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
92. 과속은 사고를, 사고는 후유증을 낳는다 (1)
“어?”
웬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서 건물 앞을 서성이고 있는 중년 여성이었다.
“…….”
짐이 꽤 무거워 보이는데 여기를 찾아오신 게 맞나. 나이대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그녀와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의 친지나 가족인 듯했다.
어차피 처음 뵙는 아주머니였기에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이상한 이끌림 탓에 그는 저도 모르게 먼저 말을 걸고 말았다.
“뭐, 찾고 계신 거라도 있으세요?”
현재의 말에 여자가 퍼뜩 고개를 돌렸다. 가까이서 본 그녀는 무척 고운 인상이었다.
“……아.”
그제야 그를 발견한 여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차 쪽으로 다가왔다.
아직 꺼트리지 않은 엔진 소리를 뚫고 그녀의 가느다란 음성이 들려왔다.
“저…… 여기가 로열베스트 맞나요?”
건물 이름을 대며 조심스럽게 물어 오는 여자를 향해, 현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제가 혹시 도와드릴 거라도……?”
“아…… 아니에요. 고마워요.”
보아하니 초행길 같은데.
현재는 다시 몸을 돌려 문 앞으로 가는 여자의 모습을 한 번 더 슥 보고는 차를 주차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얼굴이 낯이 익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일까?
“……친절한 청년이네.”
기분 좋게 남자를 뒤로한 그녀는 공동 현관문 앞으로 다시 다가갔다. 여기가 분명 맞는데. 집 비밀번호는 알고 있었지만 공동 현관 번호는 알 방법이 마땅히 없었다. 연락을 해서 물어보는 것을 제외하고는.
몰래 와서 놀라게 해 주리라 생각하고 일부러 연락을 하지 않은 것이었는데, 여기서 막혀 버리면 말짱 도루묵이 되어 버리는 거였다. 기껏 고생한 게 수포로 돌아가나 싶어 한숨이 나왔지만, 방금 전의 남자가 주차를 하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 사는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청년이 들어갈 때 함께 들어가면 만사 오케이겠지.
그런데 그녀의 간절함이 통했을까. 바로 그때, 다른 입주자가 외출을 하려는 듯 현관문을 열고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눈이 번쩍 뜨였다.
잘됐다. 이렇게 들어가나 저렇게 들어가나 똑같으니 열린 김에 그냥 지금 들어가야겠네.
신난 그녀는 얼른 짐을 고쳐 들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이로써 처음으로 서프라이즈 방문을 성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이가 드니 아무래도 기력이 예전 같지가 않았다. 옛날에는 이 정도쯤이야 번쩍번쩍 들 수 있었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녀는 짐을 들고 낑낑거리고 나서야 마침내 집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비밀번호가…….”
요즘 따라 부쩍 침침해진 눈을 깜빡거리며, 그녀는 휴대폰을 들어 이전에 저장해 놓았을 비밀번호를 확인했다. 이 집으로 이사 온 지가 그리 오래되지 않은 터라 그녀로선 첫 방문이었다.
처음 이사를 한다고 했을 때 알려 준 번호가 여기 어디 있을 텐데.
‘어, 여기 있네.’
스크롤을 올리던 그녀가 마침내 번호를 발견했다.
그런데 다시 보니 그건 딸의 생년월일이었다. 그러니까, 꽤 오래전의 오늘.
하여튼 기집애. 비밀번호 좀 철저하게 해 놓지. 도둑이라도 들면 어쩌려고……. 그녀는 저도 모르게 혀를 끌끌 찼다.
허구한 날 전기 코드 안 빼고 온통 지저분하게 해 놓더니. 이번 집은 좀 잘해 놓고 살는지.
오늘 보고 성에 차지 않으면 또 한바탕 잔소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싫다 해도 어쩔 수가 없는 엄마의 마음.
설마 그새 번호가 바뀌었을라나. 느릿느릿 도어 록을 열고 여섯 자리의 번호를 꾹꾹 찍어 누르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마지막으로 별표를 누르니 스르륵, 걸쇠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성공. 이제 한시름 놓은 셈이었다.
문을 연 그녀는 저절로 닫히려는 문을 몸으로 지탱한 채 짐을 먼저 안쪽으로 들여놓았다. 모든 짐을 내려놓고 마지막으로 홀가분해진 몸을 밀어 넣자 현관문이 경쾌한 소리와 함께 쿵 닫혔다.
집 안에는 웬일로 훈훈한 온기가 돌았다. 이 더운 날씨에 에어컨도 안 틀고 웬일이래?
끙차 하며 현관 앞에 짐을 옮겨놓자마자 안쪽에서 잠에 취한 듯한 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재 씨?”
현재? 웬 놈일까. 그게 누군지 알 수는 없었지만 자신을 다른 누군가로 착각하는 건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새 남자가 생겨 집에까지 들여보냈던 걸까.
“에이, 설마.”
우리 은수가 그럴 앤가. 말도 안 되는 소리.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그녀는 반쯤 열려 있는 안방 문을 확 열었다.
끼익.
방 안은 무척 고요했고, 침대 위로 빼꼼이 보이는 것은 긴 머리카락뿐이었다. 아마도 휴일이라고 지금까지 이불 속에 폭 파묻혀 있었던 모양.
하지만 인기척 때문일까. 이불에 싸인 인영이 꿈틀거리더니 천천히 이불이 걷혔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ㅇ…….”
말끝을 흐리던 은수의 눈에 순간 놀라움이 스쳤고, 그녀는 그것을 똑똑히 확인했다.
역시 말을 하지 않고 오기를 잘했어. 우리 딸내미가 저렇게 놀라는 걸 보기는 또 처음이네. 진정 놀랐는지 우스꽝스럽게 구겨져 버린 은수의 표정은 그녀를 절로 뿌듯하게 했다.
“말만 한 기집애가! 해가 중천에 뜬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자고 있어…….”
……잠깐.
애정 섞인 타박을 하며 반갑게 인사를 하려던 그녀의 행동이 일순 멈추었다. 한껏 올라가 있던 입가도 서서히 내려가고 있었다.
“……!”
은수는 반사적으로 팔을 모아 제 배를 가렸지만 그것만으로 그 큰 배를 전부 다 가리기에는 어쩔 수 없이 역부족이었고, 오랜만에 만난 엄마의 눈길은 이미 은수의 얼굴이 아닌, 불쑥 나온 배로 향해 있었다.
한순간 얼이 빠진 그녀가 멍하니 은수를 쳐다보았다.
“……은수야?”
삑삑삑삑삑삑,
상황 파악을 할 새도 없이 별안간 얄궂은 소음이 들려왔다. 그녀의 눈길이 스르륵 바깥쪽으로 돌아갔다.
‘누구이기에 제 집인 양 저렇게……?’
그녀의 심리는 그야말로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고 있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분간조차 가지 않았다.
잠시 후, 그녀는 놀랍게도…… 방금 전 밖에서 보았던 잘생긴 청년을 정통으로 맞닥뜨리고 말았다. 바로 그녀의 하나뿐인 딸의 집 안에서.
그녀와 남자의 눈빛이 하나로 맞물렸고, 두 사람의 얼굴에는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놀라움이 가득 들어찼다.
“…….”
“…….”
운명의 장난같이 마주친 세 사람은 할 말을 잃은 채 서로를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마치, 폭풍 전야의 고요함처럼.
* * *
긴장 탓일까. 때 아닌 난리에 별이가 단잠에서 깨어났기 때문인 듯도 싶었다. 애꿎은 배가 자꾸만 콕콕 쑤시며 뭉침과 이완을 반복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은수도 이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다. 다만 설마, 하는 마음이었다. 어떻게든 그 전에는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런 거.
하지만 부랴부랴 선수를 치려고 했던 계획은 이렇게 맥없이 끝나 버렸고, 이제 남은 건 오래 놓아 둔 찻잔처럼 싸늘하게 식어 버린 공기와 찢어질 듯한 적막뿐이었다.
또 감기에라도 들까 싶어 일부러 에어컨을 세게 틀지 않았던 집 안에는 이질적이게도 훈훈한 온기가 감돌아서, 얼어붙은 분위기와 비교되는 그 화학적인 온도가 더욱 여실히 피부에 와 닿고 있었다.
“…….”
“…….”
식탁에 마주 앉은 세 사람은 좀처럼 말이 없었다.
멍한 얼굴로 은수에게 다가가며 딸의 이름만을 계속해서 되뇌던 엄마는 그 상태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고, 지금은 현재와 은수가 그런 그녀를 겨우 부축해 식탁에 앉힌 후였다.
이제,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은수는 초조하게 마른 입술을 축였다.
‘이 분위기라면 내가 포문을 열어야 할 것 같은데…….’
은수가 엄마의 눈치를 살살 보며 긴장 속에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현재가 갑자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은수의 엄마에게로 머리를 조아린 것은.
“현재 씨!”
“……!”
그의 돌발 행동에 놀란 건 은수뿐만이 아니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은수의 엄마 이 여사 또한 놀란 얼굴로 현재의 정수리를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현재는 망설임 끝에 말을 내뱉었다.
“죄송합니다. 미처 일찍 말씀드리지 못한 것도, 진즉에 찾아뵀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도…… 다 죄송합니다.”
“…….”
“모두 제 불찰입니다. 이 상황이 너무 갑작스럽고 황당하시겠지만……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
용서고 뭐고, 그녀는 그저 이 상황이 믿기지 않을 뿐이었다. 딸내미 생일이라고 신나게 와서는 이게 무슨 봉변인가.
차마 이 꼴을 못 보겠다는 듯,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허탈한 숨을 뱉어 냈다.
“……일어나요. 이럴 것까진 없어요.”
“…….”
“남의 집 귀한 아들한테 이러기 싫어서 그러니까, 일어나요.”
그 말에 현재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은수를 무척이나 빼닮은─아니, 은수가 그녀를 닮았다고 해야 옳겠지만─ 얼굴로 앞에 앉아 있는 중년의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똑 닮아 있는 그 얼굴에 거사를 치르고 회사에서 처음 대면하던 날, 무릎을 꿇은 자신에게 일어나라 손을 내밀던 은수의 모습이 겹쳐졌다.
그래, 그때 은수 씨도 꼭 이런 표정이었던 것 같은데.
“…….”
생각해 보니, 무릎을 꿇는 건 아무래도 그녀의 입장에서 부담스러울 만했다.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은 마음에 다시 몸을 일으켜 의자에 앉은 현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
“……어머니.”
……어머니?
생경한 호칭에 그녀의 눈이 커졌다.
은수는 외동딸이었고, 평생 그녀를 상대로 어머니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항상 ‘엄마’였을 뿐. 생전 처음 본 낯선 남자에게서 듣는 ‘어머니’ 소리는 달갑지 않으면서도 묘한 느낌을 주었다.
‘내가 누구 맘대로 자네 어머니야?’ 하고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어쩐지 순해 보이는 인상과 예의 바른 목소리 때문일까. 돌아가는 말이 그렇게 날카롭게 나가지는 않았다.
“이름이…… 정확히 어떻게 되나.”
그 말에 긴장한 듯한 남자가 몸을 곧추세웠다.
“도, 현, 재, 입니다. 밝을 현에, 맑을 재를 씁니다."
“……나이는?”
“……올해로 스물일곱입니다.”
“……스물일곱?”
그녀가 멈칫했다.
가만. 올해로 은수가 아마…… 서른둘일 텐데. 스물일곱이라면……?
“그럼, 은수보다…….”
“……예. 다섯 살 어립니다.”
“……세상에…….”
처음 봤을 때부터 나이가 있어 보이는 얼굴이 아니기는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다섯 살이나 어리다니! 스물일곱이란 나이를 곱씹은 그녀는 단숨에 기함한 얼굴이 되었다.