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102. 일촉즉발 (1)
고개를 숙인 현재가 자조하듯 읊조렸다.
“……남자가 돼서 버팀목이 돼 주진 못할망정 기대기나 하고, 별로죠.”
그런 그를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고개를 슬슬 저었다. 그건 오히려 그녀가 늘 바라 왔던 일이었다.
“아니요. 난 오히려 나한테 좀 기대 줬으면 좋겠는데요.”
“…….”
“사랑하는 사이잖아요. 나한테 안 기대면 누구한테 기대요. 또 이 대리한테 기댈래요?”
우울한 분위기를 환기시켜 보려는 시도. 속내가 빤히 보이는 은수의 너스레에, 시무룩하던 현재도 그만 픽 웃어 버렸다. 하지만 그 웃음기는 이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은수 씨한테는 늘 어른스러워 보이고 싶었어요. 내가 은수 씨보다 어리단 것 때문에라도…… 속 좁고 애 같은 모습은 절대로 보여 주기 싫어서.”
“…….”
“신경 안 쓰는 척했지만 그게 잘 안 되더라고요. 그래도 지금까지는 나름대로 잘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
“요즘은 자꾸 초심을 잃어버리네요, 이상하게.”
……쓸데없는 생각은.
은수가 보기에, 현재는 원래가 그런 사람이었다. 또래의 다른 남자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어른스럽고 무던한. 하지만 그런 굴레가 아직 어린 나이인 현재에게는 오히려 속박이 될 수도 있었다.
홀로 된 어머니를 위해 부득불 의젓해져야 했을 그. 그리고 이제 한 가정의 가장이 될 그는 원치 않아도 어른이 되어야 했다. 그래야만 그녀와 동등한 위치에 설 수 있을 테니까.
은수는 그가 벌써부터 그런 부담을 갖게 되는 것이 맘에 걸렸다.
“난 있는 그대로의 현재 씨가 좋은 거예요. 좀 유치하고 애 같더라도, 그건 또 그거대로 좋다구요, 난.”
“…….”
“원래도 그렇긴 했지만, 이제 나 어디 가면 능력 있단 소리만 잔뜩 들을 걸요. 나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데, 그것도 겁나 잘생긴 남자를 꼬셨다고.”
그제야 현재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웠고, 은수는 살짝 안도했다.
이제부터는 장난으로라도 나이 얘기는 하지 말아야지. 그렇게 다짐도 했다.
“……아무튼, 이제 속은 좀 후련한 것 같아요?”
“잘 모르겠어요. 시원한 것 같기도 하고, 섭섭한 것 같기도 하고.”
“……안 서운해요? 이제 아버지랑은 완전 쫑인 것 같은데.”
“……그렇진 않아요.”
거짓말. 그러면서 왜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건데.
사실 아까 전에 들었던 말은 제삼자인 은수에게도 충격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남처럼 지내자는 말을 그렇게 당당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명색이 아버지란 사람이.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애써 밀어 넣고 있는 것 같은 남자를 보며 은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마도 늘 혼자서, 이런 식으로 슬픔을 달랬겠지.
“현재 씨.”
“…….”
“슬플 땐 원래 우는 거예요, 참는 게 아니라.”
“…….”
그러니까…….
그녀가 기어 옆에 축 늘어져 있는 현재의 손을 꼭 잡았다.
“울고 싶음 울어요, 바보같이 참지 말고.”
“…….”
“내 앞에선 울어도 되니까.”
그 말이 촉매가 되었을까. 넌지시 들여다본 그의 눈가는 이미 촉촉해져 있었다.
덩치는 나보다 두 배면서, 이럴 땐 진짜 어린애 같네. 그녀에게서 무심코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에이, 인심 썼다.”
“…….”
“이리 와요.”
그의 쪽으로 돌아앉은 은수가 작게 박수를 짝짝 치고는 팔을 떡하니 벌렸다. 현재는 그 모습 그대로 멀뚱멀뚱 그녀를 쳐다볼 뿐이었다.
은수가 여전한 자세로 한쪽 눈을 찡긋했다.
“내가 안아 주겠다구요. 싫어요?”
“…….”
“어서요. 지금 아니면 안 안아 줄 건데.”
그녀가 먼저 이런 식으로 적극적인 스킨십을 허락하는 건 극히 드문 일이었다. 평소라면 고민도 없이 바로 안겨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모양새가 좀 그렇지 않나.
현재는 눈을 내리깔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
하지만 빙긋 웃고 있는 여자의 얼굴을 보자, 그는 이내 고민을 접기로 했다.
그래, 어차피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렸는걸.
슬픔으로 인해 일렁거리고 있는 가슴을 애써 감추며, 현재가 서서히 그녀의 품에 안겼다.
끌어안은 몸이 솜사탕처럼 포근했다. 여자의 좁은 가슴팍이 이 순간만큼은 마치 태평양처럼 넓게 느껴졌다. 그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
이제는, 언젠가 그가 그녀에게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줄 차례였다.
제게 기댄 남자의 뒤통수를 조심스럽게 쓸어 주며, 은수는 그의 귓가에 자그맣게 속삭였다.
“……괜찮아요. 다, 괜찮아요.”
이제는 그에게 웃을 일만 가득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서.
그리고 잠시 뒤, 딱딱하게 굳어 있던 남자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거렸다. 울음소리도 조금씩 새어 나왔다.
뒷머리를 쓰다듬던 은수의 부드러운 손길은 어느새 가벼운 토닥거림으로 변해 있었다.
남자를 고쳐 안은 그녀가 작게 미소 지었다. 배 속의 별이도 아빠를 위로하듯 둥둥거렸다.
“……사랑해요.”
그러니까 이제는, 아무 걱정 말아요.
* * *
은수는 게임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래도, 주어진 미션을 하나하나 성공하는 재미는 꽤 쏠쏠한 것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잠깐 동안 RPG 게임 하나에 심취해 있을 때 은수는 그것을 몸소 느꼈다.
마뜩찮은 눈길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중년의 여자를 보면서, 은수는 요즘 자신이 제 인생의 퀘스트들을 한 개씩 깨어 나가고 있는 것 같단 생각을 했다. 특히, 이번 퀘스트는 개중에서도 가장 빅 이벤트였다. 난이도 최상에,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열쇠. 다만 그와 다른 것은, 성공해도 별다른 보상이 따로 없다는 점 하나였다.
아, 아니지. 보상은 이 남자와 결혼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일까.
그녀의 초조한 눈길이 옆에 앉은 현재에게 닿았다. 그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매우 긴장한 얼굴이었다.
“허, 참…….”
테이블 너머로 잔뜩 불러 있는 은수의 배를 보며, 현재의 엄마 유 여사는 짧은 탄식만 간헐적으로 내뱉었다. 떡 벌어진 한정식 상이 그녀의 앞에 펼쳐져 있었지만, 둥그런 배 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예정일이 대체 언제야.”
“……두 달 정도 남았어요.”
제가 물어본 것이면서도, 바로 대답해 오는 아들이 밉기만 했다.
둘째 아들을 있는 힘껏 째려본 그녀는 눈길을 돌려 은수를 바라보았다.
“이름이, 은수 씨라고 했나?”
“……예, 어머니.”
“나이가, 정확히 몇이지?”
“……서른둘입니다.”
직접 보니 서른둘이라 하기에는 다소 나이가 많지 않아 보이는 여자애였다. 여리하고 여려 보이는 게, 팀장이라는 것치곤 카리스마도 영 없어 보였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그녀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이야기는 현재한테서 대충 들었어요. 아무래도 우리 아들이, 아가씨한테 실수를 했던 모양인데.”
“…….”
“일단은, 내가 엄마로서 미안해요.”
미안하다니. 대체 뭐가?
그녀의 사과에 깜짝 놀라 송구스러워진 은수가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닙니다. 이제야 찾아뵌 제가 더 죄송…….”
“솔직히 말할게요.”
그러나 그녀는 은수의 말을 단호하게 싹둑 잘랐다.
“……나는 이게 무슨 일인지 아직도 도통 모르겠어.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애가 갑자기 결혼을 한다니. 그것도 애까지 만들어서.”
“…….”
“아가씨가 제일 힘든 입장이겠지만, 나도 지금 너무 억울하고 답답해. 정말 미치겠어.”
“……네,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눈앞의 여자애만을 탓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애를 혼자 만드는 것도 아니고, 이 애라고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을까. 그렇기에 가슴이 더욱 답답했다.
“……제일 이해가 안 되는 건, 왜 이렇게 끌었냐는 거야.”
“…….”
“결혼을 하고 싶었으면 진즉에 찾아오든가. 왜 이렇게 늦게 와서 사람을 복장 터지게 만드냐고. 응?”
현재도 현재지만, 그녀는 사실이 밝혀진 후에도 아무 소식이 없었던 은수가 못마땅했다. 같은 여자로서 혼전 임신을 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일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해하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감감무소식이었던 건 좀 너무하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죄송해요. 어떡해야 할지 고민하느라…….”
은수의 말끝이 모래처럼 흩어졌다.
그녀의 앞에서, ‘그때는 결혼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알려드릴 생각을 미처 못 했다’라고는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랬겠지. 그래야지, 당연히.”
누군 속이 다 타서 닳아 없어지게 생겼는데.
혼자서 아들 놈 멀쩡하게 잘 키워 놨더니 첫 회사에서 덜컥, 그것도 제 상사랑 애를 만들어 오고. 현재의 일만 생각하면 가만히 있다가도 부아가 치미는 그녀였다.
“이제 애 낳을 때도 다 됐는데, 지금 와서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야.”
“…….”
“그냥 니네가 판 벌인 대로, 가만히 보고만 있으면 되는 거니?”
차갑게 쏘아붙이는 엄마를 향해 현재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제 불찰이에요.”
“…….”
“은수 씨는 얼른 가자고 했었는데, 제가 말렸어요. 다 제 잘못이에요.”
“……자꾸 이 애 역성만 드는구나, 너는.”
나지막이 터져 나온 그녀의 지적에 현재가 입을 다물었다. 실로 오랜만에 듣는 엄마의 목소리이건만 왠지 모르게 낯설기만 했다.
폭탄선언 이후, 엄마는 좀처럼 그와 대화를 나누려고 하질 않았다. 불같이 화를 내던 것도 잠깐이었을 뿐, 얼마 안 가서 그녀는 아예 둘째 아들의 존재를 지우기라도 하려는 듯이 철저히 현재가 없는 사람인 양 굴었다. 그냥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철석같이 믿고, 늘 자랑스러워 마지않았던 아들에 대한 실망감이 정말로 대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된 시점에 잘잘못을 가르고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 애까지 있는데 결혼을 반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유 여사는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얼른 결혼 준비해. 어차피 지금 상태로 바로 하는 건 무리일 거고, 애 낳고 나서도 한참은 몸 풀어야 하니까 미리 해 놓으라고. 때 되면 바로 할 수 있게.”
“……네.”
현재와 은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대신, 너희들끼리 준비해. 난 신경 끌 테니까.”
“……엄마.”
그게 무슨…….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아들을 향해, 유 여사는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희들이 이렇게 만든 거야. 조금만 일찍 알았어도 이렇게까지 화가 나지는 않았어.”
“…….”
“너희들이 시작한 일이니 너희들끼리 알아서 잘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