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98. 피차 잊고자 했던 이름 (1)
“……네, 그러시겠죠.”
수긍하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향해, 현수가 차분한 어조로 덧붙였다.
“어쨌든 이건 두 사람의 일이고, 그래서 내가 뭐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닌 거 아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부딪쳐야죠.”
“…….”
“물론 지금 당장은 좀 힘들겠지만…… 머지않아 받아들이실 수 있을 거예요. 엄마도 그렇게 딱딱한 사람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의 사려 깊은 말에도 금세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진 은수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맘 같아선 그냥 미친 척하고 그의 집으로 쳐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러다 혹시 미운털이라도 박히게 되면 큰일이니 함부로 그럴 수도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상태. 이 일을 대체 어떻게 풀어 나가야 좋단 말인가.
“……휴.”
나직이 한숨을 뱉은 은수가 말없이 차 한 모금을 마시며 상념에 잠겼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귀로,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현재의 휴대폰이 별안간 부르르 진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나 잠시 전화 좀 받고 올게요.”
“……누구 전화예요?”
순간 은수는 저도 모르게 쓸데없는 질문을 했다. 그렇잖아도 서먹한 분위기에, 옆에 있던 현재마저 사라져 버린다면 어마어마한 어색함이 찾아들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친구요. 잠깐이면 되니까 얘기 나누고 있어요.”
“…….”
……나한테는 ‘잠깐’이 아닐 테니까 문제죠!
“……네.”
할 수 없이 은수는 매우 마지못한 대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현재가 야속하게도 홀연히 자리를 떴고, 테이블에는 마침내 현수와 은수 둘만이 남게 되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짧지 않은 적막이 흘렀다. 각자 손에 잔을 쥔 그들의 입가엔 부자연스러운 미소만이 감돌고 있었다.
“…….”
“…….”
계속 웃고만 있을 순 없으니 뭐라고 말을 하긴 해야 할 것 같은데, 대체 뭔 말을 해야 하나…….
홀짝홀짝 들이켰던 차의 뒷맛이 혀끝에 남아 아릿해서, 그녀는 부러 입맛을 다시며 엄지로 잔을 문질렀다.
그때, 그들의 침묵을 먼저 가르고 나선 건 현수였다.
“저…… 은수 씨.”
“……네?”
“……혹시.”
그의 말끝에는 살짝 머뭇거림이 묻어 있었다.
“……현재한테, 우리 아버지에 대한 얘기도 들으셨나요?”
“…….”
……아버지?
순간적으로 멍해진 은수는 잠시 할 말을 잃은 채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이 자리에서 그들의 ‘아버지’에 관해 언급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므로.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녀는 어렵사리 대답을 할 수 있었다.
“……네, 들었어요.”
그녀의 느지막한 대답에 현수는 쓰게 웃었다.
“현재가 미리 말씀드렸나 보네요.”
“…….”
“혹시 안 좋게 생각하실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입니다.”
눈에 띄게 안도하는 현수를 보며 은수는 슬슬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저희 집도 사정이 비슷한 걸요.”
“……그럼, 은수 씨 아버님도……?”
“네. 근데 저희 아빤 돌아가셨어요.”
그 대목에서,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잔뜩 커져 있던 그의 눈이 단박에 아래로 향했다.
“……아, 죄송합니다.”
너무나 익숙한 상황. 은수는 그저 겸연쩍게 웃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얘기에 걸핏하면 이런 식으로 반응하곤 했다. 이젠 미안하다, 죄송하다 소리도 지겨울 정도로. 별다른 반응을 보였던 사람이라고 해 봐야 현재가 유일했다. 사과가 아니라 공감을 해 주었던 사람. 그래서 그가 더 특별하게 다가왔던 것인지도.
“아니에요. 그냥 신경 쓰실 일 아니라고 말씀드린 거예요.”
“…….”
“저, 그런데…….”
말을 이어 가던 그녀가 잠시 머뭇거렸다. 이런 걸 물어봐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얼마 전부터, 아니, 사실은 그와 결혼하기로 마음먹고 양가에 알리기로 했을 때부터 들기 시작한 의문.
“……지금도 왕래하시나요, 그분이랑?”
“…….”
“아버……님이요.”
은수는 저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이제 곧 부모가 될 텐데도, ‘아버지’와 관련된 말은 좀처럼 입에 붙지를 않았다. 이놈의 고질병.
하지만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현수는 아랑곳없이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저는 아닌데, 현재는 모르겠어요. 속을 알 수가 없는 놈이에요. 뭐 하고 다니는지도 모르겠고. 하다못해 결혼할 사람이 있다는 것도 이제 안 걸 보면 말 다했죠.”
“…….”
“어렸을 때는 아버지를 좀 찾는 편이긴 했어요. 또래 친구들은 다 아버지가 있으니까 그랬겠지만……. 그런데 나이를 먹을수록 조금씩 찾는 빈도가 줄어들더니, 언젠가부터 아버지에 대한 얘기는 거의 안 하더라고요. 해도 잠깐이었고.”
“…….”
현수의 말을 곱씹던 그녀는 무심코 지난 기억을 돌이켰다. 서로의 비밀을 공유했던 그날 이후, 그가 ‘아버지’에 대해 언급했던 적은 딱 한 번이었다. 아마 세 번째로 입을 맞췄던 날일 것이다. 그러고 난 뒤, 임신 사실을 양가에 알려야 하는지를 두고 이야기했을 때.
‘그럼, 어머니께는 얼른 알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우리 부모님한테는 좀 나중에 말씀드린다 쳐도…….’
그때 그는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버지에게도 사실을 말하고 싶다는 뉘앙스로 말을 했었다. 그리고 굳이 그럴 필요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녀는 그의 말에 무척이나 당황했었고.
하지만 지금은 은수도 그때와 생각이 아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어머니에게 알리는 건 당연한 거고, 가능하다면 그의 아버지에게도 임신 사실을 알릴 용의가 있었다. 물론 아버지를 혐오하는 그녀로서는 그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사실은, 아버지가 보고 싶은 걸까?’
은수는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미워도 천륜은 끊어 내기가 힘든 법이니까. 그녀처럼 호되게 당해 학을 떼게 된 케이스가 아니라, 어릴 적 헤어지고 지금까지 별 왕래가 없었던 거라면 충분히 가능한 얘기였다.
당신 없이도 이리 어엿하게 자라 마침내 한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알리고 싶을 수도 있고. 또…… 어쩔 수 없이 약간은 보고 싶기도 하겠지.
그런데 그때, 그녀의 생각을 뒷받침해주듯 현수가 말했다.
“근데 실은, 얼마 전에 현재가 넌지시 얘기를 꺼낸 적이 있어요.”
“어떤…… 얘기요?”
“아버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지 않느냐고요.”
“……정말요?”
깜짝 놀란 은수가 반문했다. 혹시나 했는데, 정말이었구나. 아버지를 생각했던 게…….
그러나 그 사실이 별로 탐탁지 않은 듯, 현수의 입가에는 다소 불만스러운 주름이 졌다.
“저는 하나도 안 궁금하다고 딱 잘랐는데, 그걸 듣고 나서 문득 생각하게 됐어요. 현재는 어쩌면 저랑 생각이 좀 다를 수도 있겠다고요.”
“…….”
“애틋함인지 애증인지, 쟤가 어떤 맘을 갖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마도 미운 감정이 훨씬 크긴 하겠죠. 하지만 확실한 건, 쟨 아직도 아버지가 신경 쓰이는 것 같아요.”
“…….”
“사실 이 얘기를 은수 씨에게 할까 말까 고민했었는데, 그래도 지금은 은수 씨가 우리 현재랑 제일 가까운 사람이니까…… 알아두셔야 할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괜히 너무 깊게 생각하지는 마세요. 쟤도 알고 보면 큰 생각은 없을 거예요.”
그러나 현수의 말에 은수는 잠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는 이내 생각했다. 만약 그런 거라면, 오히려 어머니 쪽보다 그쪽을 먼저 해결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어머니 앞에선 좀 힘들지 몰라도, 그의 아버지 앞이라면 누구보다 당당해질 자신이 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를 위해 뭔가를 해 줄 수 있다는 것은 그녀가 무척 고대해 온 일이었다.
“혹시, 어떤 분인지 알 수 있을까요? 그분이요.”
* * *
오후의 조용한 회의실 안엔 딸깍거리는 소리만이 간헐적으로 울리고 있었다. 멍한 표정의 은수가 습관처럼 펜 끄트머리를 똑딱이는 소리였다. 반면 그녀의 건너편에 앉은 박 과장은 그런 소린 안중에도 없는 듯, 안경을 낀 채 진지한 얼굴로 서류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불쑥 튀어나온 은수의 목소리가 그녀를 깨운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박 과장님.”
“네.”
“……혹시, ‘소해원’이라고 들어 보신 적 있으세요?”
“……‘소해원’이요?”
갑작스레 맞닥뜨린 단어에, 박 과장의 눈이 안경 너머에서 소처럼 끔뻑였다.
“그…… 회사 이름 말씀하시는 거예요?”
흐리멍덩했던 은수의 눈이 금세 반짝 빛났다.
“네, 맞아요. 혹시 그 쪽에 대해서 잘 아세요?”
“그럼요. 옛날에 우리 회사랑 기술 제휴도 했었는데.”
“……기술…… 제휴요?”
“네.”
박 과장은 손에 들었던 서류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기억을 더듬는 듯 눈알을 굴렸다.
“아마…… 제가 입사하고 얼마 안 지나서 했을 건데. 우리랑 규모가 비등비등했던 곳이라 서로 상부상조하자고 많이 애썼죠. 지금 우리만큼은 아니어도 한때는 꽤 잘나갔던 회산데. 요즘은 영 죽 쑤고 있는 게 맘에 좀 걸리더라고요.”
“…….”
“근데 거긴 왜요?”
“……음.”
자그맣게 신음하는 은수를, 박 과장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럼 혹시…… 거기 대표님도 기억하세요?”
다소 뜬금없는 질문의 연속. 하지만 박 과장은 일단 아는 대로 대답했다.
“글쎄요. 직접 면 대 면으로 본 적은 없어서…….”
“…….”
“잘은 기억 안 나는데, 사람은 좋은 편이라고 했던 것 같아요. 본 사람들 말에 의하면요.”
“…….”
지금은 별 연고도 없는 회사 이야기를 왜 자꾸 묻는 것일까. 애먼 곳에 대뜸 호기심을 보이는 게 박 과장은 영 수상했다.
“왜요, 그쪽이랑 뭐 연계해서 해 보시려고요? 물론 콜라보가 또 요즘 트렌드이긴 하지만…… 다른 데도 많은데 굳이 거기랑 할 필요는 딱히…….”
“과장님.”
그때, 갑작스레 입을 연 은수가 박 과장의 말허리를 싹둑 잘랐다.
“예?”
“……복수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게 뭘까요.”
“……복수요?”
갑자기 이건 또 웬…….
화제가 거의 롤러코스터 급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정말 의식의 흐름대로 이야기하고 있는 듯한 그녀가 갈수록 이상해서, 박 과장은 넌지시 눈을 치켜떴다.
“팀장님 혹시, 무슨 일 있어요?”
복수라니. 설마 그 회사에 무슨 철천지원수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러나 은수는 무슨 꿍꿍이인지 모를 얼굴로 빙긋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있어요. 제 일은 아닌데, 어떻게 보면 제 일이기도 하고……. 하여튼 설명하기엔 좀 복잡해요.”
“…….”
“하여튼, 복수는 어떤 식으로 해야 제일 통쾌할까요? 제 나름대로 여러 가지 생각해 본 게 있긴 한데, 왠지 박 과장님이 더 잘 아실 것 같아서요.”
“…….”
미심쩍은 얼굴을 한 박 과장이 입술을 꼭 다물었다.
예전처럼 꽁꽁 숨기는 것보다는 이렇게 터놓고 상담하는 것이 훨씬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저를 무슨 ‘진리를 깨우친 자’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조금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그래도 뭐, 이 정도면 대답하기에 썩 어려운 질문은 아니니까. 괜히 몸을 곧추세운 그녀가 천천히 읊조렸다.
“글쎄……. 그런 말이 있기는 하죠. ‘잘 살아라. 그게 최고의 복수다.’ 이런 거?”
“…….”
“속은 좀 덜 시원해도, 보란 듯이 잘 사는 모습만 딱 보여 주는 게 쿨하고 멋있죠. 작정하고 복수하려고 들다가 자칫 잘못하면 유치해지니까. 미묘한 심리전에서 이기는 게 진짜 복수라고 생각해요.”
“…….”
박 과장의 대답에 은수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의 말을 천천히 곱씹는 중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 눈빛에 별안간 이채가 띠더니, 이내 박 과장의 손을 덥석 잡아 제 가슴팍 쪽으로 팍 끌어당겼다.
“……!”
졸지에 손을 빼앗기다시피 붙들리게 된 박 과장은 한껏 당황하고 말았다. 가느다란 손의 악력이 꽤나 대단했다.
“……티, 팀장님!?”
“……역시…… 언니밖에 없어요!”
아이처럼 생글거리는 얼굴에는 감동과 깨달음이 동시에 떠올라 있었다.
……아니, 내가 뭘 했다고 이래……?
어안이 벙벙해진 박 과장의 눈썹이 대번 삐뚜름해졌다.
“……?”
언니라고 부르는 것까진 좋은데, 대체 무슨 일인지 좀……!
어차피 대답을 듣지 못할 것을 알기에, 그녀는 그저 내적 비명만 내지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