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
에필로그3. After 3 years, 아직 못 다한 이야기 (3)
“…….”
장난 반 진심 반으로 놀리듯 물은 것이었으나, 현재는 대답 대신 쑥스러운 미소만 지었다. 그에게 침묵은 거의 긍정을 뜻한다는 걸 승환이 모를 리 없었다.
“이 과장님이라면 어떡하시겠어요? 실은 요새 은수 씨도 제가 자길 일부러 피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것 같아서요. 혹시 신경 쓸까 봐 끝까지 모른 척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솔직히 이야기하는 편이 낫겠죠?”
승환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눈썹을 들썩이며 말했다.
“당연하지. 나라면 진즉에 얘기했다. 괜히 그런 거 숨겨 봤자 오해만 더 생긴다고. 게다가 몇 달 동안이나 그랬으면…… 어휴. 이따 집에 가서 잘 찾아봐. 현재 씨 인형 만들어서 저주하고 계신 걸지도 모르니까.”
……그 정도인가. 승환의 말을 곱씹던 현재가 피식 웃었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현재 씬 어떻게 그걸 무작정 피할 생각을 했어? 부부 사이에?”
“그게…… 저도 처음엔 그럴 생각까진 아니었는데, 요즘 은수 씨가 일 때문에 너무 피곤해 보이는 바람에……. 괜히 옆에서 치근댔다가 힘들어할까 봐요.”
“……그런 몹쓸 배려심은 좀 버려라, 이 자식아.”
100퍼센트 진심에서 우러나온 대꾸였다.
“그러지 말고, 며칠 안으로 솔직하게 얘기해. 그게 나아.”
“……그렇겠죠?”
“그럼. 그리고 혹시 알아? 이제 본부장님도 좀 쉬고 싶으실지.”
현재의 빈 잔을 다시 채워 주며, 승환은 세상 다 산 어르신처럼 넉살 좋게 말했다.
“본부장님이 보통 직장인도 아니고, 그 정도 했으면 지치실 때도 된 거야. 언제 한번 휴가를 가길 했어, 제대로 쉬어 보기를 했어? 그나마 쉬었던 때가 은성이 낳고 난 직후였는데. 이참에 둘째 낳고 쉬는 것도 나쁘지 않다 판단하셨을 수도 있잖아. 예전에 현재 씨한테도 예고하셨었다며? 2년 뒤에 낳고 싶다고.”
“……네.”
현재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그새를 또 참지 못하고, 진심으로 걱정되는 듯한 얼굴을 한 채 되물었다.
“근데 만약에, 그게 은수 씨의 진심이 아니었다면요? 사실은 아직 일을 더 하고 싶은데, 괜히 저 위한답시고 일을 내팽개쳐 버리는 거면…… 그럼 안 되잖아요. 워낙 착하고 여린 사람이라, 저한텐 말도 못 하고 혼자 끙끙 앓을 게 분명한데…….”
“…….”
“혹시, 그러다 제가 싫어지기라도 하는 건…… 아니겠죠? 아, 그럼 안 되는데.”
“…….”
쩜쩜쩜. 소주잔을 탁 내려놓는 승환의 얼굴에 천천히 빡침이 끓어올랐다. 말하는 것만 봐선 지금 대체 누가 신혼 입장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후, 저 팔불출.
“야, 도현재.”
“네?”
이제는 참아 주는 것도 한계다.
“……좀 그만해, 이 자식아!!”
어째 나이가 들어도 변하는 게 없어, 이놈은!
빽 내뱉은 승환의 짜증 소리에, 주변에 있던 시선이 한꺼번에 그들에게로 쏠렸다.
* * *
“이씨 가족과 도씨 가족의 무궁한 번영과 영광을, 위하여!”
“위하여!”
“짠!”
상투적인 건배사와 함께 네 잔의 와인 잔이 신나게 부딪쳤다. 모두들 기분 좋게 제 몫의 와인을 들이켰지만, 단 한 사람 ‘알콜 쓰레기’ 은수만은 늘 그랬던 것처럼 질색하며 와인 잔을 내려놓았다.
맞은편에 앉은 윤정이 그것을 단박에 캐치하고 물었다.
“왜, 별로야? 너 땜에 일부러 최대한 약하고 맛있는 걸로 산 건데.”
“……이게 약하고 맛있다고?”
하여튼 이해가 안 돼, 정말. 이게 대체 뭐가 맛있다는 거야?
와인 잔을 들어 살펴보는 은수의 입술이 뾰로통하게 나왔다. 그걸 본 현재는 역시나 씩 웃었다.
“마시기 싫으면 마시지 마요. 내가 마실게요.”
남자의 반응쯤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꽐라가 되어 그 역사적인 하룻밤을 치렀던 이후, 무슨 일이 있어도 술만큼은 각별히 자제시켜 왔던 그이니까.
내키지는 않았지만, 은수는 매우 마지못한 얼굴로 잔을 넘겨주었다.
“……네, 뭐.”
“야, 갈비찜 어때? 먹어 봤어? 배도 갈아 넣고, 네가 하란 대로 다 했는데.”
은수의 도움을 받아 첫 집들이 상을 홀로 무사히 차려 낸 윤정이 한껏 기대감을 안고 물었다.
하지만 젓가락을 쪽쪽거린 은수는 무척이나 간결한 평을 내놓을 뿐이었다.
“짜.”
그 한마디에 해맑던 윤정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짜?”
“어. 달고 짜고, 완전 자극적이네. 설탕이랑 간장을 아주 들이부었냐?”
“아니!? 그, 그럴 리가 없는데. 나 네가 하란 그대로 했다니까?”
“근데 왜 이런 맛이 나. 딱 보니까 중간에 맛 안 난다고 지 맘대로 넣었구만……. 솔직히 말해. 넣었지?”
“……아, 아니거든?! 지, 진짜 아닌데…….”
윤정은 당당한 척 큰 소리로 항변했으나 찔리는 얼굴을 감추기엔 역부족이었다.
‘아으, 무서운 기집애. 그 몇 숟갈 더 넣은 걸 저렇게 금방 알아채냐. 그래도 기왕 신경 쓴 거, 예의상으로라도 맛있다고 좀 해 주지.’
그렇다고 내가 굴할쏘냐.
절친의 혹평에 눈에 띄게 시무룩해진 윤정은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며 질문의 타깃을 돌렸다.
“저기, 여보는 어때요. 여보도…… 짜요?”
“어?”
갑자기 왜 화살이 이쪽으로…….
아무 생각 없이 밥을 뜨던 승환이 지레 뜨끔해선 대꾸했다.
“……아, 아니? 이 정도는 돼야 밥이랑 같이 먹지. 딱 좋아. 안 그래, 현재 씨?”
“예. 맛있습니다, 형수님.”
“……그래요?”
쳇, 그럼 그렇지.
현재의 대답까지 듣고 나서야 윤정은 비로소 흡족한 듯 웃었다. 그러나 엄격한 평론가 은수의 독설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맛있긴 개뿔이. 야,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들이니까 믿지 마. 이런 말 곧이곧대로 듣다간 실력 늘기는커녕 퇴보한다, 너.”
“이씨, 뭐?”
척 팔짱을 낀 그녀가 짐짓 진지하게 말했다.
“다른 건 됐고, 넌 일단 그냥 무작정 많이 해 봐야 돼. 백날 블로그만 본다고 요리가 잘해지냐? 직접 부딪쳐야지. 어차피 집들이 한 번 더 남았으니까 연습해. 아님, 너도 나처럼 요리 학원을 다녀 보든지. 어차피 이제 시간도 많을 텐데.”
요리 학원은 무슨. 윤정은 보란 듯 갈비 한 점을 뜯으며 콧방귀를 뀌었다.
“나 바빠. 요리 학원 다닐 시간 없거든?”
“바빠? 네가 뭐가 바빠.”
승환과 결혼하면서 자연히 전업 주부의 삶으로 들어선 윤정이었다. 물론 집안일도 하려고 들면 끝이 없기 마련이겠지만, 아무래도 회사 다닐 때보다는 조금 널널할 텐데.
그리 생각하고 있는 은수를 향해, 윤정은 왠지 모르게 매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도 해 봐서 알잖아. 태교하랴, 육아하랴, 이 사람 챙기랴…… 앞으로 나한테 요리 학원 다닐 시간 같은 게 어디 있겠냐? 숨쉬기 운동만 해도 다행이지.”
“……어?”
태교? 육아? 쟤가 지금 뭔 소리지?
은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옆에 있는 두 남자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반면, 좌중을 슥 돌아보는 윤정의 입가에는 천진한 미소가 걸렸다. 마치 선물을 숨겨 놓고는 모른 체하는 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아우, 입 근질거려서 죽는 줄 알았네. 내가 오늘까지 기다리느라 여길 얼마나 긁었는지 아냐? 거의 딱지가 앉게 생겼다고.”
너스레 뒤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가 이내 쑥스러운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나, 임신했어. 4주 됐대.”
“……뭐?”
“정말이야?”
“정말입니까?”
윤정을 제외한 세 명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레졌다. 윤정은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그럼. 나도 이제 곧 엄마가 된답니다.”
그녀의 마른 손이 아직은 전혀 티도 나지 않는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제껏 본 윤정의 얼굴 중 그 어느 때보다도 뿌듯하고 행복한 얼굴이었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긴가민가함에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승환의 표정은 점차 환희로 변했다. 떨리는 입가가 조금씩 승천하고 있었다.
“지, 진짜야? 나 이제, 애 아빠 되는 거야?”
“그렇다니까요. 워낙 초기라 아직 아빠 되기까진 좀 멀었지만, 그래도…… 언젠간?”
“워호!”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승환은 포효에 가까운 환호성을 날렸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현재와 은수의 입도 덩달아 함박만 해졌다.
“와, 축하합니다, 형수님. 과장님도 축하드려요. 정말 좋은 일이네요.”
“그러게요. 진짜 축하해, 허윤정. 축하해요, 이 과장.”
하지만 그러던 것도 잠시.
“……가만!”
승환의 입가에서 서서히 웃음기가 사라지는가 싶더니, 이윽고 그는 기겁한 얼굴로 안절부절못하며 옆에 있던 와인 병을 집어 들었다.
“당신 그럼, 이거 마시면 안 됐던 거 아니야? 술이잖아?”
마냥 기뻐서 간과하고 있었던 사실, 그것은 와인도 술이라는 것이었다.
곧 엄마가 될 것이라는 그녀가, 알코올이 복중 태아에게 미칠 치명적인 영향을 모를 리가 없었을 텐데. 알고도 이걸 마셨다니!
“……아.”
하지만 정작 윤정은 태연하기만 했다. 오히려 입꼬리를 씩 말아 올릴 뿐.
“그래도 남편이 낫긴 낫네. 예리하게 알아채 줘서 감사하긴 한데, 이럴 줄 알고 내가 준비한 게 있지요.”
“어?”
윤정의 손이 아래쪽으로 향하더니 무언가를 슬그머니 꺼내 흔들어 보였다. 반 정도 비어 있는 병 안에서 찰랑거리는 짙은 보랏빛 액체.
윤정의 잔에 담긴 음료와 똑같아 보이는 그것은 확실히 나머지 셋과는 뭔가 다른 빛깔을 띠었다.
전면 라벨에 붙어 있는 자랑스러운 이름은…….
“……포도주스?”
설마 바꿔치기를 해 놓은 거야? 그 짧은 사이에?
승환은 잠시 벙찐 채 그녀를 쳐다보았으나, 이내 못 당해 내겠다는 듯 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이 상황에 일방적으로 속은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할까!
“아주 처음부터 속이려고 작정을 하셨구만. 하여튼 대단해, 허윤정 씨.”
그걸 이제 아셨나. 칭찬 아닌 칭찬에 윤정 또한 비싯 웃었다.
“당연하죠. 오늘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딱 말하려고 내가 며칠을 참았는데. 여보까지 속이느라고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모두를 놀래키고야 말겠다는 소기의 목표를 달성한 윤정은 와인의 탈을 쓴 포도주스를 뿌듯하게 한 모금 들이켜고 다시 말을 이었다.
“암튼, 우린 저쪽에 비하면 좀 늦었으니까 분발해야 돼요. 적어도 우리 첫째가 너네 둘째보단 빨리 나와야지. 안 그러냐?”
윤정 딴엔 가볍게 내뱉은 말. 하지만 그 말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반향을 일으켰다.
“……둘째?”
그 말을 입에 담은 순간, 은수의 입가에서 거짓말처럼 웃음기가 싹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애들 또래는 좀 비슷해야 될 거 아니야. 뭐, 혹시나 우리 애가 딸이면…… 너랑 사돈 맺는 상황이 올 수도 있는 거고?”
“…….”
“아, 맞다. 그러고 보니까 너넨 아직 둘째 생각 없어? 이맘때쯤 가진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 얘기한 지도 벌써 오래된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