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속도위반 로맨스-112화 (112/128)

# 112

112. 헬로우 베이비 (3)

물론, 지금껏 은수를 키운 것이 누군가에게서 공치사를 듣기 위함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여자의 말에 뿌듯한 마음이 드는 것은 이 여사도 어쩔 수가 없었다. 하나 남은 유일한 자랑이었던 제 딸이 좋은 사람과 만나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를 얼마나 바라 왔던가. 가정환경이 불우했던 딸인 만큼, 남은 인생이라도 무탈하게 지내면 더 이상 여한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그녀의 눈앞에 있는 여인은 그것을 가능케 할 사람 같았다. 그것은 그녀가 이 모진 세상에서 몇십 년 동안을 홀로 고군분투하며 터득하게 된 감이었다.

적어도 은수를 괴롭게 하거나 슬프게 할 사람은 아닌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찌감치 현재에게서 보았던 성품이 그 엄마에게서도 비슷하게 묻어나고 있었다. 아마 은수도 그것을 느꼈을 터였다.

해서, 이 여사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그렇다면 저도 감사드려야죠. 현재 군처럼 훌륭한 청년이 저희 은수 짝이 된다는데.”

“…….”

“일이 이왕 이렇게 됐으니 나쁜 기억은 잊고, 둘이…… 아니, 셋이서 행복하게 잘 살기만을 바라고 있어요.”

셋이서 행복하게. 이제 막 태어날 아기까지 염두에 둔 말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내내 했던 생각 하나도 덧붙였다.

“사부인 얘기를 듣고 보니, 어쩌면 두 아이가 이리될 운명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

“이토록 비슷한 아이들끼리 만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유 여사 또한 가슴 깊이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에겐 제 짝이 있는 법. 모든 사실을 알고 난 뒤에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들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서로가 인연임을 알아보았는지도 모르겠다고. 운명이 그들을 맺어 주기 위해서, 이런 엄청난 일을 벌인 거였을지도 모른다는…….

“그나저나, 이제 슬슬 낳을 때가 되지 않았을까요?”

“그러게요. 시간은 충분히 준 것 같으니까 우리도 이제 그만 가 보지요.”

“예.”

얘기를 끝마친 두 여자가 사이좋게 일어났다. 그런데 주머니에 무심코 손을 찔러 넣던 유 여사가 생경한 감각에 흠칫 놀랐다.

“……뭐지?”

주머니 속에서 겉이 오톨도톨한 봉투 하나가 슥 잡힌 것이었다. 아. 그 감촉에 퍼뜩 깨달을 수 있었다. 은수의 일로 바쁜 나머지 미처 잊고 있었던 그것.

오늘 오후, 은수가 그녀에게 주었던 편지였다.

‘이참에 읽어 봐야겠다.’

꼭 지금 읽어야 할 필요는 없었지만,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결심한 유 여사가 앞서 가던 이 여사를 잠시 톡톡 쳤고, 그녀는 곧장 뒤를 돌아보았다.

“예?”

“저, 사부인. 먼저 가 보십시오.”

“왜요? 혹시 무슨 일 있으신가요?”

“아, 그런 건 아니고요. 혼자 할 게 좀 있어서……. 금방 따라갈게요.”

“아…… 예, 그럼 얼른 오세요.”

짧은 대화였지만 그새 믿음 같은 게 생겼는지 별 의심도 없었다. 대수롭지 않게 씩 웃은 이 여사가 그렇게 먼저 자리를 떴고, 유 여사는 자리에 남아 천천히 봉투를 개봉했다. 왠지 모르게 은수를 닮은 것 같은, 별 디자인도 없이 깔끔하고 예쁜 편지지였다.

[어머님께.]

필체 또한 편지지만큼이나 간결하고 단정했다. 그녀는 며느리가 또박또박, 한 자 한 자 정성 들여 쓴 활자 속으로 조금씩 빠져들었다.

* * *

[어머님, 안녕하세요. 저 은수예요. 갑작스레 웬 편지인가, 하고 놀라셨죠.]

한편, 그곳은 어느덧 전쟁터였다. 마침내 영영 오지 않을 것 같던 출산이 시작된 것이다.

은수는 옮겨 가게 된 분만실에서 한 번도 낸 적 없는 비명을 한껏 내지르고 있었다. 땀이 배어 나오는 것만 빼면 깨끗했던 얼굴 전체가 고통으로 일그러졌고, 머리는 이미 산발이었다.

[먼저, 자주 찾아뵙지도 못하고 이리 편지를 쓰는 것을 용서하셔요. 본의 아니게 며칠간 병원에 잠시 있는 바람에……. 실은 정말 많이 고민했어요. 어머님께 얘기는 드리고 싶은데, 어떤 방법이 가장 좋을까 하고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클래식한 방법이 가장 좋을 것 같았어요. 마음을 오롯이 전달하기에는 이 손 편지만 한 것이 없으니까요. 부디, 어머님께서 이 편지를 읽고 웃음 지으실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그건 아직 큰 바람일까요?]

“흐어어, 아악……!”

“산모님 힘 더 주세요. 잘하고 계세요, 조금만 더!”

“……후우, 후우. 하아…….”

조금이고 뭐고, 나는 이 이상 더 못 하겠다고!

그러나 그런 말을 내뱉을 정신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불타오르는 아래의 감각에만 열중해 있었다.

[오늘은 그간 못 다한 이야기들을 조금 들려 드리려고 해요. 맨 처음 뵈었던 그날, 어머니께서 제게 왜 이렇게 늦게 온 거냐고 말씀하셨죠. 그땐 죄송한 마음에 미처 대답해 드릴 수 없었는데, 지금은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무지막지한 아픔에 휩싸인 은수는 심호흡을 하다가도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럴 때마다 옆에 선 현재의 표정도 마치 제가 낳는 양,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이 변했다. 일회용 헤어 캡과 마스크 등으로 단단히 무장한 그는 안절부절못한 채, 제가 사랑하는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우스운 얘기처럼 들리실 수도 있지만…… 사실 저는 현재 씨와 결혼을 할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어요. 전 원래 비혼주의자였거든요. 아, 비혼주의자가 뭔지 아시려나. 요즘 막 늘어나고 있는 추센데, 결혼은 절대로 안 하겠다고 맹세한 사람 같은 거예요. 오해하지는 마세요. 현재 씨가 싫었던 건 절대 아니었어요. 싫고 좋고를 따질 일이 없었던 게, 그때까지만 해도 현재 씬 그저 제 직장 후배에 불과했었으니까요. 아이가 생겼어도, 제 신념 자체가 그랬기 때문에 결혼을 하고 싶단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어요. 제가 비혼을 결심하게 된 건, 저와 엄마를 버린 제 아버지 때문이었거든요. 누군가와 제 인생을 함께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이상한 일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당초 미혼모가 되어 아이를 혼자 키울 생각이었답니다.]

다행히, 원래의 계획대로 무통 주사를 맞기는 했다. 아마도 자궁 문이 3~4센티미터 정도 열렸을 무렵이었다. 주사발도 굉장히 잘 들었는지, 그녀는 그때까지만 해도 별 아픔을 느끼지 못했었다. 진짜 셋도 가능하겠는데. 건방지게 감히 그런 생각까지 잠시 했다.

하지만 문제는 무통을 끄고 난 후부터였다. 아프지 않아 힘을 줄 필요를 못 느꼈기 때문일까, 아니면 힘이 다 빠진 나머지 여력이 안 돼서 그런 거였을까. 하여간 은수는 좀처럼 출산에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자궁 문 열리는 것도 여전히 지지부진한 상태였고.

보다 못한 의료진은 결국 무통을 끄기를 권했고, 얼른 이 지긋지긋한 것을 끝내고 싶었던 은수는 당연히 동의했다. 그러나 은수는 잠시 뒤, 제 선택을 곧바로 후회했다. 본 경기는 바로 그때부터였으니까.

생전 느껴 본 적 없는 엄청난 고통이 몰려들기 시작하더니, 진척이 놀라울 정도로 빨라졌다. 단숨에 자궁 문이 열려 분만실로 이동했다. 조산인 탓에 아기가 작아 낳기가 조금은 더 수월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은 당연히 오산이었다. 조산이었지만 ‘초산’이기도 하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픈 와중에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결혼도 안 하려던 내가 진짜 출산을 하고 있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뭔가 마려운 느낌, 콧구멍으로 수박을 낳는 듯한 느낌 등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도 너무 이상했다.

[이쯤 되면 얘는 이제 와서 왜 이런 이야기를 하나, 싶으실지도 모르겠어요. 그렇죠. 어쨌든 저는 지금 현재 씨와 결혼하겠다고 이러고 있으니까요. ^^; 어머님 입장에선 어이가 없으실 수도 있을 거예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그저 이 모든 게 다 현재 씨의 노력 덕분이라는 거예요. 그 사람은 제게 정말 한결같은 사람이었어요. 현재 씨한테 아이를 혼자 키우고 싶단 제 생각을 말했을 때, 엄청 놀라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아이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지키고 싶다더군요. 제가 아무리 싫다고 해도 그 사람은 아이 아빠 노릇을 다해 줬고, 생각 못 했던 부분까지 하나하나 세심하게 신경 써 주었어요. 결혼하기 싫다는 제 입장도 누구보다 잘 이해해 줬구요. 임신을 하면 원래 속상한 일도 많고, 힘든 일도 많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이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동안, 저는 덕분에 참 많이 행복했어요. 깨닫지도 못한 새에, 예전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을 행복이 저한테 오고 있었던 거예요.]

다만 이런 게 출산이라면 다신 겪고 싶지 않았다. 은수는 사람들이 엄마들더러 대단하다고 하는 이유를 그제야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건 드라마나 영화에서처럼 몇 번만 힘주면 무조건 성공하는, 그런 차원의 것이 아니었다. 힘닿으면 몇 명씩 낳아 보고 싶은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아니, 이 아픈 걸 어떻게 몇 번씩 되풀이해? 미친 거지, 그건!

“산모님 조금만 힘내세요, 거의 다 왔어요. 머리 보여요!”

[어머님. 전, 이제 그 행복에 이미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것 같아요. 그 사람이 없는 제 인생이 상상이 안 돼요. 현재 씨도 저처럼 그랬으면 좋겠는데, 잘 모르겠네요. 그 사람은 어떨지……. 하하.

염치없는 말인 건 알고 있습니다만, 어머님께서 현재 씨를 제게 허락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현재 씨가 훌륭하게 자란 건 모두 다 어머님의 영향일 거라 생각해요. 어머님께서 너무 좋은 분이셨기에, 그토록 훌륭하게 아들을 키워 낼 수 있으셨던 걸 테니까요.

이런 말, 오글거려서 정말 싫어하는데…… 현재 씨를 낳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진심이에요.]

바로 그때,

“아이 나옵니다!”

“으아아앙! 으아앙!”

사내아이다운 우렁찬 울음소리가 분만실 안을 울렸다. 초산에다 조산이라 혹시나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었던 부모의 걱정을 말끔히 지워 주는, 반가운 신호였다.

“두 시 37분, 건강한 아드님 출산하셨어요. 축하드려요.”

[잘할게요. 이 세상 어느 시어머니가 부럽지 않으시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현재 씨와 천년만년 잘 살겠습니다.]

한순간 힘이 쭉 빠진 은수는 잔뜩 풀린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곧이어 그녀의 가슴 위로 깃털 같은 무게의 아기가 얹혔다. 감정이 끓어올랐지만 현실 감각이 없었다.

“아버님, 탯줄 잘라 주시고요.”

그건 옆에 서 있던 현재도 마찬가지였다. 어정쩡하게 가위를 손에 든 그는 의료진의 지시에 따라 탯줄을 잘랐다.

그들을 잇고 있던 말캉한 연결 고리가 끊기는 순간, 아기는 비로소 완전히 은수에게로 왔다.

“으애앵! 으앙!”

“……별아.”

어찌나 소리를 질렀는지 때 아닌 쉰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외계인처럼 쭈글쭈글해 가지고는 앵앵대는 모습이 평소 보던 아기들의 모습과는 달랐지만, 그제야 조금 실감이 났다.

“……별아, 엄마야. 엄마…….”

[부탁드려요, 어머니. 저희, 예쁘게 봐주세요.]

내가 정말 아이를 낳았구나. 저 남자와의 결실을…….

은수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눈꼬리를 타고 흐른 눈물은 관자놀이를 통해 스며들어 머리카락을 축축하게 했다.

“고생했어요. 정말 고생했어요.”

그의 얼굴에도 어느새 눈물이 번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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