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
93. 과속은 사고를, 사고는 후유증을 낳는다 (2)
“…….”
저런 표정이라면, 묻지 않아도 지금 엄마가 어떤 기분인지 알 수 있는 은수였다.
곧바로 엄마의 심중을 훤히 간파한 그녀는 좌불안석이 되었다.
“저기, 엄마…… 그게…….”
“은수 씨, 잠깐만요. 제가 말씀드릴게요.”
“…….”
뭘 잘했다고 저렇게 당당한지. 이 여사는 그 모양조차도 맘에 안 들기 시작했다. 소중한 제 딸 은수가 고얀 놈 옆에 앉아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걸 보니 절로 속이 터졌다.
애를 가지게 한 것도 모자라서 다섯 살이나 어려? 내가 정말 기도 안 차서!
속으로는 이미 둘을 강제로 떼어 놓고 역정을 내고 있는 그녀였지만, 답답한 속이 턱턱 막히는 나머지 겉으로는 그저 허, 하는 한숨만 간헐적으로 흘러나올 뿐이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현재라고 모를 리 없었다.
중재하려는 은수를 말린 현재가 다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일단 상황에 대한 설명부터 하는 게 급선무였다.
“저흰 직장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은수 씨가 제 직장 상사였고, 저는 부하 직원이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렇고요.”
“…….”
“죄송합니다. 많이 당황스러우실 거란 것도…… 압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누구보다 은수 씨를 사랑하고 아끼고 있습니다. 처음 뵙는 자리에서 이런 말씀 드리는 게 예의가 아닐 수도 있지만, 은수 씨에 대한 마음만큼은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 있습니다.”
“…….”
“잘하겠습니다. 실망시켜 드린 만큼 두 배, 아니, 몇 배 더 잘하겠습니다.”
이 상황에서는 어떠한 말도 위안이 되지 않으리라. 갑작스런 상황이라 말이 정리되지도 않고 생각나는 대로 막 튀어나왔지만 그래도 할 수 없었다. 무조건 엎드려야 했다. 은수와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이 여사의 눈빛과 현재의 눈빛이 또 한 번 맞물렸다.
“결혼하고 싶습니다.”
“…….”
“은수 씨를 제게 허락해 주십시오.”
“…….”
“어머니.”
그 말에 은수도, 이 여사도 잠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은수는 어쩐지 뭉클해서, 이 여사는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그래도 불행 중 하나 다행인 건, 아이를 가진 은수를 나 몰라라 할 사람은 아닌 것 같다는 것이었다.
이 여사는 언제 그녀를 똑바로 쳐다봤냐는 듯, 속눈썹을 내리깐 채 눈길을 피하고 있는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쪽에선 우리 은수를 알고 계시나.”
대답에 약간 주저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단단하게 말했다.
“아니요. 아직까지는 모르십니다.”
“…….”
“하지만 곧 알게 되실 겁니다. 오늘 가는 길로 곧장 말씀드릴 생각입니다.”
“……!”
엄마가 생각보다 이 상황을 잘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다행이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은수는 깜짝 놀라 현재를 쳐다보았다.
이건 상의하지 않았었는데……? 자기 맘대로 이러는 법이 어디 있어!
“…….”
하지만 이 상황에서 그렇게 따져 대기에는 엄마의 시선이 따가웠다. 오히려 불난 집에 부채질이 될 수도 있고.
은수는 결국 뭐라 말하지도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현재를 믿으니까, 그가 하는 대로 놔두는 게 옳을 것 같았다.
그런 은수의 머릿속도 복잡했지만, 엄마인 이 여사의 머릿속은 당연히 이루 말할 수 없이 더 복잡했다.
“……난 정말 뭐가 뭔지, 도저히…….”
“…….”
그녀가 흘러내린 앞머리를 뒤로 넘기며 정신을 추슬렀다. 식탁에 반쯤 가려진 은수의 불룩한 배가 야속하게도 자꾸 눈에 들어왔다.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남산처럼 솟아오른 그 배를 보고 있자니, 이 여사는 일단 남자의 이야기보다는 은수의 이야기를 들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섰다. 은수의 입장은 그와 또 다를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자를 계속해서 보고 있기가 힘들기도 했고.
“이름이…… 현재 씨라고 했죠.”
“…….”
“미안하지만, 오늘은 이쯤 해서 돌아가 줄 수 있을까. 내가 지금은 너무…….”
그녀의 말에 ‘현재’라는 이름의 남자는 부리나케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최소한의 눈치는 있어 다행이네.
“예, 당연하죠.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어머니. 안녕히 계십시오.”
“…….”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이 자식은 또 어머니라네.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가며 하는 인사를 모른 척할 수 없어 고갯짓으로 화답해 주었지만, 불편한 마음은 여전했다. 다음에 또 뵙겠다는 말도 그랬다. 그것은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던 은수가 현관문이 닫히기 무섭게 따라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면서 배가 되었다.
“잠깐만 나갔다 올게, 엄마. 금방 올 거야.”
이 여사는 대답 없이 밖으로 나가는 은수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차라리 이게 꿈이었으면…….
고개를 숙인 이 여사가 머리를 짚었다.
* * *
"현재 씨!"
뛰지는 않았지만 다행히도 차에 올라타려는 현재를 그 전에 잡아챌 수 있었다. 현재는 차 문의 손잡이를 잡으려다 말고, 자신에게 득달같이 달려오는 은수를 돌아보았다.
“정말 말씀드리려고요? 오늘요?”
은수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건, 집에 어머니가 혼자 계신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오지 말라고 했어야 했나. 그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우리가 너무 안일했던 것 같아요.”
“…….”
“이게 숨긴다고 숨겨질 게 아니었는데…….”
엄밀히 말해 숨긴 건 아니었다. 말할 타이밍을 놓쳤을 뿐.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그걸 구분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그의 말을 굳이 정정하지 않은 채로, 은수가 다급하게 물었다.
“바로 집으로 가려구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늘 바로 말씀드릴 거예요. 어머님까지 아신 이상…… 우리 엄마도 아셔야 해요.”
“…….”
“들어가요, 어머니 기다리실 텐데.”
“…….”
“나중에 연락할게요.”
걱정 말라는 듯 부드럽게 대답을 마친 그가 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은수는 가만히 지켜보고 서 있었다. 황사 바람이 쌩쌩 몰아치는 사막 같던 마음이 이상하게 확 가라앉아 있었다. 왠지 이 남자의 말만 들으면 안심이 된다. 꼭 모든 게 잘 풀릴 것처럼…….
잠시 왜 그럴까, 하고 생각에 잠겨 있는데, 시동을 켠 현재가 기어를 조작하려다 말고 무언가 떠오른 듯이 창문을 내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제일 중요한 말을 빠뜨릴 뻔했네.”
“…….”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지. 은수는 의아한 얼굴로 현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전혀 웃지 않던 그가, 오늘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생일 축하해요, 은수 씨.”
……아, 생일.
잠시 잊고 있었다. 이 와중에 생일 챙길 정신이 어디 있어. 챙기는 이 남자가 지나치게 섬세한 거지.
“……고마워요.”
뭘요, 하고 어깨를 작게 으쓱인 현재는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빠른 속도로 주차장을 벗어났다.
아직 들어가지 않고 차 뒤꽁무니를 눈으로 쫓고 있는 은수의 모습이 사이드 미러에 비쳤다. 그 모습을 본 순간, 현재는 뭔가 하나 더 빠뜨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뭐지? 생각하는데 문득 용수철처럼 생각이 바로 튀어 올랐다.
그건 바로 조수석에 놔두었던 선물과 케이크였다.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건 주고 올 걸 그랬나.’
힐끔힐끔 선물을 돌아보던 그가 생각을 지워 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물론 생일 당일에 받는 게 제일 좋겠지만, 이 상황에 선물을 들려 보내는 것도 좀 웃긴 일이었다.
선물을 줄 시간쯤이야 나중에 얼마든지 있을 테니. 지금은 그보다 더 급한 게 있으니까.
* * *
은수가 집 안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엄마는 식탁에 없었다. 대신 그녀는 은수가 오전 내내 누워 있던 침대에 허망한 듯 앉아 있었다.
문 열리는 소리에 초점 없는 눈이 은수를 향한다 싶더니, 이 여사는 곧장 몸을 일으켜 주방 쪽으로 향했다.
“……밥은.”
“……아직.”
“임신한 애가 끼니를 안 챙겨 먹어.”
“어, 그게…… 밀린 잠 잔다고…….”
어정쩡하게 서 있던 은수가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고개도 돌리지 않는 엄마에게선 곧장 무뚝뚝한 대꾸가 들려왔다.
“있어 봐, 차려 줄게.”
“좀 이따 먹어도 돼. 쉬어, 엄마.”
“…….”
“……엄마.”
“……왜.”
바리바리 싸 온 짐에서 이것저것을 꺼내고 있는 탓인지 왜, 하는 대답이 한 템포 늦었다.
“……언제 갈 거야?”
은수가 꿋꿋하게 물었지만, 여전히 대답은 늦게야 들려왔다.
“……몰라. 쌀 어디 있어.”
“……저기, 전자레인지 밑에.”
쌀독에서 쌀을 꺼내 밥솥에다 붓고, 천천히 쌀을 씻는 엄마의 모습은 오랜만에 보는 것인데도 꽤 익숙했다. 또 이 집에서는 처음 하는 것인데도 그 모습이 이질적이지가 않았다. 역시 우리 엄마.
잠자코 조용히 있는 게 나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 모양을 보고 있으니 그녀는 자꾸만 엄마를 불러 보고 싶어졌다. 한동안 불러 보지 못하기도 했고.
“……엄마.”
“…….”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집 안에는 물 흐르는 소리와 쌀을 박박 문지르며 씻어 대는 소리만이 울렸다.
그녀는 어쩌면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사이사이 스며드는 자신의 목소리가 엄마에게는 작게 들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때문에 평소보다 더 크게 말했지만, 왠지 그 소리가 풀 죽은 것처럼 들리는 것 같았다. 어쩌면 내 무의식의 발현 때문일지도. 엄마에게 너무나 미안한 나머지, 정말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으니까.
그녀는 엄마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엄마.”
“…….”
“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해. 너무 겁이 나서…… 엄마한테 임신했다고 말할 걸 생각하니까 너무 무서워서…… 통 입이 안 떨어졌어. 그래서 그랬어. 속이려고 한 거 아니야……. 절대 아니야.”
“…….”
“미안해, 엄마. 정말 미안해.”
“…….”
엄마를 실망시킬 게 너무 미안해서, 무서워서, 그래서 미처 말하지 못한 이런 내 마음을…… 엄마가 알아주었으면.
“…….”
하지만 엄마는 대답이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은수는 다시금 엄마를 불렀다.
“……엄마.”
“…….”
“……엄마?”
“…….”
몇 번을 불러도 답이 없었다. 왜 대답이 없지……. 일부러 대답을 안 하는 건가.
의아한 마음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엄마를 살펴보려던 은수는 엄마에게 가까워질수록 뭔가 이상한 느낌을 감지했다.
희게 변한 쌀뜨물을 비워 내고 새로이 물을 받아 다시 쌀 씻기를 되풀이하는 소리 사이로 이상한 울음소리 같은 것이 섞여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은수는 엄마가 대답을 안 한 것이 아니라, 못 한 것임을 알았다.
“엄마…….”
“…….”
“……울어?”
“…….”
자신에게 우는 것을 들킬까 봐.
“엄마 나 좀 봐봐.”
“…….”
“응? 엄마.”
엄마의 허리를 뒤에서 껴안은 은수가 그 얼굴을 억지로 보려고 했다.
“…….”
계속해서 얼굴을 돌리길 거부하던 그녀가 마침내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밥솥을 탕 내려놓고 은수를 향해 돌아섰다.
주름이 약간 졌지만 여전히 고운 얼굴은 이미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