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속도위반 로맨스-100화 (100/128)

# 100

100. 당신 아들의, 아들을 가졌습니다 (1)

“……후우.”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몸이 자동적으로 자그맣게 떨렸다. 어렵지 않을 거라 그에게 호언장담했던 것이 무색해지는 순간. 하지만 그럴수록 은수는 고개를 더 당당하게 쳐들었다. 결판을 내기에 앞서, 상대에게 틈을 보여선 안 되는 것이 당연했다.

의식하지 말고 행동하자, 당당하게. 평소의 나처럼. 그렇게 주문도 걸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민은수 팀장님.”

“……안녕하십니까.”

은수는 떨떠름한 얼굴을 애써 지우며 악수를 했다. 마디가 굵고 큼지막한 남자의 손은 현재만큼이나 따뜻한 편이었다.

기분이 이상하네.

억지 미소를 지은 그녀가 그대로 테이블에 천천히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남자의 시선이 제 얼굴보다 배로 먼저 닿는 것이 여실히 느껴져, 은수는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사실은 아직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자신이 없었다. 나도 이런데, 그 남자는 오죽했을까.

“라프레즈 마케팅팀에서 방문해 주신다니, 처음에 연락 받고 좀 놀랐습니다. 한동안 서로 뜸했잖습니까.”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중간에 놓인 다기를 이용해 은수에게 손수 차를 따라 주었다. 찻잔을 손에 받아 쥔 그녀가 저도 모르게 메인 목을 풀기 위해 잠시 큼큼거렸다.

“……아, 예. 연락이 너무 갑작스러웠지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저희야 뭐, 라프레즈 쪽에서 만나자고 하시면 만사 제치고 나서야죠.”

관록 있는 사업가다웠다. 사람 좋은 얼굴로 웃어 보이는 그였지만, 그를 힐끔 훔쳐보는 은수의 얼굴은 밀랍 인형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의연해지기로 해 놓고서는…… 그의 웃는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 절로 심사가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사실은 제가 조만간 육아 휴직에 들어가는데, 그 전에 한번 만나 뵈어야 할 것 같아서요.”

“아, 역시 그랬군요. 처음 들어오실 때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만…….”

“…….”

“저, 그런데…… 라프레즈에서 저희에게 무슨 일로……?”

그 말에 문득 고개를 든 은수가 남자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보는 게 이상하게 겁이 났었다. 그래서 답지 않게 인사도 대강 되는 대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비로소 똑똑히 확인하게 된 남자의 얼굴은…….

‘뭐야. 진짜 완전 똑같잖아!’

현재의 얼굴을 빼다 박았다 해도 될 정도로 그와 많이 닮아 있었다. 현재가 늙어서 저 나이가 된다면 꼭 저런 얼굴일 것 같은.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예전에 그가 했던 말이 자연히 떠올랐다.

‘사실 난 아버지를 많이 닮았어요. 다들 잘생긴 아빠 닮아서 좋겠다고, 커서 여자들 깨나 울리겠다고 그랬었는데.’

‘근데 난…… 그 말이 너무너무 싫었어요.’

‘그 말이 꼭, 나도 나중에 커서 아버지와 똑같은 사람이 될 거라고…… 저주하는 것처럼 들렸거든요.’

그땐 그냥 그랬구나, 하고 말았었는데…… 실제로 보고 나니 절실히 이해가 되었다. 닮았다, 닮았다 해도 이 정도로 닮았을 줄이야.

이제야 만나게 된 남자는, 만약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다면 꽤 괜찮은 사람 같다고 여겼을 것 같은 태도와 말투를 하고 있었다. 하여간 사람을 겉만 보고 판단해선 안 된다는 진리는 이럴 때마저 유효했다.

제 얼굴만 쳐다볼 뿐, 좀처럼 반응이 없는 여자가 이상했는지 그는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까, 요즘 라프레즈 신제품 반응이 굉장히 좋은 것 같더군요. 임산부를 타겟팅한 제품이라기에 놀랐었는데, 민 팀장님을 뵈니 이해가 가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건 누구 아이디어였습니까? 굉장히 참신하던데요.”

“…….”

누구긴 누구야, 당신 아들이지.

혀끝까지 도달한 말을 그녀는 억지로 욱여넣었다.

“감사합니다. 유능한 신입이 하나 있어서,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신입이요? 요즘 다들 인력난 때문에 힘든데, 거긴 또 예외인가 봅니다.”

“……뭐, 딱히 그런 것도 아닙니다마는…….”

“…….”

“그나저나 대표님 댁내는…… 두루 평안하신지요.”

처음 만난 사이에 걸맞지 않은, 갑작스러운 안부 인사였다.

덕분에 남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 예. 그럼요. 하하하.”

“…….”

그러고 나자 또다시 짧은 정적이 흘렀다. 숨 막히는 고요 속에서, 그제야 남자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듯했다.

그가 은수에게 넌지시 물었다.

“……저, 그런데 혹시…… 우리 구면입니까? 초면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상하게 팀장님 얼굴이 낯이 익네요. 일전에 어디서 뵌 적이 있는데 제가 기억을 못 하는 건지…….”

그러자 그녀의 입가에는 엷은 웃음이 번졌다.

“글쎄요. 그러실 만도 할 겁니다. 원래 사랑하는 사람들은 많이 닮는다고들 그러더군요.”

팀장이라고는 하지만, 무척 어려 보이는 여자의 입에선 그가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남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예?”

“…….”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제 진짜 시작인 건가. 은수는 일부러 심호흡을 한번 한 뒤 말을 이었다.

“사실 오늘 제가 이곳에 찾아온 이유는 일 때문이 아닙니다. 회사에서도 제가 여기 온 줄은 전혀 모르고 있어요.”

“……그럼, 무슨 일로……?”

잔뜩 의아한 눈초리를 한 남자를 향해, 그녀가 명료한 어조로 대꾸했다.

“안 들으신 지 꽤 된 이름이라 가물가물하시겠지만, 적어도 기억은 하시리라 믿습니다.”

“…….”

“‘도현재’ 씨, 알고 계시죠.”

‘도현재’라는 이름에 남자의 눈은 삽시간에 커졌다.

아니, 이 여자가 어떻게……?

“……민 팀장님이 그 아일 어떻게 아십니까?”

그녀는 태연자약하게 미소를 지었다.

“방금 전 말씀드린, 저희 팀 신입 사원이니까요. 그리고…….”

“…….”

“이 아이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자, 저와 결혼할 사람이기도 하구요.”

은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자의 눈빛은 순식간에 갈피를 잃었다. 사시나무처럼 흔들리는 눈동자가 그의 심리를 고스란히 대변했고, 덕분에 그녀는 한결 여유가 생겼다.

“많이 당황하신 것 같네요.”

“…….”

“하기야, 오래전에 버렸던 자식이 갑자기 결혼한다는 것도 모자라 아빠가 된다고 하니 놀라우실 수밖에요. 이해합니다. 당사자인 저도 처음엔 굉장히 놀랐었으니까요.”

방금 전과 달리, 또박또박 말을 내뱉는 여자가 그는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심상치 않은 느낌.

일순 입장을 선회한 그가 본능적으로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날 왜 찾아온 겁니까.”

“……방금 말씀드렸을 텐데요. 도현재 씨 때문이라고.”

“난 그 아이에 대해 할 말 없습니다. 그런 얘기라면 이만 가 보시죠.”

“아뇨. 죄송하지만, 이대로 가기는 싫습니다.”

남자는 벌써부터 꼬리를 빼려고 했지만, 은수는 절대로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제 아이의 아빠가 될 남자의 ‘아버지’를, 한 번은 꼭 만나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저도, 그분이 이렇게 가까운 곳에 계실 줄은 미처 몰랐네요.”

“…….”

“참…… 많이 닮으셨어요, 제가 다 기분 나쁠 정도로.”

닮아서 기분이 나쁘다, 라. 요즘 젊은 애들은 원래 다 이렇게 직설적인가.

어이가 없는 듯 그가 하, 하는 소리를 냈다.

“겨우 그런 얘기 하자고, 여기까지 찾아온 겁니까?”

“…….”

“나와는 이미 상관없는 아이입니다. 입 아프게 그런 얘기 하셔 봤자 시간 낭비라는 얘깁니다.”

“…….”

“이만 돌아가십시오.”

그때였다. 그녀의 말 한마디가 일어서려던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후회,”

“…….”

“하십니까?”

자연스레 그의 고개가 스르르 돌아갔다.

“……뭐라고요?”

“후회하시냐고 여쭈었습니다.”

“…….”

“……후회하시긴 합니까? 아니, 했었습니까?”

그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은수도 더 이상 상대하긴 싫었지만, 이 말만은 꼭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잠시 뒤, 그는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왜 후회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

“어차피 아이들은 제 엄마가 잘 길러 냈고, 지금 나는 그쪽과 남남일 뿐입니다. 다짜고짜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한테 이러는 거,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은수는 부러 살짝 코웃음을 쳤다.

“예전의 저였다면, 지금 대표님이 하시는 말들을 기꺼이 이해했을지도 모릅니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없으니까요.”

“…….”

“하지만 지금은 제 ‘남편’의 일이기 때문에 이야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네요.”

그 사람의 일이 곧 나의 일.

주저하는 현재를 대신해 은수가 남자를 찾은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이대로 가만히 놔두기만 하면 오래전에 썩어 버린 이 고리는 계속해서 좀먹어 가 현재를 괴롭게 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제가 나서서라도 그것을 속 시원히 끊어 버리고 싶었다. 비슷한 과거, 비슷한 상처. 그녀에게는 이미 끝난 과거였지만, 눈앞의 남자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상 현재에게는 여전히 진행형일 수밖에 없었다.

“사랑이었다고 말하고 싶으시겠죠. 평생 가슴에 남을 것 같았던 첫사랑, 조금이라도 늦기 전에 되찾기 위해 떠났을 뿐인데, 세상 사람들은 바람, 불륜이라 떠들어 대고…… 억울하시기도 했을 겁니다.”

“…….”

“근데 그렇게 지고지순한 사랑을 하신 분이, 두 번째 이혼은 왜 하신 겁니까?”

‘두 번째 이혼’이란 대목에서, 그의 눈은 끝을 모르고 커다래졌다.

가까운 지인들 일부만 아는 내용을, 도대체 어떻게 이 여자가 알고 있단 말인가?

“……그걸, 어, 어떻게…….”

“알아보니까, 이미 이 바닥엔 암암리에 소문이 파다하더라고요. 표면적으로는 어떻게 잘 포장하셨는지 모르겠지만.”

“…….”

“그게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진짜 사랑이었다면, 지키셨어야죠. 똑같은 상처는 주지 마셨어야죠. 책임감 없이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건 사랑이 아니잖습니까?”

“…….”

“왜 후회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요.”

“…….”

“그게 지금 당신 입에서 나올 말입니까?”

……젠장.

여자의 말은 너무도 논리정연해서, 그로선 차마 대꾸할 말이 없었다.

이 상태에서 방법은 오로지 회피뿐이었다. 그가 곧장 일어섰다.

“이만 나가세요. 더 들을 가치도 없군요.”

은수도 얼른 따라 일어섰다.

“들으세요.”

“나가시라고 했습니다.”

“제 얘기 아직 안 끝났습니다.”

“난 들을 얘기 없대도.”

“대표님.”

“나가라고!!!”

남자의 목소리가 실내를 쩌렁쩌렁 울렸다.

뭘 잘했다고 이렇게 적반하장인 건지. 이런 걸 보면 어릴 적 현재가 어떻게 지냈을지도 대충 짐작되었다. 그러니 그녀의 발은 더 움직이질 않았다.

“…….”

“…….”

그때, 어디선가 뚜벅뚜벅 걸어오는 발소리가 조금씩 크게 들려오는 듯하더니 저 멀리서 문이 발칵 열렸다.

서로를 쏘아보고 있던 정규와 은수는 동시에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후광이 날 듯 훤칠한 인영은……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네.”

피식 웃은 현재가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섰다.

얼마 만에 보는지 감도 잡히지 않는 낯선 아들의 얼굴. 정규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소리치지 마세요. 임신한 사람한테 그러는 건 어디서 배워먹은 짓거립니까.”

무심한 얼굴로, 그는 얼음장 같은 목소리를 내었다.

“왜 소리를 질러.”

“…….”

“당신이 뭔데.”

십몇 년 만에야 비로소 제 아버지를 노려보는 그를, 은수는 가만히 응시했다.

언뜻언뜻 보이던 것이 생채기, 혹은 상처인 줄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것은 흉터였다.

비로소 짙은 흉터만이 남은 그의 눈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적의가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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