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
106. 이게 바로 행복이겠지?
“…….”
그러나 그녀는 이어지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세게 닫아 버렸다. 어찌나 세게 닫혔는지 문고리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체념하듯 고개를 떨어뜨린 현재는 문 앞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엄마, 들어갈게요.”
철컥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았으므로 잠겨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문고리를 비틀어 문을 열자, 침대나 의자에 앉아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그녀가 화장대 앞에 서 있는 것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흐트러져 있던 화장대를 부산하게 정리하던 그녀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얘긴데.”
“…….”
“……할 거면 빨리 해.”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현재는 말을 고르느라 잠시 뜸을 들였다.
애매하게 돌려 말하는 것보다는 이편이 낫겠지.
“아기가 좀…… 빨리 나올지도 모르겠어요. 조산기가 있대요.”
현재는 곧 자신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생각지 못한 말에 그녀가 놀란 눈치였기 때문이다.
“……조산? 아직 예정일까지 좀 남았다며?”
“……하혈이 있어서 병원에 갔는데, 아무래도 조만간일 것 같아요. 스트레스가 좀 심했었나 봐요.”
달리 그녀를 책망하는 말투는 아니었지만, 유 여사는 그 스트레스에 자신도 한몫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간 미안한 마음이 덜컥 올라왔다. 그러나 이 마당에 그런 내색을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잠깐 놀란 눈으로 현재를 쳐다보던 그녀가 이내 눈길을 거두곤 애써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그래서.”
“……그래서.”
그녀의 말을 한번 되풀이한 그가 잠시 뒤 어렵게 말을 이었다.
“엄마가 은수 씨한테 힘 좀 주셨으면 좋겠어요. 다른 건 필요 없고, 그냥 몇 번만 더 만나 주시면 돼요. 조금만 살갑게 대해 주시고요.”
“…….”
“……아직, 힘드세요?”
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자신의 잘난 아들을 잠시 노려보았다.
“……휴우.”
깊게 한숨을 쉰 그녀가 침대 가장자리에 주저앉았다. 응어리진 감정이 하루아침에 풀릴 리는 없지만, 같은 여자이고 장차 시어머니 될 입장이다 보니 안타까운 맘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몸은 좀 어떻다니.”
“잘 회복하고 있어요. 이제 곧 퇴원이니까 큰 걱정은 마세요.”
어차피 긴 얘기를 해 봐야 엄마의 화를 더 돋우기만 할 것이 분명했다.
현재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주머니에서 쪽지 하나를 꺼내 화장대 위에 올려 두었다.
“은수 씨 지금 있는 곳 주소예요.”
“…….”
“많이 힘들어하고 있어요. 자주 뵙고 싶은 맘은 굴뚝같은데 몸이 그래서 은수 씨도 속상할 거예요. 엄마도 힘드신 거 알지만, 한 번만…… 한 번만 저 좀 봐주세요.”
쪽지로 향한 그녀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현재는 엄마의 맘이 조금씩 동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강한 것 같아 보여도, 엄마는 본래 천성이 여린 사람이었다.
“엄마.”
“…….”
“……은수 씨, 좋은 사람이에요. 계속 보다 보면 엄마도 분명히 맘에 드실 거예요. 그러니까…… 혹시 마음이 바뀌시면 꼭 말씀해 주세요. 제가 자리를 만들어 볼게요.”
“…….”
“……아, 맞다.”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웬수 같기만 한 둘째 아들은 방을 나가려다 말고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는 듯 다시 돌아섰다. 그러고 보니 그의 손에는 하얀 봉지 하나가 들려 있었다.
“이거요.”
현재는 제 손에 있던 그것을 조심스레 엄마에게 건넸다.
이게 뭐지?
떨떠름하게 봉지를 받아 든 그녀가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거렸다.
“요즘 부쩍 열도 많이 나고 편찮으시다면서요. 형 눈치 없는 거 다 아시면서 왜 형한테…….”
“…….”
“잊지 말고 꼭 챙겨 드세요. 병원도 한번 가 보시고요.”
“…….”
현재가 쓰게 웃었다.
“……죄송해요, 엄마.”
“…….”
“아프지 마세요.”
담백하게 말을 마친 현재는 그 길로 조용히 방을 나갔다.
“…….”
탁.
문이 닫히고 난 뒤, 봉지를 천천히 열어 본 그녀는 그 안에 든 것들이 무엇인지 확인하고는 비로소 입술을 감쳐물었다.
[달맞이꽃종자유 캡슐]
[여성갱년기치료제]
* * *
“뭐 해요?”
“엄마!”
꼭 도둑질이라도 하다 들킨 사람처럼 놀란다. 뭘 그리 열심히 하고 있었는지, 그가 오자마자 베개 밑으로 감추는 모양새가 수상했다.
“어후, 깜짝 놀랐잖아요.”
“왜 그렇게 놀라요.”
“인기척도 없이 들어오니까 그렇죠. 애라도 떨어졌음 어쩔 뻔했어요?”
“하하, 미안해요.”
진짜 애가 떨어졌으면 큰일 나죠. 내가 큰 실수했네. 실없는 농담을 하던 현재가 키득거렸다.
그나저나, 한창 뭔가 쓰고 있던 것 같았는데. 뭐지?
“뭐 하고 있었어요? 비밀 일기라도 쓰는 거예요?”
“꼬치꼬치 알려고 들지 마세요, 비밀이니까.”
“출산 일기 쓰는 거면 난 찬성이에요.”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뭔데요?”
“아, 글쎄 비밀이라니까요. 나중에 어련히 다 알게 될 테니까 궁금해하지 마요.”
“궁금한데…….”
하지만 그런다고 포기할 그가 아니었다. 그는 기어코 은수의 마음을 쟁취해 낸 집념의 사나이가 아니던가.
입맛을 다시며 잠시 눈치를 보던 현재가 그녀가 방심하는 틈을 타 의문의 그것을 쓱싹해 보려 시도했다. 하지만 은수가 임산부답지 않게 재빠른 몸놀림으로 사수해 내는 바람에 그의 작전은 맥없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베개를 깔고 앉은 은수는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로 현재를 쏘아보았다.
“아 진짜, 사람이 교양도 없이!”
“뭐 어때요. 보여 줘요.”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왜요, 부끄러워서 그래요?”
“……아무튼 안 돼요!”
별 예의 없는 사람을 다 본다는 듯 현재를 잠시 흘겨보던 은수는 그의 관심을 다른 데 돌리려는 요량으로 옆에 놓아두었던 지갑을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쪽이 신경 쓸 건 이게 아니라 이거예요. 혹시 또 까먹을까 봐 바로 옆에 놔뒀다고요. 돈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 했어요?”
어젯밤, 깜빡하고 병실에 지갑을 놔두고 가는 바람에 그는 오늘 하루 종일 원치 않게 무일푼 신세가 되었었다. 현재가 제 지갑을 내려다보며 멋쩍게 웃었다.
“차에 비상금 있었어요. 좀 모자라서 이 대리님한테 빌붙긴 했지만. 이제 몸은 좀 괜찮아요?”
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의자에 앉는 그를 보며 한결 평화로워진 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경과 며칠만 더 보고 퇴원해도 된대요. 아무리 급해도 아직은 나올 때가 아닌가 봐요.”
“다행이네요.”
“아참, 근데 철분 수치랑 비타민 D 수치가 너무 낮다고 약은 먹어야 된대요. 평생 먹을 약 지금 다 먹는 것 같아. 진짜 질린다.”
“……그래도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으니까 조금만 힘내요.”
그가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로 그녀를 위로했다. 시무룩해진 은수는 앞에 앉은 현재의 손을 끌어와 살짝 잡았다. 복잡했던 마음이 절로 포근해지는 기분이었다.
“현재 씨.”
“네?”
“나…… 무서워요.”
“뭐가요?”
“애 낳는 거요. 당연히 아플 것 같긴 했지만, 먼 일이라고 생각해서 별로 걱정은 안 됐었거든요. 근데 막상 이렇게 병원에 있어 보니까…… 좀 무서워요. 이제 진짜 현실로 다가온 느낌이고.”
“…….”
“왜, 드라마 보면 막, 남편 머리끄덩이 잡구 늘어지잖아요. 그게 얼마나 아프면 그러겠어요.”
“…….”
“휴. 진짜 어뜩하지. 무통 주사 맞으면 좀 괜찮을라나…….”
출산을 앞둔 산모의 흔한 푸념이었다.
그때, 은수의 하소연을 묵묵히 듣고 있던 그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내가 낳고 싶다.”
……응? 이 사람이 방금 뭐라고 한 거지? 멍해진 은수가 눈을 깜빡였다.
“네? 잘 못 들었어요.”
“내가 대신 낳아 주고 싶다고요.”
“……네에?”
한숨을 푹푹 쉬며 걱정하던 건 언제고, 금세 경악하는 표정이 된 그녀를 보며 현재가 짐짓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린 거 알지만, 지금 은수 씨 보고 있으니까 그러고 싶어요. 아픈 건 내가 다 하고 은수 씬 편하고 좋은 것만 하게 해 주고 싶은데…… 이건 나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속상하네요.”
“…….”
“물론 아기는, 내 배에 있는 것보단 은수 씨 배에 있는 걸 더 좋아하겠지만요.”
그의 변을 들은 은수의 입술이 새치름하게 모아졌다. 방금 그는 꼭 엄마 같았다. 엄마가 대신 아파 주고 싶다, 우리 딸. 제가 아플 때면 엄마는 평소엔 잘 해 주지도 않던 죽이나 수프 같은 것을 만들어 주면서 저렇게 말하곤 했었는데.
일순, 그의 말 한마디에 무서움이 조금 가시는 것이 느껴졌다. 왠지 모를 용기가 솟아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현재 씨 말 들으니까, 갑자기 좀 덜 무서워졌어요.”
“그래요?”
“네. 그래도 무통 주사는 맞을 거예요.”
“은수 씨가 그러고 싶으면 그렇게 하는 거죠, 뭐.”
“……그치만 고마운 건 고마운 거구, 영 억울해서 안 되겠어.”
“……뭐가요?”
아아-!!!
별안간 그의 뒷머리를 쥐어뜯는 은수의 손길에 현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도 모르게 이곳이 병원임을 잊고 큰 소리가 터져 나오는 바람에 서둘러 입을 막기까지 했다.
애초에 장난이었으므로 은수에게 잡힌 그의 머리는 금방 다시 자유로워졌지만, 어찌나 세게 잡아당겼는지 잠깐이었는데도 뒤통수가 얼얼했다. 설마 평소에 악감정이 쌓여 있었던 건 아니겠지.
체면도 잊고 뒷머리를 벅벅 문지르는 현재를 보면서 은수는 보란 듯 여유롭게 손을 털었다.
“미안하지만, 내가 고생하는 거 생각하면 이렇게 해도 분이 안 풀려요. 봐준 건 줄 알아요.”
“……언제는 내 잘못만은 아니라더니.”
이 남자가 이제 말대꾸도 다 하네. 은수의 표정이 샐쭉해졌다.
“그래도 솔직히 난 그때 술 먹고 정신이 나가 있었잖아요. 나에 비해서 현재 씨는 완전 제정신이었으면서.”
“……지금 생각해 보면 그다지 정상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나도.”
현재가 자조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술에 취하는 대신에 나는 당신에게 취해 있었으니까. 하지만 고스란히 말하기엔 어쩐지 쑥스러워서, 뒷말은 삼켜 버렸다.
어쨌든 그가 사랑하는 눈앞의 여자는 온통 약해빠진 주제에 손힘만은 무척이나 센 것 같았다.
“아무튼, 나두 남들처럼 머리끄덩이 좀 잡아도 되죠?”
그 말에 현재의 눈썹이 대번 비뚤어졌다. 아프긴 꽤 아팠던 모양이었다.
너무 세게 잡았나. 살살한 거였는데……. 단지 장난이었음에도 눈치가 보여서, 그녀는 더듬더듬 덧붙였다.
“아니, 저기, 그러니까.”
“…….”
“너어-무, 너무너무! 아프면 말이에요.”
방금 전 호기롭게 머리를 쥐어뜯어 놓고도, 뒤늦게 제 눈치를 보며 ‘너무너무’를 강조하는 여자는 그의 눈에 그저 귀엽기만 했다.
명불허전 사랑꾼 아니랄까 봐, 금세 그녀에게 사르르 녹아 버린 현재는 화를 내기는커녕 말갛게 웃었다.
“……대머리 만들어 놔도 참을게요.”
아픔으로 인해 아직 눈에 물기가 맺혀 있으면서도, 대답은 역시나 그다웠다.
그런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니 배 속의 별이가 화답하듯 자그맣게 꿈틀거렸다. 아마도 나름의 행복하다는 표현이 아닐까. 은수도 덩달아 웃었다.
행복. 이게 바로 행복이겠지?
이 순간 만약 아빠가 살아 돌아온다면, 은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당신에게서 행복이란 걸 배운 적이 없어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이 ‘진짜’ 행복인 것 같다고. 그것을 이제라도 알게 되어서, 참 다행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