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속도위반 로맨스-123화 (123/128)

# 123

에필로그3. After 3 years, 아직 못 다한 이야기 (2)

[라면 먹을 생각 하지 말고 밥 먹어요. 금방 갔다 올 테니까 꼭 챙겨 먹어요.]

깔끔하고 어른스러운, 현재 특유의 글씨.

쪽지를 확인한 은수는 무의식적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의 흔적은 당연히 어디에도 없었다.

‘……뭐야, 진짜 CCTV라도 달아 놓은 거 아니야?’

하여튼, 귀신같은 남자라니까. 내가 라면 먹으려고 할 건 또 어떻게 알고.

임신 초반, 별것도 아닌 쪽지 한 장으로 그녀를 웃게 만들던 현재는 결혼 후에도 종종 이런 식으로 쪽지를 남겨 놓곤 했다. 남겨 놓는 장소도 다양했다. 식탁, 혹은 냉장고 문, 그것도 아니면 침대맡. 오늘은 그중에서도 굳이 냄비 뚜껑 위를 택했단 점이 약간은 신선하게 다가왔다.

어쨌거나 문자나 메신저 같은 것들보다는 훨씬 로맨틱한 소통 수단임에 분명했지만, 그녀의 눈썹머리는 떨어질 줄을 모르고 맞붙었다. 그 짧은 글귀를 읽자마자 필체와 꼭 닮아 있는 남자의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입체 서라운드로 들려온 탓에.

‘……쳇, 남이사 웬 참견.’

이미 수 개월간 쌓여 버린 원통함. 그래도 그 앞에선 대놓고 티를 낼 수 없었다. 일일이 따져 묻기에는 너무나 우스운 이야기라는 걸, 그녀 스스로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흐음. 한 템포 쉰 그녀는 별다른 기대 없이 냄비 뚜껑을 열었다. 그런데 그때, 전혀 생각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밀랍인형처럼 차갑게 굳어 있던 그녀의 표정이, 내용물을 확인하기 무섭게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변한 것이다.

“……헐?”

냄비에 담겨 있던 것은 바로 그녀의 최애 음식이자 소울푸드, 아주 얼큰해 보이는 해물탕이었다.

육안으로만 대충 보아도 새우, 게, 조개 등이 아주 실하게 들어 있는 명품 수제 해물탕. 불그죽죽한 때깔이며, 슬쩍 풍겨 오는 냄새며, 입 안에 절로 군침이 도는 듯했다.

“와…….”

어느샌가 입술이 헤벌쭉 벌어져 있었나 보다. 그것을 깨달은 은수는 단속이라도 하는 양 황급히 입가를 눌렀다. 그리고 얼른 가스 밸브를 열고 레인지를 켜며 머쓱하게 중얼거렸다.

“……웬일이래.”

신혼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녀를 따라 어깨 너머로 요리를 배운 남자였다. 때문에 다른 음식들은 곧잘 해 준 적이 많았지만, 이렇게 호화스런 해물탕은 처음이었다.

물론, 안 봐도 비디오. 그녀가 자는 새 얼른 준비해 놓기 위해 장모인 이 여사에게 다급히 SOS를 쳤겠지.

엄마가 해 주던 것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 해물탕을 이리저리 뒤섞는 동안 그녀의 입술은 저도 모르게 꽉 앙다물어졌다.

‘이런 걸 보면 딱히 맘이 식은 것 같지는 않은데…….’

……근데 그 남잔 왜 그러냐는 거냐고, 도대체! 아, 짜증 나.

퍽퍽. 국자를 쥔 손의 움직임이 과격했다. 그리 좋아하는 해물탕을 데우면서도 새어나오는 건 한숨뿐.

눈 깜짝할 새 서른다섯 살이 된 ‘유부녀’ 민은수의 일상은 오늘도 그렇게 덜커덩덜커덩 굴러가고 있었다.

그럭저럭, 행복하게.

* * *

“요즘 어떠세요?”

“응? 뭐가.”

“좋으시냐구요, 요즘.”

다소 뜬금없는 물음이었다. 얼마 전 드디어 승진을 한 구 ‘이 대리’, 현 ‘이 과장’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좋지, 그럼! 신혼인데. 그걸 말이라고.”

물을 걸 물어야지, 하는 듯한 어조. 빙긋 웃은 현재는 멋쩍게 고개를 숙였다.

“하하, 죄송합니다. 윤정 씨, 아, 아니, ‘형수님’도 잘 지내시죠?”

“어, 그 사람이야 늘 똑같지 뭐. 근데 요즘 들어서 이상하게 먹성이 좀 늘었어. 우리 마나님 먹여 살리려면 아무래도 지금 월급 갖곤 안 될 것 같다니까. 자, 건배.”

나직한 웃음소리와 함께, 두 남자의 술잔이 다정하게 맞부딪쳤다.

그렇게도 티격태격하던 윤정과 승환은 2년간의 연애 끝에 결국 결혼에 골인해, 벌써 결혼 한 달 차로 접어드는 중이었다. 바로 내일, 그들 부부의 집에서 집들이 겸 나름의 조촐한 송년회를 갖기로 계획한 것도 그 때문이었고.

돌이켜보면 정말 쏜살같이 흐른 시간이었다. 어쩌면 시간이 이렇게도 빠를까.

승환만 보면 사납게 발톱을 세우던 것이 언제였나 싶게 이젠 시종일관 하트 뿅뿅 눈이 되어 버린 새색시 윤정과, 눈 깜짝할 새 훌쩍 커 버린, 이젠 아장아장 잘도 걷는 아들 은성이, 그리고……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더 아름다워지고만 있는 아내 은수.

애정 가득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현재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곤 했다. 자신에 이어 한 가정의 어엿한 가장이 된 이 대리를 마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나저나, 현재 씨네는 어때. 본부장님 요새 엄청 저기압이신 것 같던데.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안주로 나온 곰장어 한 점을 입에 넣으며 승환이 물었다. 현재는 살짝 흠칫했지만, 이내 느릿느릿 대답했다.

“……아뇨, 일은요. 그냥 워낙 바쁜 사람이니까……. 요즘 일이 너무 많아서 그런 것 같아요.”

어쩐지 미적지근한 대답, 그다지 밝지도 않은 안색. 이 구역에서 눈치 빠르기로는 제일가는 승환이 그것을 못 알아챌 리가 없었다.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죽상을 하고서 무슨……. 뭐야, 무슨 일인데. 말해 봐.”

“……아니에요. 정말 아무 일도 없습니다.”

“에헤이, 속일 사람을 속여, 좀. 피차 다 아는 사이에 왜 이래?”

왠지 모르게 주저하는 듯한 그를 보고 있자니 승환은 문득 오래전 현재의 연애 코치를 해 주던 시절이 떠올랐다. 이 자식, 그때도 꼭 이런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근데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치고, 이제는 예쁘고 능력 있는 마누라 있겠다, 떡두꺼비 같은 아들도 있겠다, 나날이 행복하기만 할 뿐 아무 걱정이 없을 것 같은 그에게 대체 무슨 고민이 있을지 도통 가늠이 되질 않았다.

결혼한 순서로는 엄연히 선배인 데다 어느덧 서른 줄에까지 들어선 현재이기는 했지만, 이런 쪽으로는 여전히 제가 한 수 위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승환이었기에. 승환은 형님 된 맘으로 현재를 인자하게 채근했다.

“그러지 말고 바른대로 말해 봐. 그래야 내가 뭘 도와주든가 말든가 할 거 아냐.”

“……딱히, 과장님이 도와주실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서요.”

“그래? ……에이,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어디 들어 보기나 하자고. 엉? 뭔데.”

“…….”

그렇게까지 말했는데도 현재는 머뭇거렸다. 잠시 동안의 묵묵한 기다림 후에야 승환은 비로소 그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이게…… 이제 와서 조금 우스운 말일 순 있는데.”

“…….”

“사실, 요즘 많이 후회가 돼요.”

“어? 뭐가?”

현재가 좀 더 적절한 말을 고르려는 듯 뜸을 들였다.

“은성이를 조금만 더 늦게 가졌더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이 종종 들어서요.”

“……어?”

이건 웬 생각지도 못한……. 승환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은성이 같은 복덩이가 또 어디 있다고.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했대?”

“…….”

“음…… 아니면 뭐, 속도위반 했던 것 때문에 그래? 은성일 혼전에 너무 빨리 가져서?”

아, 이것 때문인가?

말해 놓고 잠시 생각하던 승환은 살짝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튼, 이놈은 별 후회할 것도 많아요.

“참…… 현재 씬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아직까지 그러고 있어? 그쪽은 오히려 빨리 가져서 좋았지, 뭘. 은성이도 알아서 무럭무럭 잘 크고 있고, 첫째는 됐으니까 이제 둘째 낳을 생각이나 해야지. 그렇잖아도 본부장님이 원하는 눈치시더만.”

은수가 2년만 더 일한 뒤 둘째를 가질 계획을 세웠었단 것은 승환도 이미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아이 아빠인 현재로선 당연히 반길 일이 분명할 텐데, 그는 이상하게도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실은, 그것 때문에요.”

“뭐 말이야. 둘째?”

“……네.”

뭐지. 얜 둘째는 생각이 없나?

승환은 좀 더 정확한 이해를 위해 재차 물었다.

“아니, 나 지금 현재 씨 말이 좀 이해가 안 되는데. 뭐가 문제야. 왜, 본부장님이 둘째 갖기 싫대? 근데 그런 눈치는 딱히 없으시던데.”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시선을 내리깔던 현재는 머뭇거림 끝에 남아 있던 소주를 입 안에 다 털어 넣었다.

그러고는 마치 오랫동안 감춰 두었던 비밀을 풀어 놓듯, 천천히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물론 저도 둘째 가지면…… 좋죠. 너무너무 좋을 거고, 은수 씨도 갖고 싶어 하는 눈치는 맞는데…… 근데, 괜히 주저가 돼요. 제 욕심에 자꾸, 은수 씨한테 못할 짓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

“과장님도 아시잖아요. 은성이 가졌을 때, 은수 씨 엄청 많이 힘들어했던 거.”

그야 당연히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임신을 하면 응당 거쳐야 하는 수순인데. 그게 뭐 어떻다는 얘기지?

승환은 대답 없이 잠자코 현재의 말을 계속 들어 보기로 했다. 한번 시작한 넋두리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처음엔 정말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그땐 은수 씨가 제 아일 가졌단 사실이 마냥 좋아서, 은수 씨가 절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생겼다는 게 내심 기뻐서…… 그냥 그렇게 넘겼었거든요. 근데, 은성일 낳고 나서야 깨달았던 것 같아요. 제가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이었는지, 또…… 앞으로 제가 은수 씨에게 얼마나 속죄해야 하는 입장인지.”

“…….”

“이제야 원하는 걸 이뤄서 원 없이 일하고 있는 사람한테, 그런 고생을 또다시 겪게 하고 싶지가 않아요. 좋아하는 일을 포기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구요. 요즘도 뭐만 하면 야근이다 뭐다 고생하고 있는 게 뻔히 보이는데…… 둘째 가지겠단 욕심에 제가 또 괜히 짐을 얹어 주는 건 아닐까…….”

“…….”

“그런 생각이, 자꾸만 드네요.”

……아아.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승환은 새삼 그에게 감탄했다. 확실히 같은 남자지만 생각하는 차원이 뭔가 남다른 자식이었다.

뭔 얘기인지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만, 그렇다 해도 그게 이렇게까지 고민할 일인가?

“참나. 열부 났네, 증말. 뭐가 그렇게 걱정이야. 그럼 둘째 갖지 말자고 하고 피임해. 그럼 되잖아.”

승환이 나름 명쾌한 해답을 내놓았다. 현재 또한 수긍하는 얼굴이었지만, 미심쩍게도 굳은 표정은 여전했다.

“……네. 사실 그렇게 하면 되는 거긴 한데요…….”

“……근데? 또 뭐.”

눈살을 찌푸린 승환이 영문을 모른 채 쳐다보는 사이, 매우 착잡한 얼굴의 현재가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제가…… 아무래도 아직은 너무 철이 없어서 그런 것 같은데…….”

“…….”

“그렇게 생각하면 은수 씰, 좀 가만히 놔둬야 하는 거잖아요. 그게 맞는 건데, 저도 아는데. 근데…… 은수 씨만 보면 자꾸 또 반대로 욕심이 생겨서, 저 스스로가 주체가 안 되더라구요.”

“…….”

“그래서 실은, 은수 씰 일부러 좀 피하고 있는 중이에요.”

“뭐? 언제부터?”

“……최근 몇 달간요.”

승환의 눈이 금세 커다래졌다.

“몇 달간?!”

무심결에 기함한 그는 그만 큰 소리로 반문했다.

몇 주도 아니고 ‘몇 달’을 피하고 있다니. 아니, 이 자식이 이젠 보살로도 모자라 수도승이 될 셈인가?

“……자, 잠깐, 이거 일단 정리 좀 하자고. 그러니까 지금 현재 씨 말은…… 민은수가 너무 좋아서 죽겠고, 속으론 둘째도 너무너무 가지고 싶은데, 그 걱정되는 것들 때문에 둘째고 뭐고 다 포기하고 싶다는 거 아냐. 스킨십까지 일부러 피해 가면서.”

“…….”

“한마디로 말해서 이성과 감정의 충돌, 뭐 이런 거라는 건데. 맞아?”

“……네.”

아이고, 이 자식을 어떡하면 좋냐, 정말.

현재의 맥없는 대답에, 승환은 아주 오랜만에 그를 예의 딱하다는 눈길로 쳐다보았다.

결혼만 시켜 놓으면 끝일 줄 알았더니, 아직도 멀었구만. 쯧쯧.

“참, 진짜…… 현재 씨도 증말 대단하긴 하다. 3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그렇게 정신을 못 차리겠어? 아직도 막, 그렇게 좋아 죽을 정도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