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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위반 로맨스-103화 (103/128)

# 103

103. 일촉즉발 (2)

물론 그녀에게서 유한 반응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나올 줄도 몰랐기에, 현재와 은수는 잠시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유 여사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이렇게까지 된 마당에 순순히 받아들여 주면 어디가 덧나나, 싶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말이 쉽지, 그녀는 드라마 속의 온화하기만 한 예비 시어머니는 결코 아니었다. 머리로는 받아들여야지, 받아들여야지 하면서도 맘은 그렇지가 못했다. 지금까지 사실을 숨긴 데 대한 괘씸함, 아들을 향한 미움, 안타까운 마음 등이 어지럽게 섞여 유 여사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은, 당분간 그들을 무작정 피하고픈 심정이었다. 전쟁 같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저를 쳐다보는 아들 내외의 눈빛을 ‘당황스러움’으로 해석한 그녀는 착잡한 말투로 읊조렸다.

“야속하다 해도 어쩔 수 없어. 이러다 언젠가 풀어지긴 하겠지. 문제는, 그게 언제가 될지 나도 정확히 모르겠다는 거지만.”

“…….”

“아가씨가 밉다거나 그런 건 절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요. 이건 순전히 내 문제야.”

유 여사의 눈을 들여다보던 은수가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이건 진정한 의미의 허락이라고 볼 수 없다. 아이 때문에 마지못해 허락하는 것이 빤한데 마냥 기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한동안 잠잠하던 배가 어쩐지 콕콕 쑤시고 뭉치는 것 같았다. 이미 각오한 것이면서도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그래도, 조만간 상견례는…… 해야겠지.”

“…….”

“아가씨 부모님은 이 일에 관해 뭐라고 하시던가.”

그 와중에 아무것도 모르는 유 여사는 아주 당연하게 ‘부모님’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다. 그들처럼 집안 사정이 비슷한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니 그리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아무것도 아닌 말 한마디조차도 은수의 맘을 상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현재였기에 엄마의 말을 잽싸게 정정했다.

“……저기, 엄마. 은수 씨도 우리 집이랑 사정이 같아요.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

그 대목에서 은수의 눈꺼풀은 더욱 밑으로 내려앉았다.

“……그, 그래?”

반면 유 여사의 눈빛은 곧장 묘하게 변했고, 은수는 그것을 바로 캐치했다. 또 한 번 마음이 불편해지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그녀는 정상적인 가정의 며느리를 받아들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저에게는 아픔이 있더라도 자식만은 행복하게 자란 짝을 만났으면 하는 게 부모 마음이니까.

“…….”

그런 관점에서 은수는 낙제점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한 그녀의 속이 쓰렸다.

어떡하면 어머니의 맘을 움직일 수 있을까.

임기응변에 능하던 그녀답지 않게, 계속해서 생각해 봐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상황이 워낙 여러모로 불리해서일까. 오히려 자꾸 비관적인 생각만 들었다. 결혼하겠다는 마음만 먹으면 모든 게 일사천리로 해결될 줄 알았는데……. 또 그가 했던 말처럼, 다소 갑작스러울지라도 막상 직접 만나게 되면 나를 맘에 들어 하시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도 했었다…….

하지만 그 모두가 오산이었다는 것을, 은수는 순간 뼈저리게 깨달았다.

“……아무튼, 그 얘긴 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일단 밥부터 먹자.”

“…….”

“아가씨도 들어요.”

“……네.”

입 안을 뒹구는 매끈한 밥알들이 모래알처럼 까끌까끌했다.

* * *

시골에서 지내던 사람이 갑작스레 도시 생활을 하게 되면 그만큼 불편한 것이 없다. 은수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어떻게든 하나 있는 딸내미는 부득불 상경시키려 노력했던 이 여사지만 정작 그녀 본인은 서울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이런 도시는 여기저기 나다니기도 좋고 유익한 생활을 누리기에도 좋았지만, 그럼에도 정이 붙지 않았다. 미세 먼지의 영향으로 황폐해진 공기, 그리고 정확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어딘가 삭막한 듯한 분위기 같은 것들이 맘에 들지 않는 탓이었다. 은수 없이 어딜 나간다는 건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는 일이었고, 그나마 은수에게 먹일 것을 챙기느라 바쁜 것이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하릴없이 허송세월만 보낼 뻔했으니까.

이 초유의 사태만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집구석에서 전화통이나 붙잡고 신나게 수다를 떨어 댔을 텐데. 이 여사는 널어 둔 빨래를 걷어 와 개면서 한숨을 쉬었다. 한탄해 봐야 뭐 하누. 현실은 변하지 않는데.

그녀의 눈길이 문득 안방에 닿았다. 그 곳엔 은수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출근할 때는 죽상을 하고 있다가도 귀가할 때면 늘 밝은 얼굴이 되어 쌩쌩하게 조잘대던 은수였는데, 웬일인지 이번 주엔 집에 오자마자 족족 방으로 직행해 곯아떨어지곤 했다. 말은 안 해도 사실은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오늘 저녁도 먹기 싫다는 걸 아기를 생각하라고 사정사정하여 억지로 먹였다. 아주 상전이 따로 없어요. 어쨌든 덕분에 이 여사는 홀로 일일 연속극을 보고, 밀린 집 안 청소 등을 하며 저녁 시간을 보내야 했다.

“…….”

잠자리에 든 시각은 밤이었는데 통 잠이 오지 않아 시계를 확인하니 벌써 새벽이었다. 시간이 이렇게나 빨리 가다니. 원래 본가에서도 마룻바닥에 이불 깔고 자는 그녀인지라 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 일도 아닌데, 오늘따라 괜히 허리도 배기는 것 같고, 오려던 잠이 자꾸만 물러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온갖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기 마련이다. 결국 이런저런 생각에 이불을 뒤척이는데, 그때 그런 그녀를 깨우듯 침대 위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잠에서 깬 은수였다. 워낙 이른 저녁부터 잠들었기에 벌써 일어난 모양이었다.

“어, 깼어? 다 자서 이제 잠도 안 올 텐데 어떡해, 너. 엄만 이제 자려는데.”

“……엄마.”

“참, 왜. 왜 자꾸 불러싸.”

이제 피곤함은 좀 가셨을라나. 왠지 모르게 무거운 몸을 일으킨 이 여사는 은수가 누워 있는 침대 맡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어쩐지, 불을 켜지 않아 아직 어둠 속에서 불분명하게 보이고 있는 은수의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눈을 떴다 감았다 하는 속도도 굼벵이처럼 느렸다.

걱정이 되는 맘에 이 여사는 은수의 가슴 아래로 내려간 이불을 끌어올려 잘 덮어 주며 물었다.

“왜 그래. 무슨 꿈 꿨어? 악몽 꾼 거야?”

“……으응…….”

신음 같은 대답. 반사적으로 반응한 이 여사의 손이 은수의 얼굴을 고이 쓰다듬었다.

“…….”

그런데 그 순간, 이상한 물기가 그녀의 손에 곧바로 닿았다. 처음에는 얘가 잠결에 울었나, 싶었지만 천천히 더듬어 보니 그건 아니라는 직감이 빡 섰다.

관자놀이와 턱 주변으로 느껴지는 이 자잘한 물기는 눈물이 아니라 땀에 가까웠다. 그것도 다 식어 미지근한 땀.

“……어머, 얘가 또 웬 식은땀이 이렇게 나?”

얼마 전에도 한번 이랬었던 것 같은데.

잊혀 있던 기억을 떠올린 그녀는 불안한 목소리로 은수의 이름을 되풀이해 불렀다.

“은수야? 정신 차려 봐. 은수야!”

어디가 심각하게 아프기라도 한 걸까.

덜컥 겁을 집어먹은 그녀는 얼른 은수를 흔들어 깨웠다. 하지만 일어나기엔 영 힘이 없는지, 은수는 여전히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채로 드문드문 말하고 있었다.

“느낌이…… 이상해, 엄마…….”

“……느낌이 이상해? 왜, 어디가?”

뭐가 어떻게 이상하다는 거야?

가슴이 급격하게 쿵쾅쿵쾅 뛰는데, 그런 이 여사의 귀로 실눈을 뜬 은수가 중얼거리는 작은 목소리가 느릿느릿 들려왔다.

“배도 아프고…… 뭔가 축축한 거 같기도 하고…….”

“……뭐?”

배가 아프고 축축하다. 그건 임신부에겐 당연히 불길한 징조였다.

그녀는 더 생각할 새도 없이 은수를 감싸고 있던 이불부터 옆으로 제쳤다. 그런 그녀의 눈에 보인 것은…….

“……!”

침대 시트에 물든 피였다. 매우 소량이기는 했지만, 그 검붉은 자국은 분명 피였다.

“이게 무슨…… 이, 이거…… 피 아니야?!”

……피?

낯선 단어에 부리나케 몸을 일으켜 아래를 확인한 은수는 그 상태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허어…….”

그것은 제 눈으로 봐도 피가 맞았다. 이제껏 하혈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임신 중에 생리를 할 턱은 더더욱 없었다.

설마, 아이가 잘못되기라도 한 걸까? 아니, 갑자기 왜?

이런 이유로는 한 번도 든 적이 없었던 불안감과 무서움이 은수를 엄습했다. 자동적으로 손이 덜덜 떨렸다. 품에 안아 본 적도 없는 아이가 걱정된 나머지, 저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

이걸 어쩐다. 혹시나 큰일이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이 든 이 여사는 당장 손에 잡히는 대로 짐을 꾸리며 멍하니 앉아 있는 은수를 향해 소리쳤다.

“일어나. 빨리 병원 가야지!”

“이, 이 밤중에?”

“그럼 지금 이 지경인데 병원을 안 갈래?!”

“……어어……! 가, 가야지…….”

늘 똑똑하던 딸내미는 방금 막 잠에서 깨서인지, 아니면 저에게서 나온 피를 보고 너무나도 놀란 건지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는 듯했다.

병원을 가기는 해야 한다. 문제는…….

“근데…… 어떻게 가?”

병원까지 어떻게 가느냐는 것.

이 여사는 얼른 머리를 굴렸다.

차는 있지만 운전을 할 수 있는 은수는 이 상태고, 택시를 부르자니 하혈이 계속되면 곤란해질 것 같았다. 더더군다나 그녀는 병원이 어디 있는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이 부근의 지리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급한 마음으로 고민했지만…… 사실, 그녀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해답은 따로 있었다.

그녀의 다급한 혼잣말이 작게 흩어졌다.

“……현재!”

“……어? 뭐라고?”

“도현재! 그 청년한테 연락해 봐, 얼른! 집도 가깝다며!”

“현재 씨……?”

“휴대폰 어딨어!”

“……여기 어디 있었는데…….”

경황이 없어 폰이 어디 있는지조차 가늠하지 못하는 은수를 대신해 이 여사가 그녀의 머리맡을 황급히 더듬거리자 곧 묵직한 것이 손에 잡혔다.

“여기 있네.”

폰을 얼른 손에 들고 홀드를 풀었지만, 가뜩이나 침침해진 눈에 은수의 폰 글씨는 무척이나 작았다. 급한 와중에 짜증이 팍 났다.

“아이, 요즘 폰들은 왜 이렇게 글씨가 작은 거야!”

연락쯤은 은수에게 하도록 맡겨도 될 것을, 당장 눈앞에 펼쳐진 핏자국 탓에 잘 알아먹을 수도 없는 화면을 터치하는 그녀의 손길이 급했다. ‘현재씨♥’라고 저장된 이름이 무척이나 아니꼬웠지만, 그런 게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로.

현재의 번호를 확인하는 순간 그녀는 망설임 없이 전화를 걸었다. 컬러링 없이 정직하게 넘어가는 연결 음이 마치 10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딸깍,

[……은수 씨……?]

막 자다 일어난 듯 잠긴 그의 목소리가 이 여사의 귓가로 들려왔다. 은수에게서 걸려 온 전화임을 의식해서인지 또렷한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는 것이 느껴졌다. 혹시 늦은 시간이라 안 받으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기우였다.

예의고 뭐고 차릴 겨를도 없이, 다짜고짜 현재의 말꼬리를 잘라 낸 이 여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나 은수 엄만데! 당장 집으로 와요! 빨리!”

[……예? 은수 씨한테 무슨 일 있습니까?]

정말 모를 일이었다. 어째서 이 급박한 상황에, 딱 한 번밖에 보지 않은 그 얼굴만 미끈한 놈이 당연하다는 듯 제일 먼저 떠올랐는지. 어쩌면 지금 은수에게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자신보다 이 ‘몹쓸 놈’이 꼭 필요하다는 걸 내심 알고 있었는지도. 심술이 난다고 고집을 부릴 타이밍은 아니었다.

“있어요. 그러니까 여기로 와요!! 얼른!!!”

정신없이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속이 상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오로지 은수를 위해서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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