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96. 과속은 사고를, 사고는 후유증을 낳는다 (5)
은수의 말에 이 여사는 잠시 고개를 돌리더니, 곧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사람 아니어도 세상에 남자 널리고 쌨으니까.”
“…….”
“넌 얼굴도 이쁘겠다, 능력도 좋은데 애 있다고 이 세상 천지에 너 데려갈 놈 하나 없을까. 걱정하지 마. 엄마가 어떻게든 너 잘 살게 해 줄 거니까.”
“…….”
엄마의 말을 듣자마자 은수는 이제껏 엄마가 해 온 말들이 단순히 현재가 미워서 그런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고작 아기를 가졌다는 것 하나 때문에 내가 기 죽어 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이겠지. 소중한 우리 딸 이 세상 어디에 내놔도 부족하지 않으니,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자신 있게 살라고.
그 엄마에 그 딸이라고, 은수나 이 여사나 말로 표현을 잘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말로 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엄마의 마음이 고마워서, 은수는 순간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왔다.
그리고 그런 은수를 눈치챈 이 여사는 괜히 밝게 너스레를 떨었다.
“정 데려가겠다는 놈 없으면 엄마가 끼고 살지, 뭐. 그렇잖아도 적적한데 손자나 키우면서 살면 되겠네.”
“……엄마두 참…….”
그래, 엄마는 현재 씨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라…… 내가 이런 수순으로 결혼을 하게 되는 걸 바라지 않았을 뿐이야.
고로, 현재가 엄마와 함께 시간을 좀 보내서 점수를 따 놓는다면 엄마만큼은 적어도 결혼을 반대하지 않으리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문제는, 그녀도 현재의 어머니에게 점수를 따야 한다는 거였지만.
그렇지 않아도 현재가 그날 바로 폭탄선언을 해 버렸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그녀였다. 어머니는 거의 화병으로 앓아누울 것처럼 그러셨다는데, 다행히도 지금은 괜찮아지셨다고 했다. 대신 그와의 대화를 피할 뿐.
얼른 찾아가야 하는데, 절로 두려워지는 나머지 날을 잡는 것 자체가 버거울 지경이었다.
착잡해지는 마음을 애써 누르며, 은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때마침 라면 코너를 지나는 길이었다.
“엄마, 나 먹고 싶은 거 생겼다.”
“뭔데.”
“……컵라면 하나만 사면 안 돼?”
“뭐?”
“하나만…….”
포장된 것만 보는데도 현재와 함께 먹었던 컵라면의 맛이 떠올랐다.
진짜 먹고 싶은데…….
하지만 컵라면을 집어 들려는 은수의 팔뚝을 이 여사의 매서운 손길이 제지했다.
“얘가, 얘가. 큰일 날 소리 하지 마! 임신을 했으면 먹는 거 하나도 다 신경 써야지. 인스턴트를 먹으면 돼?”
“아, 엄마! 가끔은 괜찮댔어!”
“허, 누가 그러는데?”
“……인터넷에서.”
……어, 이거 현재 씨가 자주 하던 말인데. 이젠 내가 하고 있네.
요즘 들어 자꾸만 행동도, 말투도 그와 닮아가는 그녀였다.
“그런 말 듣지 말고 엄마 말이나 들어. 아이, 그나저나 또 뭘 사야 되더라…….”
“그러니까 장 볼 땐 좀 적어 다니라니까. 안 그래도 건망증 심하면서. 감자랑 양파는 있어. 안 사도 돼.”
“아, 그래? 그래, 그럼.”
은수의 말에 채소 코너를 벗어나던 이 여사의 눈길이 무심코 은수의 얼굴로 향했다.
늘 보던 얼굴과 같았는데, 그녀는 문득 은수의 얼굴색이 영 흙빛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보니 화장한 얼굴 주변으로 원인 모를 물기가 어린 것도 같았다.
“근데 이거 땀이야? 왜 이렇게 땀을 흘려. 어디 아퍼?”
“응?”
“이제 보니까 오늘 안색도 영 안 좋네, 네가. 목소리도 안 좋고. 일이 너무 고된가?”
나도 모르는 새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나 보다.
몸이 좀 찌뿌둥하긴 하지만…… 딱히 별다른 이상은 없는 것 같은데.
은수는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닌데…… 별로. 평소랑 똑같은 거 같은데?”
“아니긴 뭘 아니야. 아침에도 먹는 둥 마는 둥 회사 가더니. 너무 무리한 거 아니야?”
사실 요 며칠 스트레스도 좀 받고 해서인가, 이따금씩 배가 콕콕 쑤시고 뭉칠 때가 있었다. 한동안 괜찮다가 갑자기 부쩍 횟수가 늘기는 했지만, 조금씩은 늘 있던 일이라 별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의사가 말하기를 별문제가 없어도 가끔은 그럴 수 있다고 했으니까.
무엇보다 그녀는 엄마에게 그런 얘기는 일체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엄마를 더 걱정시키기는 싫으니까.
‘엄마 몰래 내일 잠깐 시간 내서 병원에 갈까. 어차피 이제 곧 현재 씨 어머니도 뵈어야 하니까, 뵙기 전에 검사를 받아 놓는 것도 괜찮겠네.’
어쨌든 은수의 얼굴을 면밀히 살핀 이 여사는 그녀를 더 이상 오래 서 있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식은땀을 흘리는 걸 보니 아무래도 기가 허해졌거나 어디 안 좋은 데가 있는 모양인데. 얼른 가서 쉬게 해야겠다.
이 여사는 얼른 집에 갈 요량으로 옆에 있는 해산물들을 빠르게 카트에 집어넣었다.
“됐다. 이쯤 해서 얼른 집에 가자. 가서 좀 쉬어.”
“……그럴까?”
“그래. 네 얼굴 보니까 돌던 입맛도 떨어지겠다. 오늘은 너 좋아하는 해물탕 해 줄 테니까 빨리 가자.”
“우와! 간만에 또 실력 발휘하는 거야?”
은수는 아픈 티가 나지 않도록 일부러 더욱 신나게, 앞서가는 엄마를 종종걸음으로 뒤따랐다.
뭐, 별일이야 있겠어?
* * *
“별일은…… 없었죠?”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스스로 자문하던 것을 그대로 그에게 묻게 되었다.
며칠 동안은 일이 바빠 이렇게 짬을 내서 대화를 하기도 힘들었다. 어차피 회사에서 개인적인 대화 시간을 갖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간은 그나마 그녀의 집에서 편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었지만…… 이 여사가 상주하고 있는 지금 상황에선 그를 집에 부르기도, 통화를 길게 하기도 애매했으니.
그러니까, 그날 이후 은수가 현재의 소회를 제대로 듣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고 며칠 새 약간 까칠해진 것 같은 남자의 얼굴이 그녀는 속상했다.
“그래도 우리 엄만 좀 나아졌는데, 현재 씨 집은…… 살얼음판이겠어요.”
그러나 안타까워하는 그녀를 안심시키기라도 하듯, 그가 담담한 투로 대답했다.
“살얼음판인지는 잘 모르겠고, 냉전은 맞는 것 같네요. 그 이후로는 말을 거의 안 거시니까.”
“……형은 뭐라고 해요?”
아.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현재가 그녀를 쳐다보고는 작게 혼잣말을 했다.
“……내가 은수 씨한테 말 안 했구나.”
“……네? 뭘요?”
“형은 지금 한국에 없어요. 미국에서 직장 다니거든요.”
“정말요?”
“네. 몇 년 됐어요.”
“……아, 그렇구나…….”
어쩐지…… 형 얘기는 거의 안 한다 했어. 이제야 이해가 되네.
별생각 없이 고개를 주억거리던 은수는 불현듯 깨달았다.
그렇다면 남자는 이제껏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다는 얘기가 되는 거였다.
헐. 그런 사람을 그렇게 늦은 시각마다 다짜고짜 불러 대고 한 거야?
은수에게 금세 막심한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런 줄 알았으면 절대 외박도 안 시키는 건데. 어머님이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셨을까…….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는 그저 담백하게 물었다.
“우리 형, 만나 볼래요?”
“……방금 미국에 계신다면서요? 무슨 수로 만나요. 우리가 미국에 갈 것도 아닌데.”
그녀의 퉁명스러운 말투에도 현재는 그저 슬며시 웃었다.
“그건 맞는데…… 우리가 못 가니까 형이 온다나 봐요, 다음 주에.”
“……진짜요?!”
어머니에 형까지.
물론 언젠간 꼭 만나야 할 사람들이었지만, 그녀는 갑작스러운 부담감이 저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가만, 이렇게 되면…… 어머니를 뵙기 전에 형이라도 포섭해 놔야 하는 건가.
“괜찮겠어요? 형은 만나고 싶어 하는 눈치던데.”
“……어, 음.”
“…….”
“현재 씨 형…… 무서워요?”
굉장히 조심스러운 말투였다.
어울리지 않게 긴장하는 것 같은 그녀가 귀여워서, 현재는 푸스스 웃었다.
“뭐, 장난기가 좀 있긴 해도 착해요, 사람은.”
“…….”
“은수 씨 보여 주기 전에 내가 이실직고할 거니까, 형에 관해선 너무 걱정하지 마요.”
은수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솔직히 형 정도는 얼마든지 아군으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
진짜 걱정되는 사람은 그의 형이 아니라…….
“……그럼, 어머니는요.”
“…….”
“……언제쯤 뵙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어머님이지.
은수는 순간, 현재의 얼굴이 희미하게 굳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보나마나 긍정적인 반응은 아니었다.
하지만 기필코 부딪쳐야 할 산이었다.
어차피 단번에 받아들여 주시길 기대한 건 아니니, 어느 정도는 감당해야 할 몫인 게 당연했다.
“……아직 안 될 것 같아요?”
“…….”
그는 나지막이 한숨만 내쉴 뿐, 별다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말 안 해도 알겠어요. 쫓겨나지 않은 게 다행인 거죠?”
현재는 눈치 빠른 은수의 말에 씁쓸한 마음을 숨기고 짐짓 웃었다.
사실은, 그러고 난 뒤 실제로 쫓겨날 뻔도 한 그였다. 하지만 원체 마음이 약한 어머니인지라, 하루 만에 그 결정을 거두어 준 덕분에 집에는 들어갈 수 있었다.
그게 끝이면 좋았으련만, 애석하게도 그렇지는 못했다.
이제 엄마는 단순히 그의 얼굴을 보는 것도 피했고, 정말로 그에게 말 한마디조차 걸지를 않았다. 그래서 현재도 속으로 좀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그런 엄마가 은수의 부른 배를 실제로 보게 된다면 상황이 더욱 악화될지도 몰랐다.
그래도 현재는 이러한 사실을 은수에게 굳이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힘든 상황. 이런 일들이 반복되다 보면 정말로 아기와 은수에게 해가 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긍정적으로.
“그래도, 이렇게라도 말씀드리고 나니까 후련하지 않아요? 꼭 마지막 산을 넘은 기분이라고 해야 되나.”
맞는 말이다. 은수는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하지만 그러다 곧 시무룩해졌다.
그건 일정 부분 나도 동의하는 바이지만…… 그래도.
“아직 다 못 넘었잖아요. 우린 아직 등산 중인 거라구요, 이 몸을 하고!”
그녀가 자조적으로 제 배를 가리키며 하는 말에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시작이 반이라잖아요. 반은 온 거니까.”
그러면서 현재는 조용히 그녀의 손을 잡아끌어 깍지를 꼈다.
“…….”
은수의 입이 꼭 다물렸다. 그가 손을 잡아 주자 그녀는 조금이나마 안정이 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더 이상 숨기지 않게 된 것 자체가 다행이지.
그걸로 일단은 안심이 되니까, 어찌 보면 반은 넘게 온 것일지도.
그런데 다 마신 종이컵을 힘껏 구겨 휴지통에 골인시킨 현재가 잠시 은수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는가 싶더니, 보릿자루마냥 서 있던 그녀를 갑작스럽게 힘껏 끌어안았다.
“엄마!”
그 바람에 코와 코가 거의 맞닿을 지경이 되었고, 튀어나온 배에는 그의 체온이 확 와 닿았다.
은수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집에 계신 어머니는 왜 찾고 그러실까.”
그는 평소엔 순한 양 같다가도, 가끔씩 이렇게 기습적으로 훅 들어올 때가 있었다.
은수는 능글맞게 웃는 현재의 얼굴을 가자미눈으로 째려보며 솜 주먹으로 가슴팍을 팡팡 내리쳤다.
“가, 갑자기 왜 이래요……. 사람들 다 보는데!”
“보라고 해요. 보라고 하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