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
97. 과속은 사고를, 사고는 후유증을 낳는다 (6)
실제로 주위에 사람이 몇 있기는 했지만, 이미 공표한 마당에 거리낄 것도 없었다.
은수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은 현재가 숨을 힘껏 들이마시곤 내뱉었다. 언젠가 은수에게서 엄마 냄새가 난다고 했었는데, 그것은 날이 갈수록 더해가고 있는 듯했다. 꼭 아기 분내 같은 냄새가 난다고 해야 할까. 정신적으로 지쳐 있던 가운데 그 향기를 맡으니, 현재는 만족감 같은 것이 뻐근하게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반면 그의 뜨거운 입김이 귓불과 쇄골 즈음에 퍼지자, 은수는 괜히 긴장이 되어 얼굴이 홍옥처럼 붉게 물들었다.
“아, 살 것 같다. 이만한 산소 호흡기가 없네.”
“…….”
“죽는 줄 알았어요, 안고 싶어서.”
나직하게 들려오는 듣기 좋은 목소리에 은수 또한 입술을 수줍게 모은 채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말했다.
“……나두요.”
엄마와 함께 있는 시간도 물론 좋았지만, 이렇게 그에게 안겨서 위안 받는 건 또 다른 안락함이 있었다. 어정쩡하게 떠 있던 그녀의 팔이 어느새 그의 뒷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많이 힘들었죠…….”
“아니에요. 은수 씨가 힘들었지.”
“난 괜찮아요. 차라리 엄마한테 진작 말할 걸 싶더라니까요. 아기 가졌다고 엄마가 이것저것 챙겨 주는데, 꼭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았어요. 나 학교 다닐 때.”
“……역시, 내가 아무리 잘 챙겨 줘도 장모님만은 못한 거죠?”
“……장모님……이요?”
은수가 잠시 몸을 떼어 내 현재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런 단어는 난생 처음 들어 봤다는 양 놀란 눈을 하고 있어서, 현재는 멋쩍게 웃었다.
“말해 놓고 보니까 좀 민망하긴 하다. 연습해야 되는데.”
“……듣기 좋기는 한데.”
놀리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지만 마침 생각났다는 듯, 은수가 한마디 덧붙였다.
“아, 근데 어쩌죠. 울 엄만 장모 되기 싫다는데.”
“……왜요. 시집보내기 싫으시대요?”
“아뇨. 현재 씨가 너무 잘생겨서 싫대요.”
“……정말요?”
경악하는 현재에게 은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우리 엄마지만 진짜 이중 잣대가 너무 심한 것 같아요. 엄마두 젊었을 때 아빠 얼굴에 혹했던 거면서…….”
내가 진짜 괜히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니까.
장난스레 입술을 비죽이는 그녀에게, 그는 잔뜩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내 얼굴 때문에 싫으시대요? 다른 건요.”
“뭐…… 나이가 어리다고 하긴 했는데, 그건 별로 안 중요한 것 같고.”
“…….”
“사실 지금은 애기 때문에 선입견이 있어서 그렇지, 은근히 맘에 들어 하는 눈치예요. 괜히 말로만 그러는 거예요. 내가 울 엄마 하루 이틀 보나.”
“…….”
잘생겨 보이면 마냥 좋을 줄 알았는데 이런 복병이 있을 줄이야.
그녀가 맘에 들어 한다는 말을 덧붙였는데도 그 말이 꽤 충격으로 다가온 모양인지 현재가 약간 어두워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내가 그렇게 잘생긴 건 아닌데…….”
그 말에 그녀의 얼굴이 짐짓 굳어졌다.
“괜히 겸손 떨구 그러는 거, 예의 아닌 거 알죠.”
“…….”
그녀가 생각보다 너무나도 단호하게 말하자, 현재는 얼떨결에 수긍하며 노선을 바꾸었다.
“그럼 성형을 해야 하나…….”
“……?”
이건 또 무슨 기겁할 소리? 다른 남자도 아니고 도현재가?
그는 안 그렇게 생겨서 은근히 엉뚱한 기질이 있었다. 그의 인생에 절대 있을 수 없는 ‘성형’이라는 단어에, 은수가 저도 모르게 커진 언성으로 소리쳤다.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이 잘생긴 얼굴을!”
“…….”
……아, 잠시만. 별거 아닌 얘긴데 왜 이렇게 필요 이상으로 흥분했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 나머지, 말이 필터를 거치지 않고 생각한 그대로 튀어나가고 말았다.
예민한 반응에 의외라는 듯 웃는 남자의 표정을 보자마자 은수는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변명하려니 어쩐지 더 궁색해졌다.
“아, 아니, 성형까지 할 얼굴은 아니라구요. 돈 아깝게 성형은 무슨…….”
“…….”
이거 봐, 이 의미심장한 미소.
내 심정을 이미 훤히 꿰뚫고 있다는 표정이잖아. 내가 자기한테 푹 빠졌다는 걸 아는 거지.
은수의 마음속 어딘가에서 실낱같은 자존심이 구겨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현재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냥 해 본 말이에요. 대신 다른 면은 모조리 맘에 드실 수 있게 노력해야죠.”
“……그, 그래요. 그럼 뭐…….”
“이제 거의 시간 다 된 거 같은데 들어가요, 우리.”
“……네.”
에휴, 그렇게 드높던 내 콧대는 다 어디로 갔을까. 이제 완전히 태세 전환되게 생겼네. 아이씨, 내가 누난데.
어쩐지 내가 갑의 입장에서 을로 변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이제 그런 걸 따지는 건 아무 의미가 없겠지만…….
심통이 나 얼굴을 구기던 은수가 잠자코 그의 뒤를 따르려는데,
“……아!”
웬일인지 평소와는 다르게 배의 뭉침 강도가 전에 없이 강하게 느껴져, 그녀는 잠시 걸음을 멈추어야만 했다.
저도 모르게 낸 소리가 꽤 커서, 그것을 바로 캐치한 현재가 앞서가다 말고 재빨리 그녀에게 돌아왔다.
“왜 그래요? 어디 안 좋아요?”
“……아, 아뇨. 가끔 배가 뭉친 것처럼 그래서……. 괜찮아요…….”
이번 건 정말로 좀 아팠다. 다른 때는 그냥 잠깐 그러고 마는 정도였는데…….
그녀가 다시 잠잠해진 배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다행히 별이는 안전하게 잘 뛰어 노는 것 같은데, 왠지 이상했다. 자꾸만 몸에서 뭔가 신호를 주는 느낌. 저도 모르게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런 은수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현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배가 왜 뭉치지. 병원 가 봐야 되는 거 아니에요?”
은수가 고개를 들자 현재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그녀의 눈에 한가득 들어왔다. 요즘 그는 안 그래도 걱정이 많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있을 것이었다. 그에게 괜히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걱정을 끼치기도 싫었고. 그래서 손사래를 쳤다.
“저번에 한번 여쭤봤는데, 걸어 다니다 보면 가끔 그럴 수 있다나 봐요. 별일 아니에요. 그래도 정 불편하면 내일이나 모레쯤 가 보려구요.”
말은 이렇게 하지만, 설마 무슨 일이 있기야 하겠어.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현재에게 은수는 괜찮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그리고 별일 아닐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가려면 같이 가요. 알았죠?”
“응, 알았어요.”
그나저나, 다음 주에 만나기로 한 그의 형이 문제였다.
대체 어떤 사람일까. 아무래도 형제니까, 현재 씨랑 많이 닮았을라나.
* * *
현재보다 살짝 매섭지만, 또 조금 큰 덩치 때문인지 둥실해 보이는 이목구비의 남자가 그녀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도현수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민은수라고 해요.”
테이블 위로 숨 막히는 어색함이 감돌았다. 옆에 앉은 현재는 그저 이 상황이 재밌는 눈치였다.
“현재한테서 이야기 많이 전해 들었어요. 진짜 굉장히 미인이시네요.”
“아…… 하하, 감사합니다.”
아, 이거 좀…… 상당히 민망하네. 칭찬을 받았는데 가만히 있을 수도 없고.
쭈뼛거리며 웃던 은수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현수 씨도 인상이 엄청 좋으세요. 현재 씨랑 되게 닮으셨네요.”
그런데 옆에 있던 현재가 눈치 없이 바로 태클을 걸고 들어왔다.
“형이요? 에이, 내가 훨씬 낫죠. 저 형 미국 물 먹고 완전 아재 다 된 건데.”
“…….”
……그쪽이 잘생긴 건 나도 아니까 제발 가만히 있으라고요…….
은수는 정수리에서 땀이 삐질 흐르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형제라서 그런가, 닮았다는 얘기에 무척 민감한 모양이었다.
정장을 입은 그의 형은 현재에 비해 다소 투박한 인상이었지만, 풍기는 분위기 자체는 그와 매우 흡사했다. 어쩐지 다정하고, 구김 없고, 밝은 에너지를 내뿜는.
은수는 아마도 그것이 같이 자란 환경의 영향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곧 그들의 어머니로부터 비롯됐을 가능성이 컸다.
“참나. 도현재, 형 없는 새에 많이 컸다?”
“내 나이가 몇인데, 당연히 커야지. 이래봬도 내가 형보다 먼저 아빠 된다고.”
웃음기 섞인 현재의 말에 현수도 덩달아 웃으며 말했다.
“아이, 자식……. 그거 가지고 되게 째네, 진짜. 여자 친구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냐?”
“부러우면 형도 빨리 장가가든가.”
“갈 거면 네가 빨리 가야지. 누가 보면 결혼한 지 몇 년 된 유부남인 줄 알겠네.”
“걱정 마. 곧 갈 거니까.”
현재를 밉지 않게 흘긴 현수가 슬쩍 은수에게 눈길을 두었다.
“저…… 그럼, 제수씨라고 불러도 되는 거죠?”
“……네, 네?”
형제의 대화를 들으며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있던 은수는 순간 퍼뜩 놀라 현수를 쳐다보았다.
제수씨라……. 영 이상한 기분이기는 하지만, 듣기 나쁜 호칭은 아니었다.
“어, 네…… 그럼요. 편하게 부르세요.”
현수는 그녀를 향해 현재와 똑 닮은 미소를 짓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실, 좀 놀랐어요. 원체 여자한테는 별 관심도 없던 놈이라 이렇게 큰 사고를 칠 줄 몰랐거든요. 처음 들었을 땐 장난인 줄 알았어요.”
“……아, 네.”
그럴 만도 하죠. 저도 그랬는데…….
은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처음의 그 까마득한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손발이 떨릴 지경이었다.
“그래도 조카가 이렇게 일찍 생긴다니까 저는 좋네요. 제수씨도 좋은 분이신 것 같고.”
“…….”
“앞으로 자주 뵐 것 같아요. 이참에 아예 한국으로 들어올 거거든요.”
“……정말요? 그럼 직장은 어떡하시고요?”
“아, 미국은 어차피 경력 쌓으려고 간 거였어요. 거기도 좋긴 좋았는데, 그래도 한국이 제일 편한 것 같아요. 이제 좀 그립기도 하고.”
“아…….”
은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생각해 보니, 그는 장차 아이의 큰아버지가 되는 거였다. 지금껏 둘만의 일이라 생각해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사실.
하지만 그의 형을 직접 만나고 나니 뭔가 안심이 되었고, 역시 피는 어디로 가지 않는구나 하는 확신도 들었다. 현재가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 만큼, 그의 형도 아이에게 좋은 큰아버지가 되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조곤조곤 말하던 현수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물었다.
“엄마는…… 아직 안 만나 보셨다고 했죠?”
아. 역시, 이 질문이 나올 줄 알았어.
“……어, 네.”
나란히 앉아 있는 두 사람의 표정이 동시에 어두워졌다. 그들의 처지를 현수라고 모를 리 없었다.
그의 입가에 작은 주름이 졌다.
“솔직히 말하면…… 엄마가 좀 걱정이에요. 나나 현재나, 지금까지 엄마를 속 썩인 적이 별로 없었거든요.”
“…….”
“오늘도 나올 때 대충 보니까, 충격이 꽤 큰 모양이더라고요. 약간 배신당한 기분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