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115. 무조건 해피엔딩 (2) 完
“휴…….”
짧은 한숨을 내뱉은 그녀는 성질을 내던 것이 무색하게 다시금 걸레를 집어 들고 바닥을 벅벅 닦기 시작했다. 요즘은 그 생각만 하면 짜증이 올라왔다. 이건 뭐 도 닦는 것도 아니고, 천하의 민은수가 대체 이게 뭔 꼴이냐.
사랑스러운 은성이가 태어나고 벌써 한 번의 계절이 바뀐 시점이었다. 그리고…… 현재와 은수의 관계는 그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다정한 연인인 그는 여전히 은수를 잘 챙겨 주었고, 아빠의 몫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다정한 연인, 그게 문제였다.
바닷가에서 받았던 낭만적인 프러포즈의 기억은 어느새 수면 밑으로 가라앉아 버리고 말았다. 출산을 하면 그 고통 때문에 건망증이 생기기도 한다더니, 정말인 것 같았다. 이젠 프러포즈를 받았단 사실조차 까먹을 지경이니까!
맨 처음 그의 맘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을 때는 결혼식이 미뤄진다 해도 별생각이 없었다. 이미 불러 있는 배도 그렇고, 여러모로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으므로. 거기서 시간이 흘러 은성이를 낳은 직후에도 그랬다. 육아니 모유 수유니, 신경 쓸 것이 한두 가지였어야지. 그땐 몸과 마음이 바쁜 나머지 결혼식 같은 게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었다. 그렇게 시간은 덧없이 지나갔고, 결국 지금에 이르고 말았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제야 억울함이 속속 밀려들었다. 이쯤하면 기다림은 충분한 거 아닐까?
양가 어머니의 허락은 진즉에 떨어졌다. 또 이젠 별 고민 없이 회사에도 출근할 수 있을 정도로 상황이 많이 나아졌지 않은가. 출산 직후 빡센 다이어트와 모유 수유 등으로 다시 홀쭉해진 덕에 이 정도면─적어도 은수의 기준에선─ 웨딩드레스를 입기에 썩 나쁜 몸매도 아니었다. 고로, 예전과 달리 여건이 받쳐 주지 않는 상황도 아니란 얘기인데.
왜! 왜 아무 말도 없는 거냐고, 이 남자는.
급기야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들었다.
‘혹시, 우리가 이미 결혼한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 아냐?’
그런 거면 진짜 곤란한데…….
걸레질을 하다 말고 생각에 잠긴 은수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물론 법적으로 그들은 이미 부부가 된 상태였다. 은성이의 출생 신고를 하면서 부득이하게 혼인 신고까지 함께 끝마쳤으니까. 그땐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결혼할 사이, 혼인 신고부터 먼저 할 수도 있는 거지.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때문에 결혼식에 대한 필요성을 못 느낀다는 건 또 다른 골치였다. 그래도 인생에 딱 한 번 있을 결혼식. 남들 앞에서 자랑스럽게, 이 남자가 내 남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날을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지금도 암묵적으로 다들 그렇게 바라봐 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휘황찬란한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남들처럼 평범한 결혼식은 올리고 싶었던 건데……. 이러다간 정말 일이 흐지부지될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에 관해 제가 먼저 물어보기도 뭐했다.
왜? 자존심이 무지 상하니까.
그렇게도 결혼을 싫다고 했다. 그랬던 은수가 지금 그와 결혼을 하지 못해 안달하고 있다는 것은, 진정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었다. 정작 그녀는 더 이상 웃음도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지만.
요즘은 그저,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란 것만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순서가 한번 어그러지면 답도 없다, 정말.
“응애! 응애!”
그때, 얌전히 잘 자고 있던 은성이가 깼는지 요란하게 울어 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또 시작이구만. 퍼뜩 깨어난 은수는 바로 총알처럼 일어났다.
“읏차.”
부리나케 손을 씻고 나온 그녀가 요람에서 은성이를 얼른 꺼내 품에 안아 들었다. 손목 쪽이 어쩐지 시큰했다. 앵두 같던 아기는 그새 무럭무럭 자라, 이제 하루가 다르게 무게가 늘어가고 있었다.
은빛 별. 언젠가 꿈에서 현재의 품에 와락 안겨들었다는 그 아기는, 지금 그녀의 품에 안겨 언제 울었냐는 듯 또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허기에 몸부림치다가도 절로 배가 불렀다.
그래, 그래도 이럴 때 엄마한테 유일한 위안이 되는 건 우리 은성이지.
“응애!”
“어유우, 그래그래. 우리 아들 배고팠쪄요? 맘마 먹자.”
바로 셔츠 앞섶을 벌린 그녀가 익숙하게 수유를 시작했다. 초반엔 이 수유 때문에도 참 많이 고생을 했었다. ‘젖 먹던 힘’이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세게 빨아 대는 통에 가슴이 아팠고, 젖몸살도 잠시 앓았다.
그래도 최근 들어서는 수유 텀이 많이 길어져 편해진 편이었다. 아빠와 달리 엄마 맘을 기똥차게 아는 효자 은성이는 요즘 저녁 즈음만 되면 잠이 들어 새벽 혹은 다음 날 아침까지 조용했기 때문에, 고달픈 밤중 수유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게 그녀가 수유를 다 마치고 아이를 끌어안아 한참 토닥이고 있을 때였다.
마침내 둔탁한 문소리와 함께 반갑지만은 않은 얼굴이 등장했다.
“……왔어요?”
“네. 별일 없었죠?”
결혼 얘긴 입도 뻥끗 안 하고 있는, 야속한 도현재였다.
“그럼요. 저녁은요.”
“먹었죠. 은수 씨는요?”
“아직요.”
“아직도요? 내가 차려 줄까요?”
“아니에요. 내가 나중에 먹을게요.”
“내가 할게요. 은수 씨 힘들잖아요.”
“괜찮대두요.”
저도 모르게 틱틱대는 목소리가 나온다. 요 며칠은 늘 이런 식이었다. 대답을 하기는 하는데 어딘가 맘에 안 드는 구석이 있는 것처럼. 이런 식으로 대응하는 제가 그녀 스스로도 유치하게 느껴졌지만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래 봤자, 현재는 한결같기만 했다. 한 번쯤 속이 상할 법도 한데……. 하긴, 그는 도현재니까. 그 외엔 그 맹목적인 다정함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살아 숨 쉬는 보살. 뭐, 그 정도 단어면 설명이 가능할는지도.
“은성이도 방금 밥 먹었어요?”
“네. 열심히 먹느라 피곤했나 봐요.”
꿀떡꿀떡, 젖을 잘도 받아먹던 은성이는 어느새 스르륵 눈을 감고 있었다. 여느 때에 비하면 굉장히 빠른 취침 속도였다.
“오늘은 웬일로 쉽게 잠들었네.”
“그러게요. 혹시 깰지도 모르니까 쪼끔 이따 눕혀야겠다.”
“그렇게 해요.”
잠들기 전에 한번 안아 보려 했는데…….
아이의 등을 주기적으로 토닥거리는 은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현재는 못내 아쉬워 입맛을 다셨다.
뭐, 그래도 어쩌면 잘된 일이었다. 그렇잖아도 오늘은 은성이를 일찍 재워 놓고 둘이서만 조용히 얘기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조금 더 기다리려 했지만 어쩐지 참기가 힘들었다.
“은수 씨.”
“네?”
“이것 좀 봐 봐요.”
“뭔데요?”
은수는 저에게 내밀어지는 휴대폰을 별 기대 없이 일별했다. 어딘지 모를 훤한 장소들이 그의 폰에 한가득 펼쳐져 있었다. 왠지 모르게 유럽 같은 분위기가 풍기는, 색색깔의 멋진 풍경이었다.
“여기가 어디예요?”
“맘에 들어요?”
“네. 엄청 예뻐요.”
저런 데는 살다가 한 번쯤 가 보면 좋겠다. 내 신세에 언제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런 그녀에게 불현듯 예상치 못한 말이 하나 날아들었다.
“신혼여행 갈까요, 여기로?”
“……네?”
뭐, 뭐라고?
은수의 눈이 금세 동그래졌다. 반면, 말을 꺼낸 현재는 아무렇지 않은 기색이었다.
“방금…… 뭐라고 그랬어요?”
“신혼여행 가자고요, 여기로.”
“…….”
“아, 참. 결혼을 해야 신혼여행을 갈 텐데.”
설명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뻔뻔한 얼굴로 이렇게 덧붙이기까지.
“……네?”
지금 이 남자가 누구 놀리나? 안 그래도 요즘 예민한데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도 아니고.
“…….”
조금씩 낯빛이 붉으락푸르락해지려는 은수를 향해 현재는 능글맞게 씩 웃기만 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결혼할까요?”
“…….”
“우리.”
그 말에 은성이를 토닥이던 은수의 손길이 일순 멈추었다.
뭐, 뭐야. 장난으로 하는 말인가. 아님 진심……?
혼란스러운 은수의 표정을 읽은 현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결혼하자고요, 이제. 정말로.”
“…….”
“대답 바라고 하는 말 아닌 거 알죠.”
“…….”
“이거 통보예요, 난 당신이랑 평생 살 거라는 통보.”
어딘가 익숙한 말.
그 순간, 은수의 머릿속에선 먼 옛날, 그에게 아기를 낳겠다고 통보하던 날이 문득 떠올랐다. 그의 지난 프러포즈들만큼이나 아득하게 느껴지는 기억.
“……청첩장도 미리 찍어 왔는데.”
그제야 그가 꺼내 놓은 톡톡한 봉투가 뒤따라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의 약지에 끼워진 익숙한 반지까지도. 은수는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
진짜 어이없어. 아무 말도 없다가 이런 식으로…….
은수는 자신의 반응을 기다리는 듯한 현재의 얼굴이 고인 눈물 탓에 흐릿하게 보였다. 잊혀 있던 기억을 떠올리니 가슴 한구석에서 울컥 올라온 무언가가 눈물샘을 툭 건드린 모양이었다. 이미 여러 번 받았던 프러포즈인데, 왜 눈물이 나는 걸까. 그러고 보면 요즘 그녀는 툭하면 눈물을 흘렸다. 예전에는 너무 안 운다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였는데.
눈물이 많아진 건 맘이 약해졌다는 방증이 아닐까. 공교롭게도 아이를 임신하고서부터 그녀는 눈물이 많아졌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단단한 척하긴 했어도 사실 그때 그녀는 너무 막막했었으니까. 현재에게 그 통보를 할 때에도 표면적으로는 ‘그에게 떳떳해지고 싶어서’라고 말했지만, 그게 진실한 이유는 아니었다.
사실은…… 사실은, 무섭고 두려워서. 생물학적 친부인 당신에게라도 기대고 싶었던 거라고.
이제는 솔직하게 말할 수 있지만, 은수는 굳이 그러지 않기로 했다. 이미 이 남자는 그 사실을 오래전에, 어쩌면 그녀보다 더 일찍 깨닫고 있었던 것 같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퉁명스러운 물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무슨…… 현재 씬 왜 이런 말을 애 재우고 있을 때 해요?”
“……아, 미안해요.”
하여튼 무드가 갈수록 없어져. 다 잡아 놓은 고기다, 이거지.
머쓱한 웃음을 짓는 남자를 마뜩찮게 바라보던 그녀가 톡 쏘는 투로 말을 이었다.
“벌써 청첩장을 찍어 오면 어떡해요. 아무리 내가 결혼식에 로망이 없다지만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
“언제 하는데요? 장소는 어디고요. 후진 데는 절대 안 돼요.”
“…….”
“……신혼여행은요. 진짜 여기 갈 거예요? 이래 놓고 꼴랑 제주도로 때우는 거 아니죠?”
상의하지 않고 제멋대로 일을 처리한 죄가 있기에 그녀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기만 하려 했던 그가 잠시 은수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 이건 정말이지 인내심의 한계라고밖에.
화장기 없는 얼굴을 하고, 품에 저들의 결실을 안은 채로 자신을 촉촉하게 쳐다보는 여자가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충동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현재는 아기와 은수를 동시에 덥석 끌어안고 말았다.
“헉, 현재 씨 잠깐만! 왜 이래요! 애 숨 막혀요!”
“잠깐만요. 잠깐만 이렇게 있을게요.”
그러나 그들에겐 잠깐도 무리라는 것을, 두 사람은 잠시 뒤에 바로 깨닫고 말았다.
“으아앙!”
불시의 습격에 잠이 깨 버린 은성이가 서럽게 우애앵 울어 젖히기 시작한 것이다. 은수의 얼굴에는 낭패감이 어렸지만, 둘을 품에 가둔 현재는 속도 모르고 그저 싱글벙글이었다.
“……지금 웃음이 나와요?”
“……네.”
가만있어도 웃음이 날 정도로 행복한 걸 어떡합니까, 그럼.
하지만 그는 최소한의 눈치는 볼 줄 아는 인간이었기에 그 말은 속으로 삼켜야만 했다.
결국 그 벌로 은성이를 다시 재우는 것은 현재의 몫이 되었다. 은성이는 한참이나 둥개둥개를 하고 요람에 눕혀 토닥여 주고 나서야 다시 잠이 들었다. 그런 후에도 현재의 들뜬 기분은 여전했다.
“그러게 갑자기 왜 애를 놀래켜요.”
“미안해요. 갑자기 너무 안아 주고 싶어서. 은수 씨도, 은성이도.”
“……근데 프러포즈를 무슨 세 번씩이나 해요.”
포근한 침대 위, 어느새 그녀의 옆에 나란히 누운 현재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그만큼 간절하니까요, 나는.”
그 말에 또 한 번 뭉클해진 은수가 손을 들어 남자의 뺨을 쓰다듬어 주며 속삭였다.
“……암튼 고마워요, 세 번씩이나 청혼해 줘서. 한 남자한테 이렇게 청혼 많이 받은 사람은 이 세상에 나밖에 없을 거예요.”
“그거 좋네요. 사랑한단 말을 제일 많이 듣는 여자도 될 수 있게 할 테니까, 기대해요.”
어이구, 말은 누가 못 해…….
그녀는 허황된 말에 코웃음을 치면서도, 한편으론 그라면 능히 그럴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어 가슴이 벅차올랐다.
“진짜죠. 그 말, 할아버지 할머니 돼도 유효한 거예요.”
“지당하신 말씀을.”
바로 대답을 마친 그가 그녀의 입술에 성급하게 입을 맞추었다. 그는 한 아이의 아빠가 된 후에도 여전히 혈기 왕성했다. 덕분에 매일 밤 배로 힘들어진 건 은수였다. 뭐, 물론 그녀라고 그것이 불만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안 돼요.”
“왜요?”
“피곤하단 말이에요.”
“…….”
오늘만은 왠지 응해 주기가 싫었다. 지금껏 속사정을 말 못 한 그녀의 소심한 복수였다.
“내일 해요, 내일. 시간은 얼마든지 있잖아요.”
“……알았어요.”
잔뜩 풀 죽어서는, 대답은 잘해요.
그의 마음이 훤히 보였지만 은수는 애써 모른 척했다. 방금 전 그 말은 위로하려 하는 말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었다.
그들에겐 앞으로 무한정 많은 날들이 펼쳐질 것이다. 10년이든, 20년이든. 둘 중 한 사람이 먼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쭉 그렇게 함께. 아, 기왕 사는 거 마지막 가는 길까지 함께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그게 가능만 하다면야.
“그래도, 키스는 되는 거죠?”
“……그거야 뭐…….”
님 원하실 대로.
별다른 대화도 없이 두 사람의 입술이 다시금 맞닿았다. 그와 함께 심장도 맞닿았다.
길게 이어진 격렬한 입맞춤 뒤, 조용히 미소 지은 은수가 눈을 떴다. 처음 그날처럼, 호수처럼 맑고 큰 남자의 눈이 그녀의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정말이지 너무 힘들고 고달픈 길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그 길을 기꺼이 걸어온 것은 그 자리에 늘 당신이 함께 있었기 때문에.
현재의 입가에도 슬그머니 미소가 일었다. 그의 진실한 눈을 올려다보며, 들판처럼 너른 가슴에 안기고 나서야 그녀는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요.”
나를 지탱하던 중력은 다름 아닌 당신이었다는 것을.
속도위반 로맨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