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
117. 에필로그1. 결혼식 (2)
“……그냥…….”
잠시 생각하던 그녀는 그냥 대답을 얼버무리기로 했다. ‘서지훈하고 말 섞어서요.’라고 대답하기는 어쩐지 좀 민망하지 않은가. 졸지에 그를 속 좁은 남자로 만드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그는 다행히 덤덤한 말투로 말했다.
“은수 씨가 오라고 한 것도 아닌데 왜 화가 나요. 화 안 났어요.”
“……정말요?”
대답은 않고 씩 웃기만 하던 현재가 지체 없이 은수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두 팔로 감싸 안아 올렸다. 그 덕에 하얗고 나풀나풀한 드레스 자락이 그의 다리에 감겼다.
“현재 씨?”
얼떨결에 그의 품 안에 갇히게 된 은수의 손이 그의 가슴팍 위에 얹혔고, 현재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화는 안 나는데, 질투는 좀 나는 것 같기도 하네요.”
“…….”
“결혼식 날까지 내 거 탐내는 인간이 나타날 줄은 몰랐거든요.”
이전까지는 미처 몰랐던, 그의 귀여운 소유욕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수줍어진 은수는 살풋 미소를 지었다.
“맞아요, 난 현재 씨 거예요. 그러니까 질투할 필요도 없는 거구요.”
“나도 알아요. 근데…….”
“…….”
“너무 예쁘잖아요. 금방이라도 다른 놈들이 훔쳐 갈 것처럼.”
“…….”
“그래서 불안해요.”
어휴, 난 벌써 당신의 아이까지 낳은 몸이라고요. 쓸데없는 걱정은.
역시 나무꾼이 선녀 옷을 감춘 뒤에 애를 그렇게나 많이 낳게 한 데는 이유가 있었던 거다. 실없는 생각을 한 은수가 피식 웃고는 물었다.
“제 눈에 안경이란 말, 혹시 알아요?”
“네. 근데 은수 씬 그런 거 아니에요. 지금 당장 밖에 나가서 물어봐요. 다 나같이 얘기할 걸요.”
딱 잘라 말하는 투가 쓸데없이 단호하기까지.
“글쎄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은수는 굳이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 놓지 않았다. 예쁘다고 하는데 뭐가 문제일까. 어차피 언젠가는 알아서 벗겨질 콩깍지, 일부러 나서서 억지로 없앨 필요는 없었다.
그건 그렇고, 이 남자는 왜 벌써 여기 온 거지?
“참, 근데 왜 왔어요. 신랑은 결혼식 전에 신부 보는 거 아니라던데.”
“이미 봤잖아요. 그럼 끝난 거지.”
“…….”
“근데 와 보고 나니까 왜 그런 말이 생겼는지는 알 것 같아요.”
“네?”
은수가 남자의 표정이 왠지 모르게 조급해진 것 같다고 느낄 무렵,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물어보는 거 별로겠지만.”
“…….”
“키스해도 돼요?”
질문과 어울리지 않게, 묻는 얼굴이 사뭇 비장했다.
……아, 난 또 뭐라고. 왜 이리 뚫어져라 쳐다보나 했네.
조그맣게 웃은 은수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실망시켜서 미안한데, 안 돼요.”
“왜요?”
“화장 지워진단 말이에요. 이게 얼마짜린데.”
“……아.”
현재가 탄식했다. 솔직히 이런 화장쯤 지워져도 상관없다. 어차피 화장한 얼굴이나 안 한 얼굴이나 그의 눈엔 예쁘기 매한가지니까. 하지만 그러기라도 하면 아침부터 공들인 화장을 망쳐 놓았다며 길길이 날뛸 그녀의 모습이 눈에 선했기에, 그는 들끓는 욕구를 속으로 고이 밀어 넣었다.
“알겠어요.”
“네.”
“그럼 뽀뽀만요.”
“…….”
참나, 그거 두 개가 무슨 큰 차이가 있다고. 하여튼 포기란 것을 모르는 남자였다.
아니나 다를까. 은수가 어이없어 하는 사이, 현재는 잽싸게 그녀의 입술을 훔치고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예기치 못한 공격에 은수의 볼이 대번 발그레 달아올랐고, 그녀의 장갑 낀 손이 그가 들렀다 간 흔적을 감쌌다.
“이럴 거면서 대체 왜 물어본 거예요?”
“그냥, 예의상.”
못 말려, 정말.
의젓하고 어른스럽기만 하던 그는 어째 날이 갈수록 애 같아지고 있었다. 요즘은 정말 아들 둘을 키우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이런 그마저 마냥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걸 보면 그녀도 중증임에 틀림없었다.
어느새 분위기에 이끌리게 된 은수가 현재의 목을 감싸 안은 채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고 있을 때, 갑자기 대기실 문이 발칵 열렸다.
“어허! 신랑 신부가 벌써부터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퍼뜩 놀란 현재와 은수가 동시에 입구 쪽을 쳐다보았다.
그 자리엔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있는 은성이와 그런 아이를 품에 안아 든 윤정, 그리고 이 대리가 구경하듯 서 있었다.
“!!!”
그들을 발견한 현재는 부리나케 떨어져서 헛기침을 했고, 은수는 천연덕스럽게 들어오는 윤정을 힘껏 째려보았다.
“야! 넌 무슨 노크도 안 하냐?”
“당연히 너 혼자 있을 줄 알았지! 근데 우리 신랑님도 여기 계신 줄은 몰랐네에?”
하여간 저 기집애는 매사에 도움이 안 돼. 빙글빙글 웃는 모양새가 한 대 때리고 싶을 정도로 얄미웠다. 은수의 입술이 뾰로통하게 모아졌다.
“빨리 나가! 곧 시작하겠다.”
“그러니까! 내 말이 그 말이지. 식이 대체 얼마나 남았다고 여기서……. 쯧쯧. 하여튼, 그새를 못 참아요.”
“…….”
“은성아, 보기 힘들어도 견뎌, 응? 너네 엄마 아빠가 금슬이 너~무 좋으시단다.”
이모인 윤정이 비꼬듯 말을 걸어 보아도 천사 같은 은성이는 예쁘게 차려입은 아빠와 엄마를 보고 까르르 웃기만 할 뿐이었다. 오늘은 결혼식 날인 만큼 혼주인 할머니들도 바빠서 부득이하게 은성이를 윤정에게 맡겨 놓을 수밖에 없었는데, 지금 와서 보니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게 나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은수였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윤정의 성격상 애를 데리고 또 뭔 짓을 하고 다녔을는지 모르는 일이니.
“아유~ 이뻐. 넌 애가 어쩜 이렇게 순하니.”
“…….”
“야, 은성이 나 주면 안 되냐?”
이러는 것만 보아도.
작게 한숨을 쉰 은수는 다소 신부답지 않은 언행으로 맞받아쳤다.
“내가 미쳤냐? 금쪽같은 우리 아들을 너한테 주게. 너 설마, 오늘 사람들한테 네 애라고 뻥치고 다닌 거 아니지?”
“……어?”
반문하는 목소리에서 왠지 모를 어색함이 묻어났다.
이거 어째 좀…… 찔려 하는 것 같은 반응인데. 은수의 눈초리가 대번 가늘어졌다.
“뭐야, 진짜 그랬어?”
“아, 아냐!”
“맞는데?”
“아, 그건 이뻐서 그냥 해 본 말이지!”
어휴, 저 철딱서니 없는 거 진짜. 옆에 있는 현재 씰 봐서 참는다, 내가.
애써 마음을 가라앉힌 은수가 심호흡을 한 뒤 말을 이었다.
“그렇게 부러우면 너도 애를 낳든가. 옆에 도와줄 사람도 있구만.”
“뭐?”
윤정이 의아한 목소리로 반문하자 은수의 눈빛이 조용히 윤정의 옆을 향했다.
가만있다 졸지에 지목 당하게 된 이 대리가 저를 손가락으로 찍어 보였다.
“저요?”
홀린 듯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던 윤정도 발끈했다.
“아, 또 뭔 개소리야! 결혼식 날 사망했다는 뉴스 기사 나게 해 줘?”
저놈의 말투를 어쩜 좋지, 정말. 애 안고 잘하는 짓이다.
은수가 혀를 끌끌 찼다.
“야, 이제 좀 인정해라. 오늘 부케도 받을 거면서 유난은…….”
“아, 취소해. 취소해. 안 받아!”
“어이구, 그래. 네 마음대로 하세요. 누가 무섭냐?”
지금 아무리 저래 봤자 막상 부케를 던지면 야구 선수 뺨치게 받아 낼 윤정임을 알기에 은수는 잠자코 둘의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때, 옆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던 이 대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윤정 씨가 아이를 원하신다면 전 언제든 준비가 돼 있습니다. 오늘이라도 충분히 가능한데…….”
“……미쳤어요!?”
말을 꺼내 놓기가 무섭게 윤정의 손바닥이 그의 팔뚝을 강타했고, 은수와 현재는 그 모습에 풉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이지, 참 한결같은 커플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니, 근데 그건 그렇고…… 대체 우리 결혼은 언제 하는 거야?
* * *
“소중한 시간을 내어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하객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저는 오늘, 신랑 도현재 군과 신부 민은수 양의 결혼식 사회를 맡은 라프레즈 이승환 대리라고 합니다.”
이럴 때의 그는 확실히, 윤정에게서 갈굼 당하는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 하기 어려웠다. 멀끔한 얼굴의 그가 꾸벅 고개를 숙이자 사회자를 환영하는 작은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타고난 입담꾼답게 이 대리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준비해 온 멘트들을 읊기 시작했다.
“먼저, 예식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휴대 전화는 꼭 진동으로 바꿔 주시길 부탁드리겠고요. 오늘 첫 길을 내딛는 신랑 신부가 입장하고 행진할 때 힘을 받을 수 있도록, 아낌없는 박수와 환호 보내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울러, 오늘 결혼식은 주례가 없는 결혼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예식에 비해 상당히 덜 지루할 것으로 예상되오니, 부디 자리 비우시거나 졸지 마시고 이 뜻 깊은 결혼식에 끝까지 집중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노련하게 잠시 좌중의 반응을 살피던 그가 진행을 이어 갔다.
“자, 이제 그럼 본격적으로 식순에 따라 예식을 진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일 먼저 양가 어머님의 화촉 점화가 있겠습니다. 양가 어머님, 입장!”
요란한 박수 소리와 함께, 비슷한 색감의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유 여사와 이 여사가 다정하게 손을 맞잡은 채 나란히 식장 안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은 긴장해서 다소 굳은 얼굴이기는 했었지만 안내에 따라 천천히 화촉 점화를 할 때는 확연히 여유로워진 모습을 보였다.
“예, 이렇게 화촉 점화가 끝이 났고요. 양가 어머님들께서는 자리에 착석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이로써 결혼식의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이제 오늘 결혼식의 주인공인 신랑, 신부를 차례대로 만나 보겠는데요. 앞서 말씀드렸듯, 먼저 입장할 우리 신랑에게 우레와 같은 박수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자, 그럼 신랑, 입장!”
커다란 박수 소리가 쏟아지며 닫혀 있던 입구가 열렸고, 그 사이로 드디어 현재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쑥스러움과 긴장 등이 혼재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발걸음만은 무척 씩씩했다. 버진 로드를 걸어간 그는 단상 위에 올라 하객들을 향해 인사했다.
“여러분의 성원 속에 신랑이 무사히 입장했습니다. 이야, 역시 인물 좋은 신랑이 등장하니까 식장 안이 확 밝아진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사회자의 농담에 하객 석에서 와르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 그럼 이제는 이 식장 안이 더 환히 밝혀질 차례가 되겠네요. 우리 잘생긴 신랑의 마음을 잔뜩 설레게 할, 신부 민은수 양의 입장이 있겠습니다. 지금 그분답지 않게 굉장히 떨고 계실 텐데요. 떨지 말라고, 아주 우렁찬 박수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신부, 입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