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95. 과속은 사고를, 사고는 후유증을 낳는다 (4)
“저…… 결혼하려고요.”
“……응?”
……아니, 갑자기 결혼이라니?
그녀는 어리둥절한 마음에 다시금 물었다.
“결혼? 갑자기 결혼은 왜…….”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있어요. 그 사람 아니면 안 돼요.”
여자가 있다는 건 그녀도 이미 알고 있었다. 물론 현재가 그런 걸 가타부타 말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지금껏 아들을 키워 온 엄마로서 그 정도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것이었다. 최근 들어 외박도 잦고 집에 있는 시간도 적어진 게 다 그 탓이겠거니 했었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현재가 고른 여자라면 분명 예쁘고 착한 아가씨일 거라 생각해서 별로 걱정도 되지 않았다. 이제 현재의 나이도 20대 중후반. 그러니 슬슬 신붓감을 고른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얼마나 만났다고 벌써부터 결혼을 논한단 말인가?
진지하고 단단한 현재의 말이 놀랍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해서,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우리 아들 단단히 빠졌나 보네. 어떤 아가씨길래 그래. 좀 기다리면 안 되는 거야?"
“…….”
“뭐…… 아직은 네가 나이도 어리고, 또 요즘 남자애들은 보통 다 서른 넘어서 하잖아. 연애 조금 더 하고, 나중에 해도 엄만 늦지 않을 것 같은데?”
하지만 그런 그녀의 생각을 현재는 서둘러 잘라 냈다.
“아니요. 그땐 늦어요. 되도록이면 하루 빨리 했으면 좋겠어요.”
“……왜, 아가씨가 재촉해? 대체 갑자기 왜 그런…….”
이상했다. 교제를 한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결혼을 해야겠다고 말하는 것이.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 돌연 뭔가가 스쳐 지나갔다.
“…….”
에이, 설마. 아닐 거야. 내 아들이 설마 그런 일을 저질렀으리라곤…….
왠지 모를 직감에 그녀의 목소리가 덩달아 차분해졌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아닐 거라고 믿었다.
“……설마…….”
“…….”
“……아니지?”
“…….”
왜 대답을 하지 않는 걸까.
아닐 텐데. 분명히 그런 건 아닐 텐데. 왜…….
“현재야?”
답답했다. 무어라 대답이라도 좀 해 주지, 하는 마음에 그녀는 현재를 채근했다.
하지만 늘 불러 왔던 이름을 다시 부르는 것이, 어쩐지 전에 없이 무서웠다.
“……현재야.”
현재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애석하게도 그녀에게 돌아가는 대답은, 언젠가 은수가 현재에게 선물했던 폭탄과 닮아 있었다.
“……맞아요.”
“…….”
“제 아이를 가졌어요. 그래서 그래요.”
마침내 현재마저 제 스스로 핀을 뽑은 것이었다.
* * *
“어머, 여긴 완전히 딴 세상이네.”
“또또, 시골 사람 티 다 낸다.”
“이렇게 큰 데는 처음 보니까 그렇지!”
물론 마트는 어딜 가나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큰 데는 처음 보네.
여기저기를 구경하느라 이 여사의 눈이 바삐 움직였다.
결국 그녀는 한동안 은수의 집에 함께 머무르기로 했다.
‘생일 딱 하루만 챙겨 주러 간다더니, 왜 이렇게 안 와?’ 하는 주위 사람들의 연락도 있었다. 그들에게는 길게 떨어져 있던 만큼 오랜만에 딸이랑 좀 있어 주려고 한다는 핑계를 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오랜만에 본 딸내미가 덜컥 임신을 해 있어서 좀 도와주느라 못 간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으니까.
그리하여 출퇴근길에 항상 현재가 함께하던 것도 중단되었다. 은수가 적어도 엄마와 함께 있는 동안만큼은 스스로 출퇴근하겠노라고 통보했기 때문이었다.
현재는 내키지 않는 듯했지만 결국 은수의 말에 동의했다. 아직 그를 향한 이 여사의 노여움이 채 가시지 않은 마당에, 괜히 출퇴근 해 주겠답시고 집 근처를 얼쩡거리면 화를 돋우기만 할 것이라 생각해서였다. 때문에 출퇴근은 좀 힘들어졌지만, 퇴근 후 운동 겸 이곳저곳 엄마와 함께 다니는 것은 오랜만에 느끼는 즐거움이었다.
은수 딱 한 명만을 낳아 봤어도 엄마는 엄마였다. 그녀는 경험자 포스를 내뿜으며, 아직까지 출산 준비도 제대로 안 하고 뭐 했던 거냐고 은수에게 타박을 늘어놓았다. 나름 육아 서적이나 블로그 같은 것을 보고 준비한다고 한 건데도, 첫 출산이라 그런지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것을 은수 스스로도 깨닫고 있었다. 엄마에게 사실을 좀 더 빨리 말했더라면 상황이 이보다는 나았을지도.
아직은 엄마의 화가 다 누그러지지 않았다는 것이 계속해서 느껴졌지만, 지금이라도 말하게 된 게 어디야, 싶었다. 차라리 이렇게라도 허심탄회하게 밝히고 나니 마음이 훨씬 가벼워져서, 상대적으로 무거워지는 몸의 무게 정도는 버틸 만하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카트를 끌고 있는 이 여사의 옆에 거머리마냥 붙어서 쉼 없이 조잘거리고 있는 은수를 향해 그녀가 인상을 팍 썼다.
“어우, 귀 따가워. 애를 가졌는데 어째 먹성은 안 늘고 수다만 늘었어, 얘는.”
“먹성도 늘었어. 살 엄청 쪘는데?”
“애를 가졌는데 그럼 살이 쪄야지. 뭐 또 먹고 싶은 건 없어?”
“음…… 없어. 현재 씨가 얼마 전까지 족족 다 사다 줬었거든.”
“…….”
……현재.
“……따로 필요한 건? 튼살 생겼을 거 아냐.”
“아아, 그건 이미 다 대비하고 있었지. 그런 것도 현재 씨가 다 사 줬어.”
……또 현재.
잊을 만하면 나오는 그 이름에, 은수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주 노래를 불러라. 그놈의 현재, 현재…….”
신나게 걸어가고 있던 은수는 금세 불만스럽게 입술을 내밀고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엄만? 그놈이라니. 귀한 남의 집 아들 어쩌구 하더니 왜 이러셔?”
“…….”
이젠 내 앞에서 대놓고 역성까지.
현재를 두둔하고 나서는 은수를 외면한 그녀가 흥, 콧방귀를 뀌며 카트를 끌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 날 새는 줄 모른다고 네가 딱 그 짝이다, 은수야.”
“그게 무슨 소리야?”
“그렇~게 남자가 싫니, 결혼 안 하니 하던 애가, 엄마 앞에서 지금 말끝마다 현재 씨, 현재 씨 그러고 있잖아.”
“……치.”
정말 우리 딸내미가 이상해지긴 했네. 평소 같았으면 펄쩍 뛰며 부인부터 해 댔을 텐데, 지금은 은근슬쩍 팔짱을 껴 오며 부끄러운 듯 긍정하고 있는 걸 보면.
어우, 기막혀.
어이가 없는 이 여사가 팔을 흔들어 은수를 떼어 내려 했지만, 은수는 그냥 거머리가 아니라 찰거머리처럼 요지부동이었다.
“어유, 어유? 징그러 죽겠어. 넌 그놈이 어디가 그렇게 좋아?”
어디가 좋냐고……?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질문이었다. 팔짱을 낀 채 엄마를 따라 천천히 걸으며, 은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냥, 모르겠어.”
“무슨 대답이 그래?”
“진짜 그래. 그냥…… 언젠가부터 좋아졌어.”
꼭 습자지에 물이 스미는 것처럼.
좋은 걸 하나하나 따지자면 너무나도 많다. 목소리도, 눈도, 입술도, 그 진중한 성격도…… 때때로 나를 어루만지는 그 따뜻한 손길도 전부 다 좋은걸.
……그렇지만 물론 외모에 먼저 끌렸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무리 술 먹고 사고를 쳤다지만, 외적으로 매력을 못 느끼던 상대와 그런 일을 벌였을 린 없을 테니까.
“솔직히 엄청 잘생겼지. 그치, 엄마?”
“얼레?”
“잘생겼잖아. 그 정도면 인물 좋지, 능력 있지. 성격도 좋고, 다정하고…….”
어디가 좋은지 잘 모르겠다더니 장점만 들입다 늘어놓고 있는 딸을 보며, 이 여사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휴, 그렇게 팔불출 다 돼서 어떡해.”
“팔불출은 무슨, 다 사실인데.”
“으이그…… 남자 잘생긴 거 아무 짝에도 소용없다. 자고로 남자는 잘생기면 얼굴값, 못생기면 꼴값 하는 법이야.”
“……그러는 엄마도 아빠 잘생겨서 결혼한 거면서…….”
하여간 딸이라고 하나 있는 게 한마디 지는 법이 없다.
그렇지만 이렇게 똑똑하게 키운 장본인이 이 여사 자신이니 어쩔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대신 은수의 머리를 제 머리로 장난스럽게 콩 찍으며 대꾸했다.
“그때야 뭘 아니. 훤칠하기만 하면 좋아서 어쩔 줄 몰랐는데. 나이 먹으니까 그런 게 조금 보이나 보지.”
“오오, 우리 엄마 철들었네?”
“……요게. 아무튼 조심해. 얼굴은 멀쩡하게 생겼더구만…….”
“…….”
“……혹시나 바람피울라."
솔직히 말하면, 잘생기긴 했더라. 그 정도면 은수 뱃속에 있는 손자─아들이란 것을 전해 들었다.─의 외모는 걱정 없겠다 싶었을 정도로.
하지만 이 여사 입장에선 오히려 인물이 너무 잘나서 걱정되는 부분도 있었다. 은수의 말처럼…… 그녀의 남자이자 은수의 아버지였던 그 사람도 그렇게 인물이 좋았었으니까.
그러나 은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현재 씨는 그런 사람 아니야. 세상 남자가 다 아빠 같은 줄 아나.”
“느이 아빠가 어때서.”
“지금 설마 몰라서 물어? 솔직히 아빠가 요즘 세상에 태어났으면 진짜 돌 맞아 죽어. 개썅놈이라구.”
“어머, 요게 이제 나이 먹었다고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아주.”
“엄마 딸 원래 이랬거든요? 암튼…… 현재 씨는 진짜 괜찮은 남자야. 아빠랑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지. 얼굴이 다가 아니라니까.”
“……뭐, 나쁜 놈은 아닌 것 같더라.”
은수에게 아이를 배게 한 몹쓸 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는 했지만,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자신을 향해 친절하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던 청년이 바로 다름 아닌 현재였다는 것을 그녀는 잊지 않고 있었다.
사람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또 어차피 책임을 진다는 마당에, 주위에 눈치는 좀 보일지언정 혼전 임신 자체는 문제 삼을 거리도 아니었다, 요즘 세상에.
다만…….
“근데 나이가 너무 어려.”
스물일곱이면 아직 너무 어리니까 문제지. 가장이 되어 가정을 꾸리기에는 못 미더운 나이니까.
“엄마, 우리나라에서는 군대까지 다녀온 성인 남자를 어리다고 하지 않아.”
거기다 내 딸이 이렇게 변호하고 나서는 것도 영 마음에 안 들고.
이게 무슨 심보인지는 그녀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어쨌든 썩 마음에 드는 사윗감은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예비 사위를 생각할 때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혀를 끌끌 차게 되었다.
“그래도 스물일곱이면 어린 거지. 하여튼 얼굴 번지르르한 놈들은 별로야.”
“……엄마 완전……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딱 그거네.”
“뭔 소리야, 그건?”
“그런 게 있어. 지금 엄마한테 딱 맞는 말.”
“어?”
괜히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간 좋은 소리 못 들을 것을 알고 있기에, 은수는 황급히 말을 돌렸다.
“아, 암튼 그래서 뭐. 반대라도 하려구?”
“왜, 못 할 거 같아?”
“……아니, 그게 아니라.”
은수가 카트를 끌고 가던 엄마를 잠시 멈춰 세우고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엄만 맨날 나 시집가라고 노래 불렀었잖아.”
“…….”
“좀 의외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