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
에필로그3. After 3 years, 아직 못 다한 이야기 (1)
「혹시, 내가 싫어졌어요?」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거렸다. 졸지에 당황한 은수는 속눈썹을 달싹였다. 간결한 물음임에도 대답이 쉽사리 나오질 않았다.
이 남자가 싫어지다니? 그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날이 갈수록 더 좋아진다면 모를까……. 반대의 경우는 생각해 본 적도, 실감한 적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녀의 맘속 깊은 곳 언저리에서는 돌연 이상한 오기 같은 것이 발동하고 있었다.
뭐랄까, 곧이곧대로 착하게 대답해 주기는…… 어쩐지 싫다고 해야 할까.
「네. ……싫어요.」
「정말로요?」
「……나 두 번 말하기 싫어하는 거 알잖아요. 그렇다니까요.」
그래서였다. 미운 일곱 살처럼 퉁명스럽게 대답해 버린 것은.
잠시 동안 불편한 정적이 흘렀다. 호기롭게 내뱉은 말이 무색해지게, 은수는 또 은근슬쩍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평소답지 않게 대답이 없는 남자가 영 불안해서. 덮어놓고 철벽만 치던 옛날과는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에잇, 내가 미쳤지. 싫긴 뭐가 싫다고. 도대체 맘에도 없는 소릴 왜 해?’
하여튼 항상 이 망할 놈의 자존심이 문제라니까. 이제 이 남자 없인 살 수도 없는 주제에.
그렇게, 금방 소심해진 은수가 속으로 방금 전 자신의 대답을 지레 자책하고 있을 무렵.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남자가 웬일인지, 입가에 웃음기를 띄우며 말했다.
「……이거, 서운하네.」
이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권태로운 웃음. 은수의 눈이 절로 동그랗게 떠졌다.
밑도 끝도 없는 그 말과 미소가 순간적으로 이해되지 않은 탓이었다.
「……네?」
여전한 얼굴의 그는 이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내가 잘못 생각했나 봐요.」
「…….」
「……이럴 줄 알았으면 굳이 안 참는 건데.」
그것도 무척 후회스러운 듯한 어조로.
「……그게 무슨 말이에……. 헉!」
물으려 했으나 끝을 맺을 수는 없었다.
바로 그 찰나에, 그가 너무나도 가볍게 그녀를 안아 올려 버렸으므로. 엉덩이를 단단하게 받쳐 드는 손길이 마치 불에 덴 듯 뜨거웠다.
「현재 씨!」
은수는 엉겁결에 그의 목덜미를 꼭 끌어안고 소리쳤다. 폴더폰이라도 된 양 착 밀착된 자세가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두 다리는 본능적으로 그의 몸을 꽉 옭아맸고, 얼굴 또한 순식간에 빨갛게 물들었다.
그녀의 놀란 안색에도 불구하고 그는 쉴 새 없는 입맞춤을 시작하며 턱턱 걸음을 옮겼다. 겨우겨우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그녀는 제가 이미 딱딱한 무언가에 걸터앉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남자의 뒷머리를 헝클이며, 아래에 있는 그를 내려다보는…… 꼭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자세. 순식간에 후끈한 열기가 은수의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혀, 현재 씨……?」
「말해요, 듣고 있으니까.」
……들을 생각이라곤 추호도 없어 보이면서 말만!
아니나 다를까, 남자는 다시금 지체 없이 입술을 부딪쳐 왔다. 뒤통수와 등을 통해 벽의 차가운 기운이 곧바로 닿았지만, 온기를 잔뜩 머금은 그의 입술이 목덜미를 뜨겁게 데우고 있어 그런 것쯤은 차마 느낄 새도 없었다.
곧이어 큼지막한 손이 그녀의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었고, 신음은 흘리는 족족 그의 입 안으로 먹혀들었다. 끝 간 데를 모르는 채 잔뜩 몰아붙여지는 느낌. 절로 숨이 가빴다.
「잠깐만요, 현재 씨! 잠깐…….」
오랜만이라 더욱 자극적인 그 손길을 정신없이 받아 내던 은수는 결국, 남자의 단단한 가슴을 애써 밀어냈다.
「잠깐만!」
그제야, 남자의 저돌적인 움직임이 멈추었다.
억지로 밀려난 그의 얼굴에선 불만스러움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었다.
「……왜요.」
안달이 난 듯한 목소리. 금방이라도 모든 걸 태워 버릴 듯한 시선.
원초적인 욕정을 품은 남자의 눈빛이 그대로 와 닿아서, 은수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어, 저기…… 그, 그게.」
언젠가 한 번쯤 이런 일을 꿈꿔 본 적은 있지만…… 그래도 이건 갑작스러워도 너무 갑작스럽지 않은가! 아무리 부부 사이라고 해도 그렇지…….
잔뜩 당황한 그녀의 뇌가 팽팽 돌아갔다. 어떻게든 여유를 찾아야 하는데!
「…….」
하지만 그녀의 바쁜 머릿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현재는 여전한 눈길로 은수를 끈덕지게 쳐다볼 뿐이었다. 평소엔 금욕적이고 신사적이기만 한 남자인데, 대체 무엇이 이리도 그의 불씨를 당긴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은수 씨.」
「……네, 네?」
「미안한데, 얘기할 거 있으면 나중에 해요.」
「…….」
「……지금은, 못 참겠으니까.」
나지막이 내뱉는 그 모양이 정말, 죽을 만큼 섹시했다.
온몸으로 전기가 타닥타닥 오르는 느낌. 남자의 페이스에 완벽히 말려들고 만 순간이었다.
「…….」
……어떡해. 나도 못 참겠어.
결국, 그녀는 더 이상의 저항 없이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꼭 앙다문 입술은 곧 허락의 의미였다.
원하던 것을 손에 쥔 듯 만족스런 미소를 지은 그가 마침내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집어삼켰다.
그리고 바로 그때.
은수가 별안간 눈을 떴다.
한순간에 시야가 새까매졌다. 사방이 어두컴컴했고, 쥐죽은 듯 조용했다.
뜨거운 물에 잠겨 있다 막 밖으로 나온 듯한 기분. 게슴츠레하게 뜬 눈이 느리게 끔뻑였다.
‘……뭐지. 뭐야?’
살짝 고개를 틀자, 머리맡에 난 창문을 통해 옅은 주황 불빛이 새어 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마저 없었다면 여전히 눈을 감고 있단 착각이 들었을지도.
순간, 그녀는 무지막지한 현실감이 마구마구 덮쳐 오는 것을 느꼈다.
‘……꿈이었구나. 역시나.’
하, 참.
일순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파자마 원피스로 감춰진 아랫도리는 너무나도 공허했으며, 어딘가에 큰 충격이라도 받은 양 욱신거리고 있었다.
짜증이 팍 솟구친 나머지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참나. 아니, 내가 무슨 몽정하는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정말 갈 데까지 갔구나, 민은수. 넌 꿈을 꿔도 어째 이런 꿈을 꾸냐. 욕구 불만이니? 어?’
아으, 머리야.
은수는 이불 바깥으로 나와 있던 탓에 서늘해진 손등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사실, 근래 들어 이리 푹 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늘 과열되어 있던 머리가 급격하게 푹 식어 버린 느낌.
덕분에 잠에 대한 갈증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지만, 깨고 난 뒤 이런 기분을 맞이한 건 영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개꿈이야, 개꿈. 잊어버리자.’
그래. 어차피 이런 꿈은 곱씹어 봐야 하등 도움이 될 게 없으니까. 더구나 지금 같은 상황에선 더더욱.
‘일어나야 돼, 빨리.’
잠시 뒤, 까만 천장을 짜증스럽게 올려다보고 있던 은수는 천천히 이부자리를 제치고 침대를 나섰다.
─끼익.
불 꺼진 거실은 마찬가지로 조용했다. 하지만 방문을 열어젖힌 그녀를 유일하게 반겨 준 건, 거실 모퉁이에 놓여 있던 크리스마스 트리였다.
영롱한 빛을 마구마구 뿜어내고 있는 그것은 어둑한 실내와 대비돼 생각 이상으로 퍽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했다. 다름 아닌 ‘그’의 작품이었다.
며칠 전, 현재는 귀찮게 뭐 하러 그러냐는 은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부득불 은성이와 함께 트리를 만들었다. 화려하고 아기자기한 소품 같은 게 없는 대신, 차분하면서도 유달리 예쁜 조명으로 전체를 밝혀 놓은 트리.
하여튼 누가 소박한 취향 아니랄까 봐……. 트리를 훑어보는 고개가 새삼스레 삐딱해졌다.
“…….”
뭐 그래도, 해 놓으니까 예쁘긴 하네. 크리스마스 분위기도 좀 나는 것 같고. 그러고 보니 오늘이 며칠이었더라.
의식의 흐름에 따라 은수는 벽에 달린 달력을 쳐다보았다. 아직 잠기운이 제대로 물러가지 않은 터라 잠시 동안 고민하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오늘은 12월 23일 토요일, 크리스마스이브의 이브였다.
“……꼴랑 이틀 남았구나.”
뭐, 크리스마스라고 해 봐야 나한텐 별일도 없겠지만.
이젠 명절이니 기념일이니 하는 것들도 별 감흥이 없었다. 딱히 어디를 갈 것도 아니고, 쉬는 날엔 집에 있는 게 최고라 여기는 그녀에게 휴일 계획 같은 건 아주 먼 얘기에 불과했으니까.
시큰둥하게 입술을 내민 은수는 습관처럼 은성이의 방으로 먼저 향했다.
그녀의 하나뿐인 별, 은성이는 올해로 벌써 만 세 살이었다. 마냥 유순하고 얌전해서 초보 엄마인 그녀조차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키울 수 있었던 아이. 하지만 그런 은성이도 요새 들어선 순진무구한 악동으로 변하고 있는 중이었다. 즉, 이제는 집 안 전체가 아이를 위한 큰 방이 된 셈이었다.
그래도 신혼 초, 그들 부부가 각별히 신경을 써 준비했던 은성이의 방은 엄연히 따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멋들어진 인테리어와 함께. 그런데…….
“……아이, 참.”
어김없이 방 안 곳곳을 장식하고 있는 레고 조각들과 장난감들을 보며, 은수는 오늘도 혀를 끌끌 차야만 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제 때 제 때 좀 치우라고 그렇게 누누이 말을 했는데도!
까놓고 말해서, 이제 이 방은 단순히 아이를 위한 방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었다. 왜냐. 방문하는 빈도수로 보나, 아니면 주로 쓰이는 용도로 보나, 방 주인인 은성이보다는 오히려 ‘아이 아빠’인 현재의 비중이 훨씬 더 컸으므로.
요사이 현재에게 새로 생긴 낙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아들 은성이와 이 방에서 놀아 주는, 아니 아들을 놀이 상대로 삼고 함께 노는 것이었다. 그를 증명이라도 하듯, 그녀가 지나가다 슬쩍슬쩍 구경할 때면 되레 아이보다 더 몰두하고 기뻐하는 듯한 남자의 표정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덕분에 본의 아니게 ‘독박육아’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살게 된 그녀였지만……. 그렇게 깔끔한 성격의 소유자인 남자가, 왜 유독 장난감들만은 이렇게 안 치워 놓는 건지 당최 모를 일이었다. 맞추는 족족 신이 나서 치워야겠다는 생각은 아예 뒷전이 되어 버리는 건지.
하기야, 원체 레고를 좋아하는 남자가 아니던가. 그리 크지도 않은 방 안엔 연애 시절─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어쨌든 결혼 전이니까─에 그녀가 사 주었던 레고 세트는 물론이거니와, 은성이와 맞추겠다며 새로 산 레고 세트들이 이미 한 무더기였다.
만화 캐릭터, 영화 캐릭터, 소방서, 경찰서…… 기타 등등. 덕분에 은수는 레고의 세계가 그렇게 무궁무진한 줄 난생처음으로 알았다.
그래도 그런 현재의 모습이 싫지가 않았다. 조막만 한 아들내미와 머리를 맞대고 레고를 맞추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볼 때면, 그녀도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뭉클해지곤 했으니까.
아마…… 어린 시절의 그도 지금의 은성이와 같은 삶을 꿈꾸었겠지. 어느덧 나이를 서른 살이나 먹은 남자의 취미라고 하기엔 좀 유치하지 않나 싶어도, 그를 차마 뭐라 할 수는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그것이었다.
하여튼 오기만 해 봐. 이번엔 진짜 혼쭐을 내 줘야지.
두 말썽꾼들이 어질러 놓은 방을 깨끗이 정리한 은수는 해 봤자 곧 잊어버리곤 하는 다짐을 되새기며 다시 거실로 나왔다.
한데 그것도 약간의 노동이어서일까, 문득 배가 고파 왔다. 그러고 보니 종일 자느라 먹은 것도 통 없었다.
“……뭣 좀 먹을까.”
아이씨, 혼자 먹긴 싫은데.
은성이라도 옆에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녀의 금쪽같은 아들내미는 오늘도 아주 먼 곳에 가 있는 채였다. 주말에 애 보지 말고 잘 쉬기나 하라며, 배려 같은 핑계를 내세운 두 할머니들이 날 밝기가 무섭게 또 은성이를 데리고 가 버렸으니까. 갓 낳았을 때도 그러했지만, 그들의 손자 사랑은 날이 갈수록 끝을 모른 채 부풀고 있었다.
한편, 그녀의 웬수 같지만 잘생겨 빠진 남편은 또 어떻고. 오늘 그놈의 ‘승환이 형’─언젠가부터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과 저녁 약속이 있다더니, 아무런 기척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 그녀가 깨어나기도 전에 외출을 한 모양이었다.
문득 심통이 난 은수가 입술을 삐죽였다.
‘어차피 내일 저녁에 보기로 했으면서, 남자들끼리만 굳이 왜…….’
그렇잖아도 요즘 누구누구 때문에 우울 모드인데, 이 대리까지 나서서 부채질을 할 건 뭔지. 이러다 애꿎은 사람까지 미워질 판이었다.
축 처진 눈초리를 한 채 홀쭉한 배를 슬슬 문지르던 그녀는 별생각 없이 주방으로 향했다. 여차하면 라면이라도 하나 끓여 먹을 생각에.
그런데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가스레인지에는 웬 냄비 하나가 척 올라가 있었다. 반투명한 유리 뚜껑 위로는 정체 모를 쪽지까지.
고개를 갸웃거린 은수가 쪽지를 떼어 냈다.
“……?”
어딘가 무척 낯이 익은 노란 쪽지 안엔 주인을 닮아 반듯하기만 한 글씨체가 그녀를 반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