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
111. 헬로우 베이비 (2)
“엄마는요?”
“나도 곧 들어갈게. 너 먼저 들어가.”
지 아내 걱정에 몸이 달아 있는 게 눈에 뻔히 보이는데 할 말도 없으면서 더 이상 붙잡고 있을 수는 없었다.
“네. 그럼 먼저 들어가 볼게요.”
그러나 유 여사의 격려 하나만으로 한순간 모든 근심 걱정을 내려놓게 된 것 같은 현재는 홀가분하게 미소 짓더니 다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유 여사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여기까지 왔으니 한 시름 놓았다. 이제 남은 것은 은수의 고난과 인내뿐이었다.
유 여사는 제 여자를 챙긴답시고 저러는 아들이 낯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기특했다.
‘그 조그맣던 게 언제 저리 커서 한 아이의 아빠 노릇을 하고 있을까.’
처음에는 물론 화가 났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통방통한 일이었다. 외모는 제 아빠를 완전히 빼다 박은 놈이 아내와 아이를 대하는 태도는 완전히 정반대였다. 비록 나 혼자 키운 아들이지만 정말 잘 컸구나, 괜히 그런 사색도 들고, 이제는 심지어 살짝 울컥하는 마음까지 올라왔다. 새 생명의 탄생은 사람을 퍽 약해지게 만들고 있었다.
“……어휴, 주책이야.”
눈물이 핑 도는 눈시울을 슥슥 닦아 내며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머지않아 곧 만나게 될 손주 녀석을 상상하자 그녀는 제 가슴이 조금씩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비록 아닌 척했지만, 내심 아들 내외가 잉태했다는 그 녀석의 모습이 무척 고대되는 것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너무 고생하지 말고 순산이나 하면 좋으련만. 어찌 되려나.
* * *
“으…….”
아니나 다를까, 유 여사의 말처럼 은수에게는 서서히 진짜 진통이 찾아오고 있었다. 관장에, 제모에, 내진까지. 그런 것쯤이야 그럭저럭 견딜 수 있었지만, 조금씩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를 괴롭히는 건 언제 시작될지 모를, 본격적인 산고에 대한 공포감이었다.
“산모님, 무통 주사 맞으실 건가요?”
“……음.”
그래도 아직까지는 다행히 좀 과한 생리통 정도에 그치는 수준이다. 이 정도라면 참을 만한데. 간호사의 질문에 잠시 생각하던 은수가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진짜 진짜 못 참겠으면, 그때 맞아도 되나요……?”
그러나 간호사는 아주 익숙한 질문인 듯 빙그레 웃었다.
“그럼 맞으신다는 거네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산모님들은 다 맞으시더라고요.”
“……아.”
간단히 말해, 지금 이 고통은 고작 전초전에 불과하다는 얘기가 아닌가. 은수는 나직하게 탄식을 내뱉었다.
하기야, 아이를 낳는 고통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던데. 고작 이 정도로 끝날 리가 없었다. 이 정도면 셋이라도 거뜬히 낳겠네.
색색거리면서도 짜증스런 얼굴로 입술을 깨무는 은수를 보며, 간호사는 차분한 얼굴로 속삭였다.
“일단 좀 지켜보고, 자궁 문 좀 열리면 곧바로 준비해 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은수가 할 말을 대신한 그가 침대 곁에 다시 앉았다.
“힘들죠.”
“네. 근데 아직 죽을 정돈 아니에요.”
기진맥진하는 신세면서도 말투 하나만은 예의 그녀다워서, 현재가 설핏 웃었다.
“그런 소리 하면 안 돼요. 은수 씨 죽으면 난 어떻게 살라고요.”
……아, 그런가. 하긴, 죽는단 소리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니지.
“……알았어요.”
대답을 마친 은수의 눈길이 문득 병실을 훑었다. 그러고 보니 자리에 있어야 할 두 여자가 온데간데없었다.
“그런데, 어머님은요?”
그녀의 질문에 현재도 병실을 두리번거리고는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아까부터 두 분 다 안 보이시네요. 어디 가셨나.”
“…….”
“아참, 그건 그렇고, 왜 그랬어요?”
엥, 다짜고짜 왜 그랬냐니?
앓는 소리를 내던 은수가 뜻을 알 수 없는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뭘요?”
“우리 집에 왜 혼자 갔냐고요. 가려면 나랑 같이 가지.”
약간 서운한 듯한 목소리였다.
아아, 그거. 난 또 뭐라고. 입가에 희미한 웃음기를 머금은 그녀가 변명했다.
“그랬다가 괜히 역효과만 날까 봐요. 고부간에 중요한 할 말이 있었거든요. 현재 씨는 몰라도 되는 얘기.”
“그럼 그렇다고 미리 설명해 주면 되죠. 뭐든 숨기지 않겠다더니, 은수 씨 혼나야겠네.”
“쳇, 설명한다고 현재 씨가 그런 거 들을 사람이에요? 그리고, 혼은 지금도 충분히 나고 있어요.”
그녀의 눈길이 우뚝 솟은 제 배로 향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안쓰러워서, 현재는 손을 뻗어 땀으로 촉촉해진 여자의 이마를 보듬었다.
“진짜 내가 대신 낳고 싶다. 그때도 진심이었는데, 지금은 진짜 간절해요.”
그러나 은수는 고개를 슬슬 저었다. 무척 진지한 얼굴로.
“괜찮아요, 나 할 수 있어요. 우리 별인 효자라서 고생 많이 안 시키고 숨풍 나올 거예요. 감이 지금 딱 오는 것 같아.”
“정말요?”
“그럼요.”
이제 ‘진짜 엄마’가 되기 직전이라 그런 것일까. 은수는 신기할 정도로 의연해지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이미 오래전부터 어른이었건만, 이제야 비로소 어른으로 거듭나는 느낌이었다.
그런 기분은 현재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침대 위에 놓인 그녀의 손 위로 현재의 손이 포개어졌다. 토닥거리는 손길이 마치 아기를 어르는 양 부드러웠다.
* * *
“저.”
“……?”
“여기.”
그 시각, 따끈한 김이 피어오르는 자판기 커피 잔이 유 여사의 앞으로 디밀어졌다. 그 손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이 여사였다.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가 흠칫 놀라며 컵을 받아 들었다.
“아, 예. 감사합니다.”
몇 시간 뒤 할머니가 될 두 사람은 함께 병원 휴게실에 나와 있었다. 출산을 앞두고 부부가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가지라고, 일부러 자리를 비켜 준 그들의 배려였다.
늦은 시각이라 그런지 휴게실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작게 틀어진 TV만이 유일하게 소음을 내고 있는 존재였다. 나이답지 않게 곱기만 한 중년의 두 여자는 커피를 손에 쥔 채 묵묵히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
“…….”
어색하기가 짝이 없는 상황. 아직 상견례도 가지지 못한 채로 이렇게 나란히 앉아 손자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두 여자 모두에게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상황이 급박했던 탓에, 인사를 제외하고는 아직까지 말 한마디 붙이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도 이제는…… 괜찮겠지.
달콤 쌉싸름한 커피를 입 안으로 삼키며 이 여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많이…… 놀라셨지요. 하필이면 거기서 그럴 게 뭔지…….”
그녀를 따라 커피를 홀짝이던 유 여사가 퍼뜩 고개를 돌렸다. 사실은 유 여사에게도 양수가 먼저 터져 고생을 한 경험이 있었다.
그때가 아마, 맨 처음 현수를 낳을 때였지. 양수가 모자라니 얼른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었던 의사의 얼굴이 이 나이 먹고까지 떠오르는 걸 보면, 그때 나도 오늘의 은수만큼이나 당황하고 두려웠었던 모양이야. 유 여사는 백짓장처럼 하얘져 있던 은수의 얼굴이 아직도 선연했다.
“……아닙니다. 양수야 그렇게 터지는 일이 워낙 흔하니…….”
“…….”
“저희 집에 오는 걸 은수 양이 말씀 안 드렸다고 하던데, 사부인께서야말로 많이 놀라셨겠습니다.”
은수의 앞에서 이어 또 튀어나와 버린 ‘사부인’이라는 호칭에 이 여사도 놀란 눈치였다. 유 여사도 제가 무의식적으로 자꾸만 그 호칭을 쓴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물론 이렇게 부르기엔 아직 좀 이른 감은 있었지만, 할 수 없었다. 별다르게 부를 수 있는 호칭이 없는 것을.
“……저, 저야 뭐…… 그냥, 오늘 퇴원한 애가 또 병원을 간다고 하니까…… 거기에 놀랐지요.”
“…….”
“아무튼…….”
“…….”
“……사부인 덕에 무사했으니 다행입니다. 고맙습니다.”
“……뭘요. 당연한 일인데요.”
그러고 나니 또 한 번 정적이 흘렀다. 이제 무슨 얘기를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어차피 살면서 사돈을 만날 일이 잘 없기는 하지만, 이제 진정 ‘가족’이란 이름으로 한데 묶일 사이가 될 터. 고로, 대충 어떤 사람들인지는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윽고 이 여사의 입술이 달싹였다.
“저, 그런데…….”
“…….”
“혹시 바깥어른께서는…….”
어디 계시냐고. 그녀는 그렇게 물을 작정이었다. 시어머니도 시어머니지만, 며느리 사랑은 또 시아버지라고 했으니까. 안 그래도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 그게 궁금하던 차였다.
그러나…… ‘바깥어른’이라는 말에 유 여사의 눈은 대번 커다래졌다.
아니 설마, 이쪽은 아직 모르고 있는 걸까?
“……어, 은수 양이, 말씀드리지 않던가요?”
“…….”
“애들 아빠와는…… 현재가 어렸을 적에, 이혼……했습니다.”
“……아.”
그 말에 이 여사도 덩달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비록 엄밀히 따지면 제 쪽은 이혼이 아니고 사별이었지만, 현재 쪽도 그와 비슷한 사정일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은수 딴에는 어차피 알게 될 일, 굳이 말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겠지만 이 여사는 졸지에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이, 이 기집애. 딴 건 다 말해 놓고 이 중요한 걸 말 안 해주면 어떡해!
“죄송합니다. 은수도 그렇고, 현재 군도 말을 안 해서 미처 몰랐어요.”
“……아마, 자연히 아시게 될 일이라 생각해서 그런 거겠지요.”
유 여사가 씁쓸한 목소리로 그들을 옹호하며 이 여사를 쳐다보았다.
맨 처음 만나던 날, 사정을 몰랐던 그녀도 은수에게 이런 질문을 했었더랬다. 처지가 비슷하단 현재의 말에, 그 작은 얼굴에 떠올랐던 표정이 이와 비슷했던 것 같은데. 이제 보니 엄마와 딸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만큼 흡사한 외모였다. 이목구비 자체가 비슷하다기보다는…… 풍기는 분위기가 닮았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그런가, 초면의 여자를 마주하며 그녀는 편치 않았던 마음이 조금씩 풀어지고 있었다.
“저는 애들에게 들어서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사부인께서도 은수 양을 혼자 키우셨다고요.”
“……아, 예. 그럼 사부인도…….”
“네. 현재 위에도 형이 있어서, 저는 아들 둘을 키웠지요.”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혼자서.”
“이제는 기억도 잘 나지 않네요……, 하도 오래전 일이라.”
두 여자의 넋두리가 천천히 이어졌다. 얼떨결에 옛 이야기를 하다 보니 다소 우중충한 분위기가 된 것 같아, 유 여사는 부러 지그시 웃었다.
“그래도 이제 며느리가 생길 테니까…… 딸 못 키워 본 설움은 좀 가실 것 같아요.”
“…….”
“매사에 딸처럼 대해 주리란 약속은 못 드리지만, 그래도 서운하지 않게 잘해 주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시어머니로서 아직 좀 서툴더라도…… 부디 이해해 주세요.”
두 여자의 눈빛이 따스하게 얽혔다.
“곱게 키우신 딸을 저희 아들에게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