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
109. 마지막 난코스 (2)
일자로 다문 입술 새로 얕은 한숨이 새었다. 표정을 푼 은수가 나직하게 말했다.
“……나 그날 안 돼.”
“뭐야, 왜 안 돼?”
“가 볼 데가 있어.”
“다음 날 가면 되잖아.”
“안 돼. 꼭 그날 가야 돼.”
갑자기 이건 또 무슨 고집일까. 답답해진 윤정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왜 그날 아니면 안 된다는 거야? 대체 어딜 가길래?”
그러나 은수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윤정의 궁금함을 해소시키기엔 여전히 턱없이 모자란 것이었다.
“높으신 분 만나러 가야 되거든.”
“……높으신 분? 뭐, 대통령이라도 만나러 가냐?”
“…….”
제가 말해 놓고도 우스운지 윤정이 낄낄거렸다. 하지만 우스갯소리임에도, 은수는 그것이 우스갯소리처럼 들리지가 않았다. 글쎄, 어쩌면 나한텐 대통령보다도 어려운 분이지.
시베리아 벌판처럼 서늘하던 그 얼굴을 떠올리자 굳게 먹었던 다짐이 자꾸만 약해지려 했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아, 누군데! 빨리 말 안 하면 나 집에 간다.”
그래도 가야 한다, 무조건. 적어도 별이가 친할머니 품에 안길 순 있어야 하지 않은가.
낄낄대다가 금세 뿔이 난 윤정을 향해, 은수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현재 씨 어머님한테 가 보려고.”
* * *
경쾌한 초인종 소리가 집 안을 울렸다. 설거지를 하던 유 여사는 그릇의 거품기를 씻어 내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제 막 저녁으로 접어들려는 오후였다.
이 시간에 누가 올 리가 없는데. 혹시 택배인가?
“현수가 시켰나…….”
거듭되는 초인종 소리는 어쩐지 소심한 면이 있었다. 고무장갑을 개수대에 벗어 놓은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인터폰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누구세……?”
그런데 화상에 떠 있는 인물을 확인한 그녀의 말끝이 순간 희미해졌다. 아니, 저건…….
[어머니, 저예요, 은수.]
……얘가 어쩐 일이지?
퍽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수화기를 제자리에 다시 돌려놓고 현관으로 가 문을 열어 주는 유 여사는 당황스러운 얼굴이었다.
“안녕하세요. 그간 별고 없으셨죠?”
“……아니, 아가씨가 여긴 어떻게…….”
엄밀히 따지자면 이곳에 있어야 할 아이가 아니었다. 현재는 분명 이 애가 입원 중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니면 그새 퇴원을 한 건가. 아니, 그보다 얘가 여기를 대체 어떻게 알고 왔을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똘망한 눈망울과 눈을 맞추는 짧은 시간 동안, 유 여사는 급격히 혼란스러워진 머릿속을 정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반면 만면에 미소를 띤 은수는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안쪽을 가리켰다.
“저, 우선……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 드려도 될까요?”
“어?”
그제야 유 여사는 정신이 들었다. 하마터면 임신한 사람을 밖에 오래 세워 둘 뻔했네.
“어, 어. 얼른 들어와.”
유 여사가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런데 그 사이를 냉큼 비집고 들어온 은수의 손에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그건…….”
“아, 이거요?”
그제야 제 손에 들린 봉투를 들어 보인 은수가 넉살좋게 씩 웃었다.
“현재 씨한테서 들었는데, 어머니가 카스텔라를 좋아하신다고 해서요. 댁에 처음 찾아뵙는 건데 빈손으로 오긴 좀 그래서…… 별거 아니지만 사 와 봤어요.”
“……뭘 이런 것까지…….”
은수에게서 봉투를 받아 들고 그것을 힐끔 들여다본 유 여사는 난감해졌다. 고급스럽게 포장되어 있는 카스텔라가 무척 먹음직스러울 것 같았지만, 지금 이 시점에는 카스텔라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쨌든 은수를 거실로 안내한 유 여사는 그나마 얘기하기 편할 것 같은 식탁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여기 앉아요.”
“네, 감사합니다.”
그래도 손님인데 뭘 줄까 하다, 되는 대로 우유라도 따라 앞으로 놓아 주었다. 은수는 그것을 감사히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유 여사만큼이나 은수도 긴장한 얼굴이었다.
두 사람 사이엔 잠시 적막이 흘렀다. 그러다, 은수를 힐끔 쳐다본 유 여사가 먼저 이야기의 물꼬를 텄다.
“입원했었다면서. 언제 퇴원한 거야.”
“아, 알고 계셨구나. 현재 씨가 말씀드린 줄 몰랐어요.”
“…….”
“……오늘 아침이요.”
“오늘 아침?”
말갛게 대답하는 은수를 보며 유 여사는 경악했다. 지금 저 표정을, 누가 갓 퇴원한 환자의 얼굴이라고 생각할까.
“아니, 그럼 퇴원하고 여기 제일 먼저 온 거야? 몸도 아직 성치 않으면서?”
혹시, 내가 퇴원하자마자 이곳으로 직행했다는 게 부담스러우신 건가.
은수는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몸은 이제 정말 괜찮아졌고, 집에도 다녀온 길이에요. 제가 오늘 여기 온 건 그냥…….”
“…….”
“말씀드릴 것도 있구…… 드릴 것도 좀 있고 해서…….”
병원에 있을 때부터 조바심이 났었다. 이렇게 감감 무소식으로 지내다가 감정이 더 틀어지시면 어떡하나. 혹시 사정을 모르고 찾아오지 않는 것을 서운해하시면 어떡하나……. 퇴원을 하자마자 여기로 올 생각을 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비록 별다른 연락을 취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마음은 늘 그녀를 향해 있었다는 걸 보여 주고픈 맘. 시간이 지체될수록 효과는 점점 떨어질 테니 오늘이 제격이었다.
“현재 씨는 제가 여기 온 줄 전혀 모르고 있어요. 사실, 저희 엄마한테도 얘기 안 하고 온 거구요.”
“……그럼 집 주소는 어떻게 알고.”
“…….”
“혹시, 이전에 여기 와 본 거야?”
유 여사가 약간 날카롭게 물었다. 혹 저도 모르는 새, 아들이 여자를 여기까지 끌어들였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므로.
하지만 은수는 순수하게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뇨. 현재 씨한테 물어봤어요.”
“아…… 그래.”
사실 엄밀히 말하면 옳은 대답은 아니었다. 그에게서 얻어낸 건 맞지만 물어본 건 아니었으니까. 처음엔 그럴 생각이었지만 예상치 못하게 그럴 필요성이 사라졌었다. 그가 병원에 지갑을 놔두고 갈 줄이야.
은수는 무심코 들여다본 그의 지갑 속 신분증에서 정확한 주소를 찾아냈고, 이게 웬 떡이야 하며 제 폰에 그대로 메모했다. 그렇잖아도 어머니를 찾아뵙겠단 말을 하면 분명 같이 가자고 할 터였기에 어떡해야 하나 고민했었는데, 결과적으로 그 덕분에 아주 평안하게, 무사히 이곳에 올 수 있게 된 것이다.
“지난번에 뵈었던 이후로 계속 마음이 불편했어요. 아무래도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사과도 못 드린 게 맘에 걸렸었나 봐요.”
“…….”
“죄송합니다. 심려 끼쳐 드려서 정말로 죄송해요.”
“…….”
은수의 진실한 눈이 유 여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현재 씨에게 들으셨다면 아시겠지만, 아마도 아기가 좀 빨리 나올 것 같아요. 얼마 남지 않은 일이라 생각하니까 맘이 더 조급해지더라구요. 아기한테 할머니가 어떤 분인지 보여 주고 싶었고, 어머님께도 아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여 드리고 싶었는데…… 이대로라면 그럴 면목이 없을 것 같았어요.”
“…….”
“그래서, 제 나름대로 생각해 봤는데요…….”
은수의 말이 그대로 끊겼다. 조용히 듣고 있던 유 여사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그 상태로 잠시 머뭇거리던 은수는 챙겨 온 가방 안에서 아이보리 빛이 나는, 얄팍한 종이봉투 하나를 꺼냈다. 그러곤 그것을 유 여사에게 건넸다.
“……이게…… 뭐야?”
은수의 얼굴에 약간 부끄러운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글재주는 별로 없지만, 한번 써 봤어요. 제가 어머님께 드리는 편지예요.”
“…….”
“물론 이런 것만으로 어머님 화가 풀리실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아요. 그래도 조금이나마 제 마음을 알아주셨으면 하는 생각에서…….”
유 여사의 입술이 약간 벌어졌다. 이건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애도 가졌겠다, 그냥 뻗대다가 지들끼리 결혼하고 차후 천천히 제 마음을 돌려놓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잖아도 정신없었을 와중에 이렇게까지 해 가며 제 마음을 우선적으로 얻으려 할 줄은…….
편지 봉투를 내려다보는 유 여사의 눈빛이 흐려졌다. 아직 편지를 읽어 보지도 않았건만 약간, 뭉클했다.
하지만 초조했던 은수는 그 눈빛을 부정적인 것으로 판단하고 성마르게 덧붙였다.
“지금 꼭 안 읽으셔도 돼요. 나중에, 저 간 다음에 천천히 읽어 보세요. 별 내용 아니니까 부담은 가지지 마시고요.”
봉투에서 눈을 뗀 유 여사가 고개를 들어 은수를 쳐다보았다. 혹시 제 심기를 거스르기라도 할까, 전전긍긍하는 듯한 모습이 좀 안쓰러웠다.
“……그래, 잘 읽어 볼게. 고마워요.”
“참, 그리고…… 어머니.”
“……응?”
후, 하고 한번 심호흡을 하는 게 뭔가 대단한 말을 할 것처럼 느껴졌다. 그 모습을 약간 귀엽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이윽고 은수가 말을 이었다.
“현재 씨를 낳아 주셔서, 또 훌륭하게 키워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
“편지에도 적은 거긴 한데, 이 말만은 직접 해 드리고 싶었어요.”
“…….”
유 여사는 그 말에 순간적으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두 아들을 혼자 키워 온 지난 세월, 힘든 일도 궂은일도 참 많았지만 누군가에게 수고했단 칭찬 한번 듣지 못했다. 누구나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감동적인 말을 다른 사람도 아닌 ‘예비 며느리’에게서 들을 수 있을 거라곤 미처 생각하지 않았던 그녀였다.
조금의 정적이 흘렀다. 대꾸할 말은 여전히 떠오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눈엔 그저 예비 며느리의 불룩한 배만 들어올 뿐이었다. 눈에 밟혔다. 여기까지 오는 게 쉬운 발걸음이 아니었을 텐데, 뭐라도 대접해 주고 싶은 맘이 솟구쳤다.
“……이제 곧 저녁인데, 밥은. 배 안 고파?”
“네. 사실은 저 금방 가 봐야 돼요. 얼마 안 걸릴 거라고 엄마한테 호언장담하고 왔거든요. 아마 밥 해 놓고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
곱게 주름진 얼굴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은수는 그 얼굴을 바라보며 집에 있을 엄마를 자동적으로 떠올렸다. 어찌 보면 참 많이 닮은 두 여자였다. 사실, 혼자된 몸으로 자식을 키웠다는 것부터가 가장 큰 공통점이겠지만.
“저희 엄마 보니까, 저 없으면 끼니 거르실 때가 많더라구요.”
“…….”
“어머님도 혼자 계시다고 끼니 거르지 마시고…… 꼭 잘 챙겨 드세요. 기력이 제일 중요한 거니까요.”
“……응.”
어느덧 슬슬 이야기가 끝나 가는 분위기였다. 그러다 잠시 집 안이 조용해졌고, 유 여사는 왠지 모르게 멋쩍어져서 손에 쥐고 있던 찻잔 손잡이를 슬슬 문지르고 있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얼굴이 훨씬 유해진 유 여사가 넌지시 은수를 쳐다보았다. 그때였다. 방실방실 웃고만 있던 은수가 약간 불편한 듯한 표정을 지은 것은.
어딘가 이상하다고 여길 찰나. 아니나 다를까, 은수에게서 갑자기 가느다래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머니, 저, 근데…… 잠깐 화장실 좀 쓸 수 있을까요?”
“……왜 그래? 어디가 안 좋아?”
“아, 아뇨. 그냥, 아까 오는 길부터 배가 좀…….”
“어, 그래? 화장실은 저 쪽에 있어. 얼른 가 봐, 그럼.”
“……네. 그러면, 잠시만…….”
어딘지 모르게 어정쩡해 보이는 자세로 은수가 몸을 일으켰다. 그 상태로 어기적어기적 걸어가던 은수는 몇 걸음 가지 못하고 우뚝, 자리에 멈춰 섰다.
왜 저러지.
유 여사는 순간 이상하리만큼 불안감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그때, 은수가 천천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어, 어머님…….”
“……응?”
은수의 낯빛이 한순간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심상치 않은 얼굴. 거기다 뭐라 대답도 하지 못한다.
상황이 급속도로 돌변했다. 그녀는 저의 불안감이 그냥 든 것이 아니라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뭔가 일이 터진 게 분명했다.
아니, 어쩌면 일이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