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
110. 헬로우 베이비 (1)
유 여사가 자리에서 다급하게 일어섰다. 무슨 일인지 단번에 직감한 탓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어느새 망망대해처럼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양수 터진 거야, 설마?”
“…….”
그러나 그런 유 여사와 달리, 당사자인 은수는 일순 패닉에 빠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은 오늘 아침에 퇴원을 한 몸이 아니었던가.
유 여사의 물음에 은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 그럴 리가요.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분명히…….”
아무 이상이 없었는데. 그새 양수가 터졌다니! 그건 곧 아이가 나온다는 말이잖아.
갑작스레 닥친 상황에 현실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두려움과 무서움을 견디지 못하고 은수는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며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하늘도 무심하시지. 하필이면 왜 여기서 이러냐고. 내가 어떤 맘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하지만 하늘을 원망해 봤자, 물은 이미 엎질러진 뒤였다. 즉, 지금은 그런 말이나 생각 따위가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타이밍이라는 것.
유 여사가 거듭 침착하게 물었다.
“자세히 좀 말해 봐. 느낌이 어떤데? 응?”
말 몇 마디가 은수에게서 더듬더듬 튀어나왔다.
“……배, 배가 싸늘하고…… 방금은, 뭔가 왈칵 쏟아지는…… 느낌이었는데…….”
이럴 수가. 속으로 약간 긴가민가하고 있던 유 여사의 얼굴이 은수의 설명을 듣곤 곧장 확신으로 변했다.
“맞네! 양수 터진 거야, 그거!”
하지만 정작 은수는 아직 그 판단에 자신이 없었다.
“호, 혹시…… 다른 건 아닐까요?”
소변이라거나…… 혹은 분비물이라거나. 아무래도 양수가 터졌다고 하기엔 너무 이른 시점이니까.
사실, 일단 조산만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다 자라지 못한 아이가 너무 일찍 세상에 나오게 되면 위험한 상황에 놓일 확률이 높아진다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었으므로.
그러나 유 여사는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저들이 당면한 현실을 인정하기로 한 유 여사는 멍청한 소리를 하고 있는 예비 며느리를 다그쳤다.
“아이, 이거랑 그런 거랑 같아?! 임산부가 돼선 그런 것도 구분 못 하면 어떡해!”
급한 와중에도 은수는 살짝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오히려 이렇게 맞받아치고 싶었다.
임신도 처음이고, 모든 게 다 처음인데. 그런 제가 대체 뭘 알겠습니까, 어머니!
“가만 있자, 키를 어디 놔뒀더라.”
은수가 속으로 뭐라 부르짖거나 말거나, 유 여사는 다급히 방에 들어가 차키를 챙겨 나왔다.
“빨리 병원 가자! 채비해.”
“…….”
그러나 서두르는 그녀를 보는 은수는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어머님, 운전하실 줄 아세요?”
아니, 평소엔 똑똑하고 재빠르다는 애가 지금은 어째서 이럴까. 속으로 혀를 차던 유 여사가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그럼, 내가 나이가 몇인데 운전도 못하겠니?”
“……아.”
그제야 이해한 은수가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제 엄마의 경우를 생각한 탓이었다.
이건 모두 차는커녕 자전거도 못 타는 엄마만 보고 자랐기 때문이라고요. 은수가 속으로 푸념했다.
정말 단순한 사고 회로로 인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잠시 생각하던 유 여사는 은수가 제 운전 실력을 못 미더워하는 모양이라고 해석했다.
아무래도 나이가 나이이니 불안하겠지.
기분이 조금 상하긴 했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은 맘에 그녀는 조곤조곤 일러 주었다.
“베스트 드라이버까진 못 돼도 너 하난 안전하게 데려다줄 수 있으니까 걱정 마.”
“……네.”
“가는 동안 전화해서 현재 불러. 혹시나 진짜 양수가 터진 거면 오늘 내일 안엔 애가 나와야 되는 거니까. 그리고…….”
출산 유경험자답게 능숙한 솜씨로 말을 이어 나가던 그녀는 돌연 특정 대목에서 숨을 한 번 들이켰다.
그에 이상함을 느낀 은수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자 이내 그녀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사부인한테도 얼른 연락드리고.”
은수는 다급한 상황에서 맞닥뜨린 생경한 단어에 깜짝 놀랐다.
사부인. 며느리의 친정어머니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 말인즉슨…….
“……네?”
저를 며느리로 인정한다는 뜻이 아닌가. 그것을 깨달은 은수의 머릿속이 팽이처럼 팽팽 돌아갔다.
그러나 유 여사는 은수에게 생각할 시간을 줄 여유가 없었다.
“출산 가방 가져와야 될 거 아니야. 준비물은 다 챙겨 놨지?”
“…….”
“안 챙겨 놨어?!”
맘이 급한 나머지 다소 언성이 높아진 시어머니의 목소리에 은수는 금세 깨갱했다.
“……아, 아뇨! 챙겨 놨습니다.”
“자꾸 그렇게 멀뚱히 서 있기만 할 거야? 빨리 가야지!”
“……네, 네…….”
어물쩍 대답하는 은수를 한참 마뜩찮은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던 유 여사가 이내 작정하고 그녀에게로 바짝 다가섰다.
“자, 잡아 줄 테니까 조심조심 걸어 봐.”
결국, 은수는 유 여사의 부축을 받아 조심스럽게 그곳을 나설 수 있었다. 그러는 중에도 새삼 기쁨이 솟아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사부인……이라고?’
그 단어가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상황이 걱정되면서도 입가에 자꾸만 웃음이 걸리는 것이……. 요상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감정 기복에 스스로 놀라울 지경이었다.
* * *
그로부터 몇 시간 뒤.
현재는 눈썹이 휘날릴세라 쉴 새 없이 병원 안을 누비고 있었다. 가히 우사인 볼트급으로 달렸다 해도 될 만큼, 제가 생각해도 그의 27년 인생 중에 가장 빠른 달리기였다.
그렇게 얼마쯤 달렸을까,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그는 앞뒤 잴 것 없이 문부터 벌컥 열어젖혔다.
“은수 씨!”
침대에 맥없이 누워 있던 은수가 그의 눈에 아프게 박혀들었다. 고개를 들어 누구인지를 확인한 은수의 얼굴에 살짝 밝은 기가 어렸다.
“현재 씨…….”
“갑자기 이게 무슨 일……. 어?”
아무것도 안중에 오직 은수에게로 돌진하려던 그가 문득 멈칫했다.
“…….”
너무나 익숙한 시선, 익숙한 향기.
그가 전혀 생각지 못한 인물이 병실에 이미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왔구나.”
은수를 걱정하느라 몇 시간 만에 얼굴이 까맣게 타 버린 유 여사였다.
제 엄마의 존재를 확인한 현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엄마가 어떻게 여길…….”
그렇게 물으려던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런 것쯤이야 나중에 얼마든지 물어볼 수 있는 일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은수의 안위였다.
그의 경황없는 눈길이 금세 다시 은수를 찾았다.
“은수 씨, 괜찮아요?”
아침에 퇴원한 것을 분명 확인했건만, 다시 병원으로 간다는 전화를 받고 얼마나 놀랐었는지. 거기다 양수가 터졌다는 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뻔했던 그였다.
“……네, 괜찮아요.”
그런 그를 알기에 은수는 애써 웃어 보였다.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시어머니로부터 며느리로 인정받았다는 기쁨은 그때 잠시뿐이었고, 조산을 할 것이란 생각에 아까부터 지금까지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제 막 퇴근하고 돌아온 그를 불안하게 할 순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불안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주문을 외우는 것이기도 했다.
괜찮을 거야. 이제껏 위기는 여러 번 있었지만, 늘 잘 이겨 냈었으니까. 이번에도 그럴 거야.
그녀의 마음속엔 어느새 이상할 정도로 맹목적인 믿음이 싹터 있었다.
현재의 큼지막한 손이 링거 바늘이 꽂혀 있는 그녀의 마른 손을 감싸 쥐었다.
“이제 안심해요, 나 왔으니까.”
“……네, 그럴게요.”
한편, 각자의 아들과 딸이 눈물겹게 상봉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유 여사와 이 여사는 속으로 살짝 한숨을 쉬었다. 저런 것들을 어찌 떼놓을 수 있었을까. 아이가 없었더라도 절대 불가능했을 일 같았다.
“……현재, 잠깐 이리 나와 봐.”
유 여사의 목소리였다.
일단 은수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현재는 그녀의 부름에 군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은수 씬 갑자기 왜 이러고, 엄만 또 왜 여기…….”
문득 그녀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왜, 내가 오면 안 될 곳이니?”
아들의 말뜻이 뭔지 뻔히 알면서도 괜히 말꼬리를 잡고 싶어진 것이었다.
그녀의 예상대로 그는 일순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아, 아뇨.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엄마 앞에서 도토리처럼 작아져 버린 둘째 아들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유 여사가 먼저 포문을 열었다.
“오늘, 은수가 우리 집으로 찾아왔었어.”
“……예?”
‘어떻게요?’라고 덧붙이려던 그는 이내 그만두었다. 순간적으로 뭔가 짚이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공교롭게 우리 집에서 양수가 터졌어. 아침까지만 해도 괜찮았다더니, 퇴원한 뒤로 조금씩 배가 싸했다더니 결국엔…….”
“…….”
“은수가 애 낳는 게 처음이라 잘 몰라서 그랬나 본데, 그게 가진통이었던 모양이야.”
“……그럼, 엄마가 은수 씨 여기까지 데려오신 거예요?”
“그래.”
제가 회사에 있는 동안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 줄이야. 현재가 입술을 딱 벌렸다.
“……절 부르시죠. 만사 제치고 당장 달려왔을 텐데.”
쯧쯧. 그녀는 제 아들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차암 태평한 소리 한다. 이렇게 뭘 몰라요.
“너를 부르기엔 상황이 너무 급했어. 내가 운전을 못 하는 것도 아닌데 널 왜 부르니. 그새 애 잡을 일 있어?”
“…….”
“일단 의사 말론, 34주는 넘겼기 때문에 아마 자가 호흡이 가능할 거라더라. 그래도 미숙아는 미숙아라서, 인큐베이터에 2주 정도 있어야 할 거래.”
아기 얘기로 접어들자 그녀의 목소리가 훨씬 누그러져 있었다. 침착하게 말하고는 있지만 그녀도 내심 손자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전과는 뭔가 달라진 것 같은 엄마의 반응에, 현재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유 여사는 그런 아들을 향해 짐짓 미소 짓기만 했다.
“은수가 많이 놀랐을 거야. 이제 슬슬 진통도 와서 힘들 텐데, 네가 옆에서 많이 달래 줘. 안심시켜 주고.”
“…….”
“나이는 어려도 너는 엄연한 아빠잖니.”
“……네.”
당부하는 목소리가 눈에 띄게 온화했다. 오늘 두 여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찌 됐든 은수가 엄마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현재는 그 사실에 새삼 북받쳐서 엄마에게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감사해요, 엄마.”
상황이 아무리 이리됐다 해도, 아들에게 이런 인사를 받는 건 익숙하지가 않았다.
쑥스러워진 그녀는 그저 어깨를 으쓱거렸다.
“……감사는 무슨. 얼른 다시 들어가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