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
114. 무조건 해피엔딩 (1)
……음, 방금 건 좀 정나미 없어 보였나?
상사도 뭣도 아닌 제게 팀원들이 혹시나 괜한 마음을 쓸까 싶어, 일부러 팀에 큰 미련이 없는 것처럼 굴기로 한 그녀였다. 그러나 정작 돌아온 것은 뜻밖의 핀잔이어서, 은수는 다소 멋쩍게 뒷머리를 긁었다.
“아, 죄송해요. ‘제 맘속의 영원한 고향’이라고 해야 될 걸 잘못 말했네요. 방금 건 못 들은 걸로 해 주세요.”
그들이 알고 있던 팀장은 아기를 낳고 돌아와서도 여전했다. 능숙하게 수습하는 모양이 정말 그녀답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팀원들은 모두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그냥 온 거죠?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하지만 그 와중에도 웃음기를 거둔 현재만은 그녀에게 진지한 목소리로 묻고 있었다.
아, 이 남자는 왜 이렇게 걱정이 많담. 속으로 생각하던 그녀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하기야, 젖먹이를 키우는 엄마들이 보통 그러하듯 최근엔 어디 나다니지도 않고 집에만 쭉 박혀 있던 몸이었다. 늘 집에 있던 사람이 간만에 나들이를, 그것도 전에 몸담았던 회사로 나왔으니 놀랄 만도 하겠지. 그 외로웠던 시간들을 나는 도대체 어떻게 버텼던 걸까. 그녀 스스로 생각해도 기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장하다, 민은수!’ 하고 엉덩이를 두드려 주고픈 심정이었다.
어쨌든 뭐, 오늘은 엄밀히 따지면 일이 있긴 한 거니까. 아예 어울리지 않는 질문은 아니었다.
“왜요, 무슨 일 있으면 안 돼요?”
“예?”
며칠 전 대화를 통해 조금은 짐작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반문하는 남자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던 은수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리더니 그 입술 새로 놀라운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저, 조만간 다시 출근할 것 같아요.”
“……예?!”
“정말요?”
이럴 수가. 깜짝 놀란 현재가 그녀를 퍼뜩 쳐다보았다.
놀란 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의외의 소식에 잠깐 어안이 벙벙해져 있던 팀원들은 이내 커다래진 눈으로 저마다 한마디씩 묻기 시작했다.
“와, 다시 우리 팀으로 오시는 거예요? 현재 씨도 몰랐어?”
“언제부터 출근이신데요?”
“다시 팀장님 하시는 거예요?”
어휴, 시끄러. 은수의 눈꼬리가 호를 그리며 휘었다. 쇄도하는 질문 세례에 눈살을 찌푸리다가도 익숙한 모습에 웃음이 나오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하나하나씩 좀 물어 보세요, 나 어디 안 가니까. 일단 출근 일자는…… 정확히 정해지지 않았지만 근 시일 내일 것 같구요. 그리고…….”
입술을 감쳐물고 ‘음…….’ 하는 소리를 내던 그녀가 잠시 뒤 말을 이었다.
“안타깝지만, 마케팅 1팀으로 다시 돌아오는 건 아닙니다.”
“그럼 어디로……?”
‘어디’라는 대목에 이르자 그녀의 입술이 쑥스러운 듯 모아졌다.
“전략기획……본부장으로 가게 됐어요.”
“우와!”
뒤편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유라가 탄성을 터뜨렸다. ‘본부장’이라는 이름에서 위엄을 느낀 것이었다. 새파란 신입 입장에선 당연한 일. 하지만 꼭 유라만 놓고 말할 것도 아니었다. 당사자인 은수조차도 최근 회사에게서 부름을 받았을 때 이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었으니까.
별다른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사실 아이를 낳은 순간부터 라프레즈로의 복직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은 일이었다. 아마도 비슷하지만 좀 더 하등한 조건의 타 회사로 이직하게 될 공산이 가장 커 보였다. 거기다 어쩌면 아예 한직으로 다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언제 다시 복직할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는 상황에선 그런 변수까지 고려해야 했으니까. 어쨌든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 해도, 결국 모두 그녀 스스로 선택한 결과였기에 후회는 없었다. 별이, 아니 은성(銀星)이가 나날이 커 가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행복했다.
그런데 며칠 전, 회사로부터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연락이 왔다. 이번에 회사에서 전략기획본부를 신설하는데, 회사 초기 공을 세웠던 인재 중 하나인 그녀가 함께해 줄 수 없느냐는 요청이었다.
너무도 파격적인 제안에 은수는 잠시 멍해 있었다. 햇병아리 시절부터 꿈만 꿔 오던 일. 팀장이 아닌 여자로서의 삶을 선택하려 했던 그녀인지라 그 제안의 무게가 무척 버겁긴 했지만, 한편으론 설레는 맘을 감출 수가 없었다. 단순히 ‘직책이 높아서’ 따위의 이유는 아니었다. 그저 그 제안이 은수로 하여금 저가 아직도 유능한 인재라는…… ‘나도 아직 어딘가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희망을 가지게 했기 때문이다.
미래를 생각하면 당연히 잡아야 하는 기회였다. 하지만 아직 너무 어린 은성이를 생각하니 주저가 되었다. 엄마와의 교감이 특히 중요한 시기. 물론 직장을 다니게 된다고 해서 아이를 소홀히 대할 그녀는 절대 아니었지만, 또 혹시 모를 일이었다.
예전의 나 같았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예스를 외쳤을 텐데.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렇게 홀로 치열한 고민을 거듭한 끝에, 그녀는 며칠 전에야 넌지시 현재에게 운을 띄웠다.
“현재 씨.”
“네?”
“나…… 다시 일한다 그럼, 어떨 것 같아요?”
현재는 여느 때처럼 퇴근하고 돌아와 한창 아기를 끌어안고 토닥이고 있었다. 은수의 말에 그는 의외라는 듯 잠시 움직임을 멈추더니 싱긋 미소를 지었다.
“하고 싶으면 해야죠. 복직하려고요?”
후. 잠시 뜸을 들인 그녀에게서 작은 대답이 새어 나왔다.
“……네, 일하고 싶어요.”
그간은 미처 말하지 못했던 진심. 아기 때문에 2순위로 밀려났지만, 한동안은 그녀에게 절대 포기할 수 없는 1순위였던 그것.
은수의 얼굴에 드러난 표정을 본 현재는 그녀가 아기와 일을 두고 고민하고 있음을 바로 알아챘다. 그렇잖아도 그렇게 일을 좋아하고 잘하던 사람이 육아 때문에 집에만 묶여 있게 된 것이 안타깝던 참이었다.
분명 책임지겠다고 말했었다. 그 말엔 그녀의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뜻도 담겨 있었다. 이 모든 일이 시작된 것은 분명 제 탓이었으므로. 훨훨 날아오르게 하지는 못할망정 아직 다 펴 보지도 못한 여자의 날개를 꺾어 버리고 싶지는 않은 마음이었다.
그래서 현재는 별 고민도 않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은성이는 걱정 말고 복직하고 싶으면 얼른 해요.”
“……걱정을 어떻게 안 해요.”
아기한테 엄마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데…….
염려스러운 듯 은수가 나지막이 읊조렸지만, 그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은성이한테 엄마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내가 돌보면 되죠. 뭐, 아니면 열정적인 할머니들도 계시고. 무슨 걱정이에요.”
요즘 두 할머니들은 틈만 나면 하나뿐인 손자를 옆구리에 끼고 사는 상태였다. 알고 보니 둘이서 얼마나 짝짜꿍이 잘 맞는지, 굳이 현재나 은수가 없더라도 시간이 나는 족족 만나 수다를 떨고 나들이를 다니는 듯했다. 거기다 시간이 오래 흐르긴 했어도 워낙 육아에 베테랑들이라, 간혹 힘들 때면 체면 불구하고 은성이를 할머니들 손에 맡겨 놓기도 했다. 그러면 절로 안심이 되어 숙면을 취하게 될 정도였다.
그런 걸 감안하면 영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럼 괜히 죄송해지니까요. 내가 해야 할 일인데.”
그러나 현재는 은수의 말에 진지하게 얼굴을 굳혔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요. 은성이는 은수 씨 혼자 떠맡아야 할 존재가 아니에요. 일 다시 시작한다고 은수 씨가 애를 나 몰라라 할 것도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은수 씨.”
여전히 조심스러운 것 같은 여자를 현재는 애틋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내가 예전에 한번 얘기한 적 있죠, 내가 은수 씨한테 반한 이유.”
“…….”
“은수 씨는 물론 언제나 예쁘지만, 그래도 일할 때가 제일 멋있고 예뻐요. 누구보다 당당하고, 진취적이고……. 내가 처음에 은수 씨한테 정신 못 차렸던 건 바로 그런 면 때문이었다고요.”
그가 유난히 힘주어 말을 이었다.
“난, 은수 씨가 항상 빛났으면 좋겠어요. 원하는 일을 하면서 반짝였으면 좋겠고요. 물론 은수 씨가 바빠지는 건 나로선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이지만, 만약 아이 때문에 그 예쁜 모습을 다시 볼 수 없다면…… 난 그게 더 슬플 것 같아요.”
남자의 눈빛엔 한 치도 거짓의 기미가 없었다. 그 맑은 눈을 마주한 순간, 그녀는 결심했다. 갑작스레 용기가 샘솟는 느낌이었다.
결국 오늘, 은수는 언제 마지막으로 왔었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회사를 찾았고, 확답을 보냈다.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해 보겠노라고.
방금 막 그 얘기를 전하고 온 길이었다.
“축하드려요, 팀장님! 아, 아니, 이제 본부장님이지.”
“아직은 본부장 아니에요. 지금은 애 엄마 겸 백수에 불과한데요.”
“에이, 그래도 그게 아니죠. 본부장님이면 한 단계, 아니 몇 단계 업그레이드되신 건데. 진짜, 진짜 축하드립니다.”
“고마워요, 이 대리.”
수줍은 듯 미소를 짓고 있는 여자를 보며, 현재는 제가 짐작하던 것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끝까지 가서 마지막 한 발을 좀처럼 내딛지 못하고 주춤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 말이 그녀의 결정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 것 같아서 현재도 기쁜 얼굴을 했다.
“암튼 직책만 그렇지, 하는 일은 그 전이랑 비슷할 거예요. 저 다른 부서 갔다고 모른 척하시기 없기예요.”
“글쎄요. 그건 생각해 봐야겠는데요.”
“뭐라구요?”
“하하, 농담입니다, 농담.”
공지도 다 했겠다, 이제 집에 가야지.
금쪽같은 아들을 얼른 보고 싶은 마음에 은수가 이제 그만 작별 인사를 하려던 순간이었다. 그때, 예기치 못한 질문이 하나 던져졌다.
“근데 그건 그렇고, 우리 국수는 도대체 언제 먹는 거예요?”
“……국수요?”
……아.
박 과장이었다. 그 한마디에 현재와 은수의 입술이 나란히 벌어졌다. 그들이 바로 알아들었듯이, 다른 팀원들도 그 말뜻을 곧바로 간파했다.
“맞아. 두 분 도대체 언제 식 올리시는 거예요. 설마 애기 다 크고 나서 하실 건 아니죠?”
“…….”
두 사람의 눈길이 서로 맞물렸고, 현재가 먼저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자 은수도 따라서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가 어쩐지 부자연스러웠다는 것을 그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때 되면 어련히 알아서 할 테니까, 다들 젓가락 들고 대기나 하고 계십시오. 곧 알려 드리겠습니다.”
“오오!”
“최대한 빨리 부탁드려요!”
기대감이 고조된 팀원들이 난리법석을 떨었다. 그러나 그 사이에서 태풍의 눈처럼 고요해진 은수의 입꼬리는 그 상태 그대로 쉽사리 풀어지지 않았다.
* * *
퍽.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걸레를 내던진 은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아이, 씨.”
그러니까 그 ‘곧’이란 게 언젠데! 좀 자세히 알려 주면 어디가 덧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