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속도위반 로맨스-113화 (113/128)

# 113

113. 별을 품에 안다

소년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 얼굴을 마주한 순간, 이제야 조금 숨을 돌리게 된 그녀의 머릿속에선 지난 일들이 아득하게 스쳐 지나갔다.

‘팀장님,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나한테 오면 안 돼요?’

‘내가 좋아졌죠? 그래서 신경 쓰이는 거죠, 그 여자.’

‘나랑 결혼해 줄래요, 은수 씨?’

주마등처럼 넘어가는 영상들은 하나같이 남자의 얼굴만을 담고 있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의 생김새는 똑같았지만, 그녀의 눈앞에 실재하는 남자의 얼굴은 물기를 잔뜩 머금고 있으면서도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하고 기쁜 듯 활짝 웃고 있다는 점이 달랐다. 일순 모든 아픔이 사그라졌다. 상처 난 회음부가 처치되고 있음이 느껴지는데도 마냥 웃음 지을 수 있을 만큼.

남자는 은수에게 어느새 진통제였고, 또 그녀를 굴러가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고마워요……. 잘했어요, 은수 씨.”

땀에 젖은 머리를 연신 넘겨 주고 얼굴 곳곳에 입 맞추며, 현재는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심장 바로 위에 솜사탕처럼 살포시 얹힌 별이는 여전히 우렁차게 울고 있었다. 새삼 행복했다. 살아생전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것 같은 벅찬 마음.

그녀는 잠시 동안 살포시 눈을 감고 별이의 체온을 느꼈다. 용광로처럼 뜨겁게 달궈진 가슴이 지끈거렸다.

먼 길을 돌고 돌아, 이제야 진정한 셋이 된 것이었다.

* * *

당초 예상했던 것과 달리, 조산으로 낳은 아이답지 않게 몸무게가 꽤 나가는 데다 자가 호흡도 가능했던 별이는 인큐베이터에서 일반 신생아실로 금방 옮겨졌다.

그리고 지금, 현재와 은수 그리고 두 할머니는 가림막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아기의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단란한 한 가족 같은 모습이었다.

“어머, 어머. 쟤 좀 봐.”

“하이고오~ 쪼끄맣다, 정말.”

“한 줌이네, 한 줌.”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위태한 작은 몸이 간호사의 손에 감싸진 채로 다가왔다. 갓 낳았을 때는 흡사 에일리언 같은 모습이던 별이는 어느새 부모를 닮아 말끔하게 잘생긴 외양을 자랑하고 있었다.

“까꿍! 까꿍!”

세상 빛을 본 지 며칠밖에 안 된 아이가 ‘까꿍’ 같은 말을 알아들을 리 없었지만, 아기의 모습에 신이 난 그들은 절로 혀 짧은 소리를 냈다.

특히, 발간 것이 고사리 같은 손을 폈다 쥐었다 하며 채 다 뜨지 못한 눈을 끔뻑이고 윙크하는 모습에 두 할머니는 자지러지고 말았다. 아기의 모습을 보고 이리 감탄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그도 그럴 게, 제 배 아파 낳은 자식들은 이미 장성하다 못해 징그러워지지 않았는가. 두 여자는 본래 아기를 좋아하는 편도 아니었다. 지나가다 간혹 남의 아기들을 보아도 시큰둥하니 별 감흥이 없었건만, 눈앞에 있는 꼬물이만큼은 이렇게 애틋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역시 손자 앞에 장사는 없었다. 갑작스런 임신 소식에 삐치고 토라졌던 일들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갓난 애기가 인물이 보통이 아니네. 저 중에서도 제일 예쁜 것 같아.”

“그러니까요, 호호. 애기 주제에 코도 오뚝하니, 쌍꺼풀까지 있어요. 꽃미남이야, 꽃미남.”

“그렇죠? 안 되겠다. 그, 뭐야. 그…… 아! 아역 탤런트. 그거 시켜야겠는데.”

아기들 사이에서 군계일학처럼 보이는 손자를 두고 두 할머니는 언제 올지 모를 미래를 성급히 설계하며 키득대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 아이를 낳은 장본인인 은수와 현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배우면 배우, 연예인이면 연예인이지. 탤런트는 또 뭐야……. 대화 속에서 묻어 나오는 극심한 세대차에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사실, 이 여사와 유 여사가 아기를 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인큐베이터에 있는 동안은 부모를 제외하고는 면회가 불가능했었기 때문이다. 처음인 만큼 그 반향이 현재와 은수에 비해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

“…….”

점잖기만 했던 두 할머니의 오버스러운 모습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외면하기보다 이리 뛸 듯이 기뻐하니 다행이랄까. 어쨌든 할머니는 할머니라고, 손주가 어지간히 좋은 모양이었다. 한편으로 은수는 할머니가 된다는 게 그리 달가운 일만은 아닐 텐데, 저 입장이 되면 또 다른 걸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다.

그 상태로 끊임없이 별이를 주시하던 그들은 잠시 뒤, 짠 것처럼 잠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근데…… 애 얼굴이 자네랑 완전 판박이인데? 벌써부터 그냥 자네야. 은수 얼굴은 하나도 없고.”

이 여사의 한마디였다. 그러자 유 여사도 기다렸다는 것처럼 당장 동조하고 나섰다.

“그렇죠? 저도 지금 그 생각했는데. 사부인이 역시 눈썰미가 있으시네요.”

“……그런가…….”

현재의 대꾸는 어쩐지 떨떠름했지만, 유 여사는 유쾌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 넌 안 그래 보이니? 지 아빠 아니랄까 봐 잘난 부분은 다 닮아 나왔네. 어휴, 너 어릴 때도 아빠랑 똑같았었는데. 부자가 어쩜 이렇게……. 하여튼 신통방통해.”

흐음.

문득 별이의 이목구비를 뜯어보던 은수도 그 말에 차마 반박을 할 수 없었다. 처음 봤던 이후로 저도 내내 그렇게 생각했었으니까. 지난번에 보았던 그의 아버지가 떠올랐다. 모르긴 몰라도, 도씨 집안의 유전자가 그녀의 것에 비해 무지막지하게 강력한 것은 분명했다.

xx 유전자를 제공한 입장에서 약간 억울한 마음도 들기는 했지만, 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쨌든 제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두 남자가 서로 닮게 된 것은 기쁜 일이었으므로.

“괜찮아요. 아들이니까 아빠 닮아야죠. 아들이 저 닮아서 뭐 해요.”

그 말에 두 할머니들의 시선이 은수에게로 향하더니 금세 수긍하는 얼굴이 되었다.

“하기야……. 그래, 나중에 딸 낳으면 그땐 너 닮겠지, 뭐.”

“네……. 어?”

딸? 이건 또 뭔 소리야.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던 은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주 당연하게 둘째 이야기를 꺼내는 엄마 때문에 놀란 탓이었다.

그러나 이 여사는 왜 그러냐는 듯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왜 그래. 더 안 낳을 생각이었어?”

“어머, 둘째 생각 없어?”

한술 더 떠, 유 여사까지 합세해 쌍으로 천연덕스럽게 묻는다. 은수는 얼떨떨한 얼굴로 더듬더듬 대답했다.

“어, 아니…… 그건 아닌데…….”

사실 둘째 생각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임신 중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했다. 하지만 출산의 고통을 겪으면서 그것이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란 것을 뼈저리게 깨달은 그녀였다. 물론 그 고통에 대한 기억은 어느덧 망각 속으로 묻혀 들어가는 듯했지만, 두려움의 크기는 여전했다.

그러나 이 여사는 그런 딸의 눈치를 캐치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왕 시작한 거 둘은 낳아야지. 너 봐라, 요즘 세상에 외동이면 얼마나 서글픈데. 안 그래요, 사부인?”

“그쵸. 능력이 안 될 애들도 아닌데, 둘 정도면 괜찮지. 현재 네 생각은 어때?”

“……뭐, 저는…….”

은수는 내심 딸을 바랐던 그를 알고 있었다. 일자로 다무는 입꼬리에 어쩐지 아쉬움이 어려 있는 듯했지만, 이윽고 그에게서 흘러나온 말은 또 한 번 그녀를 감동케 했다.

“저야 더 낳으면 좋긴 한데, 은수 씨가 워낙 힘들어해서요. 제가 낳는 게 아니니까 은수 씨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싶어요.”

“그래도 하나는 아쉽잖아. 너 딸 바라고 있었던 거 아니었어?”

”그건 맞지만…… 어쨌든 저한테 제일 중요한 건 은수 씨니까요.”

역시나, 성동구 최고의 팔불출다운 대답이었다. 그들의 주변 사람들이 그렇듯, 이 여사와 유 여사도 동시에 질린다는 듯 표정을 구겼다.

“어유, 어유. 그래, 니들 맘대로 하세요. 눈꼴 시려서, 증말.”

“그런 게 아니라…… 은수 씨도 하고 싶은 일이 있잖아요. 그런 거 다 제쳐 두고 계속 아기만 키울 순 없는 거니까.”

내가 낳았지만 도대체 어디서 저런 게 튀어나왔을까. 30년 가까이 생각해도 알 수가 없는 유 여사였다. 겉으론 타박을 하면서도 제 아내를 부서질까, 닳을까 애지중지하는 모습이 예뻤다. 같은 여자로서 부럽기도 하고. 우직하고 정직한 사위를 바라보는 이 여사의 마음도 매한가지였다.

“참, 그러면 넌 직장은 어떻게 되는 거야. 다시 받아 주겠다 그래?”

“……직장이요.”

어쩌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흘러 버렸다. ‘직장’ 얘기가 나오자마자 밝기만 했던 은수의 표정이 한순간 어두워졌고, 두 여자는 동시에 그것을 알아챘다. 아이를 낳은 여자가 직장 생활을 그대로 이어 나가는 게 쉽지 않은 일이란 것을 그들이라고 모를 리 없었다.

“……왜, 안 받아 주겠대?”

하지만 그녀는 손자 생각에 들떠 있기만 한 할머니들을 굳이 신경 쓰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팀장일 때 그랬던 것처럼, 금방 능숙하게 표정을 고친 은수는 조용히 웃어 보였다.

“아직 확실한 건 없어요. 그래도 걱정 마세요. 꼭 거기 아니라도 저 갈 곳 하나 없겠어요. 저 능력 좋잖아요.”

“…….”

“그 얘긴 이쯤 하고…… 별이나 봐요, 우리. 면회도 시간제한 있어요.”

저에게로 닿는 걱정스런 시선들을 대충 넘겨 버린 은수는 다시 열심히 별이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현재는 아무렇지 않은 척 별이에게 집중할 수 없었다.

* * *

그로부터 몇 개월 뒤.

“안녕하세요, 여러분!”

과도하게 상큼한 목소리가 라프레즈 마케팅 1팀 사무실을 울렸다. 씩씩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은수였다.

각자 업무에 집중하고 있던 팀원들은 퍼뜩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기엔 물론 그녀의 남자, 현재도 섞여 있었다.

“팀장님!”

“은수 씨? 웬일이에요?”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아무 말이 없었는데.

깜짝 놀라 커다래진 남자의 눈을 보며, 은수는 흐뭇하게 미소 짓기만 했다.

“어떻게 된 일이세요. 다시 복귀하시는 거예요?”

“그럴 리가요. 우리 김 팀장님도 계신데.”

그녀의 자리를 채운 김성권 팀장을 일컫는 말이었다. 시간이 꽤 지난 터라 이제는 김 팀장님이라 부르는 것도 꽤 입에 익은 상태였지만, ‘전직 팀장’ 앞에서 그리 부르기에는 어쩐지 미안한 느낌이 드는지 다들 호칭 쪽으로는 말을 아끼곤 했다. 그럴수록 은수는 더욱 ‘김 팀장’을 강조해서 불렀다.

“팀장님은 자리에 안 계세요?”

“어, 네. 잠시 외근 나가셨거든요. 근데 진짜 무슨 일이세요?”

“그냥, 놀러 한번 와 봤어요. 옛 고향도 그립고 해서.”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지나가면서 한 말이었지만 약삭빠른 이 대리는 굳이 그것을 꼬집었다.

“옛 고향이라니요, 너무 섭섭하게 말씀하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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