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속도위반 로맨스-105화 (105/128)

# 105

105. 자네가 있어서 참 다행이야 (2)

병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병원 밖으로 나오기까지 두 사람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였다. 그 숨 막히는 침묵을 먼저 깬 것은 현재였다.

“추어탕 좋아하세요, 어머니?”

“어…… 나는 뭐, 아무거나 괜찮은데…….”

“생각보다 식당이 마땅치가 않네요. 밥을 드셔야 될 텐데…….”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어, 음…… 편한 대로 해요.”

이 여사가 그녀답지 않게 더듬거리며 말했다. 현재의 공손한 말투에 어떤 식으로 대답해 줘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은 탓이었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문을 연 곳은 많지 않았다. 그래도 그나마 그녀의 입맛에 맞을 것 같아 보이는 추어탕 집으로 이 여사를 인도한 현재는 자리에 앉자마자 추어탕 두 그릇을 주문하고 수저와 물을 챙겼다.

그러고 나니 또 어김없이 두 사람 사이엔 보이지 않는 막이 쳐졌다. 이 여사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린 채 한편에 틀어져 있는 TV만을 응시했다. 평소엔 관심도 없는 뉴스를 열심히 보는 척하자 그녀의 시선을 따라 현재도 TV에 눈길을 주었다.

“…….”

불편한 상황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손위 어른인 자신이 먼저 입을 열어야 할 것 같아 그녀가 생각을 고르며 입술을 꼼작거리고 있는데, 그 상태로 몇 초쯤 지났을까. 현재가 불쑥 말을 걸어 왔다.

“저…… 어머니.”

“……응?”

“간밤엔 급해서 미처 말씀을 못 드렸는데…… 감사합니다.”

“…….”

“어머님이 계시지 않았으면 정말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다 어머님 덕분입니다.”

……그건 내가 해야 할 말인데.

먼저 말을 걸어 준 현재 덕분에 조금 여유가 생긴 그녀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내가 고맙지, 뭘. 일 다니는 사람이 잠도 못 자고.”

“아닙니다.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인데요.”

“추어탕 나왔습니다.”

현재가 대답을 끝마치자마자 타이밍 좋게 추어탕 두 그릇이 각자의 앞에 놓였다.

“많이 드십시오, 어머니.”

“……으응, 자네도.”

어색하게 대답한 이 여사가 수저를 들었다. 그러자 뒤따라 현재도 수저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익숙하게 들깨 가루와 산초 가루를 넣자 그것을 또 어설프게 따라했다. 어수룩한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녀는 이상하게도 막혀 있던 말문이 조금씩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아무리 성인 남자이고 예비 사위라고 해도, 어쨌든 아들뻘밖에 되지 않는 아이라는 것이 확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 한순간 그를 대하기가 한결 수월해진 기분이었다.

숟가락으로 추어탕을 휘휘 섞어 한술 뜨며 이 여사는 지나가듯 말했다.

“실은, 내가 은수를 조산으로 낳았어.”

“……예? 정말요?”

놀란 현재가 국물을 한 숟갈 들이켜다 말고 이 여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은수를 출산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치고는 지극히 일상적인 말투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어린아이에게 옛날이야기를 읊어 주는 양 나긋나긋했다.

“그때는 나도 애를 낳는 게 처음이라 경황이 없어서, 무작정 엄마한테 전화 걸고 난리였지. 이렇게까지 급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잘못될까 어찌나 겁이 나던지…….”

“……그러셨군요.”

그 맘을 이해한다는 듯, 현재는 그녀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리곤 눈을 내리깔았다. 이 여사도 김이 피어오르는 뚝배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문득 생각에 잠겼다.

어느덧 까마득해져 버린 기억. 지금껏 잊고 살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제 딸 은수에게 조산기가 있단다. 은수가 그때의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 어쩌면 은수를 조산으로 낳은 제 탓이 아닐까 하고 새벽 내내 조바심을 내던 그녀였다.

이 여사는 은수에게조차 해 준 적이 없던 말들을 눈앞의 청년에게 털어놓고 있는 자신이 한편으론 이해가 되지 않고 우습기도 했지만, 말을 하면 할수록 걱정 가득했던 그녀의 마음도 이상하리만큼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래도, 그랬던 게 저렇게 멀쩡히 커서 애 낳겠다고 저러고 있으니까…… 난 괜한 걱정을 했던 거지.”

“…….”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아무 일 없을 테니까.”

“……예, 어머니.”

밥알을 꼭꼭 씹어 삼킨 그녀가 잠깐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내가 은수를 낳을 때 은수 아빠는 내 옆에 없었어. 혹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은수 아빠가 좀…… 아이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거든.”

“…….”

“그래서 그런가, 애 아빠가 옆에 있어 주는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싶기도 했어. 나는 혼자서도 얼마든지 잘 해냈었으니까.”

“…….”

그녀의 나직한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현재가 넌지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은수와 참 많이 닮아 있는 여자의 얼굴에 주름이 곱게 패며 미소가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래도…… 은수 옆에는 자네가 있어서 참 다행이야.”

지난 밤, 은수의 옆에 이 여사가 있어 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그처럼, 그녀도 현재가 은수의 옆에 있어 주어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은수가 흘린 피를 보자마자 왜 이놈이 생각난 것인지는 지금도 알 수가 없지만, 그녀는 직감적으로 느낌이 왔었다. 그 순간 은수에겐 자신보다도 이 고얀 놈이 더 필요하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녀는 곧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아무리 아이 아빠라고 해도 그토록 세심하게 신경 쓰기는 어려운 법인데, 내내 은수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것이 어미인 저보다도 더했다.

비록 여전히 여러모로 걸리는 부분이 많기는 했지만, 은수를 통해 들은 이야기들과 그녀가 직접 본 그의 모습들로 종합한 결론은 그것이었다. 도현재는 인간적으로 한번 믿어 봄직한 놈이라는 것. 오래전 그녀를 떠났던 그 사람과 다르게, 이놈은 적어도 먼저 은수를 저버리지는 않을 듯하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은수를 참 많이 아껴 주고 있으니까. 일단은 그거면 충분했다.

“…….”

그녀의 말에 현재는 바로 알아챘다. 드디어 그녀가 자신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음을. 너무나도 기뻐 당장 소리치고 싶은 것을, ‘장모님’ 앞임을 감안해 겨우 참아 냈다.

그 대신 그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앞으로 더더욱 잘하겠습니다.”

밥을 먹다 말고 제게 고개를 조아리는 현재를 보고 있자니 솔직하게 말을 한 것이 왠지 민망해진 이 여사가 밥을 떠먹으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하던 대로만 해. 괜히 그러다 더 못하지나 말고.”

“예, 알겠습니다.”

“장인 없다고 은수 울리면 가만 안 둬.”

“그럼요. 정말로 잘하겠습니다. 은수 씨뿐만 아니라 어머님께도요.”

자식, 추어탕 집에서 오버하기는.

“다 식겠다. 얼른 먹기나 해.”

이 여사는 흐뭇한 미소를 애써 감추기 위해 얼른 먹으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다 남은 추어탕의 양이 눈에 들어왔다. 3분의 1 정도 사라진 자신의 추어탕과 달리, 현재의 것은 여전히 처음 그대로처럼 보였다.

“……입맛에 안 맞아?”

“네?”

“아니, 왜 이렇게 못 먹느냐고.”

그가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아닙니다. 아침이라 입맛이 없어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그가, 그녀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말이 도화선이 된 것처럼 공깃밥을 모조리 추어탕에 말아 퍽퍽 떠먹기 시작했다. 어른 앞에서 음식을 깨작거리는 것처럼 보이면 안 된다는 것을 상기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복스럽게 먹는 듯해 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색해 보이기도 하는 몸짓이, 추어탕을 곧잘 먹어 보지 않았음을 광고하는 꼴이었다.

이런 걸 보면 또 귀엽네.

웃음을 속으로 삼켜 낸 그녀가 짐짓 근엄하게 물었다.

“솔직히 말해 봐. 추어탕 못 먹지?”

“……예?”

뜨거운 추어탕을 열심히 우물거리느라 잠깐 동안 대답을 하지 못하던 현재가 먹던 것을 꿀꺽 삼키고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아닙니다! 잘 먹습니다. 엄청 맛있습니다…….”

“그래?”

이 여사는 참고 있던 웃음을 비싯 흘렸다. 안 봐도 비디오. 잘 먹지 못하지만 그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메뉴인 것이다.

스물일곱밖에 안 되었는데도 또래에 비해 성숙하고 의젓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이런 부분에선 어린 티가 난다. 아무렇지 않게 잘 먹는 척을 하는 것도 괜찮았겠지만, 꾸밈없는 모습에 오히려 인간적인 호감이 생겼다. 얼굴 잘난 것들은 얼굴값을 하기에 대체로 좋아하지 않는 그녀였지만, 잘 못 먹는 추어탕을 연신 맛있다며 흡입하는 그녀의 ‘예비 사위’는 얼굴만큼이나 마음씨도 단정해 보였다.

이 여사는 더 이상 아무 말 않고, 비어 있는 그의 잔에 물을 따라 주었다. 그리고 그를 따라 남은 추어탕을 천천히 입으로 밀어 넣으며 생각했다. 다음엔 혹시 좋아하는 음식이 따로 있는지 물어보아야겠다고. 기회가 닿는다면 직접 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기억해 두기로 했다.

“천천히 먹어, 체해.”

“예. 이따 들어가기 전에 커피 한 잔 할까요, 어머니?”

“……그러지, 뭐.”

도현재에게 웬만하면 추어탕은 먹이지 말 것.

* * *

다시 돌아온 집 안은 왠지 모르게 싸늘했다. 현재가 집을 찾은 건 근 며칠 만이었다. 은수가 입원을 한 이후, 병원 근처에서 지내면서 회사와 그곳만을 오가며 수시로 은수를 간호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느덧 은수도 꽤 안정을 찾아 며칠만 지나면 퇴원이었다. 고로 이제는 더 이상 집을 비울 이유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꼭 와야만 했다.

다들 외출을 했는지 집 안은 조용했다. 현재는 습관처럼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신발을 벗었다. 그런데 거실로 들어서려던 찰나,

“현수니?”

부엌 쪽에서 가느다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녀왔습니다.”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던 유 여사는 현재의 얼굴을 보자마자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컵을 손에 든 채 곧장 일어서더니 안방 쪽으로 향했다. 꼴도 보기 싫다는 태도였다.

그것마저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그도 오늘은 이대로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엄마.”

느닷없는 현재의 부름에 방문을 열려던 그녀가 멈춰 섰다. 하지만 고개나 몸을 돌리지는 않았다.

“엄마.”

“…….”

“얘기 좀 해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

쟤가 또 무슨 얘기를 할는지. 이젠 얘기를 한다는 말만 들어도 무서워질 지경이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대답했다.

“너랑은 할 얘기 없어.”

그러자 멀거니 서 있던 현재에게서 한숨이 배어 나왔다.

“……중요한 얘기라서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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