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
118. 에필로그1. 결혼식(3)
이윽고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단상에 선 현재 또한 아스라이 멀게만 느껴지는 여자를 설렘 가득한 얼굴로 주시했다.
“…….”
이거, 생각보다 떨리네.
사람들 앞에 선 경험이 워낙 많았던지라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막상 서 보니 결혼식은 결혼식이었다. 그녀의 입술 새로 초조한 숨이 새어 나왔다.
신부 입장을 알리는 비지엠이 울려 퍼지고, 두 손으로 소담한 아마릴리스 부케를 쥔 은수가 마침내 고개를 내리깐 채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옮겼다.
보통의 신부였다면 아버지와 함께 입장을 했을 것이다. 그도 아니면 시아버지와. 하지만 그녀에게는 둘 다 가당치 않은 일이었으므로 부득이하게 입장 방법을 바꾸어야 했다.
식장 관계자는 비슷한 상황의 부부들이 으레 그러는 것처럼 신랑과 신부가 함께 입장하기를 권했지만 은수는 끝끝내 혼자 입장하는 것을 택했다.
‘혼자면 뭐 어때. 손 안 잡아 주면 못 걷는 것도 아니고.’
결혼식이란 이제 막 둘에서 하나가 됨을 선포하는 날이 아닌가. 혼자 걷기엔 길어 보이는 버진 로드라도, 꿋꿋이 혼자서 걸어가 그의 손을 잡기로 했다. 지금껏 홀로 고군분투하며 살아왔던 그녀가 기어이 그를 만나 이런 행복한 날을 맞게 된 것처럼. 의미 부여를 딱히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오늘만큼은 감성에 젖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생에 가장 특별한 날이니까.
현재의 앞까지 도달한 그녀가 수줍게 고개를 들었다. 그는 약간 감격스러운 듯 가지런한 이를 내보이며 활짝 웃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고, 은수는 화답하듯 왼손을 들어 그의 손바닥 위에 살포시 올려놓았다. 손을 통해 연결된 두 사람은 함께 단상 위로 올랐다.
“신랑에 이어 신부도 무사히 입장을 마쳤습니다. 회사에서 뵐 때도 물론 느꼈지만 오늘은 특히 평소보다도 더 아름다운 모습이네요. 우리 신랑이 첫눈에 반할 만도 하죠?”
그럼요. 누구 여잔데.
한껏 승천한 현재의 광대는 도저히 내려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반면 옆에 선 은수는 긴장한 탓에 별다른 표정을 짓지도 못하고 입가에 엷은 미소만 머금고 있었다.
그렇게 신랑 신부 맞절과 하객들을 향한 인사가 끝나고, 양가 어머니가 주관하는 혼인 서약과 성혼 선언문 낭독이 이어졌다. 기쁜 표정의 유 여사는 무척 낭랑한 목소리로 두 사람에게 물었다.
“신랑 도현재 군과 신부 민은수 양은 어떠한 경우라도 항시 사랑하고 존중하며, 어른을 공경하고, 진실한 남편과 아내로서의 도리를 다할 것을 맹세합니까?”
“예.”
“예.”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을 마친 뒤, 마주 선 두 사람은 서로에게 결혼반지를 끼워 주었다. 그리고 다시 나란히 서서 유 여사가 낭독하는 성혼 선언문의 한마디 한마디를 곱씹었다.
“조금 전, 양가 친지 및 하객 여러분을 모신 자리에서 신랑 도현재 군과 신부 민은수 양이 백년해로하며 고락을 함께할 부부가 될 것을 굳게 맹세하였기에, 저는 양가를 대표하여 두 사람의 혼인이 원만하게 이루어진 것을 여러 증인 앞에 엄숙히 선포하는 바입니다.”
두 사람은 문득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오랜 시간과 역경을 딛고서야 비로소 부부가 되었다. 너무 오래 기다린 것이라 그런지 현실 감각이 별로 없었다. 다만 저 멀리 윤정의 품에 안겨 있는 은성이가 이 모습을 보고 기뻐하리라 생각하니 괜스레 뭉클해졌다.
오늘의 영상을 꼭 두고두고 남겨서 나중에 보여 주어야지. 너 이때 기억이 나느냐고, 그렇게 물어보기도 하고. 은수는 생각만 해도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꼈다.
어느새 축가와 사진 촬영 등을 제외한, 예정된 식순이 모두 끝났다. 그런데 두 어머니는 모든 것이 끝난 이후에도 연단에서 내려가지 않았다.
‘뭐지? 아직 뭐가 남았나?’
두 사람이 이상하다고 여길 무렵, 사회자 이 대리가 나서며 그 의문을 풀어 주었다.
“예, 이제 다음 순서로 양가 어머님들께서 직접 쓰신 편지 및 덕담 낭독이 있겠습니다. 오늘은 주례가 없는 결혼식인 만큼, 특별히 어머님들께서 손수 편지를 준비하셨다고 하네요. 먼저, 신랑 측 어머니이신 유영란 여사께서 편지를 낭독하시겠습니다. 큰 박수와 함께 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라. 이건 현재도 은수도 전혀 모르고 있던 사항이었다. 갑작스런 편지 낭독에 두 사람은 당황한 표정이었다.
옆에 선 이 여사에게 슬쩍 눈짓을 한 유 여사는 종이 한 장을 꺼내 펼치며 아들 부부를 내려다보더니 천천히 낭독을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신랑 어머니 유영란이라고 합니다. 날 좋은 일요일에 이처럼 많은 분들을 하객으로 모시게 되어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저와 사부인이 준비한 편지는 어찌 보면 지극히 개인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듣기에 살짝 지루하실 수 있겠으나, 최대한 자제하려 노력하며 쓴 것이니 부디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들 내외를 향해 눈을 한번 찡긋해 보인 유 여사가 부드럽게 낭독을 이어 갔다.
[나의 자랑스러운 둘째 아들 현재야. 네가 언제 이렇게 커서 결혼까지 하게 되었는지, 쏜살처럼 지나간 세월이 정말 믿기지가 않는구나. 이제 뭘 하든 알아서 잘하고 있으니 엄마가 달리 해 줄 것은 없고…… 대신, 너의 결혼식을 맞아 이렇게 짤막한 편지로 마음을 전해 보려 한다.
우선 가장 먼저, 아빠 없이 자란다고 엇나가지 않고 건실한 청년으로 바르게 잘 자라 주어서 고맙다.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야. 너와 현수 같은 아들들을 둔 걸 보면 말이야. 게다가 하루아침에 예쁜 며느리도 생기고, 이제는 떡두꺼비 같은 손자까지 생겼으니 내가 더 이상 바랄 게 무엇이 있겠니. 요즘 엄마는 하루하루가 참 행복하단다.
솔직히 말해 처음에는 걱정도 많았다. 아직 어린 네가 가장 노릇을 제대로 잘 해낼 수 있을지, 또 너무 섣부른 결정을 한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염려했었어. 하지만 지금은 너희를 전적으로 신뢰하게 되었다. 두 사람이 엄마가 모르는 새 생각보다 더욱 견고한 믿음을 쌓아 올렸다는 걸 알게 되었거든.
내 며느리, 은수야. 우리 현재와 결혼하게 된 것을 축하한다. 쿨하고 멋있는 시어머니가 되어 주겠단 약속은 섣불리 하지 않으련다. 그러나 사부인 못지않게 너의 곁에서 힘이 되어 줄 것이고, 또 불합리하게 아들 편만 드는 못난 시어머니가 되지 않겠다는 것은 자신할 수 있단다. 우리 아들에게 와 주어서 고맙고, 예쁜 손자를 안겨 주어 고맙고, 또 우리 가족이 되어 주어서 진심으로 고맙다.
앞으로 너희에게 어려운 일이 닥칠 수도 있겠지만, 나와 사부인은 너희가 지금까지 그랬듯이 현명하고 똑똑하게 잘 헤쳐 나가리라 믿고 있단다.
마지막으로, 아무쪼록 건강 관리에 항상 유념하고, 늘 화목한 가정을 꾸릴 수 있기를 바란다.]
예상치 못한 깜짝 편지였다. 감동한 그들은 그 상태 그대로 유 여사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아들 현재는 담담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며느리인 은수는 한껏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 그녀의 감정은 잠시 뒤, 유 여사로부터 바로 바통을 넘겨받은 엄마 이은주 여사의 편지에 이르러 더욱 심화되었다.
[은수야, 엄마야. 어릴 때 이후로 너에게 편지를 쓰는 건 너무 오랜만이라 좀 어색하네. 그래도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너를 생각하며 몇 글자 적어보려고 한다.
너와 함께한 세월이 벌써 30년을 훌쩍 넘었구나. 엄마는 널 키우면서 한 번도 힘들다 생각한 적이 없었어. 이래저래 속상한 일들이 많았을 텐데도, 속 깊고 의젓했던 너는 사춘기를 겪기는커녕 늘 엄마보다 어른스럽게 행동했으니까. 엄마의 유일한 자랑은 오직 너였어. 나중에 저승에 가면 아빠한테 가서 열심히 자랑도 하고 싶을 만큼, 너는 그렇게 언제나 엄마의 빛이었다.
그런 네가 어느 날 갑자기 결혼을 하겠다고 하기에 엄마는 무척이나 놀랐었어. 솔직히 말하면 실망도 했고, 밉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오래가지 않았던 것은 너나 도 서방이 엄마에게 오로지 진심만 보여 줬기 때문이었어. 차마 미워할 수도 없게끔 말이야.
더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해 주기로 하고, 어차피 사부인이 앞에서 꽤 길게 얘기하셨을 테니 엄마도 이만 여기서 줄일게. 엄마가 하고 싶은 말은 별거 없어. 은수야, 사랑한다. 그리고 도 서방, 우리 은수의 가족이 되어 줘서 고마워. 엄마는 우리 예쁜 은성이와 함께, 두 사람이 언제나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뒤에서 조용히 응원하고 있을게.
도현재, 민은수! 파이팅!]
* * *
두 어머니의 편지가 남긴 여파는 생각보다 거셌다. 기나긴 눈물바람 끝에 울음을 그친 은수는 결국 눈이 토끼처럼 발개져서 이후 순서를 맞아야만 했다.
민희가 중심이 되어 준비했다는 축가는 썩 나쁘지 않았다. 저주하는 노래를 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선곡으로 보나 춤으로 보나 아무래도 민희보다는 다른 직원들의 입김이 많이 작용한 듯했다. 덕분에 현재와 은수는 기분 좋게 축가를 감상했다.
어느덧 대부분의 사진 촬영이 끝나고 대망의 부케를 던질 순서였다. 식전, 그까짓 부케 따위 안 받겠다며 바락바락 대들던 윤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은수의 뒤쪽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야, 애먼 데 던지지 말고 잘 던져!”
“어어…….”
나도 그러고 싶기는 한데……. 은수의 대답이 자신 없게 기어들어 갔다.
그도 그럴 것이, 은수는 정말 이런 쪽에는 젬병이었다. 뭔가를 던지거나 차는 건 특히 더 그랬다. 목표물 조준이 왜 이렇게 어려운지. 잘 던지겠다고 호언장담은 했지만 이게 어디로 갈지 그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뭐 해. 빨리 던져!”
“…….”
에라, 모르겠다. 윤정의 재촉에 은수는 손에 쥐고 있던 부케를 냅다 뒤로 던졌다.
그렇게 2초쯤 뒤, 뒤편에서 이상야릇한 탄성이 일었다. 윤정이 아니라도 누군가 잘 받은 건 맞는 것 같은데, 어딘가 모르게 찝찝한 기분이 올라왔다.
“……?”
어디로 날아가 버린 거지? 은수가 얼떨떨해하며 뒤를 돌아보았을 때, 원래 부케 주인이었던 윤정의 시선은 옆쪽에 선 흰 원피스를 입은 여자에게로 향해 있었다.
“……어?”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여자는 다름 아닌 민희였다. 엉겁결에 제 것이 아닌 부케를 손에 받아 들게 된 민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옆에 서 있던 동료들이 눈치 없게 성화를 부렸다.
“어? 민희 씨가 부케 받았네!”
“헐. 그럼 민희 씨 이제 3개월 안에 시집가야 되는 거야?”
“민희 씨 남자 친구 없지 않아? 시집 다 갔네!”
“…….”
아오! 뭐야, 이거!
속도 모르고 재미있어 하는 사람들 속에서 민희는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이 결혼식에 온 것만으로도 억울해 죽겠는데, 부케라니. 부케라니!
한순간 혼돈의 카오스에 빠지게 된 민희를 본 은수는 저도 모르게 고소한 듯 웃었다. 남의 혼삿길에 본의 아니게 걸림돌을 놓게 된 건 유감이지만,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꽉 막혔던 속이 펑 뚫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자, 마지막으로 신랑 신부 사진 하나만 더 찍겠습니다.”
부케를 받은 민희와 함께 억지로 기념사진을 다 같이 찍은 뒤, 진정으로 마지막이 될 순서였다. 그런데 촬영 기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들의 뒤쪽으로 늘어선 사람들이 하나같이 연호하기 시작했다.
“키스해! 키스해!”
“…….”
뭐, 뭐야. 낯 뜨겁게!
볼이 화르륵 달아오른 은수는 그만하라며 손짓했지만 짓궂은 사람들은 오히려 한술 더 떠 더욱 크게 외쳤다.
주위를 둘러보며 가벼운 미소를 짓던 현재가 은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안 되겠다.”
“네?”
“날도 날인데, 우리도 서비스 좀 해 줄까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은수가 현재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잠시 뒤, 마음이 통한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네.”
허락도 떨어졌으므로 거칠 것은 없었다.
“딱 한 번만 할 거니까, 잘 보세요.”
“와!!!!”
호기로운 한마디를 내뱉은 현재의 손이 은수의 허리를 감아 제게로 와락 끌어당겼다. 적극적인 현재의 주도로 마침내 두 사람의 입술이 가볍게 맞닿았다.
주변을 메운 소음들이 폭죽이 터지는 소리처럼 아득했다. 그 속에서 그들은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양, 기나긴 입맞춤을 나누었다.
정말이지 다른 건 바랄 게 없었다. 그저 이 행복이 오래오래 영원하길 바랄 뿐이었다.
찰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