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속도위반 로맨스-104화 (104/128)

# 104

104. 자네가 있어서 참 다행이야 (1)

“아이, 고만 좀 울어! 지금 병원 가고 있잖아!”

한번 터진 은수의 울음은 좀처럼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현재는 다행히 연락을 받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왔고, 그 길로 그들은 곧장 응급실로 향했다.

처음 피를 보던 순간부터 시종일관 눈물을 쏟아 낸 탓에 눈, 코가 벌겋게 된 은수는 이 여사의 걱정 섞인 호통에도 하릴없이 훌쩍거리기만 했다.

혹시, 우리 별이 잘못된 거면 어떡해?

……그럼 나 별이한테 미안해서 어떡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엄마였건만, 금세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엄마로 전락한 기분이었다. 아기에 대한 미안함과 혹시 모를 불안감으로 인해 은수의 몸은 알몸으로 밖에 내던져진 사람처럼 덜덜 떨리고 있었다.

“너무 무서워서…… 별일 없겠지……? 그치?”

급박하게 운전을 하면서도, 현재는 룸미러에 비치는 은수의 모습을 연신 살폈다. 은수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과 똑같은 마음일 테니까. 돌이켜 생각하니 다 후회되는 것투성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병원에 데려갈 것을. 왜 괜찮다는 은수의 말만 믿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건지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었다. 평소엔 그렇게 유난을 떨었으면서 어째서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는…….

이제 와 자책을 해 봐야 소용없다는 걸 머리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운전대를 잡은 그의 손마디는 어느새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은수의 흐느낌은 그의 죄책감을 더욱 더 부채질했다.

이 와중에 셋 중에서 그나마 평정심을 찾은 건 역시 출산 유경험자인 이 여사였다. 그녀는 떨리는 은수의 손을 끌어와 그러잡고 굳은 목소리로 당부했다.

“마음 단단히 먹어.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뭔가 잘못됐다고 해도, 너는 이제 네가 아니라 애기를 생각해서 강해져야 돼. 얼른 가라앉히고 뚝 그쳐.”

“……으응…….”

연륜은 못 속인다던가. 여전히 불안하기는 했지만, 패닉에 빠진 은수를 노련하게 컨트롤하는 이 여사를 보며 현재는 조금 안심했다.

여러모로 좋지 않은 상황에서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금 은수의 옆에 이 여사가 있다는 점이었다. 그녀가 없었다면 이리 신속하게 달려오지도, 은수를 이만큼 달래 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저를 대신해 은수를 살뜰히 챙겨 주고 있는 이 여사 덕분에, 현재는 오롯이 운전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여자 형제가 없어 모녀지간의 감정적 교류란 것을 전혀 알 수 없었던 그였다. 그래서일까, 뒷좌석에 앉은 두 여자의 모습이 새삼 낯설고도 짠하게 다가왔다. 딸에게 엄마의 존재란 정말로 중요하구나. 과연 심하게 위태로워 보이던 은수조차도 이 여사의 말 몇 마디만으로 확연히 눈에 띄게 안정되고 있었다.

이 여사는 둥그런 배 위에서 자그맣게 떨고 있는 은수의 손 위로 제 손을 포개 천천히 다독였다. 경험상 이럴 때는 백 마디 말보다 따뜻한 손길 한 번이 낫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별일 없을 거야. 진정해.”

은수가 힘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겠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려 애써도 마음은 도무지 여유가 없었다. 눈빛이 오뚝이마냥 갈팡질팡하다 자꾸만 배로 종착했다.

제발 아무 일도 없었으면. 다른 것은 다 앗아 가도 좋으니 아기만큼은, 별이 하나만큼은 제발 무사하게 해 줬으면.

종교도 없는 주제에 은수는 어디 있는지 모를 신에게 그저 빌고 또 빌었다.

은수에게나 현재에게나, 병원까지 가는 길이 이토록 길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 * *

“다행히 태반 출혈은 아니고, 질 출혈이에요. 아기에게 이상이 있는 건 아니니까 안심하세요.”

“어휴…….”

세상에 이다지도 반가운 말이 있을까. 안심하라는 소리에 한시름 놓은 이 여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주사와 온갖 검사들로 인해 진이 빠져 힘겹게 의사를 올려다보고 있던 은수는 초조함에 잔뜩 말라 버렸던 입술을 꾹 깨물었다.

“……출혈이 왜 일어난 거죠?”

“뭐, 산모가 무리를 해서 그런 걸 수도 있고. 아니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런 걸 수도 있고요. 직장 다니시니까 더 각별히 조심하시라니까. 최근에 신경 쓰이는 일 같은 거 있었어요?”

출혈의 원인에 대해 애써 침착하게 묻던 현재도 결국 입술을 다물고 은수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뻔할 뻔 자다. 임신과 결혼 사실을 양가에 알리는 문제 때문에 맘을 너무 많이 쓰는 것 같더니, 아니나 다를까.

자괴감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아기도 물론 소중하지만, 그보다도 소중한 건 당연히 은수였다. 이렇게 아프고 힘들게 만들고 싶지 않았는데. 모든 것이 제 탓으로만 느껴져 현재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은수는 어느새 얼굴 전체에 핏기가 사라져 있었다. 입술은 물론이거니와 늘 수줍게 발갛던 볼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녀가 안쓰러워서, 현재는 괜히 이마로 몇 가닥 내려와 있는 머리카락들을 정리해 주는 척하며 은수의 까칠한 얼굴을 보듬었다.

“아무튼 빨리 와서 다행이긴 한데…… 자궁 문이 좀 열려 있어요. 조산기가 있으니까 입원을 하는 게 좋겠네요.”

“입원……이요?”

“네. 정확한 건 검사를 더 해 봐야 알겠지만 지금으로선 조산 확률이 아주 높은 건 확실해요.”

감길락 말락, 희미해져 있던 은수의 눈에 순간 이채가 띠었다. 살면서 입원을 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고, 더군다나 제가 조산을 하리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혹시 무슨 문제가 있다는 뜻은 아니겠지? 두려운 맘에 상체를 일으킨 은수가 섣불리 물었다.

“아기가 위험한 건 아니죠?”

그러나 의사는 이미 은수 같은 산모들을 많이 봐온 듯, 능숙하게 대답했다.

“그런 건 아니에요. 최대한 출산을 늦추기 위해서 하는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 네.”

“예정일에 정상적으로 분만하는 게 가장 좋기는 하겠지만, 조산을 하는 경우도 꽤 있어요. 일단 경과를 좀 지켜보죠. 애가 누구를 닮았는지 성질이 급하네요.”

딱딱하게 굳은 분위기를 감지한 의사가 괜한 농담을 던졌다. 그제야 은수와 현재는 조금 민망한 듯 미소를 지었다. 임신 자체도 성급했는데, 이제는 아이마저도 급하게 나오려고 하는 게 어쩐지 아귀 안 맞는 수레바퀴가 덜커덩덜커덩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불안했다.

의사가 병실을 떠난 뒤, 현재는 옆에 있던 물수건을 들어 눈물 자국이 번져 있는 은수의 얼굴을 조심스레 닦아 주었다. 어찌나 걱정을 했는지 하룻밤 사이에 파리해진 여자의 모습이 너무나도 속상했다.

“이제 안심해요, 은수 씨. 걱정할 거 없다잖아요. 그리고 나도 있고…… 어머님도 계시니까.”

“……네.”

“왜 또 울고 그래요.”

어느새 또 눈물이 흐르고 있었나 보다.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눈물을 얼른 닦아 내려는데, 현재의 따뜻한 손이 대신 그것을 닦아 내며 은수의 볼을 감싸듯 쥐었다.

“이제 그만 울어요. 자꾸 울면 붓는데.”

“……별이한테 미안해서요.”

은수의 목소리가 먹먹하게 젖어들었다. 뱃속의 아기를 생각하면 왜 진작 민감하게 굴지 않았는지 통탄스러웠다. 꼴에 엄마라면서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왜 몰랐던 걸까. 임신을 한 순간부터는 대수롭지 않은 게 하나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미련하게 일을 더 하겠다고 고집 부린 거며, 배가 뭉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넘겨 버린 것 등이 하나하나 떠올라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진즉에 알았, 어야 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조그만 핏덩이가 이 속에서 말도 못 하고 얼마나…….

힘겹게 토해 내는 문장들 사이에 울음기가 섞여 들고, 숨이 가빠서 말을 잇기도 힘이 들었다.

“……알아요, 은수 씨 맘.”

자상한 눈길로 은수를 바라보던 현재가 그녀의 이마 위로 제 입술을 내렸다. 모든 게 괜찮을 테니 걱정 말라는 의미였다. 이렇게 완전히 안심시켜 주지 않으면 은수는 이 모든 게 다 제 탓이라고만 여길 것이 분명했다.

“나도 신경 못 써서 미안해요. 일찍 병원에 데려왔어야 하는 건데. 너무 무심했어요, 내가.”

“아니에요. 현재 씨 잘못 아니에요.”

“그래요. 내 잘못이 아니면 은수 씨 잘못도 아니에요. 알죠?”

“…….”

“자꾸 자책하면 별이도 더 힘들어요.”

쉽게 진정되지는 않았지만, 한참 동안 얼굴 이곳저곳을 닦아 주며 달래 주는 현재 덕분에 은수는 비로소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일이야 어찌 됐건 지금 별이는 무사하다고 했으니까. 그걸 확인한 것만으로도 한결 마음이 놓였다.

은수가 완전히 진정하고 다시 자리에 누울 때까지 잠시 기다려 준 현재는 물수건을 제자리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좀 쉬어요, 잠도 좀 자고. 난 잠시 나갔다 올게요.”

“네.”

“……어머님도 잠시 저랑 나갔다 오시죠.”

갑자기 쏠린 은수와 현재의 눈초리에, 뒤편에 앉아 안타깝게 은수를 바라보고 있던 이 여사의 눈이 커다래졌다. 갑작스러워서이기도 했지만, 현재가 먼저 말을 걸어 온 것이 뜻밖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여사가 망설이고 있는 사이 은수도 얼른 거들었다.

“그래, 엄마. 엄마도 좀 쉬다 와. 밤새 한숨도 못 자고…….”

“아…… 괜찮은데, 나는.”

“아직까지 식사도 제대로 못 하셨잖아요. 같이 나가시죠, 어머니.”

지금껏 은수가 걱정이 되어 배고픈 줄도 모르고 있던 그녀였다. 그 말을 듣자 이제야 슬그머니 허기가 올라오는 듯도 했다. 이제 뭐라도 먹기는 해야겠는데, 하지만…….

이 여사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런데 그때, 은수가 점입가경으로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빨리 가, 엄마. 나 혼자 좀 쉬고 싶어.”

“…….”

“둘이 그러고 있으니까 오려던 잠도 안 온단 말이야. 응? 빨리.”

……저게 엄마 속도 모르고!

의사를 만나고 간신히 평정심을 찾고 나자 불편한 상황이 피부로 다가왔다. 지금까지 현재와 단둘이 있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행여 함께 밥을 먹는다 해도, 밥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도 모를 것이 분명했다. 딸의 ‘남자 친구’조차 만나 본 적이 없는데, 하물며 결혼하겠다고 나선 ‘예비 사위’와는 그 어색함을 도대체 어떻게 견딘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가자는 걸 거절하기도 좀 그렇고…….

잠시 주저하던 그녀는 결국, 둘 다 빨리 나가라고 윽박지르는 은수를 야속하게 쳐다보며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나갔다 온다, 엄마.”

“응. 빨리 가, 빨리.”

그들이 나간 뒤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이 사라진 쪽을 잠깐 쳐다보던 은수는 문득 엷은 미소를 지었다. 몇 분 뒤 둘의 상황이 절로 눈에 그려지는 듯했다.

‘……어쩌면 이게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으려나.’

뭐, 어떻게든 되겠지. 우리 엄마뿐만 아니라 현재 씨 어머님과도…….

눈을 내리깔며 가볍게 고개를 흔든 그녀는 자리에 도로 누워 잠을 청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