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속도위반 로맨스-94화 (94/128)

# 94

94. 과속은 사고를, 사고는 후유증을 낳는다 (3)

이 여사에게서 가열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엄마가 그랬지. 너 좋다는 신랑 만나서 얼른 결혼해 가지고 오순도순 애 낳고 살라고. 엄마가 말했어, 안 했어?!”

“…….”

“근데 너 그때 뭐라고 했어. 결혼은 무슨 얼어 죽을 결혼이냐며! 그렇게 말 안 듣고 결혼은 싫다던 애가 어쩌자고 이렇게 애부터 덜컥 배어 와서……. 왜 이랬어, 정말!”

“……엄마…….”

우리 ‘애’가 ‘애’를 가졌다. 나이만 먹었지 정말 아직 애인데…….

어느새 그녀의 딸 은수는 어엿한 엄마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아기를 가진 사람에게 큰소리를 낼 수는 없는 노릇. 그녀는 은수를 향해 차마 더 큰소리를 내지는 못하고 울분을 삭이며 물기 어린 목소리를 토해 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좋아도 결혼을 하고 애를 가지든가 했어야지. 대체 뭘 믿고 애를 가져!”

“…….”

“배가 이만큼 불렀으면 이제 떼지도 못하는데! 그렇게 똑똑하고 잘나 가지구, 악착같이 공부해 놓고선…… 왜 그랬냐고, 응?”

“…….”

“대체 왜…….”

언젠가는 자신도 할머니가 되겠거니, 떡두꺼비 같은 손자 손녀를 마주할 날이 있겠거니 생각했었다. 그리고 예쁘고 똑똑한 제 딸이 언젠가 건실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면, 자연스레 이런 날이 올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꾸만 선을 주선하고, 계속해서 남자가 있느냐 물어 온 그녀였다. 하지만 그에 대해선 아무 말이 없기에 그런가 보다 하고, 제 일은 스스로 잘 챙기던 딸이니 그저 알아서 잘하리라 믿고 있었다. 그랬는데…….

지금 이 기분은 꼭 믿던 도끼에 발등 찍힌 느낌이었다.

내가 널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키웠는데 나한테 이래.

아이만 가지지 않았어도 몇 대 때리고 싶었을 만큼 은수가 미웠다. 야속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미혼의 몸으로 덜컥 애를 배어 버린 딸이 가여워서 눈물이 났다. 벌써 주변에 소문이 다 퍼졌을 텐데 어떻게 지내 온 걸까. 미운 마음도 컸지만 그보다는 걱정되는 마음이 앞섰다.

“…….”

“…….”

그런 엄마를 알기에, 은수는 반항하는 엄마의 몸짓을 참아 내며 있는 힘껏 엄마를 껴안았다. 장애물같이 불룩 튀어나온 배가 사이를 가로막자 이 여사는 더더욱 울음이 터졌다.

이렇게 안는 것만 해도 그랬다. 예전 같았으면, 어릴 적부터 늘 그랬던 것처럼 은수의 몸이 제 품에 꼭 맞게 안겨들었을 것이었다.

왜 진작 안 지웠느냐고, 무슨 생각이었느냐고 책망하고 싶었다.

그러나 은수는 엄마의 울음소리만으로도 그 마음을 알아챈 듯이, 귓가에 조용하게 속삭였다.

“나도 처음엔…… 지우려고 했었어. 근데 엄마.”

“…….”

“엄마가 그랬잖아. 엄마가 나 가졌을 때 마냥 좋았다고. 행복했다고. 근데 나는…… 그때 지옥에 떨어진 것 같았어. 내가 대체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러는 건가……. 사실 애기가 밉기까지 했다.”

“…….”

“근데 엄마한테 그 소릴 듣고 나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내 자신이 오히려 더 미운 거야. 죄 없는 애기한테 미안해서…… 도저히 지울 수가 없었어.”

“…….”

어느새, 은수도 울고 있었다. 그녀의 귓가에 가라앉는 무거운 목소리가 축축했다.

“그래서 나 혼자 감당하려고 했는데…… 현재 씨가, 많이 도와줬어.”

“…….”

“솔직히 그 사람한테 바란 거 아무것도 없었어. 그 사람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구, 결혼 같은 건 할 생각도 없었어. 그냥 남남이라고만 생각했었어. 정말로.”

“…….”

“근데 그 사람은…… 다 괜찮대. 내가 남자를 온전히 믿을 수 없는 것도 괜찮대. 자기랑 결혼 같은 거 안 해도 괜찮대. 그래도 내 옆에 있어 주겠대……. 세상에 어떻게 그런 사람이 있냐.”

“…….”

“근데, 그 사람이 옆에 있으니까…… 괜찮은 게 하나도 없는데도 그냥 괜찮은 것 같았어. 그새 물이 든 건지…….”

“…….”

“이제 그 사람이랑 아기가 옆에 없으면…… 난 도저히 괜찮을 수가 없을 거 같애, 엄마.”

엄마를 품에서 떼어 낸 은수는 엄마의 볼에 흘러 있는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 주며 말을 이었다.

“회사 사람들한테도 다 말했어. 엄마한테만 말 못 한 거야. 몇 달 전부터 다들 알고 있었어, 나 임신한 거…….”

“……엄마만 아주 바보 만들었네.”

“……그런 거 아냐. 어쩔 수 없었던 거라니까.”

퉁명스럽게 말하면서도, 오랜 주방 일로 까칠해진 손은 붉게 된 은수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대충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이제는 은수의 마음도 어렴풋이 이해가 갔고 상황도 이해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냉혹한 현실이 슬프게 다가왔다.

은수는 연신 제 볼을 쓰다듬는 엄마의 손을 꼭 붙잡고 제 가슴께에 올려놓았다.

“엄마.”

“…….”

“잘할게. 엄마 맘 안 아프게…… 나 좋다는 그 사람이랑, 진짜 행복하게 살게.”

물기 어린 눈으로 은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엄마, 나 있지. 이제껏 살아온 날들 중에 지금이 제일 행복해. 그리고 오늘보다는 아마 내일이 더 행복할 거야. 내일보단, 내일 모레가 더 행복할 거고.”

“…….”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정말정말 행복해. 그러니까 괜찮아, 엄마.”

“…….”

“괜찮을 거야.”

담담한 그 말에 이 여사는 또다시 왈칵 울음을 쏟아 냈다.

은수는 아기를 그러안는 양 엄마를 제 품에 가두고 다독였다. 엄마의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그녀의 어깨를 적셨다.

내가 엄마보다 키가 작았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는데. 엄마는 언제 이렇게 작아진 걸까. 엄마가 작아졌을 린 없을 텐데.

그게 아니라면…… 그냥 내가 이기적이게 너무 많이 커 버린 건가.

난…… 언제 이렇게 커 버린 거지.

의연해지려고 노력했지만 은수 또한 자꾸만 눈물이 났다.

그렇게 모녀는 한참을 끌어안고 서 있었다. 아빠를 닮아 분위기 파악을 잘하는 건지, 사이에 갇힌 별이도 어쩐지 평소보다 조용해진 느낌이었다.

“……엄마.”

“…….”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울음이 잦아들자 둘은 서로를 마주 보았고, 은수는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눈물을 눈꼬리에 매단 채로 웃었다.

“배고프다. 우니까 더 배고파.”

“…….”

“나 엄마 밥 먹고 싶어. 엄마가 차려 준 생일상.”

여전히 속이 상해 죽겠는데도, 그녀는 하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넌 이 상황에 그런 말이 나와?”

“배고픈데 어떡해, 그럼.”

……이 화상. 나쁜 것.

“…….”

그래도 은수의 말마따나 정말로 괜찮은 것 같아서, 상처 따위 받지 않은 것 같아서 그녀는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딸의 너스레에 픽 웃을 수도 있을 정도로.

“어? 엄마 웃었다. 그치.”

“……아냐.”

“아니긴 뭐가 아냐!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털 난댔는데. 어뜩하냐, 울 엄마?”

“……으이구, 이걸 진짜…….”

팔뚝을 찰싹 때리는데도 기분 좋다는 듯이 웃는 은수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얼기설기 엉켰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렸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던가. 자신이 이 말을 실감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웃음 몇 번에 야속함이 흐지부지 흩어지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옛말이 정말 틀리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쩔 수가 없다. 미우나 고우나 얜 내 딸인 걸.

“……앉아 있어, 차려 줄 테니까.”

아직 할머니가 될 준비는 멀었나 보다.

뱃속에 있다는 아기보다, 내 눈 앞에 있는 내 새끼 밥 먹이는 것부터 먼저 걱정하게 되는 걸 보면.

* * *

“어, 아들 왔어?”

“……와 계셨네요.”

집에 가도 엄마를 보기 위해서는 잠시 기다려야 할 거라고 생각한 그였다. 친구분 몇몇과 며칠 동안 여행을 다녀온다고 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한참 전에 돌아와 요리 삼매경에 빠져 있었는지 집 안에는 청국장의 구수한 냄새가 감돌고 있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로 비닐장갑을 낀 채 빨갛게 콩나물을 무치고 있는 엄마를 보며 현재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언제 오셨어요?”

“어…… 아까 점심쯤? 와 보니까 벌써 어디 나가고 없던데. 아침 댓바람부터 어디 갔다 왔어?”

“……아, 그냥. 아는 사람 만난다고요.”

“하여튼, 쉬는 날이라고 집에 붙어 있는 꼴을 못 봐요. 집보다는 바깥 공기가 좋나 봐, 아들?”

“……죄송해요.”

조용한 대답에, 콩나물을 팍팍 무치던 그녀가 고개를 들어 현재를 바라보곤 싱긋 웃었다.

“자꾸 그렇게 말도 없이 외박해, 응? 여자 있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적당히 하자고, 아드님.”

얼굴이 자꾸만 굳어서 미소를 짓는 것도 힘이 들었다.

현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케이크 상자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그녀의 눈이 대번 동그래졌다.

“웬 케이크야? 누구 생일?”

“……엄마 드시라고요.”

본 주인을 찾아가지는 못한 케이크이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몰랐다. 이런 거야 은수에게는 다시 사 주면 될 일이고, 지금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엄마를 위한 진통제 같은 게 필요한 때인 것 같으니.

“어머, 웬일이야. 고마워. 이런 건 또 엄청 오랜만이네. 무슨 날이야?”

“……그런 건 아니고요.”

“같이 먹자. 밥 먹었어?”

“……아니요. 안 먹었어요.”

그녀의 눈이 현재를 밉지 않게 흘겼다.

“아직 밥도 안 먹고 뭐 했어. 그럼 이건 밥 먹고 먹어야겠네. 옷 갈아입고 와. 너 좋아하는 청국장 해 놨어. 집에도 잘 안 들어오는데 뭐가 이쁘다고 참. 으휴…….”

“……엄마.”

“응?”

대답을 하면서도 그녀는 계속해서 콩나물을 무쳤다.

불현듯 하나 집어 들어 콩나물 무침의 맛을 보는 엄마를 보며, 현재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저 할 말 있는데.”

“할 말? 뭔데.”

“……잠시만 여기 앉아 보세요.”

그제야 그녀는 고개를 들고 현재를 쳐다보았다. 영문을 몰라 멀뚱히 쳐다볼 뿐이었다.

“무슨 얘긴데. 꼭 지금 해야 되는 얘기야?”

“……네. 실은 좀 더 나중에 얘기하려고 했는데, 급한 일이라서요.”

원체 조용하게 자라 온 아들이다. 좀 나이답지 않게 성숙하고 진지한 편이긴 했어도 이렇게 무게 잡고 얘기를 하자고 하는 일은 잘 없었던지라, 그녀는 아들의 분위기가 평소와는 다름을 단숨에 직감했다. 그리고 살짝 두렵기도 했다. 무슨 일일까?

“무슨 일이기에 그래. 그냥 여기서 얘기하면 안 돼?”

“……잠깐이면 돼요. 오래 안 걸려요.”

“…….”

정말 무슨 일이 있긴 한 건가 보네. 그녀는 비닐장갑을 콩나물 무침 위에 살포시 벗어 놓고 식탁으로 다가갔다.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아들은 무척 심각한 얼굴이었다. 원래 조용하고 차분하고 진지하긴 했는데 오늘은 더더욱 그래 보였다.

“그래, 얼른 얘기해 봐. 무슨 얘긴데?”

그런데 그는 먼저 얘기하자고 해 놓고는 입술을 달싹달싹할 뿐, 좀처럼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인내심 있게 아들이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현재의 성격은 대부분 그녀로부터 기인한 것이었는데, 상대방의 말을 기다릴 줄 아는 참을성도 그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 기다림의 끝에 툭 튀어나온 말은, 그녀의 예상보다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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