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
107. 짝사랑의 말로
며칠 뒤, 여느 때와 같이 밝지만 한편으로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현재가 사무실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안녕하십니까.”
“어, 굿모닝.”
카페인 충전을 하려 했던 요량인지 텀블러를 든 채 앞에 서 있던 이 대리가 그를 먼저 반겼다. 그러나 현재의 얼굴을 유심히 뜯어보던 그의 눈썹 끝이 이내 서로 닿을 듯 맞붙었다.
“현재 씨, 며칠 새 얼굴 많이 상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잘 모르겠더니 오늘은 특히 더 그러네. 피곤하긴 피곤한가 봐. 일하느라, 간병하느라.”
“…….”
그런가. 그래도 요 며칠은 꽤 많이 잤는데…….
한때 그의 멘토였던 이 대리는 여전히 그를 이렇듯 각별하게 신경 써 주고 있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양, 현재는 괜히 마른세수를 하며 씩씩하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할 만합니다.”
“으이구, 집에 들어가기는 해?”
“그럼요. 얼마 전까진 병원에 좀 있었는데, 지금은 집에서 출퇴근합니다.”
“어휴, 하여튼 지극정성이라니까. 열부 나셨어.”
혀를 내두르는 이 대리를 뒤로하고, 자리에 앉아 여유롭게 인터넷을 서핑하고 있던 박 과장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나저나 민 팀장님은 좀 어때. 괜찮으셔?”
“예, 많이 좋아졌습니다.”
“다행이네. 문병이라도 한번 가야 되나 했는데.”
“곧 퇴원인데 뭐 하러요. 나중에 애기 보러나 오세요.”
은수가 휴직에 들어간 지도 벌써 2주 정도가 된 시점이었다. 팀장의 갑작스런 입원 소식에 팀 내부도 잠시 술렁였다. 하지만 은수의 공석은 다행히 예정되어 있던 김 차장이 발 빠르게 채웠고, 덕분에 그녀는 맘 편히 몸을 추스르는 데만 집중할 수 있었다.
팀원들은 며칠간 이 새로운 체제를 조금 낯설어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은수의 빈자리를 크게 느끼는 사람이라곤 오직 현재뿐이라 할 만큼 모두가 잘 적응한 상태였다. 다행스럽게도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그녀도 이틀만 있으면 퇴원이었다. 그가 갈 때마다, 병원은 정말 체질에 안 맞는 것 같다며 진저리를 치는 그녀였다. 물론 여전히 조산기가 있는 건 마찬가지라 이후에도 긴장을 늦출 수는 없는 상황이었지만, 일단 병원 신세를 지지 않고 집에서 요양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큰 진척이기에 지난 밤 은수는 무척이나 신나 했다.
“참. 그러고 보니까 아직까지 애 성별을 모르고 있었네. 아들이야, 딸이야?”
“아, 제가 말씀 안 드렸었나요? 아들입니다.”
“호오, 아들이었어? 난 왜 당연히 딸일 거라고 생각했지. 현재 씨 닮으면 진짜 미남이겠다.”
“그러게요. 나중에 연예인 시키는 거 아니야?”
“뭐, 팀장님이랑 현재 씨 반반씩 닮으면 그럴 수도 있지. 둘 다 인물이 출중하잖아.”
콤비처럼 대화를 주고받는 박 과장과 이 대리를 보고 있으니, 그는 아들의 머리는 엄마를 닮는다며 자화자찬하던 은수가 떠올랐다. 저를 닮으면 너무 여성스러워서 안 된다며 고개를 젓던 모습도…….
그녀를 닮은 아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던 현재가 피식 웃었다.
“……저는 은수 씨 닮았으면 좋겠는데.”
무의식 끝에 흘러나온 그의 말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은수 씨?”
“……예?”
왜 저러지? 그의 눈동자가 느릿하게 굴렀다.
그러나 잠시 뒤, 모두가 아는 그 이름을 왜 되묻나 하고 잠깐 의아한 눈초리를 하던 그의 얼굴에 허에 찔린 표정이 떠올랐다.
“……아!”
아뿔싸. 회사에선 늘 조심했었는데, 지금은 은수도 없다 보니 습관처럼 둘이 있을 때만 부르던 호칭이 튀어나와 버린 것이었다. 신입 사원 주제에, 팀장에게 ‘은수 씨’라니!
잔뜩 당황한 현재가 서둘러 정정했다.
“아, 아뇨. 팀장님이요.”
그러나 그 말은 이미 조용하던 팀원들마저 동요시켜 버리고 말았다.
“오오, 둘이 있을 땐 그렇게 부르나 보지?”
“하긴, 애인인데 꼬박꼬박 ‘팀장님’이라고 할 순 없잖아요. 당연하지.”
“에이, 근데 호칭 별로다. 둘만 있을 땐 ‘여보, 자기’ 해야지! 누구 씨가 뭐야.”
“그래! 영 딱딱하게. 오늘부터 당장 바꾸라구.”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가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다.
갑작스레 빗발치는 원성에, 그는 정수리에서 땀이 삐질 흐르는 기분이었다.
“……하하하, 천천히 해 보겠습니다.”
그런 건 우리 둘이 알아서 하면 안 됩니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말이 그의 목젖 언저리에서 맴돌았지만, 팀원들은 그의 눈치는 아랑곳 않고 제 의견을 내는 데만 바빴다.
“천천히는 무슨. 둘 다 뻣뻣해 가지고, 뜸만 들이다가 밥 다 타서 누룽지 되게 생겼구만.”
“맞아요. 내가 보니까, 둘은 가만히 놔둬 갖곤 안 돼. 애만 빨리 만들면 뭐 해?”
“은근슬쩍 현재 씨가 먼저 좀 애교 있게 해 봐. 그래도 팀장님이 누나잖아. 연하가 또 그런 적극적인 맛이 있어야…….”
이 대리를 필두로 다들 한마디씩 재미 삼아 던지던 그때, 훈훈하던 분위기에 찬물을 확 끼얹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일 안 해요? 바쁜데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얼굴에 짜증을 가득 담은 민희였다.
“…….”
민희를 제외한 모두는 일순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것처럼 일제히 입을 다물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민희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고개를 돌려 모니터만 주시하고 있었다. 현재의 눈길이 그녀에게 가 닿았다.
“……으음.”
“…….”
“어, 그래……. 일해야지. 해야지, 일.”
“크흠…….”
순간 멋쩍어진 팀원들은 금방 제자리로 일사분란하게 흩어졌다.
그러나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던 현재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민희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민희가 왜 저러는지, 그 이유는 팀원 모두가 알고 있을 터였다. 투시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건만 보지 않아도 뿌루퉁한 얼굴이 느껴졌다.
“…….”
아무래도, 더 늦기 전에 확실히 해 두는 편이 좋을까.
* * *
“정말 팀장님이랑 결혼할 거예요?”
민희의 조급한 목소리가 옥상을 살짝 울렸다. 그녀는 조금 전, ‘저랑 잠깐 얘기 좀 해요.’ 하며 그를 불러낼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흥분한 모양새였다. 마지못해 끌려나온 것 같은 현재의 차분한 얼굴과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
이 사람은 다 끝난 이야기를 가지고 왜 이러는 걸까, 정말.
굳게 닫혀 있던 현재의 입술이 열리며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에 사무실에서 말씀드렸잖습니까, 결혼한다고. 무슨 문제 있습니까?”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내 말은…….”
“…….”
그렇게 잠깐 머뭇거리는 듯하던 민희가 덧붙인 말은 무방비 상태였던 현재를 아연실색하게 했다.
“그 아이가 현재 씨 아이는 확실해요?”
……이 상황에 어떻게 이런 질문을…….
현재는 순간 상처받은 그녀를 위로해 주리라 생각했던 마음이 팍팍 깎이는 것을 느꼈다. 도무지 정을 주려야 줄 수가 없는 여자였다.
“……대답할 가치가 없는 질문이네요.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죠.”
잠시 물끄러미 현재를 올려다보던 그녀가 일부러 심호흡을 한번 한 뒤, 입을 열었다.
“나, 현재 씨 좋아해요. 맨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어요. 신입 사원 교육 때부터요.”
“…….”
“나 오늘,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고백하는 거예요. 현재 씨도 모르고 있었던 거 아니잖아요. 왜 모른 척해요?”
민희는 그를 좋아했다. 그리고 지금도 좋아한다.
현재도 모르고 있던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그럼 제가 뭘 어떻게 했어야 합니까.”
“…….”
“왜 그걸 저한테 따지시는지 모르겠네요. 적어도 전 강민희 씨에게 ‘희망’이라거나 ‘여지’ 같은 거, 준 적 없었던 것 같은데요.”
예의 있으면서도 칼 같은 말투였다.
제게 맘이라곤 한 톨도 내주지 않을 것 같은 남자의 단호하고 깔끔한 정리에, 바로 약이 오른 민희가 뇌까렸다.
“……그 여자는 되고 난 안 되는 이유가 뭔데요. 대체 뭐가 달라서?”
치기 어린 맘에 어느 정도 엇나가는 건 그러려니 생각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실제로 듣고 나니 그로선 차마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그 여자’라뇨. 누구를 지칭하는 겁니까?”
“…….”
“그런 불분명한 호칭은 듣기가 좀 불쾌한데요.”
‘네 주제에 감히, 그 사람을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마라.’ 정도의 뜻이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의 서늘한 얼굴과 목소리에, 살짝 놀란 민희가 한풀 꺾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좋아요. 그럼, 민은수 팀장님이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건데요? 차일 땐 차이더라도 이유나 좀 알자고요!”
“…….”
“두 사람, 만난 지도 얼마 안 됐잖아요. 대체 뭘 보고 결혼까지 한다는 거예요? 그러지 말고 솔직히 말해 봐요.”
“…….”
“아기 때문이죠, 그쵸.”
속도위반으로 원치 않는 결혼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그리고 착하고 우직한 그의 성격상 충분히 가능한 얘기였다. 어쩌다 실수 한번 했는데, 그걸 가만 보고 있을 수 없었던 거겠지. 사랑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책임지려고 했던 거겠지. 그리고 어쩌면 영리한 팀장은 임신을 빌미로 새파란 신입을 협박했을 수도 있었다. 그들의 결혼 발표 이후, 민희는 내심 줄곧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그녀의 앞에 선 그의 입가엔 비웃음만 가득했다.
“나야말로 묻고 싶네요. 그러는 민희 씨는,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 좋아한다는 겁니까.”
“…….”
“우리 만난 지 얼마 안 됐잖아요.”
“……그, 그건…….”
“강민희 씨.”
뭐라 뭐라 대꾸하려는 민희를 그가 막아섰다. 저를 올려다보는 눈길이 꽤 간절했지만, 그는 그것을 외면했다.
“모르겠으면 알려 주죠.”
“…….”
“그 사람은, 스스로에게 당당한 사람이에요.”
지난 기억들을 찬찬히 떠올리며 그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맘에 안 든다고 뒤에서 누군가를 헐뜯지 않고, 자신의 과오는 어떻게든 책임지려 하는 사람이에요. 매사에 진실하죠. 한마디로 비겁하지 않다고요.”
“…….”
“또, 어느 날 갑자기 예상치 못하게 생긴 아이라도 그 생명을 소중히 여길 줄 알고, 본인 상처보다 남 상처를 돌이켜볼 줄 아는 사람이고요. 물론 예쁘고 사랑스러운 건 덤이지만.”
현재의 날카로운 눈빛이 민희를 쏘아보았다.
“강민희 씨가 예전부터 날 좋아한다는 핑계로 은수 씨를 헐뜯고 다니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눈치 줄 때 알아서 그만하길 바랐는데, 기어코 이렇게까지 됐네요.”
“…….”
“좋게 말로 할 때, 이쯤 하십시오. 더 이상은 나도 참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