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
101. 당신 아들의, 아들을 가졌습니다 (2)
“…….”
“…….”
현재의 등장과 함께, 어느샌가 대표이사실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져 있었다.
붕어빵처럼 닮아 있는 부자(父子)는 잠시 동안 서로를 말없이 빤히 쳐다보았다. 마주 선 꼴이 어찌 보면 데칼코마니 같아 보일 정도였다.
그러다, 정규가 먼저 무겁게 입술을 떼었다.
“……오랜만이구나.”
이 두 사람은 대체 얼마 만에 보게 된 걸까. 그녀로서는 그 시간을 감히 가늠도 할 수 없었다.
은수의 눈이 그들을 번갈아 쳐다보았고, 그러는 사이 현재의 대꾸가 한 템포 늦게 흘러나왔다.
“네, 오랜만이네요.”
“…….”
“오랜만에 이런 식으로 만나고 싶지는 않았는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이었지만 씁쓸함은 그대로 묻어 있었다.
정규는 그를 애써 외면했다.
“네 엄마는 잘 지내니. 생활하기에 어려움은 없고?”
“……없습니다, 그런 거.”
“그래? 난 또, 예상치 못한 손님이 한 분 찾아왔길래 뭔가 부족한 게 있어서 그러나 싶었지.”
“…….”
“결혼 준비하려면 필요한 게 많겠구나. 벌써 혼수도 생기고.”
그의 눈길이 슬그머니 은수의 배로 향했다. 그 덕에 긍정적인 뉘앙스가 아니라는 것을 현재도, 은수도 알 수 있었다. 이제 막 결혼하려는 아이들이 벌써부터 애나 가졌다고, 속으로 비웃고 있을지도 모르지. 패륜이나 저지른 주제에 뭐라도 되는 것처럼 거들먹거리는 그의 태도는 그들로 하여금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어쨌거나 정규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방금 전 은수와 단둘이 있을 때와는 달리, 현재의 등장으로 인해 그는 오히려 기세등등해진 듯했다.
“너 여기 온 거, 네 형도 아니?”
“…….”
“그렇잖아도 현수가 며칠 전에 찾아왔었다.”
“……형이요?”
갑작스레 현수에 관한 얘기가 나올 줄은 몰랐기에,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현재가 퍼뜩 놀라며 반문했다.
“네가 곧 결혼을 한다고 미리 알려 주더구나. 혹시 모르니 네 곁에 얼씬도 말라기에 알았다 했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이 아가씨는 오늘 헛걸음을 한 거지. 오려면 네가 올 것이지 왜 여자 친구를 앞세우고 그러니. 또 뭘 바라고.”
“…….”
“결혼 준비 때문에 그런 거라면 내가 어느 정도 보태 줄 순 있지만, 그렇게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을 텐데.”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그녀의 눈빛에 빠직 날이 섰다.
뭐야. 내가 지금, 뭐 얻어 내려고 여기 왔다는 거야?
이러니저러니 해도, 오랜 시간 닿지 못했던 부자간의 해후였다. 그래서 웬만하면 얌전히 지켜보고 있으려 했는데, 듣다 보니 참기가 영 힘이 드는 것이다.
보다 못한 은수는 결국 그들의 대화 사이에 끼어들고 말았다. 성격상 아닌 건 아니라고 정정해 주어야 속이 편한 그녀였으니.
“……거듭 말씀드리는데, 제가 오늘 여기 온 건 단순히 결혼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랬다면 청첩장이라도 하나 들고 왔겠죠. 물론 초대는 안 했겠지만.”
“…….”
“전 그저, 현재 씨가 어떤 아버지 밑에서 자랐었는지…… 궁금했을 뿐입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습니다만 충분히 알 수 있었어요, 대표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은수의 조용하지만 날카로운 말에, 정규가 설핏 웃고는 물었다.
“그래, 민 팀장님 눈엔 내가 어떤 사람처럼 보입니까.”
……솔직히 말해도 되려나.
떠오르는 것들을 고스란히 다 말해 주고 싶었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최대한 축소하여 대답하기로 했다. 현재의 생물학적 아버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제 핏줄이라곤 하나도 신경 쓰지 않는 안하무인에, 철면피에, 양심 불량, 불륜남으로 보입니다.”
“…….”
그녀의 말에 남자는 잠깐 멈칫하더니, 너무 어이가 없는 나머지 이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첫인상부터 알아봤지만, 보면 볼수록 맹랑하고 재미있는 아가씨네. 과함을 넘어서 무례할 정도로 솔직하고.”
“…….”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 간에 기본 예의라는 게 있지 않나? 어차피 남이니, 시아버지 대하듯 어렵게 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
“너무 일찍 높은 자리에 올라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모양이로군. 일 잘하는 것만큼 예의범절을 지키는 것도 중요한데 말이야.”
……지금 누가 누구더러 예의를 운운하는 거지. 뭐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더니.
황당해진 은수는 보란 듯 비웃음을 날렸다.
“전 철저히 받은 만큼 돌려주는 주의라서요. 맘에 없는 말이나 행동 못 합니다. 아니, 안 합니다.”
“…….”
“제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분인데, 도대체 뭐가 예쁘다고 예의를 차려 드리겠어요?”
라프레즈의 최연소 팀장이라는 여자는 풍문으로 익히 들어 왔듯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존댓말로 사람을 후벼 파는 재주가 꽤 수준급이었다. 보고 있는 게 다 힘들 정도로 배가 부풀어 있는 여자의 말엔 차마 대꾸하기 어려운 힘이 있었다.
“…….”
마침내, 그녀와 말을 섞으면 섞을수록 저의 손해라는 사실을 깨달은 남자는 아무 말 않고 현재를 향해 몸을 틀었다. 그리고 뻔뻔하게도 근엄한 아버지의 얼굴을 했다.
“현재야.”
“…….”
“다시는 여기 오지 마라.”
그 말에, 가만있던 현재가 불퉁하게 눈을 치켜떴지만 정규는 태연했다.
“난 느이 엄마, 그리고 너랑 현수한테 정말 할 만큼 했어. 이젠 그냥 남처럼 지내는 게 서로 편하지 않겠니?”
“…….”
“현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남 눈도 있는데 자꾸 이렇게 찾아오면 내가 입장이 아주 곤란해져.”
“…….”
“알겠니.”
잠시 말이 없던 현재는 이내 피식, 불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소 그답지 않은 표정이었다.
“……아아, 댁에 계신 분이 고까워하시기라도 하나 보죠.”
“…….”
“걱정하지 마시라고 전해 주세요. 피차 착각하지도 마시고요. 오늘 내가 여기 온 건 당신 때문이 아니라…….”
“…….”
“오로지 이 사람 때문이니까.”
현재의 손이 은수의 손을 덥석 그러쥐었다.
불시의 행동에 놀란 은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힘은 평소보다 무척 거셌다.
“이야기 다 끝나셨으면, 이제 제가 얘기해도 됩니까?”
“…….”
“맞아요. 저 이 사람이랑 결혼해요. 머지않아 곧 아빠도 되고요.”
“…….”
“하지만…… 저는 절대, 아버지 같은 아버지가 되지는 않을 거예요.”
제 아버지를 힘껏 노려보는 그의 눈빛은 강렬하고 확고하기만 했다.
그러나 옆에 선 은수는 그 눈빛에서 슬픔이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왠지 모르게.
“어릴 땐…… 그냥 내가 아직 어려서, 뭘 몰라서 아버지를 이해 못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나도 어른이 되고,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면 그땐……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
“그런데 막상 아버지가 되고 나니까, 더 용서가 안 돼요.”
“…….”
“아직 품에 안아 보지도 못한 아이조차도 이렇게 애틋한데, 당신은 어떻게 나랑 형을 그렇게 매몰차게 버렸을까. 왜 우릴 저버리고 그 여자한테 갔을까! 아직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요.”
나지막했던 현재의 목소리는 어느새 울분에 차 있는 목소리로 변했다. 숨을 한번 들이마신 그가 이어서 뇌까렸다.
“그러니까 평생 그렇게 사세요. 만에 하나 나중에 정신을 차리시게 된다면 그때 후회를 하든 속죄를 하든 하시고요. 이제 우린 신경 안 쓸 테니까, 지금까지처럼 아버지 멋대로 하고 사세요. 그게 아버지가 원하시는 거라면요.”
“…….”
“앞으로 만날 일 없을 겁니다. 잘 지내세요.”
주름이 곳곳에 팬 남자의 얼굴에 놀란 표정이 떠올라 있는 것으로 보아, 이제껏 현재가 이리 제 마음을 속 시원히 토해 낸 적은 한 번도 없었음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그가 내뱉은 말들은 아마도 올곧은 진심은 아닐 것이었다. 그냥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후회하거나 반성하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 아버지가 미워서, 그래서 한 말일 것이다.
차라리 만나지 않게 하는 것이 나았을까. 비로소 감정을 다 토해 낸 뒤 태풍의 눈처럼 고요해진 그의 모습이 은수는 안쓰럽고 가여웠다.
“은수 씨, 가요.”
“……네.”
그렇게 그녀의 손을 놓아 준 현재가 먼저 자리를 벗어났고, 은수는 정규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한 후에야 그의 뒤를 따랐다. 아무렇지 않은 것 같던 정규는 현재가 사라진 자리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때, 천천히 몇 걸음을 떼던 그녀가 가다 말고 다시 남자에게로 빼꼼 고개를 돌렸다.
“아참.”
그 소리에 정규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은수는 착잡한 맘을 숨기고 씩 웃어 보였다.
“방금 전에 결혼 자금 보태 준다 어쩐다 하신 거요.”
“…….”
“감사하지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저나 현재 씨나 나름 능력 좋은 편이거든요. 앞으로도 그런 도움은 필요 없을 테니 걱정 마시고,”
“…….”
“부디 잘 먹고, 잘 사세요. 건강하시고요.”
“…….”
“그럼, 전 이만.”
못 살면 더 좋겠지만, 그래도 알아서 잘 살라지.
제 마음과 정반대의 덕담을 날린 그녀는 그렇게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렸다.
* * *
지하 주차장, 그리고 그의 차 안은 이상하리만치 후덥지근했다.
“현재 씨.”
“…….”
“괜찮아요?”
“…….”
그 물음에, 정면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현재가 고개를 돌려 은수를 보았다.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고 있자니 은수는 이상하게 울컥하는 느낌이 들었다.
“……언제 와 있었던 거예요. 같이 오잘 땐 싫다더니.”
“…….”
“미안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안 나서는 건데…….”
그런 아버지라면 없는 게 낫다고 생각한 그녀였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들을 이리 갈라놓으려는 목적은 아니었다. 그냥 단순히 그의 아버지를 반성하게끔 만들고 싶었던 것인데.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는 은수를 보며, 현재는 지그시 웃었다.
“아니에요. 고마워요.”
“…….”
“솔직히 말하면, 나 오늘 아버지 오랜만에 본 거 아니에요. 아버지는 오랜만이었겠지만, 나는 아니었어요.”
“……네?”
“사실, 나 얼마 전에 여기 왔었어요. 아버지 만나려고요.”
“……?”
……아니, 언제? 나한테 말도 없이 그런…….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지만 은수는 언제였느냐, 왜 그랬느냐, 하고 굳이 캐묻지 않기로 했다. 잠시 뒤, 그가 멋쩍게 웃었다.
“혼자 당당히 걸어 들어가서 얘기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용기가 안 나서.”
“그치만…… 아까 전에는 말만 잘하던데요?”
의아한 눈초리로 묻는 은수에게, 그가 당연하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그야, 은수 씨가 옆에 있었잖아요.”
“…….”
“며칠 전에 은수 씨가 우리 아버지 만나고 싶다고 했을 때, 속으로 걱정도 됐지만 솔직히…… 놀랍고 반가웠어요. 말하지 못했던 내 마음을 알아준 것 같아서.”
“…….”
“오늘만큼은 나도…… 은수 씨한테 기대 보고 싶더라고요.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