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
108. 마지막 난코스 (1)
민희의 입술이 슬쩍 벌어졌다. 물론 그의 의중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은진과 함께 팀장 뒷담화를 하다 그에게 현장을 들켰던 날. 그날을 기점으로 저를 보는 남자의 눈빛이 확 달라졌음을 느꼈었으니까.
그럼에도 그가 이렇게 뾰족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건 너무 낯설었다. 본래 열탕에 있다 냉탕에 들어가면 그 온도차가 극심하게 느껴지는 법. 그녀가 늘 동경해 마지않던, 단정하고 잘생긴 이목구비에는 항상 자리하던 온화함 대신 냉정함만이 감돌고 있었다. 아무리 거침없는 민희라고 해도 쉽사리 입을 열 수 없게끔…….
“아, 그리고.”
그러고도 그는 아직 할 말이 남았다는 듯 조소를 지었고, 당황한 민희의 눈은 느리게 깜빡였다.
“내가 먼저 좋아했습니다. 내가 매달린 거고요. 그 사람에게 죄가 있다면 날 받아 준 것밖에 없단 소립니다. 그러니까…… 은수 씨가 민희 씨한테 이런 이야기 들을 이유도 없는 거죠.”
“…….”
“이 정도면, 질문에 대답이 됐습니까?”
방금 전 민희가 했던 말을 다분히 의식한 답변이었다. 반발심이 인 민희가 혹여나 그들이 아기 때문에 억지로 결혼한다는 소문이라도 퍼트릴까 싶은 노파심에.
저를 좋아하는 것을 뻔히 아는 여자에게 굳이 할 필요 없는 모진 말이었지만, 은수만 생각하면 그도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그녀에게 내줄 수 있는 인내심의 한계는 딱 여기까지였다.
“전 이만 먼저 가 보겠습니다. 앞으론 이런 일 없었으면 좋겠네요.”
“……현재 씨!”
민희가 다급하게 부르는데도 말을 마친 현재는 그대로 뒤돌아 휘적휘적 자리를 떴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걸음. 졸지에 홀로 남겨진 민희는 멀거니 그의 모습을 좇을 수밖에 없었다.
“…….”
결국 그에게 제 마음을 말했다. 그래도 이리 말하고 나면 후련할 줄 알았는데, 까였다는 것을 확인 사살당한 느낌이라 기분은 어쩔 수 없이 처참했다. 울분에 찬 표정으로 민희가 입술을 짓씹었다.
뒤늦게 밀려오는 민망함에 낯이 뜨거웠지만, 그러는 중에도 방금 전까지 듣던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려서…… 가슴속에서부터 화가 솟구쳤다. 이제는 마지막 하나 남은 끈마저 뚝 끊긴 느낌. 짝사랑의 끝은 꼭 이렇게 너덜너덜해야 하는 걸까. 분한 나머지 약간의 억울함까지 밀려들었다.
“……아이, 씨.”
저 남자는 왜 이럴 때까지 멋있는 거야, 짜증 나게.
* * *
“민은수!”
“어? 허윤정?”
한편 그 시간, 침대에 무료하게 누워 있던 은수는 예상치 못한 인물의 깜짝 등장에 눈을 번쩍 떴다. 침대 옆 간이의자에 앉아 있던 이 여사도 눈이 동그래진 채였다.
그제야 또 다른 이의 존재를 인식한 윤정이 먼저 싹싹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잘 지내셨죠?”
“어어! 그럼. 이게 얼마만이야. 잘 지냈어?”
“네, 저도 잘 지냈어요.”
“뭐야. 네가 여기 왜 와?”
어머니와 인사하는 것까진 좋았는데, 정작 병자는 반가워하기는커녕 다짜고짜 퉁명스럽게 질문부터 하는 통에 흥이 팍 깨져 버렸다. 윤정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이건 친구가 병문안을 와도 반응이……. 으유.”
“아니, 너 지금 회사에 있을 시간이잖아. 어쩐 일이냐고.”
“……아아, 그거.”
하긴, 놀랄 만은 하네.
은수의 반응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인 윤정이 으스대는 말투로 뿌듯하게 대답했다.
“연차 썼다, 연차.”
“……연차? 연차를 왜.”
“왜는? 이 몸이 오늘 여기서 봉사하려고 쓴 거지.”
“헐.”
은수는 곧장 기겁했다. 월급쟁이로서의 마인드가 본능적으로 튀어나오는 순간이었다.
이게 미쳤네. 연차 아까운 줄도 모르고……!
“야! 그걸 왜 이런 데다 써. 아껴 뒀다 진짜 중요할 때 써야지!”
그럼 그렇지.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윤정은 이 여사가 내어주는 의자에 털썩 앉으며 고집스럽게 말했다.
“미안한데, 이것도 나한텐 ‘진짜’ 중요한 일이거든. 친히 와 줬으면 고마운 줄이나 알아.”
물론 병원에만 틀어박힌 신세라 심심하다 못해 따분하던 차였으므로, 윤정의 행차는 은수에게 당연히 반가운 일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찝찝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럴 것까진 없는데.
“……아니, 고맙긴 한데…… 그래도…….”
“뭐. 내가 여기 온 게 싫어? 갈까?”
하지만 당장이라도 가려는 것처럼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윤정을 은수는 황급히 붙잡았다.
“아이, 누가 가래? 그런 게 아니라…….”
“그럼 뭐, 뭐가 문젠데.”
“……미안하니까 그러지. 어차피 엄마도 옆에 있는데.”
가방을 적당한 곳에 올려놓으며 숨을 돌린 윤정이 그 말에 슬그머니 혀를 찼다.
“으이그, 넌 너만 힘드냐? 어머님도 좀 쉬셔야지. 하나밖에 없는 딸이 갑자기 애를 배는 바람에 정신도 없으실 텐데. 그쵸, 어머니?”
“……그래, 그건 윤정이 말이 맞다.”
“엄마!”
거기에 동조하는 건 또 뭐야!
순간 발끈한 은수의 모습에 윤정과 이 여사는 시선을 교환하며 소리 내어 웃었다. 하여튼 안 그렇게 생겨서 놀려 먹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어머니, 진짜 잠깐 쉬다 오세요. 제가 여기 있을게요.”
“……아니야, 고생스러운데 어떻게 그래. 괜찮아.”
“고생은요. 얘가 뭐 중환자도 아닌데요. 아예 밖에 나갔다 오셔도 돼요.”
“아휴, 어차피 어디가 어딘지도 몰라서 나가지도 못해.”
“음…… 그럼, 댁에 가서 눈이라도 좀 붙이고 오세요. 자리가 이래서 제대로 주무시지도 못했을 것 같은데.”
“…….”
다른 건 다 그럭저럭 넘겼건만, 잠 얘기에 이 여사는 금세 솔깃해졌다. 그도 그럴 게, 은수의 입원 이후로 제대로 된 잠을 잔 적이 손에 꼽혔기 때문이었다. 침대 옆에 있는 소파 겸 간이침대는 언제 누워도 편하지가 않았다. 스스로 위안을 얻기 위해 그저 딸을 가진 제 업보려니, 하고 있었는데.
“……그럼, 그럴까?”
“네, 걱정 마시고 다녀오세요.”
“그래, 엄마. 갔다 와. 나도 허윤정 한번 부려 먹어 보게.”
윤정의 설득에 마음이 동했는지, 은수 또한 그녀를 얼른 채근하고 나섰다.
그러자 이 여사의 눈길이 은수와 윤정을 번갈아 향했다. 당사자도 동의했겠다, 더 이상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알았어. 그럼, 부탁 좀 할게.”
“네, 어머니. 저 저녁까지 있을 거니까 신경 쓰지 마시고 다녀오세요.”
“……으응.”
결국, 두 사람에게 등 떠밀린 이 여사는 다소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취침을 하러 떠났다. 그녀가 나가는 모습을 확인하며 인사한 윤정은 안심하고 고개를 돌렸다. 둘만 남은 아담한 병실은 생각보다 쾌적했다.
“야, 근데 애 낳는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1인실 써? 팔자 늘어졌다.”
“아…….”
누구는 이러고 싶었는 줄 아나…….
잠시 머뭇거리던 은수가 수줍게 중얼거렸다.
“원래 다인실 가려고 했는데, 현재 씨가 잠깐 있는 거라도 맘 편하게 있으라고 하는 바람에.”
“현재 씨가?”
어이구, 그놈의 팔불출. 열정적인 아기 아빠의 모습을 떠올리던 윤정은 혀를 내둘렀다.
“어련하시겠어. 근데 여기 입원비 꽤 비쌀 것 같은데.”
안 그래도 이미 그 문제로 현재와 한바탕 설전을 벌인 후였기에, 은수는 그저 힘없이 웃었다. 돈 아끼자고 해 봐야 은수가 최우선 순위인 그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할 수 없지. 현재 씨가 여기 아님 안 된다는데, 뭐. 그래도 여기 있어 보니까 이제껏 내가 아등바등 산 이유를 좀 알 것 같기도 해. 돈 벌어서 이런 데 안 쓰면 또 어따 쓰냐.”
“……그건 맞는 말이네. 암튼 병원에선 뭐래. 이제 곧 퇴원이라며.”
잠잠해진 제 배를 공연히 한번 쓰다듬은 은수가 설명했다.
“자궁 경부 길이가 짧아졌었는데, 지금은 다시 길어졌대. 그래도 많이 좋아진 것 같아. 병원에선 일단 이번 주만 무사히 넘기자는 쪽이야.”
“다음 주부턴 애 나와도 상관없대?”
“어, 34주가 마지노선이라나 봐.”
“다행이네, 그럼. 될 수 있음 빨리 나오라 그래. 대체 누구 닮았을지 궁금해 돌아가실 지경이니까.”
“으유, 그게 내 맘대로 되냐.”
간만에 기분 좋게 웃던 은수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참, 너 이 대리랑은…… 잘돼 가?”
“…….”
“현재 씨한테서 들으니까 이 대리는 긍정적인 눈치라던데.”
은수와 마찬가지로 밝게 웃고 있던 윤정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뭔가 이상했다.
“……아, 사실 그 말하려고 온 것도 있는데.”
“어? 뭔데.”
말을 하기 전 뜸을 들이는 게 윤정답지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남자, 혹시 돌싱이야?”
“뭐?”
그녀의 입에서 기함할 소리가 나왔다.
돌아온 싱글. 그것은 즉, 이혼남을 일컫는 말이지 않은가. 전혀 생각지 못한 단어에 은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쩌다 그런 생각을 했어?”
“…….”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윤정은 모르겠다는 듯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냥, 느낌이 구려. 뭔가 생긴 것도 연식이 좀 있어 보이고, 너무…….”
“……너무?”
“……능숙하단 말이야. 어디 애 하나 숨겨 놓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푸하하하. 순간 은수에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대리와 아이라니. 영 어울리지 않는 그 조합이 머릿속에 자동적으로 연상된 탓이었다.
“야, 오버야. 내가 이 대리 본 것만 몇 년인데. 절대 아니야, 그런 거. 그런 거였음 진작 들켰지. 나랑 현재 씨 들킨 거 봐. 그런 건 어떻게 해도 못 감춰. 물론 연애는 좀 많이 해 본 것 같긴 하지만…….”
은수의 변호에도 윤정은 여전히 석연찮은 표정이었다.
“……그건 그것대로 맘에 안 들어. 아, 몰라. 하여튼, 좀 선수 같아. 그래서 못 믿겠어.”
“참나, 그러는 너는. 네가 지금껏 갈아치운 남자만 몇 명인데…….”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허구한 날 외롭다고 우는 소리를 하며 가벼운 연애를 일삼던 윤정이었지만, 남자를 두고 이렇게까지 고민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나마 이와 가장 비슷한 모습을 보였던 때라면 스무 살 무렵 과 선배와 사귀던 때뿐이었다. 그때도 윤정은 이렇게 심각한 얼굴을 하고 선배의 진심을 의심했었는데. 그렇다면…….
“…….”
윤정은 여전히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은수에게선 이상하게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모르긴 몰라도 허윤정이 진짜 임자를 만난 것만은 틀림없어 보였다. 이걸 기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쨌든 계속해서 생각에 잠겨 있던 윤정은 별안간 파리를 쫓아내듯 머리를 날쌔게 흔들었다. 이런 상념들이 다 그녀에겐 파리같이 하찮은 것이기라도 한 것처럼.
“휴, 됐고. 암튼 너 퇴원하는 날 한 번 더 올 거니까 기대하셔. 어머님이랑 같이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자.”
그런데 쌍수를 들고 환영할 거라 생각했던 은수의 반응이 영 신통치 않았다. 오히려 시무룩해지기까지.
윤정의 얼굴이 대번 샐쭉해졌다.
“너 표정이 왜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