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116. 에필로그1. 결혼식 (1)
“우와! 이게 누구야.”
“와, 팀장님!”
연이어 들려오는 탄성에, 기다란 속눈썹을 붙인 은수의 눈꺼풀이 스르륵 말려 올라갔다.
평소보다 정교하고 진한 화장, 그녀의 체형에 꼭 맞는 하얀 웨딩드레스, 그리고 화룡점정으로 머리 위에 살포시 얹힌 면사포까지. 오늘의 그녀는 엄격한 팀장이나 한 아이의 엄마가 아닌, 완연한 신부의 모습이었다.
드디어 왔구나.
은수는 코랄 빛으로 반짝거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박 과장과 유라, 민희를 반갑게 맞이했다.
“일찍들 오셨네요. 차는 안 막히던가요?”
“네, 괜찮았어요. 와, 근데 진짜…….”
할 말을 잃은 듯 말끝이 흩어지는 것으로 보아 긍정적인 반응임에 틀림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팀장님 원래 예쁘신 줄은 알았는데…… 이렇게 계시니까 진짜 딴사람 같으세요. 꼭 인형 같아요. 완전 최고!”
유라가 감명이라도 받은 듯 엄지손가락을 척 치켜들었다. 초조했던 은수는 나쁘지 않은 듯한 반응에 그제야 속으로 살짝 안도했다.
예쁘단 소리가 일단 좋기는 한데, 막상 들으니까 좀 민망하네.
그녀 스스로가 평가하기에도 오늘의 자신은 무척이나 예뻤지만, 뭐라 답하기가 곤란한 나머지 은수는 그저 수줍게 미소 지었다.
“……뭘요. 다 화장발이에요.”
“에이, 화장도 본판이 없으면 안 먹히지. 하여튼 우리 본부장님 겸손하시기는.”
혹여나 질세라 박 과장도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나 그러는 중에도 단 한 명만은 아무 말 않고 묵묵히 그녀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눈빛이 어찌나 강렬한지, 은수는 만화 영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빔이 저를 잔뜩 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민희 씨가 보기엔 어때. 너무 예쁘지 않아?”
눈치 백단. 그런 민희를 모를 리 없는 박 과장이 콕 집어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 덕에 시큰둥해 있던 표정이 살짝 풀어지더니 이윽고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
“…….”
“예쁘시네요. 화장은 좀 진하신 것 같지만.”
“……고마워요.”
예쁘다는 말이 저렇게 반갑지 않게 들릴 줄이야. 하지만 마지못해 하는 것 같은 칭찬에도 은수는 여유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 속이 도저히 말이 아닐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녀는 회사에 청첩장을 돌리고 나서도 내심 저 얄미운 후배가 설마 결혼식까지 올까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싫어도 와야만 하는 것이었다. 민희는 신랑 현재로부터 직접 축가를 부탁받은 장본인이 아니었던가. 그 일이 있은 후로 팀원들은 틈틈이 민희와 함께 축가를 준비했다고 했다. 민희 입장에선 그야말로 울며 겨자 먹기였다.
은수는 문득 웃음이 터졌다. 이런 시점에서 승자, 패자를 따지고 싶진 않았지만 그래도 엄연히 따지자면 자신이 승자임이 분명했다. 그러니 저 정도 심술은 넓은 아량으로 이해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괜한 생각으로 기분을 망치기엔 오늘은 너무도 중요한 날이었으니까.
“난 딱 예쁘게 잘된 것 같은데. 팀장…… 아, 아니, 본부장님, 우리 사진 찍어요!”
“아, 그래. 얼른 이리 오세요.”
결혼식에 신부와 함께 찍는 사진이 빠질 수 있을쏘냐.
박 과장과 유라, 민희는 순백의 신부가 된 은수 뒤를 금세 병풍처럼 둘러쌌다. 그러자 아까부터 은수의 영상과 사진을 찍어 주던 기사가 촬영을 재개할 준비를 했다.
“자, 찍습니다. 하나, 둘, 셋!”
찰칵.
그렇게 짤막한 셔터 소리가 울리고, 은수는 활짝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그때, 은수의 귀로 너무나 익숙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질적인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민 팀장.”
은수의 고개가 스르르 돌아갔다. 대기실 입구 쪽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현재만큼은 아니지만 훤칠한 남자의 모습.
“……서 팀장님?”
그건…… 지훈이었다. 은수의 뒤에 서 있던 유라가 그를 확인하더니 재깍 물음을 던졌다.
“어, 서 팀장님! 웬일이세요?”
“…….”
“아까 2팀한테 듣기론 오늘 못 오신다고 하셨다던데, 궁금하셔서 기어이 오신 거예요?”
“……하하, 예. 그렇게 됐네요.”
기분 탓일 수도 있었지만, 남자의 웃음소리에서는 어쩐지 씁쓸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물려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저기, 혹시 잠깐 자리 좀 비켜 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서 팀장님하고 얘기할 게 좀 있어서…….”
혹시 뭔가 이상하게 보일까 싶었지만, 다행히 그들은 그녀의 말에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케팅 1팀과 2팀의 기둥이었던 두 사람이기에 아마도 일 얘기를 하려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아, 네. 그럼 좀 이따 식장에서 봬요!”
“……네.”
촬영 기사, 유라와 민희가 먼저 자리를 뜨고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은 박 과장이었다. 그녀는 웬일인지 말없이 은수의 어깨를 두드려 주더니 자리를 벗어났다.
‘뭐지? 혹시…… 알고 계신 건가?’
눈치가 빠른 만큼 모르는 게 없는 그녀였다. 의문스러운 행동에 잠깐 의구심이 들었지만, 그런 은수의 생각은 제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지훈으로 인해 금세 사라져 버렸다.
“…….”
“…….”
마침내 두 사람만이 남은 신부 대기실엔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의 입술 사이에서 간결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좋아 보인다.”
은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질문인지 감상인지 영 분간이 되지 않는 말.
당신도 좋아 보인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러기엔 어쩐지 주저가 되었다.
“……어떻게 된 거야, 안 오겠다더니.”
결국 그녀는 방금 전 그의 존재를 인식하고 난 뒤 맨 처음 떠올랐던 질문을 했다. 그와 마지막으로 독대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그날 그는 그녀의 결혼식에 절대 안 올 것처럼 얘기했었다.
은수의 나지막한 질문에 지훈의 입가에는 쓴 미소가 걸렸다.
“그러려고 했어. 근데, 그래도 명색이 동룐데…… 아예 안 오는 건 좀 그렇겠더라고.”
아, 그럼 그렇지. 하여튼 남 눈치 하나는 끝장나게 보는 사람이라니까.
뭐, 물론 절친했던 동료 사이에 참석을 안 하는 게 좀 이상해 보일 순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참석하란 법도 없는 건데.
이유야 어찌 됐건 그의 등장은 정말 뜻밖이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화제를 바꾸어 화살을 그에게로 돌렸다.
“소식은 들었어. 곧 결혼한다고.”
“……어.”
현재에게서 다시 프러포즈를 받았던 그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지훈도 곧 결혼을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예비 신부는 예전의 그 여자. 은수와의 일이 있은 후에 일이 어찌어찌 잘 풀린 모양이었다.
역시 사람은 종잡을 수 없는 동물이다. 너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며 애원하던 그가 어느새 이렇게 그녀 앞에서 초연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보면. 하기야 그녀만 해도 그랬다. 3년 동안 천천히 끓어올랐던 감정이 오래된 찻잔처럼 식어 버리는 데는 채 몇 개월도 걸리지 않았었으니까. 그녀도 제가 남자를 비웃을 처지는 못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결혼을 결심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소식을 들은 직후 은수는 마음 한구석이 살짝 불편해지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그럴 주제가 아닌 줄 알면서도 얼굴과 이름만 알 뿐 잘 알지도 못하는 그 여자가 안쓰럽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바보도 아니고, 그래도 결혼 같은 중대사를 결정하기까지는 다 그만한 사연이 있었을 터였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은 정말 진심이었다. 그 또한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나서 부디 행복했으면 좋겠다. 바랐던 모든 것이 이루어졌기에, 이제 그녀에게 남은 바람은 그것뿐이었다.
어쨌든 하나 확실한 건, 내가 그 결혼식에 참석할 일은 없을 거란 거겠지. 은수가 속으로 읊조렸다.
“축하해. 잘 살길 바라.”
“……고맙다.”
“아냐. 이렇게 와 줘서 내가 더 고마워.”
“…….”
“어쨌든 왔으니까 잘 있다 가. 이따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그래.”
헤어진 연인의 대화치고는 무척 담백한 내용이었다. 은수는 지훈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한때 정말 진심으로 사랑했던 남자. 그러나 이제는 과거 속에 영영 매몰되어 버린…….
신부 대기실로 오기 전, 그는 아마도 입구에서 현재를 보았을 것이었다. 턱시도를 입은 그 사람을 보면서 이 남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생각지 못한 그의 등장으로 은수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아, 오늘은 이러기 싫었는데…….
그런데 그때,
“은수 씨.”
“……!”
반가운 구세주가 등장했다.
“들어가도 돼요?”
원체 잘났긴 하지만, 그래도 결혼식이라고 평소보다 몇 배 더 멋진 모습을 한 그녀의 남자였다.
순간 반색한 은수는 하얀 장갑을 낀 손을 드는 대신,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지훈과 단둘이 있었던 것이 왠지 모르게 찔린 탓이었다.
“그럼요! 들어와요, 현재 씨.”
“…….”
지훈과 은수가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현재는 뚜벅뚜벅 당당히 신부 대기실 안으로 걸어 들어와 지훈과 마주 섰다. 현재의 짙은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서 팀장님도 와 계셨네요.”
“……오랜만입니다.”
“예, 오랜만이네요.”
은수와 지훈의 만남이 그렇듯, 두 남자의 조우도 무척 간만이었다. 상호 달가운 얼굴은 아닐 것이었다. 그래도 예전의 둘 사이에 보였던 살기나 분노는 더 이상 온데간데없는 듯해서 은수는 침착한 눈으로 두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지훈을 잠시 쳐다보던 현재가 심상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서 팀장님도 조만간 결혼하신다고요. 축하드립니다.”
“……예, 감사합니다.”
“결혼식은 아마 못 가겠지만, 축의금은 따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예쁜 아들 딸 많이 낳으시고 부디 잘 사시길 빕니다.”
“……아, 예. 고맙습니다.”
그의 말투는 매우 점잖았지만 표정은 어쩐지 조용하게 살벌했다. 저 말을 저렇게 무미건조하게 하다니, 맘에도 없는 말임을 너무나도 잘 알 수 있었다. 이제 아무 상관없는 남자이긴 해도 질투는 여전히 나는 모양이지. 그의 속이 현미경을 들이댄 것처럼 너무 잘 보여서 은수는 순간 픽 웃음이 새려는 걸 참아야 했다.
“저, 그럼 난 이제 그만 가 볼게.”
“…….”
“식, 잘 보고 가겠습니다. 그럼 이만.”
현재의 등장이 부담스러웠을까. 꾸벅 고개를 숙인 지훈이 그대로 대기실을 나갔다.
현재는 그가 사라진 곳을 잠시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은수는 그의 조용함을 부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화났어요?”
그제야 현재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네?”
“화났냐구요.”
시무룩해진 그녀의 질문에 굳어 있던 현재의 얼굴이 확 풀어졌다.
“내가 왜 화가 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