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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위반 로맨스-120화 (120/128)

# 120

120. 에필로그2. 1년 뒤 그들은(2)

절절 끓는 소스에 면을 투하하고 프라이팬을 뒤적이는 손길이 마치 전문가의 것처럼 현란했다. 은성이를 품에 안은 채로 식탁에 앉아 있던 현재는 새삼 신기하다는 눈으로 은수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은수 씬 정말 우리 회사 안 들어왔으면 요리사 해도 됐겠어요.”

“쳇, 이 정도 갖고 뭘요.”

저 남잔 꼭 저런 식으로 오버한다니까. 여전히 그를 등진 채로 은수는 입술을 비죽였다.

“뭐, 물론 일반인치곤 잘하는 편이긴 하죠. 예전에 내가 그랬잖아요, 나 요리 잘한다고. 나 못하는 거 없는 거 이제 알았어요?”

그녀 특유의 자랑 겸 너스레였지만 현재는 수긍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진짜 못하는 게 없네. 겉으로 보기엔 요리 진짜 못할 것 같은데…….”

“뭐요?”

발끈해서 팩 돌아서는 모습조차 무섭기보단 사랑스러워 보여 탈이었다. 저런 반응 때문에 현재는 요즘 그녀를 놀리는 재미가 무척 쏠쏠했다.

한때 요리 학원까지 다닌 몸이라더니, 은수의 요리 실력은 정말 그의 생각 외로 수준급이었다. 혼자 살 때는 원체 음식을 잘 안 해 먹었기 때문에 그 실력을 발휘할 일이 잘 없었지만, 결혼 이후에는 웬만하면 그녀가 요리하기를 자처하곤 했다. 그에게 맡겨 놓으면 어쩐지 불안하다는 게 이유였다. 대신 뒷정리와 설거지 같은 건 당연히 현재의 몫이 되었고. 요리 관뒀다며 꿈 깨라고 말하던 그녀는 어느새 오로지 그와 아기만을 위해 요리하고 있었다.

평일엔 회사에서 사는 탓에 집에서 밥을 먹을 일이 잘 없는 만큼, 오늘 같은 주말엔 이렇게 꼭 집 밥을 해 먹여야 직성이 풀렸다. 정성껏 요리한 음식을 남김없이 잘 먹어 주는 남자와 은성이를 볼 때면 뜨거운 불 앞에서 요리한 수고로움을 모조리 보상받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것이 엄마의 마음이란 걸까. 은수는 조금씩, 진짜 어른이 되어 가는 기분이었다.

“농담이에요. 덥지 않아요?”

“더운데, 거의 다 끝나서 괜찮아요. 조금만 기다려요.”

잠시 동안 말없이 요리를 마무리 지은 은수가 다 완성된 스파게티를 접시에 예쁘게 담아 그의 앞으로 내놓았다.

“자요. 먹어 봐요.”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잘 봐 둬요. 이게 바로 ‘알 덴테’라는 거니까.”

알 덴테?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 단어. 하지만 그는 그게 무슨 뜻인지 한 번에 떠올릴 수 없었다. ‘알 덴테’라……. 알 덴테……. 아!

“……아, 전에 말했던 그거요?”

마침내 기억이 났다. 그녀에게 처음으로 스파게티를 해 주었던 날, 그녀가 저에게 요구했던 사항이 아닌가. 금방 기억해 낸 그를 보며 은수는 비싯 웃었다.

“네, 꽤 오래전 일인데 기억하네요. 이걸 먹어 보면 아마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 거예요.”

“……어, 그럼…….”

그는 조심스레 포크를 집어 들어 스파게티를 돌돌 말아 입 안으로 넣었다.

“어때요?”

초조하게 묻는 그녀의 얼굴을 뒤로하고 그는 천천히 면을 씹었다. 알맞게 잘 삶긴 면은 탄력을 잃지 않아 쫄깃하고 씹는 맛이 있었다. 푹 삶은 면과는 또 다른 맛. 거기다, 버무려져 있는 토마토소스 또한 그녀의 비법이 들어간 것인지 감칠맛이 매우 뛰어났다.

맛을 조용히 음미한 현재의 입가에 작게 미소가 일었다.

“맛있어요. 진짜 맛있다.”

“……그래요?”

오랜만에 한 거라 이상하게 될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안심하며 환하게 웃은 은수는 그를 따라 제 몫의 스파게티를 먹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까 현재 씨한테 스파게티 처음으로 해 준 거네. 이거 진짜 쉬운데.”

“난 어렵던데.”

“잘 몰라서 그래요. 하는 법 가르쳐 줄 테니까 기억해 놨다가 나한테 해 줄 때 똑같이 해 줘요. 알았죠?”

음, 그건 나한텐 좀 버거운 바람인데…….

그래도 그녀의 기대에는 부응해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 현재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하하, 노력해 볼게요.”

그는 한쪽 팔로 은성이를 지탱한 채 맛있다는 말을 연발하며 스파게티를 먹어치웠다. 저래 갖곤 자세가 불편할 텐데 잘도 먹네. 하여튼 아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남자다웠다.

그렇게 그녀는 문득 ‘아이’와 ‘도현재’라는 단어를 연결했다. 그런데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서 잊혀 있던 것이 하나 불쑥 떠올랐다.

아, 맞아. 그거!

“현재 씨.”

“네?”

“혹시…….”

“…….”

“‘별이맘’이라고 알아요?”

“큽!”

스파게티를 맛있게 잘 씹어 넘기던 남자가 그 대목에서 갑자기 사레에 들려 캑캑댔다.

그것은 누가 봐도 ‘내가 별이맘이요’ 하는 몸짓이었다.

“…….”

으휴, 그럼 그렇지.

뜻 모를 미소를 지은 은수가 옆에 있던 물잔을 그에게로 놓아 주었다.

“뭘 그렇게 놀라요.”

“……아, 아니에요. 근데, 그건 왜…….”

은수는 잠시 그를 곁눈질하다 태연자약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아니, 내가 임신했을 때 자주 보던 카페가 있었거든요. 근데 거기 글쎄, ‘별이맘’이라는 닉네임이 있는 거 있죠.”

“……아, 그래요?”

“네. 우리 은성이랑 태명이 똑같아서 나도 모르게 관심이 갔는데, 알고 보니까 그 사람…… 무려 운영자더라구요. 근데 더 놀라운 게 뭔지 알아요?”

“…….”

“그 사람…… 남자래요.”

“예?!”

반문하는 그의 언성이 절로 높아졌다.

혹시 나도 모르는 새 내 정보가 유출된 건가? 아니면, 말투 같은 것 때문에 들킨 걸까? 설마, 그럴 리가 없어.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깜짝 놀란 현재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걸 알 수 있을 리가 없…….”

“…….”

그러나 잠시 뒤, 현재는 그녀의 비릿한 미소를 보며 그것이 곧 은수의 설계였음을 바로 알아차렸다.

‘아뿔싸.’

남자의 표정 변화를 구경하며 은수는 은근하게 물었다.

“별이맘 님, 이제 그만 이실직고하시죠?”

“……은수 씨가 그걸 어떻게…….”

그의 질문에 은수는 큼큼 헛기침을 했다. 차마 그의 컴퓨터를 몰래 봤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어떻게 알았는지는 알 거 없구요. 아니, 현재 씬 안 그래도 바쁜 사람이 무슨 그런 카페 운영진을 맡고 있어요?”

숨길 생각은 없었다. 다만 이런 타박이 돌아올 것 같아 일부러 얘기하지 않았던 건데.

현재는 어색하게 웃으며 애꿎은 스파게티를 포크에 돌돌 감았다.

“그게…… 어쩌다 보니까…….”

그도 처음부터 운영진을 하려던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은성이가 나올 것을 대비해 더 많은 정보를 얻고 싶은 마음에 전 게시판을 누비며 활발히 활동했을 뿐. 그러던 어느 날, 일은 갑자기 터졌다.

바야흐로 운영진의 비리로 인해 카페가 뒤숭숭하던 때였다. 그야 그저 일개 회원일 뿐이니 뒤에서 조용히 관망하고 있으려 했는데, 저렇게 엄청난 활동량을 보이는 회원이야말로 운영자를 해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며, 갑자기 다른 회원들이 나서서 그를 운영자로 추대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 어영부영 시작하게 된 운영진 활동이 어쩌다 보니 은성이가 이렇게 클 때까지 이어졌다. 그렇잖아도 조만간 그만두려던 참이었는데, 하필이면 끝물에 들킬 게 뭔지.

현재는 민망함을 애써 감추며 스파게티를 다시 먹기 시작했고, 은수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작은 한숨을 쉬었다.

“뭐, 현재 씨니까 그런 면조차도 귀엽긴 한데, 얼른 그만둬요. 앞으론 그런 데 신경 쓰기 어려울 정도로 바빠질 테니까.”

“바빠……지다뇨?”

지금도 충분히 바쁜데 이보다 더 바빠진다는 건가? 왜?

현재는 은수의 말뜻을 단번에 알아들을 수 없어 눈을 끔뻑거렸다.

“나, 할 말 있어요.”

“……뭔데요?”

그녀가 예고하며 말할 땐 꼭 폭탄 같은 발언이 터지곤 했다.

아니나 다를까, 잠깐 뜸을 들이던 은수가 이내 확고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우리, 은성이 동생 만들어요.”

“네?”

“아이 낳자구요, 둘째.”

그가 입을 딱 벌렸다. 요즘 일 때문에 한창 바쁜 그녀인데, 둘째라니.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갑자기 왜…….”

은수는 이미 혼자서 생각을 다 끝내 놓은 듯, 차분히 대답했다.

“갑자기 아니에요. 나름 오래 생각하고 결정한 거예요.”

“…….”

“현재 씨도 알잖아요, 나 외동이라 많이 외로웠던 거……. 어렸을 땐 잘 몰랐는데, 나이가 들고 나니까 알겠더라구요. 사람한테 형제자매가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아주버님이랑 현재 씨를 곁에서 가까이 지켜보면서 더더욱 깨닫게 된 것도 있구요.”

“…….”

“우리 은성이한테도 그런 동지이자 든든한 지원군을 만들어 주고 싶어요. 엄마랑 어머님두 내내 둘째 바라는 눈치셨구. 그리고 이번엔 나 닮은 자식도 한번 낳아 보고 싶어요. 현재 씨 유전자 말고, 내 유전자의 결과도 좀 보자고요.”

현재는 잠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홀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은 미처 몰랐던 탓이었다. 내심 둘째를 바라긴 했지만 그녀에게 못 할 짓을 하게 하는 것 같아 감히 얘기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생각이 같다면야 굳이 저가 반대할 이유는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순식간에 얼굴에 기쁨이 만면하게 된 현재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어, 네. 그럼…… 은수 씨가 원한다면 오늘 당장이라도…….”

“아뇨, 오늘 당장은 말구요.”

하지만 그 말은 칼 같은 그녀에 의해 단호하게 잘렸다.

“딱 2년만 더 일할게요. 지금도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내 자리가 좀 더 확실하게 자리 잡히고 나면, 그때 가져요.”

2년 뒤……. 그녀의 나이가 어느덧 30대 중반이 되는 때였다.

늦게 가지는 건 상관없지만, 만약 늦은 출산이 그녀의 몸에 무리를 주게 된다면 어쩌지. 그의 눈빛에 금세 걱정이 어렸다.

“너무…… 늦지 않을까요?”

“끽해 봐야 3~4년 터울인데 뭐가 늦어요.”

“아뇨, 그게 아니라…… 은수 씨 건강이 좀 걱정돼서.”

그러나 은수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렸다.

“괜찮아요. 그때까지 운동도 하고, 건강 관리도 열심히 해 놓죠, 뭐. 어차피 둘째 낳으면 더는 안 낳을 거니까. 인간적으로 너무 아파요, 진짜.”

역시 은수는 그의 생각보다 훨씬 씩씩한 사람이었다. 또 혼자서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는지, 그 고뇌의 시간들이 현재는 대충 가늠되었다.

애초부터 모든 선택권 자체를 그녀에게 온전히 넘겨 준 그였다. 그렇기에 현재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요. 그렇게 해요.”

“……좋아요?”

“네.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는데, 좋네요.”

스파게티를 야무지게 씹던 그녀가 장난스럽게 그를 흘겼다.

“……현재 씨가 낳는 거라고 해도 그렇게 싱글벙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누군 걱정돼 죽겠는데…….

똑같이 사랑하는 사이라도 누구는 남자로 태어나 편하고, 누구는 여자로 태어나 이 고생을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불공평한 처사.

그런 그녀의 맘을 이해한다는 듯, 현재는 포크를 내려놓고 오른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아끌어 그러쥐었다.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전혀 기대 안 하고 있었는데.”

“알면 잘해요. 맘 카페 운영자까지 맡았던 그 열정으로.”

“알았어요.”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린 그가 별안간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안고 있던 은성이를 반대편 쪽 그녀에게 내밀었다. 은수는 영문을 모른 채 은성이를 받아 안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상태로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현재가 그녀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가 묵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보.”

“…….”

“사랑해요.”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 위로 가볍게 내려앉았다 떨어졌다. 은수의 볼에는 대번 홍조가 올랐다.

“……가, 갑자기 뭐예요.”

결혼 1년차가 되어 가는데도 이럴 때마다 여자는 여전히 매번 수줍어했다.

“이제 그냥 이렇게 부르죠. 은수 씨라고 부르는 건 너무 딱딱하지 않아요?”

“……여보……라고요?”

“뭐, 맘에 안 들면 ‘자기야’도 괜찮고요.”

“윽, 싫어요!”

그리고 나는 여전히, 이 여자를 변함없이 사랑하고.

그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걸렸다.

“왜요, 좋은데. 자기야.”

“……하지 마요. 나 지금 닭살 돋았어.”

“왜 닭살이 돋아요, 자기야.”

“으, 하지 말라고요!”

당신이 이러면 난 오히려 더 하고 싶어진다는 걸 아직도 모를까.

“알았어요. 그만할게요.”

오늘은 이쯤 했으니 됐고, 다음에 다시 놀려 먹는 걸로.

마지막으로 쪽 입술을 다시 한 번 맞춘 그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한때는 행복이 그저 먼 곳에 있는 것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이제 그는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 이상한 소리 말고 빨리 먹기나 해요.”

그의 행복은 어느새 몇 센티미터 남짓 떨어진 바로 반대편에서 사과처럼 붉어진 얼굴을 하고 있었으므로.

“더 먹을 게 없으면요?”

“어? 벌써 다 먹었어요?”

“너무 맛있어서요.”

“……흠흠.”

언제까지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지금처럼만, 이렇게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때는 아마 셋이 아니라 넷이 되어 있겠지. 그만큼 기쁨도 더할 것이다.

이마저도 사실 욕심 가득한 바람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한 그릇, 더 줄까요…… 여보?”

“…….”

한결같이 사랑스럽기만 한 이 사람과 함께라면.

그는 끝내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이지, 빈틈없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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