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속도위반 로맨스-119화 (119/128)

# 119

119. 에필로그2. 1년 뒤 그들은 (1)

“안녕하세요!”

“……본부장님! 안녕하세요?”

어머, 웬일이야.

프린터 앞에 무료하게 서 있던 유라가 오랜만에 보는 낯익은 얼굴의 등장에 바로 반색했다.

“본부장님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

“하하, 별일 없죠?”

“그럼요. 웬 커피까지 이렇게…….”

은수의 양손엔 캐리어에 담긴 테이크아웃 커피가 한 아름 들려 있었다. 제 손을 내려다본 은수가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그냥, 지나가다 생각이 나서요. 마침 이 대리도 요 앞에서 만났고.”

“아, 그러고 보니까 이 대리님도 계셨네.”

“……그렇게 잊고 있었단 듯이 말하지 말아 줄래요? 아, 내 존재감. 언제부터 이렇게 됐냐.”

은수와 똑같이 양손에 캐리어를 든 이 대리가 막 사무실로 따라 들어오며 과장된 어조로 한탄했다. 그런 그를 보며 은수와 유라가 키득댔다.

“암튼 감사히 잘 마실게요. 아, 근데 현재 씨가 자리에 없어서 어쩌죠.”

그러고 보니 사무실 안에는 그의 자취가 없었다.

“어…… 어디, 갔나요?”

“네, 아까 외근 나갔어요. 좀 이따 들어온다고 하긴 했는데, 언제일진 모르겠네요.”

아, 놀라게 해 주려고 온 건데. 망했네.

야심차게 세운 계획이 흐트러졌다.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린 은수는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셨다. 그를 위해 사 왔지만 더 이상 소용이 없게 된 더치 커피도 맘에 걸렸다. 사무실에서 만날 커피만 마시는 통에 카페인이 좀 적은 걸로 특별히 고른 거였는데.

“그래도 곧 온다고 했으니까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아! 현재 씨 자리에서 기다리시면 되겠네요.”

“아, 음…… 그럴까요?”

오호, 그것도 괜찮겠네.

팀장을 달고, 그 다음으로 본부장이 된 지도 이제 어언 1년이 다 되어 가는 시점이었다. 평사원 자리에 앉아 본 것이 언제 적 일인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 그런데 다른 자리도 아니고 남편의 자리라니. 이곳을 그렇게 많이 드나들었으면서 왜 한 번도 그의 자리에 앉아 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걸까.

새삼 색다른 시도라고 느낀 은수는 비어 있는 그 자리에 냉큼 앉아 보기로 했다.

‘뭐, 의자는 편한 것 같네.’

나름 푹신한 그의 의자에 앉은 은수가 엉덩이를 팡팡 구르더니 책상을 훑어보았다. 돌이켜 보면 옛날 제 책상은 무척 지저분했던 것 같은데, 그의 책상은 남자의 평소 성격을 대변하듯 정말 깔끔했다. 이렇다 할 메모라든가 집기들도 딱히 없고. 그나마 있는 거라고는 서류 더미나 탈취제 같은 것들뿐이었다. 보나마나 쓸데없는 건 재깍재깍 버리고 정리하는 그의 성미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매일 봐서 지겨울 정도인─물론 정말로 지겹진 않지만─ 얼굴이었지만, 현재가 남겨 놓은 흔적들을 모처에서 속속 발견할 때면 은수는 여전히 그가 사무치게 그리워지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흠, 컴퓨터엔 뭐가 있나 한번 볼까나.’

책상 위를 뒤적거리다 금방 흥미를 잃은 은수는 모니터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자리를 비운 그의 컴퓨터 모니터엔 화면 보호기만이 켜져 있었다. 은수가 마우스를 한 번 딸깍거리자 그것은 이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엔…….

“…….”

은성이를 안고 있는 그녀의 사진이 바로 빼곡하게 들어찼다. 예고 없이 바탕 화면을 통해 제 얼굴을 맞닥뜨리게 된 은수의 입술이 슬쩍 벌어졌다.

아마도 언젠가 주말에 찍었던 것 같은 사진. 그 속의 은수는 화장기도 없고 수수해서, 지금 모니터를 뚫어져라 들여다보고 있는, 실제의 세련된 그녀와는 느낌이 매우 달랐다. 좀 더 자연스럽고 편안한 느낌. 그의 취향이 배경 화면에까지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해 놓을 거면 좀 예쁜 걸로 해 놓지.”

사진의 퀄리티가 맘에 들지 않아 살짝 푸념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함께 있지 않을 때도 늘 나를 생각하는구나, 싶어서.

사실 이 정도면 볼 것은 다 본 셈이었다. 그러나 은수는 좀처럼 신경을 끄지 못하고 바탕 화면에 마우스를 계속해서 드래그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의 컴퓨터를 한 번쯤 뒤져 보고픈 충동이 일어난 것이었다.

‘이것도 프라이버시인데, 좀 실례인가.’

집에도 물론 데스크톱은 존재했다. 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현재와 은수가 함께 쓰는 공용 컴퓨터였기에 개인적인 작업 같은 것은 되도록 각자의 노트북을 이용하는 편이었다. 그만큼 그의 물건을 건드려 본 적이 없었다. 하다못해 휴대폰만 해도 그랬다. 뭣 하러 남의 휴대폰을 봐? 무슨 감시하는 것도 아니고.

원래 그녀가 다른 사람의 것을 궁금해하는 성격은 아니었으므로 오늘도 그냥 그렇게 넘기려 했다. 그런데…… 은수는 확실히 도현재에 한해선 영 다른 사람이었다. 그렇잖아도 요즘 그가 업무 시간 외에 대체 뭘 하는지 너무나 궁금하던 차였다. 집에서도 뭘 하는지 종종 무서울 정도로 집중할 때가 있었는데, 은수가 슬쩍 보려고 할 때마다 그는 황급히 노트북을 가리곤 했다. 그의 비밀을 조금 엿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에잇. 어차피 부부 사인데, 뭐 어때.’

잠시 생각하던 그녀는 저도 모르는 새에 인터넷 브라우저를 조심스레 열고 말았다. 정말 간만에 나온 합리화였다.

인터넷 창을 띄우자마자 포털 사이트에 자동 로그인된 그의 아이디가 보였다. 메일이나 가입 카페 목록 등을 살짝 구경할까 하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것까지 확인하는 건 좀 심하다고 느껴졌으므로. 대신 그녀는 오른쪽 탭을 눌러 즐겨찾기 목록을 찾았다. 그런데 거기엔 어쩐지 어디서 굉장히 많이 본 것 같은 사이트 하나가 탑재되어 있었다.

[xxx 대표 임신, 출산, 육아 커뮤니티 <맘스터치>]

실눈을 뜬 채 잠시 생각하던 그녀가 돌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별이, 아니 은성이를 가졌을 때 드나들었던 그 맘 카페이지 않은가. 현재를 향한 성욕 때문에 고민하고 있을 때 ‘성박사’라는 사람으로부터 결정적인 조언을 얻기도 했던……. 이름이 쉽고 귀여워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었던 바로 그곳.

그런데 어째서 이 카페가 남자의 컴퓨터에 즐겨찾기 되어 있는 것일까. 그와 맘 카페는 영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 은수는 고개를 절로 갸웃거렸다. 설마, 이제껏 그에게서 들어왔던 ‘인터넷’이라는 곳은 바로 여기를 뜻했던 것일까.

딸깍.

사이트는 누르자마자 바로 연결되었고, 자동 로그인이 돼 있었던 탓에 은수는 본능적으로 그의 닉네임을 확인했다.

“…….”

대수롭지 않게 가입 정보를 확인하던 그녀의 동공이 이내 확장되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 이게 뭐야?

“헐……?”

그때였다.

“어? 은수 씨?”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자리의 주인이 딱 타이밍 맞춰 돌아온 것은.

한껏 놀라 있던 은수는 황급히 인터넷 창을 끄고 그를 맞았다.

“혀, 현재 씨, 왔어요?”

“……내 자리에서 뭐 하고 있었어요?”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였지만 그 안엔 약간의 의구심이 담겨 있는 듯했다. 은수는 프라이버시를 파헤친 현장을 정통으로 들킬 뻔했다는 생각에 등줄기로 땀이 삐질 흐르는 것을 느꼈다.

“아, 그냥 인터넷 기사 좀 찾아보고 있었어요. 오늘 열애설 하나 터졌더라구요. 하하.”

“……그래요?”

다행히 그는 그 질문을 끝으로 별 의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안도한 은수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면서도 방금 전 제가 본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근데 이거 진짜야? 저 남자가 정말……?

* * *

“아이구, 우리 은성이 벌써 다 먹었네! 이뻐 죽겠어, 아주 그냥.”

유 여사가 기특하다는 듯 은성이의 엉덩이를 토닥거렸다. 부쩍 커 버린 요즘, 은성이는 이유식을 거부하고 일반식 먹기에 도전하고 있었다.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라 먹을 수 있는 게 많지는 않았지만, 특히 조미되어 있지 않은 김에 싼 밥을 무척 좋아했다. 그걸 아는 할머니들은 매 끼니마다 은성이에게 밥을 먹이는 특권을 누리기 위해 앞다투어 나서곤 했다.

“이제는 완전히 장군감이야. 그렇지 않아요?”

“맞아요. 얘가 처음엔 미숙아로 태어났다고 누가 믿겠어요.”

은성이도 같이 봐줄 겸, 간만에 유 여사의 집으로 마실 나온 이 여사도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은수가 직장에 복귀한 이후, 은성이는 일주일에 5일 정도 친할머니와 외할머니 손에서 번갈아 키워졌다. 외할머니인 이 여사가 서울로 이사 온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은수는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다고 말렸지만, 이 여사는 얼마 남지 않은 여생, 촌구석에서 외롭게 사는 건 좀 그만하고 싶다며 고집을 부렸다.

사실 손자도 손자지만 사돈인 두 사람이 누구보다 막역한 사이가 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두 사람은 은성이의 육아를 함께 도맡으며 한층 더 친해졌고, 이제는 별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함께 나눌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사실 이 여사의 나이가 유 여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많음에도. 사이좋은 두 할머니 사이에서 빛과 소금 같은 은성이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났다.

“우리 은성이는 갈수록 인물이 더 나는 것 같아요. 하긴, 엄마 아빠가 출중하니까 당연한 거지만.”

“그렇지요. 우리 은성이 닮은 여동생 하나 있으면 딱 좋을 건데. 그치, 은성아?”

“……그러게나 말이야.”

다만, 그럴수록 그들에게 진하게 남는 건 둘째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혼자 있어도 이렇게 예쁜데, 이 아이를 쏙 빼닮은 생명체가 하나만 더 옆에 있다면…… 그 모습이 얼마나 어여쁠까. 생각만 해도 흐뭇한 광경에 두 할머니는 웃음을 지었다. 욕심인 건 당연히 알고 있다. 그래도 기대의 나래를 도저히 접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외동아들은 너무하지 않은가. 둘째를 일단 낳기만 한다면 저들이 얼마든지 또 잘 키워 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애들은 아직 둘째 생각 없다죠?”

“……아마도요. 은수 걔가 일 욕심이 워낙 많아야죠. 생각은 있다고 하는데, 그게 언제가 될지는…….”

세세한 과정을 따로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은수에겐 우여곡절 끝에 복귀한 회사였다. 1년 정도 근무하며 일을 다시 몸에 익혔는데, 이러다 또 둘째라도 덜컥 임신해 버린다면 그땐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뻔히 알기에 그들도 아들 내외를 차마 뭐라 종용할 수 없었다. 사람에겐 지금이 아니면 절대 안 되는 때가 있는데, 은수에게는 지금이 바로 그런 시기였다.

“괜찮아요. 기다렸다 나중에 가지면 되지. 급한 거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더 기다리면 노산이 될지도 모르니까. 그게 유일한 걱정이었다. 이러한 실정이다 보니 요즘은 정말 둘째에 대한 기대는 이만 접어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에이, 뭐 정 안 되면 은성이 하나만 잘 기르면 되지.”

“……맞아요. 더 바라는 건 사실 욕심이야.”

“아휴, 모르겠다. 우리 산책이나 가요. 동네 사람들한테 우리 은성이 얼굴 함 선보여 줘야지, 또.”

“하하. 네, 그럽시다.”

머리 아픈 생각은 잠시 잊기로 하고, 두 할머니들은 또 바깥에 나가 은성이를 자랑하기 위해 바쁘게 채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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