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99. 피차 잊고자 했던 이름 (2)
그래, 복수란 그다지 특별한 게 아니었다. 잘 사는 걸 보여 주는 게 최고의 복수. 그렇다면 은수는 그 증거를 대놓고 들이밀 심산이었다. 바로 그의 앞으로.
그는 다름 아닌 식품 회사 대표라고 했다. 주식회사 ‘소해원’의 대표 도정규. 현수와 현재의 아버지이자, 십몇 년 전 그들을 무참히 저버렸던 장본인.
하지만 그녀가 며칠간 알아본 결과, 그런 후진 과거사에 걸맞지 않게 그의 대외적 이미지는 꽤 좋은 편이었다. 이미지 메이킹을 잘한 것인지, 아니면 재혼에 걸림돌이 된 제 핏줄에게만 모질었던 것인지. 어쨌든 확실한 건 그도 그녀의 아비만큼이나 ‘나쁜 놈’이긴 매한가지라는 것이었다.
하여간에 바람피우는 것들이란. 쯧쯧.
누군지 알게 된 직후엔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동종 업계 사람이라면 일이 좀 더 쉬워질 테니까. ‘라프레즈 마케팅팀 팀장’이라는 명함 하나면 이쪽에선 어지간히 대우받는 축이었다. 은수는 아마 현재와 관련된 사실을 밝히기 전까지는, 비즈니스적인 측면 때문에라도 제 앞에 넙죽 엎드릴 그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패를 손에 쥐고도 그녀는 망설였다.
본 의도가 어떻든 간에, 당사자 몰래 그런 일을 하는 건 어쩌면 실례일 수도 있었다. 그건 그들이 아무리 사랑하고, 결혼할 사이라고 해도 당연한 일. 그에게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던 날을 그녀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아물어 가는 그의 상처를 헤집는 꼴이 되어선 안 됐다.
어떡하지. 미리 언질이라도 줘야 하나.
골똘히 생각하던 그녀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아…….”
“임신한 사람이 왜 자꾸 한숨이에요.”
“……네?”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은 그녀의 옆으로 곳곳에 물기를 머금은 현재가 자리를 잡으며 말했다.
“아까부터 계속 한숨 쉬잖아요, 걱정되게.”
“…….”
내가 이러는 건 다 당신 때문이라고요. 남의 속도 모르고.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탈탈 터는 그를 지켜보는 은수의 눈빛이 이지러졌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면…… 당신은 과연 뭐라고 할까.
잠시 머뭇거리던 은수는 용기 내어 입을 열었다. 몸에서 풋풋한 비누향이 진동하는 그는 이제 수건을 옆에 내려놓은 채였다.
“저, 현재 씨.”
“네?”
“……혹시요, 혹시…….”
“…….”
“아버지, 보고 싶지 않아요?”
그 순간, 은수를 품에 꼭 껴안으려던 현재가 멈칫했다. 그의 몸이 약간 굳어지는 것이 그녀의 온몸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걸 놓치지 않은 은수가 거듭 물었다.
“보고 싶죠.”
“…….”
“아니에요?”
막 씻고 나온 탓일까. 왠지 모르게 촉촉한 것 같은 그의 눈이 은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늘 어른스럽던 그였지만, ‘아버지’라는 단어 앞에서는 영락없는 소년 같기만 했다.
“……아버지, 만나려고요?”
“……알리고 싶어 했잖아요, 나 임신한 거.”
그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조금의 시간이 지난 뒤, 은수를 느슨하게 한 팔에 안은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보고 싶은 것보다는…… 그냥, 그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어요. 기억이 거의 없잖아요. 나랑 형 없이도 잘 지내고 있나, 혹시 후회는 할까, 발은 쭉 뻗고 잘까……. 그냥 그런 게 궁금해서, 자랑도 할 겸 겸사겸사 만나보고 싶었던 거예요.”
물론 후회라는 걸 하는 사람이었다면 시간이 이렇게까지 흐를 리도 없었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은 아직까지도 그의 가슴 한편에 남아 심장을 아리게 했다. 애석하게도.
솔직히 말해, 지나가듯이 했던 그 말을 그녀가 기억하고 있었을 줄도 몰랐던 그였다.
기억력이 좋다더니, 허투루 한 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는 여러 번 실감하는 중이었다.
“……그럼, 지금도 만나보고 싶어요?”
은수의 물음에 씁쓸하게 픽 웃은 현재가 눈을 내리깔았다. 저에게 남은 것이 오기인지, 미련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잘 모르겠어요.”
“…….”
“보면 후회할 것 같은데, 또 안 보면…… 더 후회할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그녀의 예상과 달리, 그는 아버지에 관해 생각보다 큰 거부 반응이 없는 듯했다. 너무 어렸을 적에 헤어져서 감정이 무뎌져 버린 탓일지도. 어떤 이유든 은수는 그가 안쓰러웠다.
이 정도라면 내가 나서 봐도 괜찮을 것 같긴 한데…….
거기까지 생각이 이른 은수는 입술을 앙다물고는 팔을 둘러 그를 껴안으며 말했다.
“내가 얼마 전에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는데요. 어차피 후회할 거라면 하고 나서 후회하는 게 더 낫다는 거였어요. 저질러 놓고 보니 속은 후련하더라구요.”
“…….”
“나, 며칠 뒤에 거기 갈 거예요. ‘소해원’이요.”
“……은수 씨가 거길 어떻게 알아요?”
한 번도 얘기한 적 없는 것 같은데…….
하지만 잠시 생각하던 그는 이내 알겠다는 듯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형이 말해 줬구나.”
질문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운 말투였다.
그래서 은수는 구태여 대답하는 대신, 속에 담아 두었던 또 다른 질문을 했다.
“현재 씨 우리 회사 들어왔던 거, 아버지 때문이었죠?”
“…….”
“같은 업계니까 어쩌면 지나가다 만나기라도 할까 봐.”
“…….”
“그쵸.”
역시 은수는 눈치가 빨랐다. 물론 같은 업계라는 것부터가 부정할 수 없는 힌트였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빨리 알아챌 줄은 몰랐으므로…… 그는 멋쩍은 웃음만 지었다.
“맨 처음 알게 됐을 땐 그랬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
“지금 내가 우리 회사를 다니는 제일 큰 이유는…… 바로 여기 있으니까.”
“…….”
……이 와중에 부끄럽게. 금세 낯이 뜨거워졌다.
현재의 말에 은수는 수줍게 미소 지으며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지만, 잠시 뒤 그의 가슴팍에서 살짝 얼굴을 떼어내고는 그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암튼 나, 그분 만나도 되죠?”
회사에서 보던 그녀처럼 무척 엄격한 목소리였다. 당신이 뭐라고 하든 나는 기필코 그를 만날 것이라는 무언의 압박.
현재도 그녀를 굳이 제지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가 우려하는 것은…….
“……근데, 만나서 뭐라고 하게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녀의 성격이었다. 그 사람 앞에서 또 무슨 말을 할는지 알 수가 없어서.
그의 맘도 모르고, 은수는 태평하게 웃었다.
“비밀이에요. 대충, 현재 씨랑 결혼할 사람이란 것만 알려 줄 거예요.”
“……대하기 어렵지 않겠어요?”
“어려울 게 뭐 있어요. 그냥 이 배만 딱 보여 주면 게임 끝인데.”
“…….”
“현재 씨도…… 같이 갈래요?”
“…….”
“맘의 준비가 좀 필요한가?”
잠시 생각하던 현재가 입술을 감쳐물었다.
글쎄. 나름대로 여러 번 머릿속에 떠올려 본 적은 있었다. 아버지를 만나게 되면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행동해야지. 하지만 그때마다 그는 자신이 없어졌다. 이제는 그 사람을 보면 분노가 일어날지, 아니면 그저 애처롭기만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이제는 그런 것조차도 가늠이 되지 않을 만큼 너무 멀리 온 느낌이었다.
“……생각해 볼게요, 조금만.”
그런 그를, 은수 또한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생판 남인 나도 약간 떨리는데, 이 남자는 오죽할까.
“……그래요, 천천히 생각해요.”
다정하게 말을 마친 그녀는 문득 저들이 체크인한 호텔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들이 맨 처음으로 갔던 그 모텔보다야 훨씬 좋은 곳이었지만, 그래도 어쩐지 아늑한 느낌은 좀 덜한 것 같았다. 맘에 드는 건 침대가 푹신하다는 것 정도.
“근데 우리 진짜 처량하다. 집 놔두고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엄마만 아니었음 그냥 우리 집에 있는 건데…….
하지만 그녀의 말에 덩달아 주위를 둘러본 현재는 씩 웃었다. 따뜻한 조명 빛이 내려앉은 여자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예뻤다.
“왜요, 첫날밤 느낌 나고 좋은데.”
“꼭 무슨 도망 온 느낌이란 말이에요. 그리고 우리 아직 첫날밤 안 치렀거든요?”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결혼도 언제 할지 모르는데 첫날밤은 무슨…….
하지만 은수의 푸념에도, 현재는 오랜만에 그녀와 함께 잠들게 된 것이 마냥 좋은 듯했다.
“그래도 그날이 우리한텐 진짜 ‘첫날밤’이었잖아요. 둘 다 제정신이 아니긴 했어도.”
“…….”
그건…… 그렇지만.
그러고 보니 그녀는 의구심이 마구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남자는 혹시 그날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혹시 그날…… 현재 씬 기억나요?”
“당연하죠. 은수 씬 기억 안 나요?”
“…….”
뭔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면 혼이라도 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솔직히 입장 바꿔 생각하면 그럴 만도 했다. 어떻게 감히, 그 역사적인 날을 기억하지 못할 수 있단 말인가.
양심이 찔리는 나머지, 은수의 목소리는 자연스레 기어들어 갔다.
“아뇨, 아예 안 나는 건 아닌데…… 좀 드문드문…….”
역시나. 그럴 줄 알았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그는 은수의 말에 짐짓 토라진 척 고개를 돌렸다.
“실망이네. 첫날밤인데 나만 기억하고.”
하지만 그녀도 변명의 여지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술을 그렇게 먹었는데 어떻게 기억해요……. 나도 어쩔 수 없었다구요.”
“……하긴, 뭐.”
그렇게 부어라 마셔라 해 댔으니 기억하는 게 오히려 용한 것일지도.
잠시 은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가 별안간 그녀를 홱 뒤로 눕혔다.
풀썩하고 큼지막한 베개가 그녀의 뒤통수에 곧바로 닿았다.
“……!”
기습 행동에 놀란 그녀가 눈을 잦게 깜빡거리자, 그가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기억 못 할 수도 있죠.”
“…….”
“정 억울하면, 지금 기억나게 해 줄 수도 있는데.”
……뭐, 뭘 기억나게 해 준단 거지?
이젠 아무렇지 않을 법도 하건만, 그가 이런 식으로 다가올 때마다 그녀는 매번 순식간에 머릿속이 새하얘지곤 했다. 이건 뭐, 이제 막 첫사랑을 시작한 소녀도 아니고.
“이제 몸은 좀 어때요? 배 뭉치는 건요.”
“……거의 안 그래요, 이제. 괜찮아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병원에 가야 하나 했었는데, 이젠 또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평온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래요? 다행이네.”
“…….”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조심하긴 해야겠죠.”
“……아마도요.”
남자의 잘생긴 얼굴을 올려다보며, 그녀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장소 때문인가. 안 어울리게 긴장한 듯한 여자가 귀여워서 그는 낮게 키득거렸다.
“안 되겠다.”
“…….”
“더한 건 무리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백 번만 하고 잘게요.”
“……뭘요?”
그녀의 질문에 그는 그런 걸 뭘 묻나, 하는 얼굴로 태평하게 대답했다.
“키스요.”
말을 마친 그가 그대로 그녀에게 입술을 부딪쳤다.
‘백 번’이라는 말 앞에 ‘수’라는 관형사가 빠졌었다는 것을, 은수는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