 맘에 안 드는 게 있기라도 한 것처럼.
‘젠장, 너무 귀엽잖아.’
이 와중에 현재는 눈치 없이 실실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꽉 붙잡았다. 단둘이 있는 곳이었다면 진하게 뽀뽀라도 한번 날려 주었겠지만, 그들이 있는 이곳은 엄연히 신혼부부의 집이었다. 이 지경을 만든 것도 모자라 때와 장소를 못 가리는 민폐까지 끼쳐선 안 될 일이었다.
게다가 요즘은 민은수의 입술 보기를 돌같이 해야 하는 상황이기도 했고.
현재는 몹쓸 욕구를 속으로 욱여넣은 채 나지막이 그녀를 달랬다.
“늦었어요. 우리도 얼른 집에 가요. 집에 가서 자자, 응?”
나른해진 은수의 눈망울이 현재를 올려다보았다. 티 없이 맑은 그곳에 현재의 얼굴이 그대로 비쳤다.
“…….”
도현재 효과가 늦게나마 통한 것일까. 어느 순간 그녀는 이상하리만큼 조용해져 있었다.
촉촉하게 젖어 든 듯한 눈가가 좀 맘에 걸리기는 했지만, 그는 그 틈을 타 얼른 은수를 안아 올려 부축했다.
현재가 서둘러 갈 채비를 마치자 승환과 윤정은 총알처럼 반응하며 반색했다.
“괜찮겠어? 힘들면 자고 가도 되는데.”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그래도 두 분 결혼하시고 맞는 첫 크리스마스인데 두 분이서 오붓하게 보내셔야죠. 저흰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 그래. 그럼 본부장님 잘 챙겨 드리고. 도착하면 연락해. 알았지?”
“네, 그럼 이만 쉬세요. 가 볼게요.”
다행스러워하는 한편 어쩔 수 없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기도 한 부부의 배웅을 뒤로하고, 현재는 여전히 말이 없는 제 아내를 둘러 안아 걸음을 옮겼다. 이전의 상황을 고려할 때, 반항 않고 순순히 따라와 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 여기면서.
그렇게 대리 기사를 불러 겨우겨우 무사히 집까지 도착하고 나니 시각은 거의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읏차.”
만취한 상태에서도 여전히 깃털처럼 가볍기만 한 아내를 침대에 눕힌 현재는 그제야 등을 쭉 펴고 숨을 골랐다. 아까 전 와인으로 인한 취기가 늦게야 오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3년간의 회사 생활로 인해 주량이 꽤나 세진 그였기에, 이젠 웬만한 양엔 쉽게 흔들리지도 않았다. 그것은 그간의 그에게 일어난 몇 안 되는 변화들 중 하나였다.
“하아.”
찬기가 묻은 코트를 벗어 두고 살짝 기지개를 켠 그가 문득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그 쪽을 향해 모로 누운 은수는 어느덧 곤히 잠에 빠져 있었다. 피로 때문에 잠든 모습은 지겨울 만큼 많이 봐 왔으나, 이렇듯 술에 취해 잠든 모습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아마도 ‘그날 밤’ 이후 처음 있는 일.
짙은 화장에도 불구하고 세상모른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여자의 모습은 영락없는 아이 같았다. 하여튼 서른다섯 살 유부녀라고 하기엔 여전히 너무나 귀여운 여자.
저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인 그는 천천히 몸을 숙여 바닥에 앉았다. 그러고는 침대 위로 팔꿈치를 짚은 채 손바닥에 부드럽게 턱을 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